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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는 ‘현대사 바로 읽기’ 시리즈의 첫 책이다. 이승만은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현대사의 주역이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 대통령, 6·25 남침 전쟁에서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내어 기적적으로 나라를 지켜낸 호국의 영웅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준 위인들의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만나보자.
저자 : 안병훈(安秉勳)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정치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편집인, 대표이사 부사장을 지내며 평생을 언론 일선에서 보냈다. 그동안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LG상남언론재단 이사장, 방일영문회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서울평화상 심사위원, SBS문화재단 이사, 서재필기념회 이사장,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회장 등을 맡아 다양한 공익활동을 펼치는 한편, 도서출판 기파랑을 설립하여 이 나라 출판문화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편저(編著)에『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박정희』가 있다. 대한민국 동백장과 한림과학원 일송상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제5회 일송상을 수상했다.
제1부 항일 독립운동에 바친 청춘
제2부 대한민국을 세우다
제3부 6·25전쟁…,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지키다
제4부 불멸(不滅)의 역사로 남은 거인(巨人)
광복 70년을 기리는 청소년용 한국 현대사
편자(編者)가 서두에서 밝힌 대로 이 책을 엮은 동기는 두 가지 소박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청소년을 비롯한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과연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조국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안다면, 혹시 거기에 의도적인 편견이나 곡해(曲解)가 빚어 올린 ‘비뚤어진 역사관’의 흔적이 남아 있지나 않을까?”
얼마 전의 ‘교과서 파동’에서 보듯이 우리의 교육현장에는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널려 있다. 특히 대한민국 현대사 부분이 그러한데,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거나, 혹은 극히 지엽적인 사안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내일의 이 나라를 짊어지고 가야할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사고(思考)를 심어주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마침 올해 광복 70년을 맞았다. 뜻 깊은 해를 맞아 그 70년 대한민국 현대사의 궤적을 올바르게 훑어, 청소년을 위한 하나의 교본(敎本)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 이 책에 담겼다. 엮은이는 이에 대해 “정성 들여 엮은 기록물을 때 묻지 않은 우리 자녀들에게 안겨주어 나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심어주고 싶었다”고 토로한다.
대한민국을 일으킨 위인(偉人)의 한 평생
‘현대사 바로 읽기’의 출발을 이 책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로 정한 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준 위인들의 이야기’가 청소년들에게 가장 어필하기 쉽고, 또 재미있게 읽히리라는 기대로 인해서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승만인가?
알다시피 이승만은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현대사의 주역이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 대통령, 6·25 남침 전쟁에서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내어 기적적으로 나라를 지켜낸 호국의 영웅이다. 그런 위인을 말기(末期)의 실정(失政)만 붙들고 늘어져 폄훼하고 죄인시(罪人視)하고 있어서야 이 나라의 밝은 미래는 요원할 따름인 것이다.
이 책의 저본(底本)은 2012년에 엮은이가 펴낸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이다. 사진집의 성격을 겸하여 초대 대통령의 발자취를 집중 조명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것을 토대로 다시금 ‘젊은이들을 위한 올곧은 교양 역사서’로 꾸미면서 모두가 광복 70년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독립협회 청년지도자 시절 독립을 위한 개혁을 주장하며 시위를 주도하다 왕실에 반역한 죄로 한성 감옥에 갇혔다. 그 기간, 7년째 감옥살이를 하던 중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비록 감옥에 갇힌 몸이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 탁월한 국제정세 판단력과 예리한 감각으로 이 책을 썼다. 두 편자는『독립정신』을 읽기 쉽게 풀어냈다. 구한말 국내외 정세는 물론 개화운동, 독립보존운동, 한국 근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태동 움직임 등을 담고 있다.
저자 : 이승만
독립운동가·상해임시정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다. 조지워싱턴대 졸업하고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협성회보」 「매일신문」 주필을 지내며 정부 무능을 비판하다 1898년 체포·투옥되어 1904년 출옥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1920년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 그뒤 워싱턴·하와이에서 항일활동을 벌이다가 광복 후 귀국,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민족통일총본부 총재를 지내고1948년 제헌국회의원, 초대 국회의장·대통령에 당선. 1960년 대통령에 4선되나 4·19로 하야했다.
편자 : 김충남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대통령 정무비서관과 공보비서관을 역임했다. 현재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연구위원으로 있다. 주요저서로는 『대통령과 국가경영』이 있다.
편자 : 김효선
이승만 연구가이며, 올인코리아 논설위원, 한국논단 편집위원으로 있다.
화보
독립정신을 펴내며
머리말
총론:우리 대한은 태풍을 만난 배와 같다
1. 국민 모두가 자신의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2.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된다
3. 국민이 힘쓰면 문명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4.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 참된 충성이다
5. 마음속의 독립정신을 굳게 하여야 한다
6. 통상과 교류는 이로운 것이다
7. 독립국과 중립국의 차이
8. 국민이 깨어 있어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
9. 자주와 독립의 중요성
10, 11, 12 생략
13. 새로운 것과 전통의 구별
14. 세 가지 정치제도의 구별
15. 미국 국민들이 누리는 권리
16. 미국 독립의 역사
17. 미국 독립선언문
18. 미국의 남북전쟁
19.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프랑스혁명
20. 입헌정치의 장점
21. 나라의 흥망성쇠는 정치제도에 달렸다
22. 정치제도의 성패는 국민 수준에 달렸다
23. 국민의 마음이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
24.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
25. 우리의 자랑스러운 독립의 발자취
26. 고루한 편견에 사로 잡힌 청나라
27. 일본이 흥성하게 된 이유
28. 러시아의 음흉한 마수(魔手)
29. 우리나라와 서양세력 간의 충돌
30....화보
독립정신을 펴내며
머리말
총론:우리 대한은 태풍을 만난 배와 같다
1. 국민 모두가 자신의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2.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된다
3. 국민이 힘쓰면 문명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4.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 참된 충성이다
5. 마음속의 독립정신을 굳게 하여야 한다
6. 통상과 교류는 이로운 것이다
7. 독립국과 중립국의 차이
8. 국민이 깨어 있어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
9. 자주와 독립의 중요성
10, 11, 12 생략
13. 새로운 것과 전통의 구별
14. 세 가지 정치제도의 구별
15. 미국 국민들이 누리는 권리
16. 미국 독립의 역사
17. 미국 독립선언문
18. 미국의 남북전쟁
19.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프랑스혁명
20. 입헌정치의 장점
21. 나라의 흥망성쇠는 정치제도에 달렸다
22. 정치제도의 성패는 국민 수준에 달렸다
23. 국민의 마음이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
24.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
25. 우리의 자랑스러운 독립의 발자취
26. 고루한 편견에 사로 잡힌 청나라
27. 일본이 흥성하게 된 이유
28. 러시아의 음흉한 마수(魔手)
29. 우리나라와 서양세력 간의 충돌
30. 일본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
31. 조선이 일본과 처음으로 통상하다
32.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배경
33. 청일전쟁 직전의 조선, 일본, 청나라 간의 관계
34.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난 사정
35. 각국에 처음으로 공사(公使)를 파견하다
36. 청일전쟁(淸日戰爭)의 원인
37. 청일전쟁 후 조선의 대외관계
38. 러시아가 요동반도를 침범하다
39. 청나라 의화단(義和團)의 난(亂)
40. 러일전쟁의 원인
41. 청일전쟁 후 개혁에 나선 조선
42. 청일전쟁 이후의 일본과 러시아의 정세
43. 조선을 놓고 각축을 벌인 러시아와 일본
44.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나다
45. 러일전쟁 당시의 대한제국
46. 일본의 저의를 해부한다
47. 청나라, 일본, 러시아가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
48. 우리는 여러 번 좋은 기회를 놓쳤다
49. 일본정부의 의도를 파헤친다
50. 일본인들의 의도를 파헤친다
결론:독립정신 실천 6대강령
연보
목숨보다 소중한 겨레의 자유와 나라의 독립!
《독립정신》은 이승만 대통령이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집필한 역사서이며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이다.
당시 청년 이승만은 이 책에서 “독립정신이 깊이 박혀, 한 사람이라도 대한독립을 지키겠다는 정신만 살아 있다면, ‘독립’이라는 말이 없어져도 두렵지 않다”며 “오로지 백성들의 정신 속에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기 때문에 이 책을 황급히 쓴다”고 만천하에 밝혔다.이 책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이 커지고 우리의 독립이 침해되더라도 오로지 ‘국민정신이 바뀌면 썩은 데서 싹이 나고 죽은 데서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젊은 열정과 피눈물로 쓴 국민 계몽도서이다.
청년 이승만의 애국심에 불꽃 일어나다!
이승만은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던 청일전쟁(1894∼95)이 터지던 해에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서구문물에 눈뜨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개혁 등 개화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국민을 계몽시키고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현대식 토론회도 개최하고 신문도 발간하고 논설을 썼다. 뿐만 아니라, 거리에 나가 연설도 하고 시위를 하다가 24살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것이다. 이승만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은 조선왕조의 국운이 급속히 기울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지만 양반관리들은 부패한 가운데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투쟁에 몰두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가난하고 무지하여 무력했다. 군대는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1882년 임오군란), 청나라에 기대는 수구파와 일본에 기대는 개화파 사이의 권력투쟁 와중에 개화파에 의한 쿠데타인 갑신정변(1894)이 일어났다. 같은 해에 일어난 농민봉기 동학혁명(1894∼95)이 전라도와 충청도 많은 지역을 휩쓸었지만 조정은 이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다.
옥중에서 불태우는 청년 혁명가의 열정!
청나라와 일본은 동학혁명 진압을 빙자하여 군사개입함으로써 우리 땅과 바다에서 청일전쟁(1984∼95)을 벌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을 장악한 일본인들은 명성왕...목숨보다 소중한 겨레의 자유와 나라의 독립!
《독립정신》은 이승만 대통령이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집필한 역사서이며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이다.
당시 청년 이승만은 이 책에서 “독립정신이 깊이 박혀, 한 사람이라도 대한독립을 지키겠다는 정신만 살아 있다면, ‘독립’이라는 말이 없어져도 두렵지 않다”며 “오로지 백성들의 정신 속에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기 때문에 이 책을 황급히 쓴다”고 만천하에 밝혔다.이 책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이 커지고 우리의 독립이 침해되더라도 오로지 ‘국민정신이 바뀌면 썩은 데서 싹이 나고 죽은 데서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젊은 열정과 피눈물로 쓴 국민 계몽도서이다.
청년 이승만의 애국심에 불꽃 일어나다!
이승만은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던 청일전쟁(1894∼95)이 터지던 해에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서구문물에 눈뜨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개혁 등 개화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국민을 계몽시키고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현대식 토론회도 개최하고 신문도 발간하고 논설을 썼다. 뿐만 아니라, 거리에 나가 연설도 하고 시위를 하다가 24살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것이다. 이승만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은 조선왕조의 국운이 급속히 기울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지만 양반관리들은 부패한 가운데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투쟁에 몰두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가난하고 무지하여 무력했다. 군대는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1882년 임오군란), 청나라에 기대는 수구파와 일본에 기대는 개화파 사이의 권력투쟁 와중에 개화파에 의한 쿠데타인 갑신정변(1894)이 일어났다. 같은 해에 일어난 농민봉기 동학혁명(1894∼95)이 전라도와 충청도 많은 지역을 휩쓸었지만 조정은 이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다.
옥중에서 불태우는 청년 혁명가의 열정!
청나라와 일본은 동학혁명 진압을 빙자하여 군사개입함으로써 우리 땅과 바다에서 청일전쟁(1984∼95)을 벌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을 장악한 일본인들은 명성왕후를 시해(1895)했다. 그리고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에 1년간 피신을 한 아관파천(1896∼97)이 일어났다. 이처럼 불과 몇 년 사이에 엄청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현장을 목격한 이승만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하려다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승만의 개화구국운동은 감옥에서도 계속되어 가짜 이름으로 논설문을 써서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 게재했다. 또 러일전쟁이 터지자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박한 심정으로 《독립정신》을 썼다. 당시 감옥은 오늘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특히 책을 쓰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책도 신문잡지를 구할 수 없었으며 종이와 연필조차 얻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감시받고 있는 상황에 몰래 숨어서 이 같은 책을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피 끓는 애국심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승만이기에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그가 이 작품에서 줄곧 주장한 것들이다.
100년 전 한반도 주변 정세와 이승만의 독립정신!
이 책은 우리 대한 독립에 관계된 중요한 내용을 쓴 것이므로 이를 읽음으로써 독립이 무엇이며,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에 왜 독립정신이 필요했는지, 또 이후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독립정신을 철저히 실천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권고하여 빠른 시일 내 국민 모두가 알고 실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독립에 관련된 과거의 일만 알고 어떻게 하면 완전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히 알아야 할 내용들을 기록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이를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이 실천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기르다 보면, 마침내 온 나라가 한 몸, 한 마음이 되고 모든 국민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100년전 세계화를 외치다!
세계 여러 나라들 간에 서로 교류하지 않는 나라는 별로 없으며,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열지 못할 이유도 없다.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내던 나라들도 지금은 다른 나라들과 자유롭게 교류하고 있다. 개화를 받아들인 나라는 점점 번창하여 다른 나라들과 대등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나라들 간에 이 같은 교류가 계속된다면 각 나라 사람들의 고유한 특성은 사라지고 마침내 온 세계 사람들이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될 것이다. 지금 동양의 상황은 아침 햇살이 떠오를 때와 같아서 햇빛이 먼저 비치는 곳도 있고 나중에 비치는 곳도 있으나 솟아오르는 해를 막을 수는 없다. 햇빛이 사방을 모두 비치고야 마는 것 같이, 서양에서 일어나서 들어오는 새로운 문명을 우리가 홀로 막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보더라도 서양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문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경험하고서도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나라는 영원히 없어지고, 그 백성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이웃이 있어야 살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물품들을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야 할 텐데 어떻게 내 손으로 이 모든 것들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산다면 학식이나 타고난 재주는 물론, 인간이 가져야 할 도덕적 성품들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은 이웃의 도움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나아가 이웃이 많을수록 더 많은 정보와 지식도 얻을 수 있게 된다. 세계 각국에 대해 문호를 열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물품들을 서로 교환하며, 우리에게 잘못된 풍속이 있으면 그것을 고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집과 뒷집이, 북쪽과 남쪽이, 또는 서양과 동양이 서로 담을 쌓고 상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지 않는 것이 세상에 얼마나 해로운 것인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세계 어느 구석도 고립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하루속히 이러한 기술들을 배워 전국에 설치하여 먼 지방도 가까운 이웃같이 왕래할 수 있게 하고, 시시각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하면 전국이 고르게 발전될 것이다.
신학문을 열심히 배워 경제적 이익을 외국인들에 뺏기지 말라!
우리는 농업에 대해 부지런히 공부하여 외국인들이 들어와 착수하기 전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기계를 들여다가 농사에 이용하여 수확을 몇 배로 늘려야 한다. 상업을 배워 외국 상인들의 상업상의 권리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하며, 광산학을 배워 외국인들이 광산개발권을 차지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광산권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항해, 전신과 우편, 어업, 산림 벌채와 조림(造林) 등에 무슨 방법이나 기계를 쓰는지 자세히 배우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는 갖가지 물건 만드는 법을 배워 외국 물건을 사오지 않고 만들어 쓰며, 만든 물건들을 수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돈이 외국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산품 값이 조금 더 비싸더라도 모두 한마음이 되어 국산품을 산다면 외국 물품은 스스로 밀려나게 되고, 국산품이 풍성해져서 우리 제조업이 더욱 발전하게 된다. 그 결과 수백 또는 수천 개의 사업체가 번성하여 외국으로부터 재물이 들어오고 경제가 발달되어 국민생활에 큰 변화가 나타나고 모든 것이 풍요롭게 될 것이다.
이 책의 기록들은 대한민국 수립기에 일어난 한미관계에 관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이승만이나 그의 측근자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사건과 인물, 그리고 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며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다. 날마다 그리고 달마다 진행 상황에 대한 매우 완전하고도 자세한 기록 문서에 근거를 두고 이승만이 맞서야했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국은 왜, 그를 제거하려 했는지, 일본은 왜 그를 두려워 했는지, 김구는 왜 그의 건국을 반대 했는지, 김일성은 왜 그를 말살시키려 했는지 이 책을 통해 당시의 상황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 로버트 올리버
위스콘신 대학교 ph.D. 시러큐스 대학 교수 ?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명예교수. 이승만 대통령 정치고문(1942~1960)으로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서, 6?25전쟁 수행 과정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승만 박사를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는 진정 ‘한국의 은인’이었다. 지은책「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한국의 비극」「이승만과 국제연합」「한국전쟁 기원」「중국의 수사학 전통 공자와 맹자」「고대 인도차이나와 중국의 통신과 문화」등이 있다.
역자 : 박일영
황해도 송화 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연세대학교 대학원 수학. 제1차 아시아자유회의 대표, 민주공화당 정구영의장보좌역, 월간지Buyers Guide편집인, 숭의여자대학 교수 역임. 지은책으로「나의 회고록」옮긴책으로 존 듀이「철학의 개조」「민주주의와 교육」등이 있다.
머리글 로버트 올리버
한국 독자들에게 로버트 올리버
1 암담했던 워싱턴 시절(1942∼1946년)
2 서울의 여름(1946년)
3 실망과 불화의 대립(1946년 겨울∼1947년)
4 신탁통치 찬반의 고비(1947년 가을)
5 워싱턴의 한국 로비(1946∼1950년)
6 국제연합의 수상한 움직임(1947년 겨울∼1948년)
7 어둠에서 광명으로(1948년 봄)
8 정부 수립(1948년 여름)
9 대혼란 속의 행정(1948년 8∼12월)
10 대한민국의 시련(1949년 봄)
11 남하하는 철의 장막(1949년 7∼12월)
12 공산군의 남침(1950년 6월)
13 38도선 이남(1950년 여름)
14 압록강까지(1950년 겨울)
15 실수의 대가(1951년)
16 성채 내부의 분열(1950∼1952년)
17 헌정의 위기(1951∼1952년)
18 반공 포로 석방(1952∼1953년)
19 판문점 휴전(1953년 7월)
20 어지러운 외교 무대(1954년)
21 폐허를 딛고 경제 부흥으로(1950∼1960년)
22 격동의 건국기를 넘어서(1959∼1960년)
옮긴이의 글 박일영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 기념! 독점계약! 긴급출판!
미국은 왜, 그를 제거하려 했는가? 일본은 왜, 그를 두려워 했는가?
김구는 왜, 그의 건국을 반대 했는가? 김일성은 왜, 그를 말살시키려 했는가?
왜, 이 극비문서를 공개하는가?
이승만 X파일의 근거가 된 편지모음의 일부는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프랑스 파리의 어느 방송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전쟁 상인’으로 묘사하여 보려는 시도 아래 진행된 선전 활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멋대로 고치고 적당히 인용한 모습으로 공개된 일이 있었다. 1950년 6월 서울이 공산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경무대(景武臺)에 보관중인 이대통령의 문서철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얼마 뒤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 관리들의 이용물이 되었다.
나에게 보낸 이승만의 편지와 내가 그에게 부친 편지 사본들로 묶인 이 극비문서는 현재 안전하게 보관중이며 한국의 현대사나 국제관계 연구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언젠가는 적당한 도서관에 맡겨질 것이다. 나에게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이승만 박사는 때때로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동기와 정책을 국무부나 신문기자에게 설명하기 위해 주로 나에게 지침을 내릴 목적으로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발언이 자기 뜻에 맞도록 되기를 바라면서 편지를 썼던 것이다.
독자들은 그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다 ‘파기할 것 인용 불가’, ‘보관 불필요’, 또는 ‘타인 공람 불가’ 등의 표시를 한 것까지 내가 이 책에 포함시킨 사실을 주목할 것이다. 한 ? 미관계의 역사에 대해서 근거가 확실한 설명을 하려면 이런 것들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런 편지들을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이 편지들이 쓰인 지 50∼40여 년이 흘러간 이 시점에서 희미하고 불완전한 기록을 명백하게 밝힐 뚜렷한 효과를 생각할 때 지금이야말로 편지모음 출판의 적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편지를 임의로 고친 일이 없다. 모든 편지가 조급하게 그리고 심리적 부담 아래 쓰였기 때문에 철자의 잘못이나 문법에 크게 어긋나는 것들은 바로잡았다. 더러 생략된 구절이나 짧게 언급된 것은 정성들여 해명하였다. 이박사에게나 나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대의 흐름에 따라 험담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편지모음이나 기타 기록의 정확한 내용을 양심껏 보존하였다. 기록의 진가는 그...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 기념! 독점계약! 긴급출판!
미국은 왜, 그를 제거하려 했는가? 일본은 왜, 그를 두려워 했는가?
김구는 왜, 그의 건국을 반대 했는가? 김일성은 왜, 그를 말살시키려 했는가?
왜, 이 극비문서를 공개하는가?
이승만 X파일의 근거가 된 편지모음의 일부는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프랑스 파리의 어느 방송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전쟁 상인’으로 묘사하여 보려는 시도 아래 진행된 선전 활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멋대로 고치고 적당히 인용한 모습으로 공개된 일이 있었다. 1950년 6월 서울이 공산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경무대(景武臺)에 보관중인 이대통령의 문서철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얼마 뒤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 관리들의 이용물이 되었다.
나에게 보낸 이승만의 편지와 내가 그에게 부친 편지 사본들로 묶인 이 극비문서는 현재 안전하게 보관중이며 한국의 현대사나 국제관계 연구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언젠가는 적당한 도서관에 맡겨질 것이다. 나에게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이승만 박사는 때때로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동기와 정책을 국무부나 신문기자에게 설명하기 위해 주로 나에게 지침을 내릴 목적으로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발언이 자기 뜻에 맞도록 되기를 바라면서 편지를 썼던 것이다.
독자들은 그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다 ‘파기할 것 인용 불가’, ‘보관 불필요’, 또는 ‘타인 공람 불가’ 등의 표시를 한 것까지 내가 이 책에 포함시킨 사실을 주목할 것이다. 한 ? 미관계의 역사에 대해서 근거가 확실한 설명을 하려면 이런 것들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런 편지들을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이 편지들이 쓰인 지 50∼40여 년이 흘러간 이 시점에서 희미하고 불완전한 기록을 명백하게 밝힐 뚜렷한 효과를 생각할 때 지금이야말로 편지모음 출판의 적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편지를 임의로 고친 일이 없다. 모든 편지가 조급하게 그리고 심리적 부담 아래 쓰였기 때문에 철자의 잘못이나 문법에 크게 어긋나는 것들은 바로잡았다. 더러 생략된 구절이나 짧게 언급된 것은 정성들여 해명하였다. 이박사에게나 나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대의 흐름에 따라 험담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편지모음이나 기타 기록의 정확한 내용을 양심껏 보존하였다. 기록의 진가는 그 정확성에 달려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피와 땀과 눈물의 자취
이 책의 기록들은 대한민국 수립의 중요한 시기에 일어난 한 ? 미관계에 관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그것은 이승만이나 그의 측근자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사건 ? 인물, 그리고 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며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이 불가피한 결정이나 필요한 행동에 참여하였던 핵심 인물들마저도 난처하게 만든 외교적 정치적 상황을 두드러지게 한 착잡한 문제들을 말하는 ‘조금도 틀림없는’ 이야기라고 나는 주장하지 않겠다. 역사적 진실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그것은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보거나 해석하게 하는 수많은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옳거나’ 필요한 것으로 느낀 것은, 한국 내에 있는 그의 정치적 동지나 미국, 그리고 국제연합 동맹국들에게는 때때로 ‘옳지 못하고’ 때로는 그저 ‘멋대로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다만 매우 복잡하고 말썽 많은 관계 속에서도 한국의 온당한 주장을 대변하려고 노력하였던, 우리 주변에서 펼쳐진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하나의 비공개 기록으로서 이 이야기는 근거가 있고 정확하다고 나는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승만이 맞서야 했던 문제에 동참하여, 그의 근본적인 동기와 의도하는 바에 대한 아주 솔직하고도 충분한 의견을 나 자신이 친숙하게 알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은 날마다 그리고 달마다 진행 상황에 대한 매우 완전하고도 자세한 기록 문서에 근거를 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이 책은 근본적으로 그의 이야기이다. 이미 발간된 해리 트루먼, 딘 애치슨과 존 포스터 덜레스 두 국무장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마크 클라크 장군, 그리고 그 밖의 인물들의 이야기와 함께 이 책 또한 역사가들이 정당한 비중을 두고 평가해야 할 이야기인 것이다. 궁극적인 역사의 진리는 사건과 그 마지막 결과를 놓고 최종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여러 다른 관점으로 뭉쳐진 하나의 혼합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강대국 하나의 볼모였던 한국
험담가들은 이승만의 목표가 옳았다 하더라도 이를 성취하는 그의 방법에 가끔 잘못이 있었다고 되풀이 말해 왔다. 그의 방법이 때로는 적당치 못했거나 너무나도 시기를 잘못 택한 즉흥적 처사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흔히 그렇듯이 그 이유가 그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어려운 시기에 국가 간의 관계 재조정이 어지러운 속도로 펼쳐졌다. 미국과 소련은 전시 동맹국 관계에서 냉전의 적대국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미 ? 일 두 나라 관계는 증오에서 협력으로 급속한 전환을 보였다. 중국 본토의 종주권은 국민당으로부터 공산당의 지배로 옮겨갔다. 신생 국제연합은 어렴풋이나마 공산 ? 반공, 그리고 제3세계권으로 뭉쳐졌다. 전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담보물이나 볼모 같은 존재로 전락하였다. 한국을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정당한 일이 세계적 추세와는 흔히 상극을 이루었다. 성취시킬 필요가 있는 과업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의 제약을 심하게 받았다.
대한민국의 공공연한 적대 국가뿐만 아니라 진정한 우방과 동맹국까지 포함하여 세계 열강국들은 이승만이 성취하고자 하는 과업에 공동 보조를 취하며 반대하였다. 북한 ? 소련, 그리고 중공은 이승만 정부에 맞서서 적극적으로 투쟁을 펼쳤다. 미국 ? 영국, 그리고 인도는 이승만의 기본 계획과 중요 정책의 많은 부분을 봉쇄하고 억제하고 거부하였다. 이승만은 적과 동지의 협공을 받았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모든 수단과 책략을 활용하였다.
이승만은 어떻게 대한민국 세우고 지켜냈는가?
4반세기에 걸쳐 그가 집권하게 되고 대권을 행사하는 동안 그의 사사로운 벗이요 국제문제에 대한 의론 상대가 된 것은 나에게 베풀어 준 특별한 대우였다. 모든 기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부닥쳐야 할 문제점과 인물들에 대해 자유롭게 자주 아무런 격의 없이 서로의 생각과 심정을 주고받았다. 해마다 여러 달 동안 1주일을 넘기는 일 없이 쓴 몇 통의 긴 편지에 이르기까지 주고받은 편지들이 두툼하게 세목별로 정리된 편지모음에 실려 있다. 내가 해마다 몇 개월간씩 한국에서 그와 함께 일하는 동안 가깝게 나눈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 책에는 편지글이 광범위하게 인용되었다. 사사로운 회고담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적어 두었던 일기장과 집으로 보낸 편지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들은 일상적인 당시의 기록이다.
이런 경험들을 지금 뒤돌아보는 일은 역사에 대한 호기심 이상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중요한 외교정책 과제 중의 하나를 놓고 그 기록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진실로 가치 있는 일이다.
미국은 어찌하여 본의 아니게 아시아 본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 국제연합은 왜 역사상 최초로, 그리고 지금까지 오직 단 한번 전쟁에 직접 개입하였는가?
정책 결정의 원인을 조사하고 무엇이 정책 결정을 낳게 했는지를 관찰하며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반에게 밝히지 못하고 흔히 정도를 벗어난 방법으로 해결 방안을 모색했던 말썽 많은 방법들을 묘사하는 일은 계몽적인 가치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직의 사임을 강요받은 1960년으로부터 충분한 시간이 흘러간 지금 한 ? 미관계에 얽힌 그의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오늘까지도 아직은 여기에 들려 줄 이야기가 어떤 민감한 감정의 상처를 남길지 모른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내가 본 그대로를 아무런 편벽됨이 없이 알리는 것은 나로서 옳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외국 국가 원수의 참모로 근무한 미국 사람으로서 나 자신의 역할을 되도록 객관적으로 보고한다. 기록이 밝히고 있듯이 나는 때때로 옳았고 때로는 잘못도 있었다. 이승만 또한 잘못이 있고 어떤 것은 매우 심각한 잘못으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미국과 국제연합 회원국의 그 당시 정책 수립자들 또한 그들 나름의 결점이 있어 잘못을 저지른 반면에 비범한 장점으로 우리 모두가 자랑할 만한 업적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이 책에서 검토된 그런 외교 문제와 전쟁 문제에 관계되는 미국인 ? 한국인, 그리고 다른 나라 시민들도 이 기록이 오늘날 세계가 당면한 많은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런 관계는 어떻게 발전하고 처리되는가? 어떤 압력이 작용하며 그에 대처하는가? 이런 물음은 중동 ? 아프리카 ? 동남아시아, 그리고 세계 도처의 복잡한 상황에서 오늘날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국제문제 분규가 계속 펼쳐짐에 따라 현장 여러 곳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결정 사항들을 우리 모두가 보다 현명하게 대처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진정 애국자란 무엇인가?
이 기록을 통해서 내가 느꼈던 것과 같은 진정한 모습으로 좀더 뚜렷하고 직접적으로 이승만은 부각될 것이다. 그를 보는 나의 눈은 더없이 우호적이었다. 그것 또한 외부의 제3자에게 허용된 것보다는 훨씬 더 친숙한 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더구나 그가 지휘한 여러 계획에 참여한 한 사람의 부하로서 나는 더없이 강렬하게 그가 때때로 차지하였던 고독한 자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의 어려움과 실수는 내가 개인적으로 참고 견뎌야 했던 불리한 조건이었다. 앞으로의 기록은 진정 순수하고 생생한 이승만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이 기록이 평가를 받을 때 한 가지 결과로서 한국 정치사와 한 ? 미 외교사에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재평가되었으면 한다. 이승만도 큰 결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의 정적이나 동지도 마찬가지이고 그가 상대했던 군이나 민간의 주요 미국 관리도 그렇고, 이 책에 묘사된 여러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 영국 ? 소련 ? 인도, 그리고 두 중국의 지도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여러 지도자들처럼 그 또한 위대한 능력과 뛰어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문제라고 이름 붙어 내려온 사건들로 엮인 상황의 전반적인 복잡성을 솔직하고도 박식한 눈으로 생각해 볼 때만이 비로소 하나의 균형잡힌 견해가 생길 수 있다. 이런 견해는 이 책 각 장을 구성하고 있는 상세한 기록을 드러냄으로써 도움을 얻게 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과거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만이 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미래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머리글에서)
이제 역사적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역사는 인간에 의해 창조된다.’
그 동안 이승만에 관한 많은 저술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그릇된 내용이거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들이었다. 이제 여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동아시아 정복을 막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한 인간에 대한 모든 풍문, 그릇된 보도, 그리고 과장된 중상모략 등을 바로잡아 줄 신뢰할 만한 기록물이 나왔다. 이승만은 어떤 형태로든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을 강요하거나 압력을 가하는 자들은 모두 자유세계의 공적(公敵)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맞서는 적수로 여겼다. 서구 열강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이들과 타협하기를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그는 아무와도 타협할 수 없는 완고하고 늙은 폭군이라는 세평을 들었다. 그는 “코브라와 타협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페어플레이? 명예? 극기심 그리고 도덕적 의무를 갖춘 세기적 감각의 신사였다. 훗날 모든 역사는 그가 예견한 바의 대부분이 옳고 정당하였음을 입증하였다. 이승만은 땡볕 아래 군중들에게 성실과 권위와 용기,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한국전쟁이 몰고 온 거센 정치적 소용돌이에 맞서 이승만은 그의 신념과 긍지로 1954년 파괴된 남한의 재건을 위한 물질적 원조를 얻어냄과 동시에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방위와 경제원조를 공약하도록 밀어 붙였다. 이 책에는 20여 년에 걸친 사건들로 엮인 생생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의 고문으로서 이승만과의 교신을 편집하는 일―이박사의 많은 편지를 통해 정직하고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지칠 줄 모르는 한 애국자이자 정치가인 인물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그는 자료들을 골라내고 사건이나 결정 사항들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제3자의 그릇된 판단을 바로잡으면서 대한민국 근대사를 증언하는 기념비적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는 무조건 정당화하려 하지도 않고, 기록을 바로잡는 일 이외에는 이승만을 위한 변명자의 역할도 하지 않았다.
(조지 폭스모트 ‘미국사회과학아카데미’ 학술지서평에서)
지식과 정보의 결합,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절묘한 조화가 돋보이는 평전으로, 이승만의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기, 미국 유학 시절, 건국과 이어진 정치 논란, 그리고 하야 후 하와이 시절의 사건들이 이승만 집필 원고와 당시 사진 자료, 그간 활발히 진행되어 온 학계의 연구 성과 등과 어우러져 저자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체로 재정리되어있다.
LEE,HAN-WOO,李翰雨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및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뉴스위크 한국판』 『문화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지낸 뒤 문화부 학술 및 출판 담당 기자로 일했다. 독일 뮌헨에서 연수를 하던 중 이론보다 한 사회의 ‘기본’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대한민국의 뿌리, 조선의 뿌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7년에 걸쳐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했고, 그 성과를 묶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 ‘이한우의 군주열전(전6권)’ 시리즈를 펴냈다.
태종과 세종의 정치 철학에 영향을 준 송나라 학자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 한문 공부를 위해 사서(四書)의 해설을 겸한 번역서를 집필했고 5년에 걸친 작업은 『논어로 대학을 풀다』 등 ‘이한우의 사서삼경(전4권)’ 시리즈로 완성됐다. 경전 공부로 단련된 한문 지식을 기반으로 『대학연의(상?하)』를 출간했다. 이 책으로 인해 ‘리더십’에 새로이 눈떴고, 사대부의 심신 수양서가 아닌, 군주의 리더십 함양의 필독서로써 『논어...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및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뉴스위크 한국판』 『문화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지낸 뒤 문화부 학술 및 출판 담당 기자로 일했다. 독일 뮌헨에서 연수를 하던 중 이론보다 한 사회의 ‘기본’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대한민국의 뿌리, 조선의 뿌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7년에 걸쳐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했고, 그 성과를 묶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 ‘이한우의 군주열전(전6권)’ 시리즈를 펴냈다.
태종과 세종의 정치 철학에 영향을 준 송나라 학자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 한문 공부를 위해 사서(四書)의 해설을 겸한 번역서를 집필했고 5년에 걸친 작업은 『논어로 대학을 풀다』 등 ‘이한우의 사서삼경(전4권)’ 시리즈로 완성됐다. 경전 공부로 단련된 한문 지식을 기반으로 『대학연의(상?하)』를 출간했다. 이 책으로 인해 ‘리더십’에 새로이 눈떴고, 사대부의 심신 수양서가 아닌, 군주의 리더십 함양의 필독서로써 『논어』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언론인의 길을 접고 ‘논어등반학교’를 열어 일반인을 상대로 『논어』를 강의하며 『한서』와 『조선왕조실록』 등을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도록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고전 번역이 아니라 지난 100여 년간 단절된 한문 번역 문화를 온전히 되살림과 동시에 우리 고전에 담긴 살아 있는 정신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 밖의 저서로는 『조선을 통하다』 『슬픈 공자』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역사의 의미』 『해석학적 상상력』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왜 송익필이라는 인물을 읽어야 하는가. 현대 한국 사회의 분열주의적 경향의 뿌리는 조선 시대, 그것도 선조 시대, 그중에서도 송익필이라고 하는 한 인물을 통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열주의의 뿌리를 정확히 파악할 때 진정한 통합주의로 가는 길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시작하며|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나라’이다
1 │ 유생 이승만
2 │ 개화 청년
3 │ 한성감옥 속에서
4 │ 미국으로 떠나다
5 │ 밀사 실패 후 결심한 유학
6 │ 모색과 좌절 그리고 망명
7 │ 하와이를 근거지로 삼다
8 │ 1차 대전 종전과 3·1 운동
9 │ 전쟁의 발발로 끝맺은 암중모색
10 │ 광복과 건국
11 │ 정치가로의 변신
12 │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고난의 대장정
13 │ 6·25 전쟁, 전략가 이승만
14 │ 국가 재건의 과제
15 │ 거인의 최후
글을 맺으며| 남한의 이승만, 서독의 아데나워
단발은 전통과의 결별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홀로 내린 결단이었다. 그가 배재학당으로 돌아온 지 2개월쯤 지난 1896년 5월에 ‘갑신정변의 주역’인 서재필(徐載弼, 1863~1951년)이 매주 목요일 배재학당에서 열리는 세계지리, 역사, 정치학 및 의사 진행법 등에 관해 특강을 시작했다. 서재필은 워싱턴에서 개업의로 있다가 1895년 말에 박영효의 요청을 받아들여 귀국했다. 전통을 버리고 근대의 문턱을 넘긴 했지만, 스물두 살 청년 이승만에게 ‘근대’는 여전히 모호하고 낯설고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때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최고의 선진문물을 몸소 겪은 서재필이라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이승만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응원군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서재필은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미국식 민주주의의 실체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어서 큰 인기를 끌었다. ― 「2장 개화 청년」 중에서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이 대안으로 생각한 정치 체제는 국민들의 자유와 평등권이 보장되는 입헌군주제나 민주공화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 제도를 전제군주제, 입헌군주제, 민주공화제로 나눈 다음 전제군주제는 쇠퇴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단발은 전통과의 결별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홀로 내린 결단이었다. 그가 배재학당으로 돌아온 지 2개월쯤 지난 1896년 5월에 ‘갑신정변의 주역’인 서재필(徐載弼, 1863~1951년)이 매주 목요일 배재학당에서 열리는 세계지리, 역사, 정치학 및 의사 진행법 등에 관해 특강을 시작했다. 서재필은 워싱턴에서 개업의로 있다가 1895년 말에 박영효의 요청을 받아들여 귀국했다. 전통을 버리고 근대의 문턱을 넘긴 했지만, 스물두 살 청년 이승만에게 ‘근대’는 여전히 모호하고 낯설고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때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최고의 선진문물을 몸소 겪은 서재필이라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이승만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응원군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서재필은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미국식 민주주의의 실체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어서 큰 인기를 끌었다. ― 「2장 개화 청년」 중에서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이 대안으로 생각한 정치 체제는 국민들의 자유와 평등권이 보장되는 입헌군주제나 민주공화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 제도를 전제군주제, 입헌군주제, 민주공화제로 나눈 다음 전제군주제는 쇠퇴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영국이나 일본 같은 입헌군주제가 당시의 현실에 맞는다고 밝힌다. 그러나 총 52장으로 된 이 책에서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에는 1장 정도만을 할애하면서도 그가 ‘민주공화제’로 분류한 미국에 대해서는 무려 4장에 걸쳐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그가 궁극적으로 생각한 것은 ‘군주가 없는 민주제’, 즉 공화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이승만이 책의 서문에서 완성된 날짜를 ‘건국 4237년 6월 29일’이라 하여 당시 흔히 사용되던 조선 왕조 개국 기원이나 광무 연호 대신 단기를 사용한 데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 「3장 한성 감옥 속에서」 중에서
학교에 다니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한 신앙 간증 강연은 계속했다. 어쩌면 그것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메모를 보면 이런 강연을 통해 번 돈이 2~3달러 많게는 30달러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즐겁게 강연 활동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조국을 새로운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그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 한국을 도와줄 친구들을 만들어가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면 이승만은 이역만리에서 어떤 내용을 어떻게 연설했기에 미국인들을 상대로 해서 지속적으로 강연을 할 수 있었을까? 올리버의 전기는 이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연설은 주로 YMCA 주최로 열렸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동부 도시에 있는 수많은 단체들로부터 초대를 받게 되었다. 어떤 때는 70장에서 100장에 달하는 사진을 환등기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제(演題)는 언제나 한국에 있어서의 선교 사업과 한국인의 점진적인 향상에 관한 것이었다. ― 「5장 밀사 실패 후 결심한 유학」 중에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기독교 소(小)조선’을 만들 포부를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와이 순회여행 도중 이승만이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한인 소녀들의 불쌍한 처지였다. 아예 학교를 다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중에는 어려서 중국인이나 하와이 본토인에게 팔려가 한국말을 모르는 여자 아이들도 있었고 어린 나이에 부모들로부터 결혼을 강요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7월 29일 이승만은 여행을 마치고 호놀룰루로 귀환하면서 그중에서도 사정이 어려운 소녀 여섯 명을 함께 데리고 왔다. 이때는 아직 이승만이 교장으로 취임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일단 감리교 여선교회에서 운영하던 수잔나 웨슬리 홈에 소녀들을 맡겼다. 그곳의 사감이던 앤더슨은 “당분간 이 아이들을 맡아주겠지만 공립학교에 보내 다른 인종들과 융화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인은 한국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바람에 한인중앙학교가 개학할 때 소녀 여섯 명도 입학했고, 다른 소녀들도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바람에 11월 기준으로 등록한 학생 99명 중 18명이 여학생이었다. 손세일은 “이로써 이승만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남녀공학을 실천한 사람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 「7장 하와이를 근거지로 삼다」 중에서
1945년. 이승만은 만 70세였다. 이승만은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유엔 창립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 정부와 교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승만은 옵서버 자격으로라도 참석하기 위해 ‘임정 대표단’을 구성했다. 문제는 연합위원회 워싱턴 사무소와 중한 민중 동맹의 한길수도 각각 회의 사무국에 참석을 신청한 것이다. 다시 분열상이 드러났다. 이들은 며칠간의 논쟁을 거쳐 겨우 회의에 제출할 문서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접수 자체를 거부당했다. 사무국장이 친소 인물인 앨저 히스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진 1945년 8월 15일까지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1945년 8월 14일 밤 11시(미국 시간), 일본의 항복 소식이 라디오 임시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이 시간 바로 곁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회고담이다.
그분은 임시 뉴스를 듣다 말고 벌떡 일어나셨어요. “이봐, 일본이 항복했어. 우린 귀국하는 거야.” 그분은 제 손목을 꽉 붙잡고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분으로서는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었죠. 그저 눈물을 글썽이면서 제 손만 꽉 잡고 계셨습니다. 전 얼떨떨한 가운데 이분이 너무 흥분하셔서 어쩌나 하는 염려마저 들었습니다. ― 「9장 전쟁의 발발로 끝맺은 암중모색」 중에서
10월 31일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장장 네 시간 동안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박헌영과 단독 회담을 가졌다. 이승만은 ‘독촉’의 존재를 3천만의 총의를 모은 통일된 기관으로서 시인하여 주는 동시에 여기에 힘을 합쳐줄 수 없겠느냐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선숙청, 후통합의 입장을 견지하며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승만은 이에 “성스러운 건국 사업에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지 않느냐”며 재차 설득했으나 의견의 일치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돈암장 회담은 논쟁의 불씨를 남겨둔 채 외형상의 ‘의견 일치’를 본 것으로 발표됐다. 이승만은 11월 1일 여운형과도 만남을 가졌다.
공산당에 대한 유화적 제스처는 이승만이 12월 19일 방송을 통해 명확한 반공(反共) 노선을 표명하기까지 계속된다. 그만큼 이승만이 ‘독촉’의 명분 확보를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오히려 우파 진영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우익지인 《대동신문》은 12월 8일자에서 “(좌파와 연합을 시도했던) 그 결과가…`… 이 박사의 한참을 나가던 인기 고무 풍선이 순식간에 급강하 저공비행을 하게 된 것이다”라며 이승만의 좌파 회유 노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이미 11월 3일 이승만의 통일안에 정식으로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16일 독촉에서 공식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이승만과 공식 결별했다. 이에 이승만은 12월 16일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이승만과 박헌영은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 「10장 광복과 건국」 중에서
사사오입 개헌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자유당은 철저하게 이승만의 개인당으로 전락했다. 동시에 다수 여당이 대통령의 ‘거수기’로 전락함으로써 결국 의회 전체의 행정부 견제 기능이 마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물론 여기서 의회의 강력한 견제가 반드시 긍정적이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이승만 식의 자유당 창당이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
자유당 창당은 이승만의 통치가 원론적인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바뀌는 전환점이었다는 것이 정치학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권력 기반이 강화된 이승만이, 그 동기가 설사 애국적인 데서 비롯됐다 할지라도 정치 행태 면에서 권위주의로 기울어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 「13장 6·25 전쟁, 전략가 이승만」 중에서
4·19 당시 민권의 승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성명 발표이다. 이승만이 하야를 결심하게 된 시점 및 과정과 관련해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1995년 말 필자가 《조선일보》에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을 연재하고 있을 때 하야 성명이 나오게 된 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유일라(兪一羅, 본명 주봉, 당시 59세)가 직접 찾아와 35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경무대에서 있었던 대화 내용을 전부 털어놓았다. 유씨는 1960년 4월 26일 데모대 대표 다섯 명 중 수석 대표로 경무대에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결심을 받아낸 장본인이다. 그의 증언은 시민 대표가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할 수 있었던 배경에 군의 도움이 있었다는 비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하야를 결심했다는 결정적 증거, 사태 직후 군정 실시의 움직임이 일부 있었지만 좌절된 이야기 등을 고스란히 밝히고 있다. ― 「15장 거인의 최후」 중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리더십 전격 분석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과 맹목적 찬양이 난무하던 1995년, 일간지에 1년 동안 기획기사를 집필하면서 좌파에게는 따가운 비난을, 우파에게는 과감성 부족이라는 질책을 받으면서도 저널리스트로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인간 이승만’에 몰두했던 저자는 건국 60년을 맞는 2008년, 국가간의 외교력와 협상력이 절실히 필요한 현 상황에서 낙후된 정치 시스템에서도 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대한민국’의 시작을 열었던 이승만의 면모를 다시금 되새겨보고자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를 집필했다.
몰락한 왕조의 후예로 과거시험에 몰두하던 청년이 일찍이 개화의 바람을 맞아 영어를 공부하고 서구 사상을 통해 ‘정치적 자유에 대한 사상’을 배운 후, 중추원 의관으로 활동하던 중 혁신 내각 설립에 가담한 까닭에 7년여의 옥살이를 겪으면서 절실히 깨달은 것은 교육에 대한 신념이었다. 영어사전 편찬 준비, 근대화에 대한 구상을 담은 『독립정신』 집필이 그 근거가 된다. 이때 시작된 ‘기독교 입국론’은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 학위를 획득하며 선진화된 정치 사상들을 학습하면서 점차 공고해졌다. 그동안 그는 한국을 알리는 연설 활동을 하며 미국 지식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고, 귀국 후 서울 YMCA에서 기독교 전파와 전도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다시 한국을 떠나야만 했고, 하와이에서 한인중앙학교 교장, 『태평양 잡지』 창간, 『한국 교회 핍박』 집필 등으로 실력을 다져갔다.
1차 세계대전 발발로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종횡무진하고 제네바, 파리 등지로 한국의 독립을 외치며 외교활동을 벌이던 당시 이승만이 펴낸 『일본 내막기』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폭로해 펄 벅으로부터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로서는 이것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나 진실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두렵다”는 찬사를 받았다.
나라의 해방과 동시에 벌어진 좌우분열 속에서 “덮어놓고 뭉칩시다!”라고 설득하고 외교력과 정치력을 발휘해 의회를 개회한 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략가의 자질과 정치가로...“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리더십 전격 분석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과 맹목적 찬양이 난무하던 1995년, 일간지에 1년 동안 기획기사를 집필하면서 좌파에게는 따가운 비난을, 우파에게는 과감성 부족이라는 질책을 받으면서도 저널리스트로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인간 이승만’에 몰두했던 저자는 건국 60년을 맞는 2008년, 국가간의 외교력와 협상력이 절실히 필요한 현 상황에서 낙후된 정치 시스템에서도 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대한민국’의 시작을 열었던 이승만의 면모를 다시금 되새겨보고자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를 집필했다.
몰락한 왕조의 후예로 과거시험에 몰두하던 청년이 일찍이 개화의 바람을 맞아 영어를 공부하고 서구 사상을 통해 ‘정치적 자유에 대한 사상’을 배운 후, 중추원 의관으로 활동하던 중 혁신 내각 설립에 가담한 까닭에 7년여의 옥살이를 겪으면서 절실히 깨달은 것은 교육에 대한 신념이었다. 영어사전 편찬 준비, 근대화에 대한 구상을 담은 『독립정신』 집필이 그 근거가 된다. 이때 시작된 ‘기독교 입국론’은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 학위를 획득하며 선진화된 정치 사상들을 학습하면서 점차 공고해졌다. 그동안 그는 한국을 알리는 연설 활동을 하며 미국 지식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고, 귀국 후 서울 YMCA에서 기독교 전파와 전도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다시 한국을 떠나야만 했고, 하와이에서 한인중앙학교 교장, 『태평양 잡지』 창간, 『한국 교회 핍박』 집필 등으로 실력을 다져갔다.
1차 세계대전 발발로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종횡무진하고 제네바, 파리 등지로 한국의 독립을 외치며 외교활동을 벌이던 당시 이승만이 펴낸 『일본 내막기』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폭로해 펄 벅으로부터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로서는 이것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나 진실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두렵다”는 찬사를 받았다.
나라의 해방과 동시에 벌어진 좌우분열 속에서 “덮어놓고 뭉칩시다!”라고 설득하고 외교력과 정치력을 발휘해 의회를 개회한 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략가의 자질과 정치가로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며 내 나라를 위해 인생을 아낌없이 쓴 그는, 당당히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나 장기간의 집권 이후 넘지 말았어야 할 3선 개헌의 선을 넘어 민심이 폭발하자 마침내 불어닥친 정치 개혁의 물결 속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라는 한마디로 정치 인생을 마무리하고 하와이에서의 짧은 체류를 끝으로 거대한 인생을 마무리했다.
몰락한 왕족의 후예에서 비분강개한 독립운동가로 거듭나 민간 외교 사절을 자임하며 멸망한 나라, 식민지라는 공백을 건넌 초대 대통령 이승만. 시대를 앞서간 교육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정치학 박사가 되어 다시 지구 반바퀴를 돌아와 마침내 대한민국을 탄생시키기까지, 근대 혁명의 정맥(正脈) 이승만의 90년 생애를 되돌아보는 이 책은 지식과 정보의 결합,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절묘한 조화가 돋보이는 평전이다. 이승만의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기, 미국 유학 시절, 건국과 이어진 정치 논란, 그리고 하야 후 하와이 시절의 사건들이 이승만 집필 원고와 당시 사진 자료, 그간 활발히 진행되어 온 학계의 연구 성과 등과 어우러져 저자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체로 재정리된 ‘한국 근현대사를 이끈 역사적 거인’ 이승만의 모든 것이 담겨 있어 초대 대통령을 둘러싼 현대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전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
제Ⅰ장 개혁활동과 투옥. 출옥 경위
1.초기 수학과정과 개혁활동
2.투옥 경위
3.출옥 경위
제Ⅱ장 감옥 실태와 옥중동지 및 비호세력
1.한성감옥의 실태
2.옥중동지
3.비호세력
제Ⅲ장 이승만의 옥중활동
1.기독교 개종과 성경공부 및 전도
2.영어공부와 독서
3.번역. 저술활동과 신문논설 집필
4.옥중학당 개설
5.서적실 개설
6.콜레라 환자 구호
7.붓글씨 연습과 한시 짓기
제Ⅳ장 「옥중잡기」의 분석과 해제
1.「옥중잡기」의 내용 분석
2.「옥중잡기」의 내용 해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공부할 책이 많네요.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
김인서 지음 이주영 엮음
비봉출판사
건국 당파 6.25전란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은 좀 보셨습니까?
우리나라 역사이야기 하고 음악 이야기만하면 제가 몸둘바를 모릅니다.
볼만한 책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망망대해 사실 요즘 책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이승만대통령에 관한
책을 8권을 구입했습니다.
지금 5권째 보고 있습니다.
@창해 그사이에 그렇게나 많이 생각지도 못하겠습니다. 그 책만 다 읽으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는 통달 하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만고에 빛나는 대한민국의 은인입니다 국부(國父)입니다
만일 그 당시 김구선생이 나라의 영도자였다면 벌써 적화가됐을겁니다.
그분 역시 애국자이지만 전체를 보는 눈이 이승만 대통령만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