3·1운동과 청라언덕, “東山基督聖地”의 소개
<청라언덕은 중구청이 2000년 초 “근대路의 여행”을 개시한 이래 지금은 하루에 수천명이 다녀갈 정도로 대구의 명소가 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대구와 영남지역에서 최초로 복음이 들어오고, 교회가 처음 세워진 곳이며, 기독교에 의해 3·1독립운동, 근대교육, 근대병원이 시작된 곳으로 뜻이 깊은 장소다. 그러므로 대구의 교회들이 이곳을 “기독성지”로 알고, 선교활동은 물론, 기독문화의 보존과 확산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동산기독성지”의 지정 및 홍보, 선교도구로 활용하는 방안 등).>
1. 대구의 東山은 기독교 성지이고, 대구 근대문화의 발원지다.
(1) 제일교회(최초의 교회) : 대구·경북지역에서 제일 먼저 세운 교회(기독교와 영신대 출발지)
(2) 동산의료원(최초의 양의원) : 병든 자를 치유하며 복음의 씨를 뿌린 동산
(3) 계성·신명학교(최초의 근대교육기관): 사람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한 장소
(4) 초기 선교 역사의 흔적들 : 대구에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했던 초기 선교사들의 주택과 묘지(은혜의 정원)
(5) 계산성당 : 대구지역 최초의 성당(천주교의 발원지)
(6) 외국 선교사에 의해 도입된 대구 최초의 사과나무와 한국 최초의 피아노 등
(7) 기독교가 앞장 선 독립운동의 산실
2. 東山과 주변지역은 대구 시민정신의 상징적 장소다.
(1) 대구지역 삼일운동의 발원지
(2) 저항시인 이상화 고택과 국채보상운동의 서상돈 고택
(3) 영남 제일의 약령시장과 근대병원의 효시인 동산의료원
(4) 전국 3대시장의 하나, 영남 최대의 서문시장과 보부상의 집합지
(5) 연인들 사랑 이야기 : 박태준의 동무생각(思友)과 두사충의 뽕나무 사랑 이야기
(6) 초기 서양의술을 소개하는 의료박물관, 서양식 주택(스윗즈 챔니스 주택)과 대구읍성의 주춧돌
(7) 달성공원 : 청라언덕을 "東山"이라고 하는 것도 달성에서 '동쪽에 있는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달성은 대구의 중심지역이었다. 달성공원의 “달”은 “대구(달구벌, 다구벌)”라는 이름의 어원이 되었고,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특성을 나타내는 배달민족의 “밝달”을 설명하고 있다.
* 달성의 어원 : 달성은 흙(달)을 퍼날라 성(빗달)을 쌓았다는 뜻이다. 비산동은 달성을 흙을 퍼날라 쌓은 곳으로 ‘날뫼(흙을 날라 쌓은 언덕, 뫼)’라고 했으나 한자로 쓰면서 ‘飛山洞(날아온 산)’이 되었다. ‘달’은 ‘다’와 함께 땅을 말하며 ‘달성’과 ‘대구’의 지명이 되었다.
<참고> 달=다=땅,달성=土城,응달, 양달, 비탈(빗달), 밝달, 다물, 가림다, 바다
地(다 地, 훈몽자회), (地는 首大具, 海는 波太具, 川은 加具, 해동역사) 등
* 대구(大邱)의 어원 : 달구벌(땅=다=달)=>“달구”는 지대가 가마솥처럼 움푹한 “분지(구덩이, 구미)”라는 뜻이다. 달구는 "다구"이므로 한자로 "大丘(큰 언덕, 큰 구덩이)"라고 했으나 ‘丘’가 공자의 이름이라고 "大邱"로 개칭하였다. 이 ‘달’과 ‘다’라는 고어는 지금의 ‘땅’을 말하고 있으므로 “배달민족(밝달겨레)”의 뜻과 역사를 밝히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3. 대구 三一運動길 -대구에서 걷고 싶은 길 베스트 5에 선정된 길-
[3.1운동길 굴다리]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강도사)의 독립선언문 낭독과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의 독립만세 삼창으로 시작된 대구 3.1운동은 요원의 불길같이 번져 교회와 교회를 통하여 경북 각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4월말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굴다리 아래 삼일운동 벽화]
대구의 3.1독립운동은 다른 도시와 달리 기독교 기관이 주축이 된 거사였으며, 당시 동원된 기독교 기관은 제일교회, 서문교회, 남산교회, 계성학교, 신명학교, YMCA, 동산성경학교, 대구고보, 농림학교 등이었다.
[<3.1운동길> 안내판 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구 파고다공원)에서 폭발한
조선독립만세 운동은 대구에서는 3월 8일 오후에 일어났다.
이날 거사에 동참키로 한 많은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산병원 솔밭길을
이용하여 예정된 큰장안 강씨 소금집 앞으로 접근해 갔다.
그리하여 동산병원 언덕 소나무 숲은 3.1운동
성공에 말없이 이바지한 비밀 통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 옛날의 우거진 소나무 숲도
그 속에 있었던 오솔길도 다 사라지고 없다.
당시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애국학생들의 발자취도 땅에선 찾을 길 없다.
그러나 그들의 발자취는 땅 밑에서 큰 진동으로 남아 지금도 크게 숨쉬고 있다.
대구시는 3.1운동 84주년을 맞아 대구 3.1운동과 관계가 있는
동산병원 솔밭과 닿았던 이 길을 대구 3.1운동길이라 이름지어
3.1운동 정신을 후세에 기리 전하고자 한다.
비록 이 길은 비좁고 보잘 것 없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이
일제의 침략과 수탈로 피패해진 우리 민족의 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안내판 글 옮김)
4. 동산성지를 지키는 사과나무와 성경
동산성지에는 1899년 존슨 선교사가 대구에 처음 들여온 사과나무의 2세목과 3세목이 자라고 있으며, 해마다 열매를 내고 있다. 이 나무가 ‘대구사과(특산물)’의 유래를 알려주고, 선교의 초기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가젼 온 최초의 사과나무는 모두 72 그루였다.
사과라는 이름도 사과의 재배지에서 유래한다. 사과는 원래 사질토에 잘 자란다. 그래서 대구사과는 주로 금호강 강변, 갯벌에서 재배하였기에 모래 밭에서 나온 과일이라 하여 한자로 "沙果(사과)"라고 하였다. 사과를 경상도에서는 "능금(임금, 林檎)"이라고 했다. 능금과 사과는 품종이 좀 다르지만, 어릴 적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사과를 능금이라고 불렀다.
성경에 사과나무(답부아, 타프아흐)는 아가서에 세 번, 잠언(25:11, 금사과나무)과 여호수아(17:8, 답부아 땅)에서 한번씩 나온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타프아흐)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아가 2:3)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아가 2:5) 내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아가 7:8)
5. 동산성지에 외롭게 핀, 나라꽃 무궁화의 성경적 의미
(우리는 기독교가 서양종교이며, 서양문화의 산물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민족이 사는 동양권에서 쓰였으므로 서양종교라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리고 한국의 초기 역사가 하나님을 믿었던 개천사상과 제천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나라꽃 무궁화를 통하여 추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동산성지에는 큰 나무 그늘 밑에서 힘들게 자라고 있는 몇 그루의 무궁화도 있다(독립운동길 양쪽). 무궁화는 신시(神市) 개국초기부터 5천년 민족사와 함께 한 나라꽃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자생지가 없고, 자연 번식이 어렵다. 무궁화는 학계에서도 정확한 원산지를 모른다(현재 중국설이 다수이지만 아직 불분명함). 무궁화라는 이름은 어원도 모른다. 무궁화는 성경에서 찾아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무궁화는 한국은 물론, 학계, 성경과 영어사전 등에서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왜 그럴까?
나라꽃 무궁화는 우리 선조(노아의 후손)가 대홍수 이후 지중해 연안, 중동지방에서 한반도까지 손수 갖고 오고, 유별나게 길러 온 꽃으로 추정된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개국 초기부터 하나님을 향한 개천사상과 제천의식으로 밝은 땅을 찾으며 살아왔던 밝달겨레(배달민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밝은 땅에서만 피는 무궁화를 제천단 주위에 특별하게 심고 가꾸어 왔다. 이런 내용은 단기고사, 환단고기 등 상고사 자료에서 구체적으로 나나타고 있다. 이 땅에서 무궁화는 사람이 심고 가꾸어야만 자라고 번식한다.
무궁화에 관련된 내용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이러하다.
나는 샤론의 수선화(하바쩨레트, 어원 불명)요, 산골짜기의 백합화(쇼산나, 나리)로다(아가 2:1)
I am the rose of Sharon, and Lily of the valleys(Song of Solomon 2:1, KJV)
성경 본문의 수선화(나르키스)는 잘못된 번역이다. 히브리어 “하바쩨레트”도 아직 어원을 모른다. 무궁화의 학명은 “시리아커스(syriacus)”, 곧 시리아의 꽃이다. ‘시리아’는 성경의 “샤론”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영어 성경은 이 구절을 “샤론의 장미”라고 번역하고 있고, 한영사전에는 무궁화를 “샤론의 장미”라고 한다.
* 무궁화는 예수님을 상징한 꽃 =>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찬송가 89장)
* 천제단에 심고 가꾼 꽃으로 ‘桓花(밝은 꽃)’, ‘天指花’, ‘근수(槿樹)’라고 불렀다.
* 무궁화는 애국가에 들어 있으며,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연합 찬송가에 해당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아침에 일어나 맑은 물 한 동이 길어다 무궁화 잘 길러라 이 민족의 살길은 예수뿐이다. 내 민족을 사랑하거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라” -삼일운동을 주도한 남산교회 김태련조사(강도사)의 유언에서-
* 한 평생 무궁화를 심고 가꾸며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했던 한서 남궁억 선생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무궁화는 하나님이 한민족의 역사를 위해 특별하게 보호하는 꽃으로 여겨진다. 한국에서 무궁화는 씨로는 발아가 어렵고 품질이 좋지 않다. 그래서 무궁화는 사람이 꺾꽂이나 접붙이기를 하여 심고 가꾸어야 원형보존과 번식이 가능하다. 이렇게 무궁화는 자생지도 없고 자연 번식도 어려운데 어떻게 나라꽃이 되었을까?
한번 피면 100일간 피는 무궁화의 백단심은 백의민족을 예표한다. 청라언덕의 사과나무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역사를 증거한다. 그러나 청라언덕 독립운동길을 지켜보고 있는 무궁화는 "나라꽃", "샤론의 꽃(syriacus)"으로 우리 민족이 개국초기부터 하나님만을 섬겼던 "밝달겨레"임을 증거해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궁화는 빛을 좋아하고 그늘을 아주 싫어하는 식물이다. 그런데 동산성지의 무궁화는 주위에 있는 큰 나무들 그늘 아래에서 홀대를 받고 있다. 더구나 무궁화는 '환한 하늘(開天)', '밝은 땅(祭天)'을 기리는 "배달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나라꽃인데...
하여서 사과나무와 큰 나무들 주위에 힘겹게 자라고 피는 무궁화를 제대로 키우고, 보호하며, 안내판이라도 붙여주고, 무궁화와 한국의 역사, 그리고 민족의 얼을 소개해야 할 것이다.
6. 청라언덕 <무궁화 소개문>
-청라언덕, 3·1운동길을 지키는 무궁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싶어서 올려놓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무궁화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나라꽃이다. 무궁화는 우리 민족이 상고시대부터 특별하게 심고 길러온 식물이다. 무궁화는 <환단고기>에서 “환화(桓花)”, 또는 “천지화(天指花)”, <단기고사(檀奇古史)>에 “근수(槿樹)”라고 하며, <단군세기>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는 제단에서 심고 가꾸었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중국의 기록으로는 <산해경>에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무궁화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君子之國在其北···薰花草 朝生募死)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군자국은 우리나라를 말하며, 훈화초는 중국에서 무궁화를 일컫는다.
무궁화는 꽃이 새벽에 피며 저녁이 되면 시드는 데 한번 피기 시작하면 3개월 동안 매일 새 꽃이 피어 계속 신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꽃의 빛깔은 흰색·분홍색·연분홍색·보라색·자주색·청색 등이 있고, 특히 꽃 중심에 붉은 단심(丹心)이 있는 흰 꽃은 백의민족을 상징하고 있다. 예로부터 동서양에 약용식물로 널리 알려진 무궁화는 나무껍질과 뿌리를 각종 위장병과 피부병 치료제로 써왔다. 또한 꽃봉오리는 요리에, 꽃은 꽃차의 재료로, 나무껍질은 고급제지를 만드는 데 이용하고 있다.
무궁화의 학명은 'syriacus'로 원산지가 '시리아'라는 뜻이며, 영어 사전에 ‘샤론의 장미(The Rose of Sharon)’라고 한다. 성경에서 ‘샤론의 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무궁화는 우리나라에서 자생지가 없음에도 선조들은 천제단 둘레에 심고 가꾸며, 신단수로 관리를 해 온 나라꽃이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직후인 1949년 10월 대통령 휘장과 행정·입법·사법 3부의 휘장을 문교부가 모두 무궁화로 도안하여 제정·사용했고, 1950년에는 태극기의 깃봉을 무궁화의 꽃봉오리로 제정했다.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무궁화는 지금도 독립운동 일으킨 김태련 조사(남산교회 강도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으며, 아들을 일제의 압제에 희생물로 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오늘도 이 무궁화는 독립운동길 길목에서 나라꽃을 피우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독립운동가 김태련은 죽으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다음 말을 남겼다.
“아침에 일어나 맑은 물 한 동이 길어다 무궁화 잘 길러라 이 민족의 살길은 예수뿐이다. 내 민족을 사랑하거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라” -대구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한 김태련 조사(강도사)의 유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