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공파(松亭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고, 영번, 수(須)로 이어져 수가 시조가 된다. 1993년 계유보의 책장 비율을 대충 세어보면 송정공파가 영양파에서 80% 정도이다.
수의 묘지(墓誌)에 있는 글이 재미있어 전문을 번역해 보면
감찰(관직명) 영양 남수의 묘지
監察 英陽 南須 墓誌
감찰공 남씨의 이름은 수이고 자는 000이며 헌 거사요 영해 영양인이다. (조선시대에는 영양은 영해부에 속해었다.)
監察公 南氏 名 須 字 000(3자 결) 軒居士 寧海 英陽人也
아버지는 중랑장(관직이름) 영번이고 할아버지는 판종부사(관직이름) 승고이며 증조 할아버지는 진사 혁이며 어머니는 전직(궁궐을 지키는 사람) 강릉 유의인 최씨의 딸이다.
父 永蕃 中郞將 大父 承顧 判宗簿事 曾大父 奕 進士 母 崔氏 殿直 江陵 有 之女
공은 1395년(태조 4년) 9월 19일에 태어났고, 1417년(태종17년)에 문선에 오르고(문선은 관리를 뽑고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문선에 오른다는 것은 관리의 예비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는 뜻이다), 1420년(세종 2년)에 대흥(성씨의 본을 말함) 백 승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서 3남1녀를 두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진이요 관직이 별시(군부대의 이름인 것같음)의 사직(정5품 무관)이고 둘째의 이름은 손이요 무과에 00 하고 셋째의 이름은 전이요 진사이며 따님은 세도있는 가문의 사람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현감을 지낸 윤 긍에게 시집을 갔다.
公 生於洪武 乙亥 九月十九日, 永樂丁酉 中 文選, 庚子 000 娶 大興白昇女, 生 三男一女 一曰 ' +辰' 別侍司直 二曰 蓀 武科 00 三曰 筌 進士 女 適 世家子 文科 行縣監 尹兢)
친손자들와 외손자들에 관한 자세한 것은 백씨(수의 부인을 말함)의 묘를 자세히 있으니 여기서는 적지 않는다.
內外兒孫 詳見 白氏墓誌 今不 錄
1425년(세종 7년) 다방(궁중에서 약을 지어 받치던 관청)에서 처음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10월에 아버지 상을 당했다.
洪熙 乙巳 筮仕 茶方 十月 服斬衰 (서사: 처음으로 관직에 오름, 참최는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옷)
1428년 (세종 10년)에 관직에 복직했고, 1432년(세종 14년)에 사선(임금의 식사를 만드는 관청)의 식의(정9품)로 자리를 옮겼고, 1434년(세종 16년)에 직장(종7품, 관청의 하급관리의 계급은 참봉, 봉사, 직장, 주부 순이다)으로 승진했고 1435년(세종 17년) 계선0의 주부로 승진했고, 1436년(세종 18년)에 상을 당했고 (그래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438년(세종 20년)에 통례문(의식을 관장하는 관청)에 복직했고, 00에 통찬(나라 제사 때 제사를 진행시키는 관직)으로 승진했고, 1440년(세종 22년)에는 승훈(정6품)으로 승진했고, 1441년(세종 23년)에는 판관(종5품)으로 승진했고, 1442년(세종 24년) 창사로 자리를 옮겼고, 1443년(세종 25년) 9월 큰 꾸지람을 받고 통례문의 통찬으로 되돌아갔으며 이때 계급은 승훈으로 낮아졌고, 1444년(세종 26년) 사헌부의 감찰(정6품)로 옮김에 0으로 공이 수망(관직의 후보자로 추천되는 세 사람 중의 첫째 사람)이었다.
宣德 戊申 還仕, 壬子 遷 司膳 食醫, 甲寅 升 直長, 乙卯 階宣0 升 主簿, 正統 丙辰 服 齊衰(주: 상복의 일종), 戊午 還 通禮門, 00 己卯 升 通贊, 庚申 升 承訓, 辛酉 升 判官, 壬戊 遷 倉使, 癸亥 九月 以大呵 還通贊 階承訓, 甲子 遷 監察 知司憲0 公 首望
그 해 9월에 용담(전라도에 있는 현)의 수령으로 나가 오로지 아래사람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스리니 읍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다.
是年 九月 出守 龍潭, 一以撫字 爲心 邑人稱之 (무자:아래 사람을 어루만져 사랑함)
1445, 1446, 1447년(세종 27, 28, 29년)에 그 해의 조선 최고수령이 되었다.
00 乙丑 丙寅 丁卯間 海居 最目
1448년(세종 30년) 봄에 남솔(원이 제한된 수 이상의 가족을 데리고 옴)로 인해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30년을 스스로 즐기다가 1477년(성종 8년)에 병으로 인해 죽으니 향년 83세였다.
戊辰 春0濫率0公公0 以溪山 自娛 凡三十年 成化丁酉 以病 卒于0(享으로 추측됨)年八十三
그해 12월 12일 을사일에 영해 남면(지금의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화전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是年 十二月 十二日 乙巳 于寧海 南面 花田山麓
수는 아주 꼼꼼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에 적혀있는 이런 세세한 내용은 본인이 기록해두지 않으면 남이 알기는 어려운 사실들이다. 수는 관직운이 그리 크게 따르지 않았던 것같다. 문선에는 그가 23세 되던 해에 올라갔으나 관리로 채용이 된 것은 5년이 지난 28 살때부터이고 이후 주변부서에서 말단관직으로 시작해 차근차근 올라가 46살 되던 해에 정5품까지 올랐으나 무슨 실수를 했는지 강등되게된다. 이때 수의 충격은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수가 관직생활에서 날짜의 달까지 기록한 것은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와 이때 그리고 현감으로 나가게 되는 해 세 곳뿐이다. 이후 수는 명예퇴직의 수순을 밝게 되는 것같다. 각 부서에서 근무한 연수를 차례대로 보면 다방에서는 5년, 사선에서는 4년, 통례문에서 4년인데 창사에서는 1년만에 쫓겨나 통례문에서 대기발령을 받다가 그의 관직생활의 명예를 높여주기 위해 사헌부 감찰(감찰은 정6품이지만 실세로서 명성이 높은 직위이다)로 잠시 감투를 쒸워준 이후 그가 실수를 한지 꼭 만 1년만에 어느 시골의 현감으로 내보낸 후 현감의 일회 임기가 만료되자(현감의 임기는 30-60 개월이다) 명예퇴직을 시킨 모양이다. 이때 수의 나이는 53세 관직에 첫 발을 내디딘지 25년되던 해이다. 쫓겨가는 수의 변명이 우습다. 수는 남솔(濫率)로 인해 그만두었다고 적고있는데 남솔이란 고을에 부임하는 수령이 그가 데려올 수 있는 식구를 초과하는 것을 말한다. 수의 아들은 3이고 그의 부모는 이미 다 죽었으니 그 당시로 봐서 결코 가족수가 많은 것은 아닐뿐더러 가족이 많으면 데리고 오지 않으면 될것이지 한참 일할 나이에 관직을 그만두고 이후 30년 동안 무직으로 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하튼 지금 종인들은 수를 부를 때 감찰 영양남공 수라한다. 수는 영양읍에서 이후의 여생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그의 후손 12세 계조(繼曺)가 임진난을 피해 청송(靑松)으로 들어와서 청송파의 시조가 된다. 수의 초기 자손들 중에는 관직에 오르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후손들은 영양, 울진, 청송, 영해 등에 조용히 살게 된다.
첫댓글 처남, 나의 19대조이신 송정공의 내력을 자세히 옮겨 놓았군, 송정공은 낙향후 울진에서 영해 나라골로 입향하셔서 사시었고 영양남씨 송정공파 파조이시고 그후손이 영양남씨 전체의 80%를 차지하며 현재 나라골에 있는 처인당 종택이 송정공의 종택이며, 송정공의 첫째아들 휘(진) 사직공 후손은 나라골, 가산(나의고향),병곡각리,호지마을,영덕양원,영양현동,석보,예천보문,용궁등에 ,둘째아들 휘(손) 현감공 후손은 영양 섬촌,청송 현동, 대구동촌입석리등에, 세째아들 휘(전) 진사공 후손은 울진 정림,행곡, 영해원구,축산칠성,경주보문,영양청기,문경등에 살고있으며, 송정공의 산소는 축산면 칠성리 꽃밭에 있슴
송정공 산소 옆으로 좀더 들어가면 우리 11대조모 산소가 있어서 가 보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