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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世 神明仙帝紀
제6세 신명선제기
원문출처 ;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帝,諱再思,又曰鹿臣.大武神帝別子也.母曰曷思太后,其父解素,柳花夫人所生金蛙子也.性聦悟好仁,讀仙書通医薬,又能用兵,善辯而常黙然如不知.哀其胞兄好童死於非命故也.閔中帝崩,國人欲立之,固辞曰“嫡子在,非庻子之所敢當也.”遂奉母而走.慕本亦義其志封為仙王.平扶余乱有功.慕本被弑,麻楽䓁迎之,卽位於東都神宮,大赦,改元曰神明.
제는, 휘가 재사再思 또는 록신鹿臣이며, 대무신제大武神帝의 별자別子1)이다. 친모는 갈사曷思태후라 하는데, 그 부친은 해소解素로 유화柳花부인이 낳은 금와金蛙의 아들이다. 성품은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어진 이를 좋아하였고, 선서仙書를 읽고 의약醫藥에 통달하였으며, 용병用兵에도 능하였다. 말솜씨도 좋았으나 항상 아는 것이 없는 듯 말이 적고 태연하였으며, 동복형인 호동好童이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음을 슬퍼하였다. 민중제閔中帝가 죽고, 나라사람國人2)들이 그를 보위에 세우려 하매, 고사하며 말하기를 “적자嫡子가 있고, 서자庶子가 감히 맡을 자리가 아니오.”라 하고서 어머니를 모시고 피해서 달아났더니, 모본慕本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서 선왕仙王을 봉하였었다. 동부여扶余를 평정함에 공이 있었다. 모본慕本이 시해되어, 마락麻樂 등이 그를 맞아들이매, 동도東都 신궁神宮에서 즉위하고, 널리 사면하고, 년호를 바꿔 신명神明이라 하였다.
1) 正后所生이 아닌 아들이란 뜻이나, 諸侯의 庶子 또는 正室의 次男以下를 뜻하기도.
2) 國人은 다스리는 사람들 즉 國士이지 오늘 날의 國民 또는 通常의 百姓이 아니다.
○元年癸酉,冬十二月,以麻勁為大芻加淹淲公,松宝太輔,烏希左輔,羽真右輔,麻楽主兵大加大注簿,松豆智中畏大夫,穆卓達賈左右将軍.以葦花芦花為皇后,麻氏羽氏為副后.葦花,好童女也.芦花,王文女也,曷思太后之弟也.麻勁女羽真女皆慕本后也.因太輔之請,皆納後宮. 以慕本子翊為太子. 皐林使八阪比邪来朝.
○[신명]원년계유(CE73), 겨울12월, 마경麻勁으로 대추가大芻加3)・엄표공淹淲公을 삼고, 송보松宝로 태보太輔를, 오희烏希로 좌보左輔를, 우진羽眞으로 우보右輔를, 마락麻樂으로 주병대가主兵大加・대주부大注簿를, 송두지松豆智로 중외대부中畏大夫를, 목탁穆卓과 달가達賈로 좌・우 장군将軍을 삼았다. 위화葦花와 호화芦花로 황후를 삼고, 마麻씨와 우羽씨로 부후를 삼았다. 위화는 호동好童의 딸이고, 호화는 갈사曷思태후 남동생 왕문王文4)의 딸이다. 마경의 딸과 우진의 딸 모두는 모본慕本의 후였는데, 태보의 부탁으로 인하여 후궁이 되었다. 모본慕本의 아들 익翊을 태자5)로 삼았다. 고림皐林6)이 팔판비사八阪比邪를 시켜 래조하였다.
3) 帝王의 아래이고 太輔의 上位인 爵位인 듯.
4) 東夫余의 太師
5) 神明仙帝 아들로 삼았다는 뜻임.
6) 匈奴의 涿邪山 皐林 땅에 있던 溫禺犢王
○二年甲戌,正月,立宮太子為東宮,與芦花皇后,習政事.是年,七歲,能知大體,事多得中. 八月,濟侵羅邊. 十月,朱那反. 漢攻西域車師7),破之.
○[신명]2년갑술(CE74), 정월, 궁宮태자를 동궁으로 세우매, 호화芦花황후와 함께 정사를 익혔다. 그해 일곱 살이었는데8), 능히 정사의 큰 틀大體을 깨달아서 정사에 적중함이 많았다. 8월, 백제濟가 신라羅변방을 침략하였다. 10월, 주나朱那9)가 반란하였다. 한漢이 서역西域의 거수車師국들을 쳐서 깨뜨렸다.
7) 車師는 車帥의 誤寫일 듯. 神明3年 條의 記錄 역시!
8) ☞神明仙帝의 嫡子 宮은 CE68年生이다.
9) 東夫余屬國으로 藻那의 隣近인가?
○三年乙亥,三月,開仙院,以尙仁為師.仁能通漢音及字,以畵敎人,人皆仰之如神. 羅,飢賑.十月,濟奪蛙山. 平朱那. 八月,漢主昜死,年四十八,号明帝.子烜10)立,年十八.車帥復反.
○[신명]3년을해(CE75), 3월, 선원仙院을 열고, 상인尙仁을 스승師으로 삼았다. 상인仁이 한자漢字를 읽기와 쓰기에 능통하여, 그려가면서 사람들을 가르쳤더니, 사람들 모두가 상인仁을 신神처럼 추앙하였다. 신라羅가 기근이 들어 구휼하자, 10월에 백제濟가 와산蛙山을 빼앗았다. 주나朱那를 평정되었다. 8월에 한漢에선 임금 양昜11)이 죽었으니, 48살이고, 호号를 명제明帝라 하였다. 아들 훤烜이 보위에 올랐으니, 18살이다. 거수車帥들이 다시금 반란하였다.
10) 炟로 筆寫되었지만, 烜으로 바로잡는다.
11) 劉陽 則 劉莊.
○四年丙子,十月,東沃沮反,討平之. 九月,羅復蛙山.
○[신명]4년병자(CE76), 10월, 동옥저東沃沮12)땅에서 반란이 있어, 토벌・평정하였다. 9월에 신라羅가 와산蛙山을 되찾았다.
12) 어디쯤? 河北省 低地帶 一圓이었던 沃沮故地의 동쪽?
○五年丁丑,二月,松宝薨,烏希太輔,羽真左輔,高敬右輔. 八月,羅吉門與加耶戦于黃山津口,穫千餘級,為海飡. 十月,扶余献三角鹿長尾兎以為太后瑞,大赦. 至月,雪三尺.
○[신명]5년정축(CE77), 2월, 송보松宝가 죽어서, 오희烏希가 태보를, 우진羽眞이 좌보를, 고경高敬이 우보로 되었다. 8월, 신라羅의 길문吉門이 가야加와 황산진黃山津 입구口에서 싸워서 천여 급을 베었고, 해찬海飡이 되었다13). 10월, 동부여扶余가 뿔이 셋인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쳐서 태후14)의 경사15)를 위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었다. 11월至月, 눈이 내려서 3척이나 쌓였다.
13) ☞ 加耶를 南方으로 밀어내었나?
14) 曷思太后는 王文의 손위누이로 東夫余가 出生地임.
15) 이 해에 曷思太后가 還甲이었으니, 回甲宴 祝賀膳物이었던 듯.
○十年壬午,正月,設五部仙院,雖執戟之士亦授仙道.以仙師尙仁為海山高士,以摠仙政.以寡慾(愼食色權)靜黙(不動不言)合天(窮理自知)為其仙要. 羅勧農桑整兵仗. 麻后生女芸. 復烏氏為太后.
○[신명]10년임오(CE82), 정월, 5부五部에 선원仙院을 두니, 갈래창戟을 잡던 무사士들이라 할지라도 역시 선도仙道를 전수하였다. 선사仙師 상인尙仁을 해산고사海山高士로 삼아 선정仙政을 총괄하니, 과욕寡慾(음식・색정・권력을 삼가기)・정묵靜黙(움직이거나 말하지 않기)・합천合天(이치를 헤아려서 스스로를 깨우치기)을 선仙의 요체로 삼았다. 신라羅가 농사와 뽕 기르길 권장하고 병장기를 정비하였다16). 마麻후가 딸 운芸을 낳았다. 오烏씨를 태후로 복위시켰다.
16) ☞富國强兵策
○十四年乙酉,五月,築南蘇城. 麻后[生]17)子邯. 羅濟相爭.
○[신명]14년을유(CE86), 5월, 남소성南蘇城18)을 쌓았다19). 마麻후가 아들 감邯을 낳았다. 신라羅와 백제濟가 서로 싸웠다.
17) 筆寫 時에 “生"字를 빠뜨린 듯
18) 勾茶古都, 南垂?
19) 慕本帝 시절엔 西方通路의 戰略要衝인 南蘇의 관리가 아마도 소홀하였던 듯.
○十六年丁亥,正月,命尙仁修三代鏡. 烏希薨,羽真太輔,高敬左輔,乙祥右輔,乙景主兵大加. 羅築加召馬頭二城.
○[신명]16년정해(CE88), 정월, 상인尙仁에게 명하여 3대경三代鏡20)을 수찬하였다. 오희烏希가 죽어서, 우진羽眞을 태보, 고경高敬을 좌보, 을상乙祥을 우보, 을경乙景을 주병대가로 삼았다. 신라羅가 가소加召와 마두馬頭 두 성을 쌓았다.
20) 芻牟鏡・光明鏡・大武鏡 즉, 3代의 歷史書.
○二十一年癸巳,四月,巡視五部,選民俊才敎以道德六藝,禁民崇尙淫乱賣子賣妻. 羽真薨,高敬乙祥陞,拜扶謙右輔,高英主宮. 羅,允良伊飡,啓其海飡. 濟,橫岳大石一時墜落.
○[신명]21년계사(CE93), 4월, 5부五部를 순시하며 민간의 준재俊才들을 뽑아서 도덕道德과 6례六藝21)를 가르치고, 민간들이 음란淫亂함을 숭상하거나 자식과 처첩을 파는 것을 금하였다. 우진羽眞이 죽어서, 고경高敬과 을상乙祥을 승차시키고, 부겸扶謙에게 우보를 주고, 고영高英을 주궁主宮대가로 삼았다. 신라羅가 윤량允良으로 이찬伊飡을 계기啓其로 해찬海飡을 삼았다. 백제濟에선 횡악橫岳22)에서 큰 돌들이 일시에 추락하였다23).
21) 禮・樂・射・御・書・數
22) 橫山? 어디쯤?
23) 지진? 산사태?
○二十二年甲午,二月,乙祥薨,扶謙左輔,乙景右輔. 羅吉元與加戦于馬頭城,大捷. 烏太后崩,葬于閔中陵,年八十.
○[신명]22년갑오(CE94), 2월, 을상乙祥이 죽어서, 부겸扶謙을 좌보로, 을경乙景을 우보로 삼았다. 신라羅의 길원吉元이 가야加와 마두성馬頭城에서 싸워서 크게 이겼다. 오烏태후가 죽어서 민중閔中의 릉침陵에 장사하였으니, 나이 여든이었다.
○二十四年丙申,七月,曷思太后崩,春秋七十七.上减食遠色,葬于大武獸林陵.七日,仙人會者万数. 羅加召城主長世與加耶戦死. 紫蒙主射旭殂,弟射満立.
○[신명]24년병오(CE96), 7월, 갈사曷思태후가 죽었다. 춘추 일흔 일곱이었다. 상이 감식하며 색을 멀리하였고, 대무수림릉大武獸林陵24)에 장사하였다. 이렛날25), 모여든 선인仙人들의 수효가 만 쯤 되었다.
신라新羅의 가소성주加召城主 장세長世가 가야加耶와 싸우다가 죽었다. 자몽紫蒙26) 임금 사욱射旭이 죽고, 동생 사만射滿이 보위에 올랐다.
24) 大武神帝의 獸林陵原
25) 칠월 칠석 날. 또는, 7일 동안에
26) 卑离國. 北魏의 祖上國
○二十五年丁酉,正月,詔曰“御園長尾兎三角鹿,似是年久之物能知人意,况民年久者豈無可師者.其令中外年老有識者敎其所長於隣里,以為文字以記之.” 加耶與羅修和. 濟有二龍見於漢水,云. 旭子鷄山殺満而自立,應黙奔漠北.
○[신명]25년정유(CE97), 정월, 조서를 내려 이르길 “어원御園의 장미토長尾兎와 삼각록三角鹿도 이처럼 나이가 들면 능히 사람의 마음을 아는 듯한데, 하물며 민간의 나이 많은 이들이 가르치지 못할 리 없소. 명을 내려서 도성 안팎의 나이 많고 유식한 이들이 그들의 장기長技27)를 인근 동리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것을 문자로 기록하게 하시오."라 하였다. 가야加耶가 신라羅와 화해하였다. 백제濟에선 룡龍28) 둘이 한수漢水29)에 나타났다고 하였다. 사욱射旭의 아들인 계산鷄山이 사만滿30)을 죽이고 보위에 올랐고, 응묵應黙은 막북漠北31)으로 도망쳤다.
27) 남달리 뛰어난 재주.
28) 용오름? 龍骨族貴人?
29) 黃河 下流之境?
30) 射旭之弟.
31) (고비)사막의 북쪽
○二十六年戊戌,三月,上東巡至柵城西罽山,穫白鹿入城,宴父老守吏有道之士,賜物段有差,紀功于大岩,十月還.是行,上遠至東海谷,望日岺壮観湖,受藻那朱那貫那之貢.諸島酋之献白熊膃肭者亦多. 以穆卓為沸流沛者.卓,東明功臣黙居之女孫也,鎭扶余之乱而有功. 鸞集于西都王庭,命有司祭之.
○[신명]26년무술(CE98), 3월, 상이 동쪽을 순행하여 책성柵城 서계산西罽山으로 가서 흰 사슴을 잡아가지고 성으로 들어가서, 부로父老들과 수자리관리守吏 및 도리道理를 아는 인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차등을 두어서 재물과 육포를 하사하였으며, 그들의 공적을 커다란 바위에 새겨주고서, 10월에 (순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금번 순행에서 상은 멀리 동해곡東海谷32)까지 행차하여, 해 뜨는 고개(산)들과 장관壯觀인 호수湖들을 구경하였고, 조나藻那33)・주나朱那・관나貫那의 공물을 받았는데, 여러 섬34)의 추장들이 바친 흰곰과 올눌膃肭35)이란 것 역시 많았다. 목탁穆卓을 비류패자沸流沛者로 삼았다. 목탁卓은 동명공신東明功臣 묵거黙居의 외손자女孫36)로 부여扶余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이 있었다. 란새가 서도西都의 궁중 뜰에 모여들어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란새들을 제사하였다.
32) 黑龍江 下流 平原之境?
33) 옛 동부여 동쪽의 侯國..
34) 北海島를 包含한 듯.
35) 韓藥材의 一種인 海狗腎
36) 딸이 출가하여 낳은 孫子 즉 外孫子
○二十九年辛丑,二月,髙敬薨,扶謙太輔,乙景左輔,禾玄右輔. 羅移月城,周千二十三步云.
○[신명]29년신축(CE101), 2월, 고경高敬이 죽어서, 부겸扶謙을 태보로, 을경乙景을 좌보로, 화현禾玄을 우보로 삼았다. 신라羅가 월성月城으로[을] 옮겼다. ‘월성의 둘레가 1,023보’라 하였다37).
37) 三國史記,新羅本紀曰“娑尼師今,二十一年,冬十月,京都地震,倒民屋,有死者.二十二年,春二月,築城名月城.秋七月,王移居月城"☞都城의 크기로 보아 新羅는 아직 小國이다.
○三十年壬寅,正月,以髙朱利為東海谷太守,使鎭北海及島酋.朱利,髙娄之孫也,質重,似愚而內明.上以東海谷為可守而設官,遠無欲去,朱利自請徃之,人皆危之. 八月,遣使朴者于[柵城]38)賑民.失農者,給牛羊而勧蓄. 十月,行東明大祭.扶余姬子八人呈舞,神馬五十匹犍于巨婁原. 是年八月,音汁伐國[興]39),與悉直谷國爭彊.羅,召首露决之而還,使六部餞之.韓祇獨以位卑者待之,他皆伊飡待之.首露奴耽下里殺韓祇守保齊而逃依于音汁伐主他鄒干家.索之,不送故,羅遂伐音汁伐國滅之40). 是年,羅又使居道滅悉直押督.先是,羅使居道牧馬於張吐之野,使兵士騎馳戱楽,以為常事,二國在傍見之而不怪曰‘馬叔之年例.’至是,其兵士遂襲二國,云.
○[신명]30년임인(CE102), 정월, 고주리高朱利를 동해곡東海谷41)태수로 삼아 북해北海 및 섬島들의 추장酋들을 억누르게 하였다42). 고주리朱利는 고루高婁의 손자로 바탕이 묵직하여서 바보스러워 보였어도 속은 명철하였다. 상이 동해곡을 지켜야겠기에 관직을 만들었지만, 멀다고 가려는 이들이 없어서, 고주리朱利가 자청해서 간 것이라. 남들은 모두가 그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다. 8월, 박朴이라는 사람을 [책성柵城43)]으로 보내서 백성들을 진휼하고, 농지를 잃은 이들에겐 소와 양을 나눠줘서 키우게 하였다. 10월, 동명대제東明大祭를 지냈다. 부여扶余여인들이 낳은 사내아이 여덟이 춤사위를 바쳤고, 신마神馬 50필을 거루원巨婁原에서 거세하였다. 이해 8월, 음즙벌국音汁伐國이 흥성하여 실직곡국悉直谷國과 강역을 다투어서, 신라羅가 수로首露를 불러 (수로가 이 일을) 처결한 후 돌아가게 되자, 6부들을 시켜서 전별餞別하게 하였는데, 한기韓祇부 홀로 지위가 낮은 이로써 그를 접대하고 다른 부들은 모두 이찬伊飡들로써 그를 접대하였다. 수로의 노복 탐하리耽下里가 한기韓祇부의 수자리관리44) 보제保齊를 죽이고서 도망하여 음즙벌국音汁伐國 임금 타추간他鄒干 집에 의탁하여, 샅샅이 뒤져도 내주지 않음에, 신라羅가 이에 음즙벌국을 쳐서 없애버렸다. 이해에 신라羅가 또 거도居道를 시켜서 실직悉直곡국과 압독押督국을 쳐서 없앴다. 이에 앞서, 신라羅가 거도居道로 하여금 장토張吐벌에서 말을 키우게 하매, 병사들로 하여 말달리는 놀이를 하여 일상사가 되었음에, 이웃한 두 나라는 이를 보고서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며 이르기를 ‘말을 모으는 연례행사야.[또는, 말을 키우는 아재비들의 연례행사야. 또는, 마한 아재비들의 연례행사야]’라고 하였으며, 이리 되었음에, 그 병사들이 두 나라를 습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38) 編年에 차이가 좀 있으나 同一한 史實로 보이는 기록인 三國史記高句麗本紀大祖大王五十年條의 기록에 「遣使安撫柵城.������라 하였음을 보아 柵城이 筆寫에서 漏落된 것으로 보아 文脈上 必要에 따라 揷入하여 번역한다.
39) 필사본에서 연이은 두 ‘與’자 중에 앞의 것은 ‘興’자를 誤寫한 것으로 본다.
40) 三國史記,新羅本紀,婆娑尼師今.二十三年秋八月條記錄에는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王難之,謂金官國首露王年老多智識,召問之.首露立議,以所爭之地屬音汁伐國.於是,王命六部會饗首露王.五部皆以伊飡爲主,唯漢祇部以位卑者主之.首露怒,命奴耽下里殺漢祇部主保齊而歸.奴逃依音汁伐主陁鄒干家.王使人索其奴,陁鄒不送.王怒以兵伐音汁伐國,其主與衆自降.悉直押督二國王來降.������라 하여, 위의 神明仙帝紀가 좀 더 略述된 것으로 본다.
41) 昨今 黑龍江下流의 平原之境
42) ☞작금의 러시아 역사학자들이 흑룡강(아무르강) 하류 동편이자 사할린・홋카이도 서편의 海岸山地들에서 발견되는 山城들을 高句麗山城으로 추정되는 根源일 것.
43) 이미 大武神帝 시절에 征討하여 高句麗의 局地로 편입한 東扶余古都
44) 部의 高位官吏 伊飡이 아닌 낮은 職位의 太守 쯤?
○三十二年甲辰,正月,扶謙薨.乙景太輔,禾玄左輔,尙仁右輔. 三月,麻皇后崩,春秋六十二.后以勁之女,忠直好善.初為慕本后,生子翊及典公主宋公主馬公主,而以直諫,見廢.上卽位之初,納之為副后.以年高而有德,諸后皆敬之以兄.豊富而善産,生上七子二女皆賢.上以是益賢之,封為第三皇后. 羅與悉直相戦.
射満子應黙立國於漠北,遣子[梪]45)功,献駝五匹.
○[신명]32년갑진(CE104), 정월, 부겸扶謙이 죽어서, 을경乙景을 태보로, 화현禾玄을 좌보로, 상인尙仁을 우보로 삼았다. 3월, 마麻황후가 죽었다. 춘추 예순 둘이었고, 마경勁의 딸로, 충직하였고 선한 것을 좋아했다. 애초 모본慕本의 후后가 되어 익翊태자와 전典공주・송宋공주・마馬공주를 낳았으며, 직간하다가 폐위되었고, 금상이 즉위 초에 거둬서 부후副后로 삼았다.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어서 여러 후들이 형으로 존경했다. 몸이 풍만하고 여유가 있어 아이를 잘 낳아서, 상의 7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가 현명하였다. 상이 이로써 마황후를 점차 현숙하다고 여기더니 셋째 황후로 봉하였다. 신라羅와 실직悉直곡국이 서로 싸웠다46). 사만射滿의 아들 응묵應黙이 막북漠北땅에 나라47)를 세우고, 아들 두공梪功을 보내서 낙타 다섯 필을 바쳤다48).
45) ‘梪’字는 필사본에 ‘上木下豆’이나 해당하는 모양의 글자가 없어 ‘左木右豆’로 대체함.
46) 두 해 전에 이미 新羅에게 滅亡당한 悉直谷國故地 遊民들과의 싸움인가?
47) 拓拔氏卑离國으로 後世의 代國과 北魏의 祖上國일 것.
48) ☞신명25년조 기록 참조.
○三十三年乙巳,正月,扶余献丈二黃虎丈一白熊,毛色甚明無尾.使御苑大牡虎字之,以取種. 三月,鎭北將軍麻楽重修盖馬諸城,率貊騎伐遼東,取白岩長岺菟城汶城章武屯有等六城.漢人大驚慌忙,以耿夔為守而來戦.宮太子與使者穆度婁,率輕騎深入敵陣,左右衝突而大破之. 羅濟復和.
○[신명]33년을사(AD105), 정월, 부여扶余가 두 길 되는 누런 호랑이와 한 길 되는 흰곰을 바쳤는데, 털색이 밝고 꼬리가 없었다. 어원의 큰 수컷 호랑이로 하여금 새끼를 배게 하여서 종자種子를 받았다49). 3월, 진북장군鎭北將軍 마락麻樂이 개마盖馬50)의 여러 성들을 고쳐 쌓아놓고서, 맥51)기병을 이끌고 요동遼東52)을 쳐서, 백암白岩53)・장령長岺・도성菟城54)・문성[민성]汶城55)・장무章武・둔유屯有56) 등 여섯 성을 빼앗았다. 한漢인들은 크게 놀랍고 황망해 하였으며, 경기耿夔로 수장守將을 삼아서 나와서 싸웠지만, 궁宮태자가 사자 목도루穆度婁와 함께 날랜 기병으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좌충우돌 들이쳐서 크게 깨뜨렸다57). 신라羅와 백제濟가 다시 화친하였다.
49) ☞扶余 땅에서 바친 丈二黃虎는 암컷이고, 東都 御苑에선 호랑이와 곰을 길렀다.
50) 芻牟大帝가 復舊한 北夫余疆域의 一部였던 盖馬故地, 작금의 山西省 西北部 지역.
51) 옛 朝鮮 民族의 一派. 低濕地에 살던 濊族에 比하여 山間地域에 據住하였을 것.
52) 山西省 東南部 遼中一圓의 東方地域으로 대략 淸漳河以東 또는 沁水以東 一帶의 地域; 光明大帝 그 以後로 後漢에게 占領당한 것으로 여겨짐. 古代의 遼河로 指目되는 河川엔 陝西山西間南流黃河, 山西西部汾水, 山西中部南流沁水 및 淸漳河 등이 있다.
53) 勾茶故地의 黃山 즉 明代의 黃岩山에 對比되는 白岩山 또는 淸代 遼州之境의 箕山 혹은 百花山 혹은 白石山 쯤으로 추정.
54) 소위 漢四郡지역이었다는 玄菟故地의 玄菟城이었을 것.
55) 山西省 武鄕縣 東方 石門鎭城 쯤인 듯
56) 2천 년 이상의 세월을 거의 동일한 지역에 있었음. 屯留는 우리 기록의 屯有라.
57) 이 遼東六城 復舊事件으로 因하여 後漢이 당시의 高句麗 임금을 宮으로 誤解한 듯.
○三十四年丙午,正月,白岩太守鄭元與耿夔戦于章武,失利.宮太子親征復之,以松豆智為遼東太守. 左輔禾玄薨,尙仁代之,麻楽右輔. 羅賑押督,而命馬頭城主,伐加耶.
○[신명]34년병오(CE106), 정월에 백암태수白岩太守 정원鄭元이 경기耿夔58)와 장무章武59)에서 싸웠는데 불리하매, 궁宮태자60)가 친히 쳐서 되찾고 송두지松豆智를 요동태수遼東太守로 삼았다. 좌보 화현禾玄이 죽어서, 상인尙仁이 그를 대신하고, 마락麻樂이 우보를 하였다. 신라羅가 압독押督을 진휼하고, 마두성주馬頭城主에게 명하여 가야加耶를 쳤다.
58) 後漢의 遼東太守.
59) 漳水之武鄕?
60) 後爲太祖皇帝. 神明仙帝 卽位 初부터 이미 母后와 함께 高句麗를 統治하였다
○三十五年丁未,七月,乙景薨,尙仁代之,髙德左輔. 九月,獵質陽,獲紫獐雌雄,育之.
○[신명]35년정미(CE107), 7월, 을경乙景이 죽어, 상인尙仁이 그를 대신하고, 고덕高德이 좌보를 하였다. 9월, 질양質陽62)에서 사냥하여 자색 노루 한 쌍을 잡아서, 이를 길렀다.
62) 質山南地, 山西省 西北邊 以北.
○三十七年乙酉,三月,麻楽伐右北平,虜生口二千經[籍]63)之士七人而敀. 羅幷比只多伐草八三國. 秋,飢,賑民. 末曷掠濟牛谷. 七月,漢使張吉來,献檀香及道德,言請和.
○[신명]37년을유(CE109), 3월, 마락麻樂이 우북평右北平64)을 쳐서 생구 2천과 경적지사經籍之士 일곱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신라羅가 비지比只・다벌多伐・초팔草八 세 나라를 병합하였다. 가을, 기근이 들어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말갈末曷이 백제濟의 우곡牛谷65)성을 노략하였다. 7월, 후한漢사신 장길張吉이 찾아와서 단향檀香과 도덕道德경을 바치고, 화친하길 말로써 청하였다66).
63) 筆寫本에 글자 하나가 채워져야 함만을 표시하였는데, 흔히 쓰이는 經籍之士라.
64) 山西省 霍太山東北隣 漢北平鎭이 곧 高句麗 右北平이라.
65) 당시 伯濟(百濟)의 北邊임.
66) ☞ 작금 河南省 洛陽之境에 都城을 둔 後漢이 매우 다급하였으니, 신명33-34년간의 기록을 後漢이 다급한 情況이 되도록 解說해야 的確할 것이라.
○三十九年辛亥,二月,松豆智與漢約和定彊,有失.上怒配豆智于沸流. 三月,置大薬肖門孝經等院,敎民本草造象孝道. 命麻楽伐漢. 四月,尙仁病退,高德代之,麻楽左輔,羽靖右輔.好万中畏大夫,葦皇后弟也.
○[신명]39년신해(CE111), 2월, 송두지松豆智가 한漢과 화친을 약속하고 국경을 정함에 잃은 것이 있었더니67), 상이 노하여 송두지豆智를 비류沸流땅에 유배流配하였다. 3월, 대약원大藥院・초문원肖門院・효경원孝經院 등 학원을 두어 민간에 본초本草와 상象 만들기 및 효도孝道를 가르쳤다. 마락麻樂에게 명하여 한漢을 쳤다68). 4월, 상인尙仁이 병들어 물러나서, 고덕高德으로 그를 대신하고, 마락을 좌보로, 우정羽靖을 우보로 하였으며, 호만好万을 중외대부로 삼았으니 위葦황후의 남동생이다.
67) ☞ 三國史記엔 태조59년(CE111)기록 본문엔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군에 속하길 요청했다."고 변조되어 있다.
68) ☞ 三國史記 태조59년(CE111)기록엔 通鑑의 기록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되어있다. 이해의 기록들이 金富寔의 曲筆이라면 그자의 學識이 바르지 않았음이고, 後世의 李朝나 日帝의 捏造라면 三國史記는 그야말로 僞書요 虛構의 正史이라.
○四十年壬子,二月,羽靖薨,好万右輔. 五月,上幸海山.禅位于宮太子,自為海山仙皇緫執內外仙政,以尙仁髙德左右太師,好万為仙相,葦皇后羽皇后為左右仙后,以芦后為摂政太后.於是,軍國之政緫敀於太子,卽位於西都鸞臺.
○[신명]40년임자(CE112), 2월, 우정羽靖이 죽어서, 호만好万을 우보로 삼았다. 5월, 상이 해산海山69)으로 거둥하였다. 궁宮태자에게 선위하고, 자신은 해산선황海山仙皇이 되어 내외선정內外仙政을 총괄하고, 상인尙仁과 고덕高德으로 좌태사左太師・우태사右太師를, 호만好万으로 선상仙相을, 위葦황후와 우羽황후로 좌선후左仙后・우선후右仙后를, 호芦후로 섭정태후摂政太后를 삼았다. 이에, 군국정사軍國之政 모두가 태자에게 돌아가매, (태자가) 서도西都 란대鸞臺에서 즉위하였다.
69) 海山의 所在는 北夫余의 最西南端이었던 荇人故地, 芻牟鏡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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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년이 잘못된 서토사서를 베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고 해설하는 것은 또다른 역사왜곡일 것이라...
잘 정리하셨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조선 1512년에 뜯어 고쳐졌지요. 삼국유사 발문에 그리 적혀 있습니다. 행간의 글을 앍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조선의 사관들이 후손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후세의 학자들이 세상의 이치를 이해해서 동방의 역사를 길이 전해줄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그러니 비밀코드가 '삼국사기'에 심겨있어야 하겠지요. 후손들이 아둔해서 그 코드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바로 우리들 탓이지요. 그런데 코드가 풀렸습니다. '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곧 출간 예정. 하하하...
[수정할 곳]
(1) 帝, 諱<再思>, ... 非庶子之所勘當也. -> 非庶子之所敢當也, 서자庶子가 감당할 자리가 아니오 -> 서자가 감히 맡을만한 자리가 아니오
(2) 동복형인 <호동{好童}>이 명령 없이 죽었음을 슬퍼하였다. -> 동복형인 <호동{好童}>이 비명{非命;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목숨}에 죽은 것을 슬퍼하였다.
(3) 二年甲戌,正月 ... 與芦皇后 -> 芦花皇后, 호芦황후 -> 호화芦花황후
(4) 五年丁丑, ... 八月, ... 獲千餘級 ->穫千餘級
(5) 二十六年戊戌,三月 ... 獲白鹿 ... 賜物暇有差-> 穫白鹿 ... 賜物段有差
(6) 三十二年甲辰, 三月, ... 以年高,以有德 -> 以年高,而有德
(7) [신명]33년을사(AD105)을사 -> [신명]33년을사(AD105)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