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메 소세키의 삶과 문학 -<구마모토>를 다녀와서 장 세 련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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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대학 內 나츠메 소세키동상
여행은 일탈이다. 떠날 때마다 맛이 다르고, 돌아올 때도 기분도 다르다. 다 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 매일 조금씩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지겨 운 일상에서의 탈출은 홀가분함이며, 즐거운 일상을 벗어날 때는 들뜸이다. 늘 변함없는 것은 설렘이다. 공통의 주제를 안고 하는 여행, 같은 취미를 지닌 사람들과의 동행은 더욱 그렇다. 떠날 때는 설레고 돌아올 때는 더 설레고, 다음을 또 기대하게 되는…. 문학을 구심점으로 들르는 구마모토는 어느새 고향처럼 정답다. 더 정다운 것은 이번 여행의 특별함에 있다. 먼저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 는 것과 전원이 자신의 장르에 걸맞은 독서감상문을 제출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은 여행인 까닭이다. 그런 만큼 구마모토에서 만날 나츠메 소세키가 반겨줄 것만 같은 마음에 기다림도 알락달락 곱게 채색되는 느낌이었다.
첫째 날 일행의 첫 만남은 5월 24일 8시 30분이었다. 14명의 단출한 인원이어서 가 족적인 분위기였다. 소풍 떠나는 아이마냥 즐거운 선생님들의 표정에서 여행 은 누구에게나 설렘이란 걸 읽을 수 있었다. 버스에 오르니 사무국장이 쇼핑백을 하나씩 나눠준다. 함께 하게 된 여행에 대한 짤막한 기대 끝에 각자의 이름이 적힌 쇼핑백이다. 사무국장의 꼼꼼한 정성이 느껴진다. 손수 마련한 삼각김밥은 그야말로 목이 메는 감동이다. 빵, 우유에 가벼운 주전부리가 될 만한 쿠키와 캔디, 이동 중에 양치질을 하지 못 할 경우를 감안한 가글과 물휴지까지 쇼핑백은 꼭 필요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단체의 움직임이란 것이 늘 그렇다. 한두 사람의 수고로 여럿이 즐거움을 누 리는 것. 그걸 알기에 작은 쇼핑백에 든 소소한 감동이 고맙기만 했다. 들뜸과 설렘만을 장착하고 여행길에 올랐음이 미안하기도 했다. 수고하는 집행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안일한 과거가 되었음이 민망했다.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사이 버스는 부산 국제여객선 터미널로 들어서고 있 었다. 즐거운 시간은 모든 게 순간임을 깨달았다. 배는 한산했다. 우리 일행의 좌석이 배정된 1층은 빈자리가 꽤 많았다. 바다 는 고요했다. 햇살을 받은 물결이 잔잔하게 반짝일 뿐이었다. 도란거리며 던 진 창밖의 풍경은 온통 푸른 물빛이었다. 바다를 향한 시선들은 하나 같이 아 스라했다. 눈은 한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가슴에 이는 기대나 추억의 높낮이는 달랐을 것이다. 뱃길이 끝나고 있음을 알리는 크고 작은 섬들. 멀리로 보이는 검은 섬들은 이제 그만 쉬고 가라는 배려의 신호등 같다. 2시 반에 내린 하카타 항은 더웠
다. 빈 곳마다 심어둔 꽃들로 정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하카타 항. 단아하고 깨 끗함은 여전했다. 이런 분위기는 한낮의 더위를 식히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이용할 이동수단은 렌트한 두 대의 승합차였다. 비록 14명이라고 해 도 단체로 여행을 할 때는 버스를 불러서 이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 지만 여행은 고정관념을 깨는 통로이기도 하다. 많지 않은 인원이 버스에, 기 사에 가이드까지 동원하기에는 낭비라는 것이 집행부의 생각이었다. 두 대의 승합차를 이용하기로 한 것은 경비를 절감하자는 차원이었다. 1호차와 2호차 로 이름붙인 승합차. 운전은 회장과 사무국장이 직접 하기로 하고 7명씩 나눠서 올랐다. 우리와 반대인 도로에서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회장과 사무국장의 용기에 경이감이 생기는 한편 괜한 걱정도 되었다. 이런 노파심 때문일까. 앞서 가던 1호차가 교차로에서 갑자기 좌회전을 했다. 우리나라의 운전습관에 익숙한 탓 이었다. 그럼에도 함께 해야 하는 운명이라 당황한 가운데 2호차도 따를 수밖 에 없었다. 다행히도 핸들을 꺾은 쪽의 차량들은 빨간 신호등 앞에서 멈춘 상 태였다. 하마터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한 해프닝에도 일본인 운전자들은 누 구 하나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당황한 가운데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린 것은 물론, 일본인들의 배려에 감동한 좋은 경험이었다. ‘인간은 이성이나 본능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습관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죤 듀이의 말을 떠올린 순간이기도 했다. 지나는 길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차를 세운 아트센터 앞은 공원이었다. 공 원에서는 성격을 알 수 없는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전통 기모노를 입은 여인 들과 아프리카 복장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리는 모습이 볼 만 했다. 소풍 나온 아이들의 함성이 쏟아지는 햇살만큼 맑았다. 아트센터는 신기한 모양새였다. 계단식 구조에 층층이 나무를 심은 건물이 었다. 후쿠오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아트센터답게 내부도 잘 꾸며져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가벼운 쇼핑으로 오후 시간을 마무리했다. 내비게이션이 찾아준 우리의 숙소는 AZ호텔이었다. 목적지를 찾는 것은 전 적으로 내비게이션의 몫이었다. 입력을 시키는 것은 사람이지만 기계가 알아 서 안내해 주는 세상. 낯선 나라에서도 전화번호만 누르면 목적지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정말이지 참 좋은 세상이다. 호텔의 외관은 단조로웠지만 내부는 아기자기했다. 일본인들의 몸에 밴 친 절도 고마웠다. 이름에서는 신뢰감이 느껴졌다. A에서 Z까지, 처음부터 끝까 지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 같아서다. 이런 나름의 해석은 로비에 서부터 허물어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흡연 습관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불쾌했다. 객실에 들어선 순간 이런 불쾌감은 극에 달했다. 객실은 온통 담배냄새에 절어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자동차의 소음과 함께 바 람이 밀려들어왔다. 코가 느끼는 괴로움을 귀와 나누기로 했다. 창을 열어둔 채 하룻밤을 지냈다. 자동차의 소음을 자장가 삼으니 그 또한 견딜 만했다.
둘째 날 새벽 다섯 시. 눈을 뜬 시각이다. 평소의 기상습관 때문인지, 자동차의 소음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숙소가 있는 곳이 결코 한적한 지방이 아니란 생각으로
잠을 깬 것만은 사실이다. 자동차의 구조와 도로교통법규까지 반대인 나라. 거리의 깨끗함에도 불구 하고 정겨움보다는 경계심을 갖게 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래서일까? 자동 차의 왱왱거리는 소리까지도 귀에 설게 느껴지는 새벽을 정답게 깨우치는 소 리. 까치가 우짖었다. 깟깟대는 소리가 모국어처럼 정겨웠다. 그런 느낌은 반 가운 손님이 오면 우짖는다는 까치에 대한 인식 때문이리라. 마치 홀로 외국 땅까지 날아와 자국민을 반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깜짝 반기고 보니 실상은 까치가 그다지 반가운 새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떠 오른다. 시어른들이 소규모로 과수원을 경영한 적이 있다. 쏟아지는 햇살에 발갛게 잘 익은 사과열매가 투명하게 느껴지는 가을날. 어김없이 찾아드는 손 님이 까치다. 아무리 쫓아도 까치는 잘 익은 과실들에 상처를 내곤 했다. 까치 가 쫀 열매는 상품가치가 없다. 가장 맛난 열매부터 시식하는 까치들이 시부 모님의 정성을 아는 나로서는 조금도 반가울 리 없었다. 그러나 그랬던 기억 은 온데간데없이 깜짝 반갑기만 했다. 요란한 자동차의 소음 속에서도 유달리 청아하게 들린 덕분이다. 스이젠지 죠주엔[水前寺成趣園]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구마모토로 향했다. 실질적인 한·일 문인교류가 시작 되는 날이다. 첫 방문지는 스이젠지 죠주엔. 아침 공원은 한산했다. 여행객이 감상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스이젠지 죠주엔은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이 다. 현세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인간 중심의 문화가 주를 이루던 모모야마 양 식이란다. 내부는 우아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유려하면서도 깨끗한 연못을 가운데 두고 주위를 돌아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정원에는 사철 푸른 나무 들이 꽤 많다. 짧지 않은 역사가 느껴질 만큼 잘 자란 나무들이다. 스이젠지 죠주엔은 호소카와[細川] 가문의 정원이다. 정원 조성을 시작한 이는 1636년 호소카와가의 3대 번주인 타다토시[忠利]공이다. 매 사냥을 나 섰던 타다토시는 이곳에서 맑은 물이 솟는 것을 발견한다. 그 물은 아소산의 청렬淸冽한 복류수가 만들어낸 지하수다. 이를 알게 된 타다토시가 이곳에 다 실을 만든 것이 스이젠지 죠주엔의 시초다. 차고 맑은 지하수가 찻물로써는 최적이라 여긴 것이다. 이어 절을 지은 타다토시는 스이젠지로 명명한다. 라 칸지[羅漢寺]의 전 주지인 켄타쿠[玄宅]스님을 기리기 위해 절이다 현재는 정원전체의 이름이 스이젠지 죠주엔일 뿐인 듯 사찰의 모습은 보이 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물만 현재까지 흐르고 있다. 신수神水-‘장수長壽의 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물맛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흐르는 신수를 받아내는 수반의 출처 때문이다. 경성 성문 기둥의 초석이었다니 일제 강점기 때 가져간 듯하다.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일본 여행은 가는 곳곳에서 아픈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이런 정서에는 아랑곳하지 않 고 불리는 장수의 물 때문일까. 1878년에 창건된 신사의 이름도 이즈미[出水] 다. 이즈미 신사는 호소카와가의 역대 번주를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호소카와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신사의 양쪽에는 하얀 리본과 패찰이 올망졸망 매달려 있다. 소원을 적은 것 들이다. 새로운 풍경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소원들은 초파일 무렵 사찰의 연등 처럼 화려하지 않다.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며 매단 자물쇠처럼 묵직함도 느 껴지지 않는다. 늑목처럼 생긴 나무의 층마다 매달린 하얀 소원리본들은 색깔 만큼 소박하다. 바람에 부딪히며 잘그락거리는 소원패찰들. 낯선 글자였지만 소원 끝에 적힌 이모티콘이 미소 짓게 한다. 아담한 신사의 모습은 고요한 공원과 잘 어울린다. 아침 햇살이 잠긴 물빛 은 투명하니 곱다. 발아래서 자잘한 자갈들이 내는 소리와 드문드문 보이는 관람객들의 도란거림도 풍경을 돋보이는 장치처럼 느껴지는 아침. 아치형의 다리 아래서 먹이에 이끌려 모여드는 잉어들의 무리는 장관이다. 웬만한 사람 의 장딴지만 한 잉어들을 보노라면 과연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말이 실감된다. 많은 관광객들을 감동시키는 오늘날의 정원이 된 것은 80여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였다. 4대, 5대 번주가 완공을 하고 붙인 이름이 죠주엔이다. 이는 도 연명陶淵明의 시에서 본딴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호소카와 가문의 초대번주인 후지타카[藤孝]가 시문에 능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는 일본 고 유형식의 시인 와카[和歌]를 즐겨 썼으며, 당시 왕에게 작법을 가르칠 정도였던 사람이다. 이렇듯 3대에 걸쳐서 조성한 스이젠지 죠주엔은 동해도 오십삼차東海道五十三次 를 본 따서 만들었다.‘동해도 오십삼차’란 과거 일본의 수도였던 에도와 교토 까지의 사이를 잇는 주요 교역로였다. 이 교역로에 있는 길들은 모두 도쿠가 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건설하고 명명했다. 목적은 하나였다. 자신이 관장 하던 지역의 영주들인 다이묘[大名]들이 편리하게 드나들게 하기 위함이었 다. 그렇지만 길은 길일 뿐. 도쿠가와의 목적이 희석되면서 행상인과 여행객 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이용이 늘어난 것이다. ‘교역로’란 이름이 붙게 된 건 이런 이유다. 교토부터 에도까지 이어진 이 길에는 총 53개의 주점이 자리 했다. 동해도 오십삼차란 이름이 붙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후지산을 본 따 만든 언덕도 있다. 후지언덕은 입구에서도 잘 보일 만큼 높 다. 용암분출로 언제 재앙을 몰고 올지 모르는 산이지만 일본인들에게 후지산 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 만하다. 고코[五高]기념관 관람객을 매료시키는 스이젠지 죠주엔의 정경을 40여 분만에 뒤로 했다. 돌 아서면서 남긴 아쉬움은 다음 행선지에서 채우리란 기대로. 고코기념관을 안 내할 니시카와 모리오[西川盛雄] 교수와의 약속시간을 넘기지 않은 것이 다 행이다. 서두른 덕분에 제 시간에 구마모토 대학에 도착했으나 아뿔싸! 정문 에서는 니시카와 교수 대신 난감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지 못한 것이다. 주차장은 전자동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오로지 출입카드로만 출입이 가능 한 시스템이다. 앞을 막고 선 차단기는 길고 가늘었지만 단순한 막대기가 아 니었다. 14명의 낯선 방문객을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위용을 감추고 있었 다. 차단기가 인식할 만한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탓이다. 꽤나 유창한 회장의 일본어도 카드인식기 앞에서는 무용지물.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 회장이 영문을 모른 채 늘어선 뒤 차량으로 간 뒤, 차단기가 열렸다. 사정을 들은 구 마모토 대학교의 재학생이 자신의 카드로 출입할 수 있게 배려한 덕분이다. 우 여곡절 끝에 차량 두 대가 주차장에 정차하게 된 것은 차량으로 인한 두 번째해프닝이다. 니시카와 교수에 이어 여러 번 만나 꽤 낯이 익은 나카가와 아키오[中川明 夫]와 츠쿠시 한조[筑紫汎三] 무궁화회 회장이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정 문을 통과하게 된 사연을 들은 나카가와 교수가 웃었다. 자신들도 자동차를 가지고 드나들기에는 아주 까다로운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부조의 인물은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입니다. 영국인으로 이 학교 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일본에 귀화한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구마모토 대학의 명예교수인 니시카와 교수가 설명했다. 고코기념관의 입 구에 세워둔 부조 속 인물에 대한 설명이다. 부조는 11년 전에 만든 것이다. 고이즈미는 ‘일본괴담’이라는 소설로 꽤 유명 한 작가다. 일본에 신교육을 전파한 인물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학교의 교수들이 만든 것이다. 부조는 실물 크기로 고개를 옆으로 돌린 모습이다. 오 뚝한 콧날이 서양인임을 짐작케 한다. 고코기념관은 빨간 벽돌이 인상적인 서양식 건축물이다. 분명한 자신의 색 깔을 가지고도 명분 없이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교정에는 나무가 많았다. 숲속에서 사색하는 아담한 풍모의 선비처럼 정다운 모습이다. 다양한 수종 가 운데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문화재급 나무도 있다고 한다. 건물 입구에 수호신 처럼 우뚝한 두 그루의 나무다. 126년 된 건축물과 역사를 같이하는 국보급 나 무라는데 니시카와 교수도 이름을 모른단다. 아쉬운 부분이다. 고코기념관이 완공된 것은 1889년이다. 126년이 지났는데도 고풍스러운 아 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내부관람은 신발을 벗어야 가능했다. 방문 객을 위한 슬리퍼가 비치되어 있어 불편함은 없다. 아치형 복도며 2층으로 오 르는 나무계단이 역사와 전통을 아우른다. 반들거리는 나무계단은 오랜 역사 에도 지치지 않은 모양새다. 작은 삐걱임조차 없다. 2층까지 높게 열리도록 설 계한 천장도 밝게 열릴 일본의 역사를 감안한 듯하다. 일본인들의 꼼꼼한 건 축공법은 배워야 할 부분이다. 건축물의 유리도 건립 당시의 것인데 국보급으 로 관리되고 있단다.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세세히 신경을 써서 지은 것이 고 스란히 느껴졌다. 126년이나 된 건축물로는 획기적인 설계가 아닐 수 없다. 화장실의 청결함에는 더욱 놀랐다. 떨어뜨린 밥알을 주워 먹어도 괜찮을 만 큼 깨끗한 데다 웬만큼 깨끗하게 닦아서는 결코 없앨 수 없는 화장실 특유의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화장지를 넣는 휴지통은 어른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크 기였다. 서너 명만 볼 일을 보고 나면 당장 비워야 할 것 같았다. 얼마나 자주 청소를 하는지 알 만하다. 신뢰감의 크기와 휴지통의 크기는 반비례란 걸 깨 달았다. 용변을 보고 물을 내린답시고 무조건 스위치를 누르다가는 실수하기 십상이다. 일행이 잘못 누른 비상벨 소리에 관리인이 달려왔다. 관광객들이 낯선 환경의 은밀한 공간에서 겪을 수 있는 비상사태를 감안한 장치다. 민망 해하는 표정만 보고도 대수롭지 않은 웃음을 웃는 관리인. 여러 번 이런 실수 를 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는 표정이었다. 쉽게 방치할 만한 공간까지 철저 하게 관리되는 관광지의 부대시설. 이처럼 작은 배려가 관광객 유치에 보이지 않는 저력이 되고 있는 것 같다. 메이지[明治]시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가난한 나라였다. 서양의 개방 압력 이 거세던 시기. 여기에 맞서기 위해 일본이 투자를 결정한 것은 교육이었다. 전국을 5개 학군으로 나누어서 각 학군마다 관립 고등중학교를 건립했다. 고 코기념관은 그 시기에 설립된 다섯 번째 학교다. 현재 구마모토 대학의 전신 이다. 비슷한 시기에 개교한 학교 중 당시의 모습과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학교는 고코기념관뿐이다. 당시는 일본의 중심이 큐슈였다. 제5고에 우 수한 인재들이 모여든 것은 당연하다. 이 학교 졸업생 대부분은 도쿄대로 진 학을 할 정도였다. 구마모토 제5고가 대학으로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다른 시설을 늘 리면서 고코기념관은 본래의 모습대로 보존하게 되었다. 구마모토 대학의 역 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증거물이다.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물론 역사까지 학 생과 구마모토 시민에게까지 많은 사랑을 받게 된 덕분이다. 기념관으로 꾸며 서 일반에게 공개를 시작한 것은 1993년의 일이다. 내부에는 복원된 교실을 비롯한 6개의 전시실이 있다. 각 전시실에는 개교 당시부터 1950년까지의 귀 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1900년경 일본 황실 관계자의 서체도 있었다. ‘신성하고 깨끗한 나라, 자원 이 많고 풍부한 나라’란 의미가 담긴 액자다. 오늘날 일본의 행태와는 상반되 는 글이라는 나의 생각과, 글의 내용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일본인들의 생각이 갈등할 만한 내용이다. 졸업생들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남학생들뿐이 었다. 그 중에 한 사람만 옆모습인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가 바로 부조 속 인 물인 고이즈미 야쿠모다. 운동을 하다가 왼쪽 눈을 다쳐서 실명을 했단다. 그 때문에 오른쪽 눈도 점차 시력이 약화되었는데 사진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 린 것이 특징이란다. 그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해되는 부분이다. 눈 이 멀어 사물이 잘 보이지 않으니 상상력이 풍부해졌을 것이다. 덕분에 일본 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가 된 듯하다. 역대 학장들의 사진도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3대 학장은 유도의 창시자였다. <바른길을 따라 가되 승부를 한다면 이겨라. 사람의 도를 지킨다면 사람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며, 도를 지켜서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유도를 창시할 당 시 내세운 유도정신이다. 일본이 틈틈이 드러내는 야비한 수작들과는 전혀 걸 맞지 않은 정신이지만 좋은 정신인 것은 인정할 만하다. 창시할 당시 유도는 스포츠가 아닌 무술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일본의 대표 스포츠로 발전한 것이 다. 구모모토 대학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구마모토 대학은 입학시험이 워낙 까다롭고 어려웠다. 초대 입학생을 모집 당시 응시생은 108명이었다. 그 중 24명이 입학자격을 얻었고, 졸업은 겨우 14명뿐이었다. 그만큼 입학과 졸업이 어려운 학교다. 이 학교에 한국 유학생 도 더러 있었다는 설명을 들은 후 이원경李源京, 이가형李佳炯등의 이름을 만나 니 꽤나 반가웠다. 당시의 나라 상황을 보나, 유학을 해야 하는 입장을 보나 우리나라 유학생이 많지 않았을 것이기에 더욱. 일본인들 중에는 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 학교 출신이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토 수상을 비롯하여 수 필가, 시인 등 정치와 문학예술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이들이 많았다. 어디나 그렇듯 역사가 제대로 보존되려면 그 기관에 성공한 선배들이 있어 야 한다. 나라의 역사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선조들에 의해서 지켜지는 것처럼 학교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구마모토 대학의 역사가 이처럼 잘 보존된 것 역시 성공한 동문들의 힘인 듯하다. 나츠메 소세키는 이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교사였다. 기념관의 입구에 있는 부조의 주인공인 고이즈미 야쿠모 역시 영어교사였다. 두 사람이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아닙니다. 나츠메 소세키가 오면서 고이즈미 야쿠모는 쫓겨났습니다.” 나카가와 교수의 대답에 궁금증이 생겼다. 그 궁금증은 니시카와 교수의 설명으로 곧 해소되었다. 개교 당시 일본이 교 육에 투자한 돈은 어마어마했다. 명치유신으로 서양식 교육에 주력한 것이다. 영국인 교사들을 초빙한 것은 그런 이유다. 그들에게는 현재 시세로 약 200만 엔을 월급으로 주었다. 그들에게 교육을 받은 수십 명의 학생들이 영국으로 유학을 했고, 졸업 후에 교사가 되어 돌아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서양식 교 육을 받은 일본인 교사들이 점차적으로 임명된 것이다. 일본인 교사들에게는 20만 엔만 주어도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고이즈미 야쿠모가 나츠메 소세키 로 대체된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간접적이긴 하나 나츠메 소세키에게 쫓 겨난 격이지만 구마모토 대학의 위상을 높인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나츠메 소세키는 그때까지만 해도 야성적이던 교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꾸기를 주장한 인물이다. 인재양성에 주력해서 개교한 만큼 학생들이 자연 스러운 분위기에서 공부하게 하자는 것이 그의 교육철학이었다. 막부시대에 맞서는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도 일조했다. 우리나라가 쇄국정책을 펼쳤 던 것처럼 일본 역시 막부시대에는 개국을 거부했다. 그렇지만 시대는 변화하 고 있었다. 서양식 교육을 받은 소세키는 개방만이 살 길이라는 걸 주장했다. 사무라이파와 개국파의 싸움이 거센 가운데 다툼을 자제하고 시대의 흐름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며 도쿠가와 장군을 설득시켰다. 펜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화폐 속 인물이 된 이유가 분명해졌다. 전시실 안내를 끝낸 니시카와 교수가 말했다. “전쟁은 절대 하면 안 됩니다.” 크게 공감하며 들른 곳은 당시의 교실을 재현해 둔 방이다. 당시의 책걸상 이며 커다란 칠판이 비치되어 있었다. 칠판에는 수학 공식과 영어 문장을 분 필로 적어둔 채였다. 그 당시 학생의 마음으로 앉아서 일행 중 전, 현직 교장 선생님들의 미니강좌를 들었다. “이 기념관을 돌아보면서 울산초등학교를 절대로 없애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을 했습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울산초등학교를 허물고, 그 자리에 미술관을 건립한 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는 교장으로 정년을 마친 박종해 시인의 소회에 숙연해 졌다. 역사적 유물, 유산을 지켜내려는 일본의 역사관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는 설명이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게 되었습니다. 감상문을 쓰 면서 우리 문학과 비교분석을 하고, 소세키 문학의 핵심을 연구하는 계기가 된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현직 교장인 김만복 시인의 이야기도 들었다. 메이지시대 도시화, 서양화 된 격변기에서 살아남은 일본 지식인들의 고뇌를 생각했다, 「서시」의 윤동주 가 살고자 했던 삶과도 비교하자니 윤리와 현실적 고뇌에 대한 부담이 얼마나 컸을까, 도 생각했다는 소회였다. 함께 생각하자니 내내 부러웠다. 작은 자료 하나도 소중하게 다루는 일본인 들의 역사관과 그 교육의 힘이 패망 이후에도 일본을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이 끄는 힘이 된 것 같아서다. 우리의 교육현실은 어떤가.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바뀌는 우리의 교육정책이 새삼 안타까웠다. 대학 내 도서관 근처에서 동상으로 만난 나츠메 소세키는 사색하는 모습이 었다. 어찌 보면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문학인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동상은 나뭇잎과 먼지로 덮여 있었다.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듯했다. 학생들 중에는 소세키의 동상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 가 대부분이었다. 씁쓸했다. 명성에 걸맞지 않은 무관심이 한 시대의 예언자 적 사상을 지닌 작가를 철저하게 고립시킨 느낌이랄까. 일본식 점심을 먹은 뒤의 일정은 구마모토 거리관광이었다. 일본인들의 생 활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소세키가 살았던 시대와는 다르겠지 만, 오늘날 일본의 문인들이 거니는 거리의 분위기를 느껴보자는 의미였다. 쇼핑은 즐거웠다. 일본의 물가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더욱 그런 듯했다. 발품을 팔다보니 값싸고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는 것도 다르지 않았 다.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답답한 것은 일본인들의 계산 방 식이었다. 처음 샀던 세 가지 물건 중에서 한 가지를 빼자 더듬거리는 점원. 이미 계산해 둔 세 가지 가격에서 한 가지 가격만 빼면 되는 걸 한참을 주물럭 거렸다. 암산으로도 충분한 것을 계산기를 이용하면서도 더듬거리는 것이 너 무 답답했다. 그런 가운데 빠르게 스치는 두 가지 생각. 나의 빠른 계산력은 어쩌면 ‘빨리빨리’가 몸에 밴 우리의 국민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자 성과, 응용력과 융통성이라는 생각에서 드는 뿌듯함이었다. 한일문인교류대회 이번 일정의 실질적인 행사가 열린 시각은 오후 6시. 장소는 우리 일행이 묵 게 될 교통호텔 6층 연회실이었다. 구마모토의 문인들과 강사, 무궁화회 관계 자들로 연회장이 그득했다. 국악인 김미경 선생의 소리로 행사의 서막을 알렸 다. 그런 다음 이어진 것은 천성현 회장의 인사말이었다. 좌중을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일본어 실력이었다. 길지 않으면서 침착하게 풀어내는 일본어에서 일무궁화회 전, 현직회장의 환영사가 이어졌다. 좋은 여행되길 바란다는 전직 회장의 간단한 환영사에 이어, 현직회장의 인사말은 구체적이었다. “올해는 한일 관계의 의미가 큰 해입니다. 한일교류조약이 체결된 지 50주 년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관계는 잘될 때도 있고 잘못될 때도 있 습니다. 우리는 민간교류 단체입니다. 그러므로 우정 쌓기에만 충실하면 될 것입니다. 한일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정 쌓기인 만큼 여러분의 방문은 특히 의미가 큽니다.” 참 의미심장한 인사말이었다. “한일문인교류는 유교문화 계승의 좋은 예입니다. 일본에도 PEN을 비롯한 국제적인 문인단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울산문인협회처럼 과감한 행사를 하 는 단체는 보지 못했습니다. 울산문인협회가 ‘나츠메 소세키의 인생과 문학’을 주제로 한 이번 제8회 교류는 특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년은 나츠메 소세키 의 사망 10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올해부터 소세키에 관한 다양한 문화행사 가 계획되어 있습니다. 한일문인교류 덕분에 다른 모임에 앞장서서 소세키에 관한 행사를 여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츠쿠시 현 회장은 행사에 걸맞은 인사말을 준비한 듯했다. 그는 양국 문인 들의 교류에 경외심을 보이는 이유도 설명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울 산을 방문했을 때 환영하던 모습 덕분이라며 고마워했다. 겉은 언제나 친절한 그들의 속내까지야 다 읽을 수는 없지만 우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서도 고 마움을 느낀 순간이다. 저녁은 행사장에서 간단하게 해결했다. 깔끔하게 준비한 도시락이었다. 이 어진 것은 나츠메 소세키 관련 강의였다. 강사는 두 사람으로 모두 현지의 석 학이자 문인이며, 구마모토 대학의 명예교수였다. 소설가이기도 한 나카무라 세이시[中村靑史] 교수가 ‘나츠메 소세키의 시 와 소설’에 대한 강의를 했다. 강의 주제는 나츠메 소세키의 시와 소설에 관한 것이었지만, 연보를 통해서 그가 문학을 접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는 시간이었 다. 강의를 통해서 소세키를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나츠메 소 세키는 필명이다. 본명은 긴노스케[金之助]다. ‘긴[金]’은 입양을 가게 되면서 갖게 된 성이다. 그는 그리 가난하지만은 않은 집의 여덟 남매 중 막내로 태어 났다. 그러나 바로 입양되었다. 생일이 1월5일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날 태어 난 아이는 도둑이 된다는 속설이 그를 입양아로 만든 것이다. ‘나츠메’라는 원 래의 성씨를 되찾아 소세키라는 필명을 쓴 것은 22세 때(1889년)였다. 그는 소설뿐만이 아니라 다방면의 문학에 심취했다. 뿐만 아니라 문학 외적 인 면에서도 다양한 지식을 풍부하게 지닌 사람이었다. 우스운 부분도 있었 다. 소세키의 연보에는 맞선을 본 것, 다른 문인의 잦은 방문을 받은 내용까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사소한 일상사까지 연보에 기록한 것은 소세키의 행적에 비하면 언뜻 이해 가 되지 않았다. 소세키는 죽기 5년 전에 받을 수 있었던 문학박사학위를 거부 했다. 남의 논문이라도 베껴서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박사학위 다. 그런 것을 거부한 소세키를 잠시 생각했다. 그는 짧은 생애동안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많이 집필한 작가다. 그것만으로도 받을 만한 당연한 명예 를 거부한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그의 문학에 대 한 애정이다. 어쩌면 그런 명예가 작품을 쓰는 데는 거추장스러운 멍에가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은 아닐까. 소세키가 더욱 존경스러워지는 반면, 하찮은 것 까지 기록된 연보를 보자니 꼼꼼하다고 해야 할지, 좀스럽다고 해야 할지 가 늠이 쉽지 않았다. 강의 이후에는 김만복 시인의 질의가 이어졌다. 강사의 간단한 답변이 있었 지만, 구체적인 답변은 다음 강의를 맡은 니시카와 모리오 교수가 했다. 소세 키 소설의 특징에 대한 질의로, 물질적 가치를 무시하는 경향이 가치관 변화 에 따른 우울과 불안요소가 된 것이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덧붙여진 것은 그 런 요소들이 중심인물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어두운 정서가 많이 깔린 듯한데 그런 소극성이 작품이 가지는 한계가 아닌가, 였다. “소설가는 당대의 예언자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 나츠메 소세키는 소설가로 서 지나치게 적극적인 시대흐름에 반대하는 사상을 소설에 반영했을 뿐이다.” 니시카와 교수의 답변은 명쾌했다. 나츠메 소세키가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 고 해도 그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에는 크게 공감했다. 그가 말하는 소세키는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소설을 썼 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이공계에 더 가까웠다. 문학을 이론적으로 다루려는 흔 적이 그의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것이 그 반증이다. 입양아였던 탓이겠지만 소세키는 성장기에 부모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꼈 다. 그는 피부와 위장병을 자주 앓을 만큼 병약한 소년이었다. 그렇기에 성장 기 때는 밝고 건강한 상태에서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소 세키가 일본 문학사를 빛낸 부분에서는 슈퍼맨처럼 유명하나 지나친 미화는 곤란하다는 이유다. 소세키는 죽음을 앞둔 시점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은 불티나게 팔렸 고, 각 학교에서는 강의요청이 쇄도했다. 그럴수록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침묵은 은혜」라는 시까지 쓴 그는 결국 4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어쩌면 영원 한 침묵을 갈망하는 그의 청이 하늘에 닿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문 학관과 삶의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삶의 편린들도 어느 시점에 누군가에게 작은 영향이라도 끼칠지 모른다는 생 각에 책임감도 생겼다. 유학 후에 고등교육을 시작한 소세키는 종종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당 시 일본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사회의 붕괴를 예견하고, 예시한 작 품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문학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소세키는 사 망한 지 100년이 다 된 현재까지도 식지 않는 인기작가다. 비결은 어둠 속에 서도 희망을 제시한 그의 문학 덕분이다.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상에 경고를 하면서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 가치관도 인기비결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 다’만 읽은 내가 소세키의 다른 작품에도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될 만한 강의 였다. “소세키는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하이쿠[俳句]나 단가에서 현대시로 변화 를 시도한 시인이 아닌가? 문학의 우수성은 물론 일본의 시문학을 일으킨 선 각자며 천재시인인 것 같다.” “천재가 아니라 노력과 연구의 결과로 문재가 빛난 것이다. 선각자라고 생 각한다면 당시 일본의 서구문명은 기독교와 연결되는데, 그런 서구문화를 일 본화가 아니게 소화하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그가 유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박종해 시인의 질의에 대한 니시카와 교수의 답변이다. 소세키를 미화해서 는 안 됨을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성격이 다른 두 문화가 만나면, 에도시대처럼 한 쪽을 완전하게 폐쇄하여 하나가 완전히 망하지만 하나는 서로 융합된다. 그러면서 둘 사이에서 독특한 하나의 새로운 문화가 생성된다. 소세키의 문학정신은 후자다. 즉, 새로운 세 계를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니시카와 교수의 답변은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사람의 바람직한 자세를 제 시하는 듯했다. 지나친 미화는 곤란하지만 소세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담긴 답변이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빼어난 면은 드러나듯, 미화하지 않으려고 해도 소세키의 선각자적이며 예언자적인 면은 칭송받을 만하다. 이런 사상이 담긴 그의 문학작품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을 거라는 뜻 을 담고 있었다. 진솔하고 깊이 있는 강연이었다. 작은 감동으로 가슴이 그득한 것은 그 진 솔함 때문일 것이다. 강연이 끝나고 조촐한 선물 교환과 친교의 시간이 이어졌다. 방문한 우리들 을 배려한 시간이지만 기껍지는 않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흡 연문화 때문이었다. 웬만한 의식은 일본이 우리보다 선진국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금연에 관한 계몽운동은 펼쳐지지 않는지 괴로운 가운데 내내 했던 생각이다.
셋째 날 나츠메 소세키의 집 아침 7시에 구마모토 성을 관람하기로 했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성문 개방 시간이 8시 30분인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숙소에서 성까지는 걸어서 15분 남짓한 거리였다. 일찍 일어난 회원들끼리 자유롭게 관람을 하기로 했으 나 산책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해자에 빠진 망루만 감상하고, 성 밖의 광장에 서 가벼운 몸 풀기를 했을 뿐이다. 성문을 열 시각이면 나츠메 소세키가 살던 집을 돌아볼 때다. 한 가지는 포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은 나츠메 소세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결 론으로 귀결되었다. 소세키가 살던 집은 동네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좁은 길을 자연스 럽게 훑어나가는 회장과 사무국장. 덕분에 마음이 편안했다. 큰길만 달리는 동안 두 운전자의 운전 실력에 대한 사소한 불안까지 몽땅 사라진 듯했다. 핸 들의 위치는 물론 모든 신호체계가 우리나라와는 반대인 나라에서 내비게이 션의 안내만으로 헤매지 않고 다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집은 전통 일본식 가옥이었다. 나츠메 소세키가 1년 8개월간 살았던 집이다. 긴노스케[金之助]였던 본명 대신 나츠메 소세키란 필명을 쓰
면서부터 살았던 곳이다. 소세키의 모습이 박힌 지폐가 깨끗하게 전시되어 있 었다. 소세키가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다. 집필실에 만들어 둔 소세키 모습의 인형이 인상적이었다. 다소 조잡 한 솜씨였는데 고양이를 쓰다듬는 모습이다. 구마모토 대학에서 재직하던 당 시의 사진도 있었다. 꽤 준수한 외모가 서양인과 비슷했다. 31세 때의 모습이 라니 한창 젊은 나이였음에도 사색하는 눈빛만은 다양한 사연을 담은 듯했다. 소설가이면서도 하이쿠를 즐겨 썼다는 건 눈빛만으로도 알 것 같았다. 소세키는 이 집에 세 들어 살았다. 현재 시가로 매월 15만엔을 지불했다고 한다. 상당한 재력가였음을 짐작하는 부분이다. 110년이 지났지만 소세키가 살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 인상적이다. 웬만한 고가들은 다 헐 렸으나 이 집이 당시의 모습을 지켜내고 있는 것은 주변 환경과 무관하지 않 다. 현재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유층인 덕분에 헐리지 않은 것이다. 굳이 나라에서 돈을 들이지 않아도 자부심을 가질 만큼 가치가 있는 장소임을 아는 사람들이 괜히 고마웠다. 이곳에서 양쪽으로 걸어서 20여 분의 거리가 소세키 소설의 주 무대다. 당시의 모습에서 손을 조금 댄 곳은 정원뿐이다. 갖가지 나무들이 자라는 정 원은 아름다웠다. 꽤 넓은 정원임에도 아담하게 느껴졌다. 촘촘히 자라는 나 무들 때문인 듯했다. 소세키가 살던 당시보다는 수종이 좀 더 다양해졌다고 한다. 여름이 막 시작되는 시점이라 정원은 규모와는 관계없이 그대로 초록 숲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가운 햇살을 가리며 들어섰던 곳이라는 사실 이 믿기지 않았다. 바깥의 뜨거운 햇살은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시원했다.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어서일까. 마루의 어느 곳을 디뎌도 삐걱거리는 작 은 비명도 없다. 창문의 유리도 소세키 가족이 기거하던 때의 것이 그대로 보 존된 것이란다. 손끝으로 유리를 살살 두들겨보았다. 유난히 맑은 소리가 났다. 여기서도 놀란 것이 화장실이다. 한 사람이 들어가서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좁은 공간. 변기와 그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자리한 세면대만이 형제처럼 붙 어있었다. 변기의 물을 내리면 세면기에서 자동으로 물이 흐르는 구조다. 손 을 씻은 물이 그대로 변기에 채워진다. 용변을 본 후에 손을 씻지 않는 사람을 경고하는 맑은 소리이기도 하지만, 손 씻은 물을 재활용하는 생활의 지혜가 놀라웠다. 카와쿠다리[川下り] 체험 사가현으로 가는 길가에는 온통 보리밭이다. 햇살을 받으며 한창 익어가는 보리는 유난히 반짝거렸다. 누렇게 누운 보리밭에 둘러싸인 시골마을이 고향 만 같다. 밭 가운데 고만고만한 크기로 앉은 집들은 오랜 죽마고우처럼 다정 해 보인다. 마치 서로 어깨를 겯고 있는 모습이다. 나지막한 집들마다 들어서 면 반겨 맞아 줄 누군가가 살고 있으려니 여겨진다. 낯선 지방도 낯설지 않게 해주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사가현까지 가기 전에 잠시 특별한 체험을 했다. 야나카와[柳川]에서 즐기 는 카와쿠다리가(뱃놀이) 그것이다. 야나카와는 물의 도시로 유명하다. 도시 의 1/3이 물이라니 어울리는 이름이다. 뱃놀이가 적격인 마을이다. 카와쿠다 리를 체험할 수 있는 강은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낭만적인 뱃놀이에 더욱 심취하게 만드는 것은 주변의 풍경이다. 외관을 예쁜 꽃들로 장식한 집들과, 장어요리 가게들. 사이사이 늘어진 버드나무까지 ‘야나카와’는 아기자기하면 서도 시원한 이색관광지임이 분명하다. 이곳은 외국인 관광객보다 일본인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400여 년 전에 수 로를 따라 제방을 쌓은 것이 오늘날 카와쿠다리가 생겨나게 된 시발점일 듯하 다. 단순히 토사가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인데, 도시를 키우 는 관광자원이 될 줄을 짐작이나 했을까. 어떤 환경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도시가 건강한 발전을 하는가 하면, 쇠퇴하기도 한다는 걸 보여주는 산 교육의 현장이다. 야나카와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1997년에 개봉한 영화 ‘도쿄맑음 [東京日和/Tokyo Biyori]’ 덕분이다. 야나카와가 두 주인공의 신혼여행지 로 소개된 것이다. 야나카와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걸맞은 서정적인 풍광은 단 번에 관람객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저력을 보였다. 돈코부네[どんこ船]라는 쪽배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다. 일행 14명이 배 한 척에 올랐다. 평일이어서인지 배를 타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 다. 바람이 살랑거렸지만 햇살은 한여름처럼 따가웠다. 사공이 노를 젓는 솜 씨는 능란했다. 앉은 자세로는 머리가 닿을 만큼 낮은 다리 아래를 통과할 때였다. “수구리~~” 사공이 외쳤다. 머리를 숙이라는 경상도 사투리였다. 외국에서 듣는 모국어 만도 반가운데, 경상도 사투리라니 일행들의 웃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 강에서는 장어가 많이 난다고 한다. 장어요리는 이 지방 관광 상품의 하 나다. 관광객의 증가로 치어들을 수입해서 이 물에서 자라게 한다는데 요즘은 그조차도 잘 잡히지 않는단다. 병이 든 걸 모르고 사들인 치어들이 죽는 경우 가 허다한 까닭이다. 강둑에는 버드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머리라도 감으려는 듯 긴 이파리들 을 한껏 늘어뜨린 버드나무는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야나카와라는 이름에 걸 맞은 풍경이다. 다른 나무와 물풀들도 많았다. 물과 친한 것들이었다. 남생이 무리와 물뱀을 보는 일은 흔하다. 수생 동식물의 보고인 듯했다. 카와쿠다리 는 몇 개의 코스가 있다. 길이마다 가격이 다른데 우리는 가장 짧은 코스를 택 했다.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이 같은 코스로 시간과 경비를 감안한 선택이었다. 아무려나 색다른 경험으로 딱딱할 수 있는 일정이 말랑말랑해진 느낌이었다. 다케오시 도서관[武雄市 図書館] 점심은 정통 일본식 라멘(ラ-メン)을 먹었다. 비계가 많은 돼지고기를 토핑 으로 얹은 음식이다. 느끼한 데다 면발의 맛도 특이했다. 덜 익은 듯한 데다 쫄깃한 맛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보다는 이에 쩍쩍 들러붙는 느낌이 유쾌한 맛은 아니다. 국물도 엄청나게 짜다. 700~900엔 정도인 가격도 만만찮다. 우 리가 요리된 라면을 사 먹는 걸 감안하면 어떤 라면이 그만한 가격으로 팔릴 까, 잠시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일본에서는 국민음식으로 불릴 만큼 대 중의 인기가 높다는데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본 음식문화의 단면을 체험한 특별한 순간이긴 하다. 오후에는 사가현[佐賀県]의 다케오도서관을 방문했다. 다케오도서관은 경 영혁신을 꾀한 다케오시장의 걸작품이다. 인구 5만의 한산한 도시에 들어선 도서관으로서는 규모가 상당하다. 내부는 카페와 서점을 겸한 1층과, 도서관
의 역할을 하는 2층의 서고로 구분된다. 1층은 마치 휴식 공간 같다. 2층 서고 에는 장서만 20만 권이 비치되어 있다. 후쿠오카에서도 차를 타고 나들이 삼 아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신뢰감이 가는 시설이 다. 다케오도서관은 2013년 이전까지만 해도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도서관이다. 시장의 획기적인 정책이 작은 고을인 다케오 시로 지적인 관광객들을 끌어 모 으는 발전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러운 것은 흑자경영이라 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도서관이 적자경영인 것이 시대적인 흐름이라는 것은 안이한 핑계라는 걸 단적으로 깨닫게 했다. 지역발전을 위한 해외시찰을 다니 시는 의원나리들이 이런 곳을 방문해서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는 없는지 아쉬 운 생각도 들었다. 2011년에만 해도 다케오도서관은 하루 이용자가 1000명 미만이었다. 그랬 던 것이 2년 뒤에는 하루 평균 2529명이 이용하는 도서관이 되었단다. 이렇게 된 데는 이용객의 편의를 최대한 충족시켜 주는 경영혁신이 큰 몫을 했다. 예 를 들면 2층 서고에서 책을 빌려서 1층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산 커피를 들고 열람실 어디에서나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식이다. 음식물 반입을 금지하는 일 반적인 도서관의 운영방침과는 정반대다. 그뿐만이 아니다. 빌려서 읽던 책이 맘에 들면 구입이 가능한 시스템도 도입했다. 무인판매도 가능하고, 마트와 주유소에서 포인트를 쌓을 수 있는 T-포인트카드(일반포인트) 이용도 가능하 다. 도서 구입 시에도 이 카드에 포인트가 쌓이는 방식이다. 무료로 발급이 가 능한 카드로 도서를 대출할 때도 매번 3포인트(한국단위 30포인트)씩 적립이된다. 회전율 1위를 차지하는 도서는 요리관련 서적이다. 빌려 읽은 책을 반납하 는 데도 이용객의 편의를 최대한 제공한다. 공민관(주민센터)이나 기차역에서 도 반납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도서 반납함은 곳곳에 있다. 먼 지역에서는 택
배비만 내고 대출을 신청하면 도서 전용백을 배부한다. 다 읽은 책은 그 전용 백에 넣어서 보내면 된다. 반납시스템이 편리하니 도서 대출이 용이해서 이용 객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다케오도서관은 큐슈올레길이 생기게 한 일등공신이다. 도서관 이용객들을 위한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 올레길이다. 맞은편에 있는 유메(You Me)타운도 다케오도서관 덕분에 판매고가 높아졌다. 그러나 다케오도서관의 덕을 가장 크게 본 것은 다케오신사다. 다케오신사는 일본의 전통무사를 모시는 신사로 참배객이 그다지 많지 않 았다. 현재는 다르다. 외부에서 들른 다케오도서관의 이용객들이 반드시 들르 는 장소가 되었다. 신사로 오르는 계단이 인상적이다. 돌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자라는 이끼가 안온하게 앉은 세월의 더께 같다. 신사의 규모는 큰 편이 아니 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원패찰과 소원리본이 매달린 모습은 여느 신사와 비슷하다. 정작 유명한 것은 뒤편에 있는 대나무 숲과 녹나무다. 눈까지 시원해지는 대 숲 끝에서 만날 수 있는 수령이 3000년이라는 녹나무. 까마득한 세월을 한 자 리에서 버텼다는 것이 놀랍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풍파를 만났는 지는 나무의 모습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밑동이 굴처럼 패인 데다 윗부분 은 부러진 모습이라 세월의 길이에 비해서 큰 키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리저 리 자유롭게 뻗은 굵고 가는 줄기마다 초록 잎을 무성하게 매달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이윽히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그 모습은 군더더기 같은 체지방이 몽 땅 빠진 채 눈빛만 형형하게 살아있는 신선 같다. 큐슈올레길까지 체험할 시간은 없었다. 도서관 탐방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오후. 지도자의 마인드에 감탄한 시간이다. 부디 우리 지방 관료들의 방문도 이런 데로 이어지길 다시 한 번 바라며 다케오도서관을 뒤로 했다 마지막 밤은 전통 일본식 호텔인 다다미방에서 보냈다. 미닫이 장지문이 편 안하고 아늑해서 향수鄕愁가 일었다. 직원들의 태도와 걸맞다. 우리의 렌트카 가 도착하자 늙수그레한 직원들이 한달음에 달려 나와 맞았던 직원들. 일본의 전통의상인 근무복이 인상적이었다는 생각이 새삼 떠오른다. “이랏샤이마세(いらっしゃいませ)-”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반기는 말투에서 연륜이 느껴졌다. 언뜻 보기에도 우리나라 같으면 모두 정년을 훌쩍 넘긴 연배의 직원들이다. 고객들을 대하는 태도로 보아 연륜을 인정받은 듯하다. 체크인을 막 끝냈을 때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들어왔다. 초등 4,5학년쯤의 학생들이 현장학습을 온 듯했다. 지도교사의 설명을 듣는 160여명의 어린이 들. 발표하는 친구의 이야기도 경건하게 듣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장난을 치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에 투영되는 일본의 미래가 보는 이를 긴장시킬 만하다. 온천이 딸린 숙소여서 피로를 풀기에 적격이었다. 자유롭게 휴식을 취한 뒤 저녁을 먹었다. 일본정식이었다. 평균 연령이 예순은 훨씬 넘긴 여종업원이 꼼꼼하게 시중을 들어주었다. 실질적인 행사는 끝난 셈이어서 이번 행사의 자 체평가 시간도 가졌다. 각자 개인적인 소회를 나누었지만, 결론은 의미 있고 실속 있는 문학 기행이었다는 의견들이었다.
넷째 날
마지막 날은 여유 있게 움직였다. 모든 시간은 후쿠오카에서 보내기로 했 다. 가는 날 들르기로 했다가 빠트린 아카렌카 문화관은 고풍스런 건축물로 눈길을 끌었다. 빨간 벽돌을 두른 몸체에 돔 형식의 지붕을 얹은 건축물이다 이웃한 모든 건물들은 현대식이다. 언뜻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한데 아카렌카 문화관은 조금도 생뚱맞지 않았다. 내부에는 후쿠오카의 문화를 상징할 만한 자료들이 아기자기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지역문인들의 저서를 보관한 서고 가 특히 부러웠다. 울산에는 이런 곳이 언제나 생길까, 그곳에 나의 작품집이 영구히 보존될 날을 은근히 기대하며 돌아 나왔다. 길든 짧든 여럿이 함께 움직이는 데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숙소의 열쇠를 가방에 챙겨서 들고 나온 일, 우회전을 해야 할 자리에서 습관 적으로 좌회전을 했던 일들은 귀여운 실수들이었다. 즐거운 시간들은 언제나 순간처럼 느껴지는 법. 가슴 철렁할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감사할 따름이 다.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올 곳이 있는 여행은 아쉬움이 수반된다. 관광이 거의 배제되어 자칫 길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3박4일이 서너 시간처 럼 지났다. 머리와 가슴에 저장된 기억과 감성의 부피만 아니라면. 그야말로 알뜰하게 꾸린 문인교류였다. 돌아오는 마음이 그득한 걸 보면. 울산광역시의 배려에 결코 누를 끼치지 않을 만큼 알찬 일정이었다고 자부한다. 더불어 울 산을 빛낼 문학작품 구상을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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