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9년 성산중학교 재직중에 쓴 글입니다.**
교육부의 교원 금강산 연수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크게 환영했었지만 설마 내가 연수 대상에 지명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그런데 지난 7월 교원 금강산 연수단에 내가 지명되었다는 공문을 받고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에 민여인 억류사건과 서해교전 사태가 발생하여 남북관계의 냉기류가 생기고 금강산 여행도 중단되게 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매우 실망하였다. 그러나 곧 금강산 여행이 재개되어 교원 금강산 연수도 계획대로 실시하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접었던 금강산 꿈은 다시 펼쳐지고 금강산이 다시 현실 속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드디어 정해진 날짜가 다가오고 부푼 마음으로 동해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친 후 금강산 여행증을 목에 걸고 나니 ‘내가 정말 금강산을 가게 되는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외국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내 나라 내 땅에 가는데, 왜 이런 출국 절차가 필요할까?’ 통일의 당위성을 다시 한번 반추해 보게 된다. 오후 4시경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며 금강산 유람선 풍악호에 승선을 하여 정해진 435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선실은 붙박이 침대가 두 개 놓인 2평 남짓한 조그만 2인실 이었으나 각종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짐을 정리하는 동안에 3박 4일 동안 동숙 할 경주 서라벌중학교 김교사가 들어왔다. 우리 둘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선실을 나와 갑판 위로 나갔다. 유람선은 이미 동해항을 출항하여 공해를 향하고 있었으며 우리는 멀리 사라져 가는 동해항을 말없이 바라보면서 생전 처음 타보는 유람선의 호화로움에 취해 있었다. 잠시 후 저녁식사를 마친 후 선상세미나에 참석하여 교육부 차관님과 통일부 관계자로부터 미래 교육의 방향과 우리의 통일정책에 대한 강연을 들은 후 금강산 연수의 첫날밤을 선실에서 보냈다.
이튿날 눈을 떠보니 유람선은 북한땅 장전항에 정박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북한의 산하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아름다운 산, 바다, 항구 모두가 내 강토, 내 강산 그대로였다. 그러나 저 멀리 뿌연 잿빛의 낡은 건물들 곳곳에 설치한 포대와 군사시설은 분단된 현실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아침 식사 후 안내원의 주의사항에 우리들은 다소 긴장했으나 곧 마음의 안정을 회복했다. 작은 배로 갈아타고 육지에 도착하여 북한땅을 처음 밟는 순간 이곳이 북한땅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았으나 북한측 출입국 관리소를 지나서 곳곳에 배치한 감시원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이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사회주의 국가 북한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전항에서 소형버스를 갈아타고 금강산 입구 온정리로 향하는 길은 주변에 철책으로 막아 북한군이 일정한 간격으로 감시병을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으나 TV나 연수 등을 통해 북한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서인지 우리들은 별로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기한(?) 북한땅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안내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작은 체구의 북한군 초병의 앳된 모습과 굳어버린 그 무표정한 얼굴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 순간 나의 마음도 함께 납덩이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차츰 주변의 산천, 논밭, 집단주택, 초라한 농부의 작업광경 등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아! ‘죽음의 땅 북한’ ‘북한 정권은 이미 망했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추수를 앞둔 논밭의 농작물은 작황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흉작이었다. 공산주의의 비효율성의 표본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어느 듯 우리를 태운 버스는 금강산 입구 마을 온정리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금강산, 꿈속에서 그려본 금강산, 백두대간을 이루는 태백산맥의 북부에 솟아있는 세계적인 명승지인 금강산을 눈앞에 펼쳐보니 산세의 수려함과 오묘한 천연미의 극치에 압도되고 매료되어 잠시 전까지 진한 동포애로 연민하던 속세의 상념은 아스라이 사라지고 환희와 감동 속에 빠져들었다. 산행이 시작되자 곳곳에 북한측의 안내원이 배치되어 있었고, 민여인 억류 사건 후 남측은 경직되고, 북측은 다소 완화되었다던 우리 안내원의 말대로 북한측 안내원은 “어느 배로 왔냐”고 먼저 말을 건냈다. 풍악호로 왔다고 대답하자 잠시 쉬어가라고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네 드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금방 우리 일행에게 금강산 자랑을 하였다. "금강산은 예로부터 금강석에 견주어 금강산이라 불렀으며, 금강산의 절경은 특수 지질구조에 따른 것으로 산 전체가 대부분 화강암과 섬록암으로 오랜 풍화와 침식으로 천태만상의 예봉, 계곡, 기암 절벽이 군집하는 산세를 이루었다고 말하며 금강산을 보지 않고서는 천하의 명산을 말하지 말라"고 자랑이 대단했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금강, 봉래, 풍악, 계골의 이름으로 불린 연유도 자세히 일러주었다.
안내원을 뒤로 한 채 만물상의 절경을 쳐다보며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니 아름다운 능선과 멀리 푸른 동해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만물상의 기암괴석은 보는 이의 마음가짐에 따라 천태만상의 기기묘묘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선상에서 이틀 밤을 보낸 우리들은 다음 날도 예정된 구룡연 코스를 답사했다. 이날 아침은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우의를 지급 받고 출발했으나 막상 산행이 시작되니 날씨가 맑아졌다. 만물상 코스가 산악미의 극치라면 구룡연 코스는 계곡미의 극치하고 할 수 있었다. 어제의 만물상 코스 보다 거리는 멀었으나 경사가 완만하여 산행하기는 편했다.
우리 나라 3대 폭포 중의 하나인 구룡폭포 앞에 서니 50년 동안 막혔던 분단의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 높이 73m의 절벽에서 쏟아지는 웅장한 구룡폭포, 그 밑에 13개의 구룡연이 있고 화강암 절벽 위에는 구룡대가 있고 그 아래 8선녀가 목욕을 했다는 상팔담을 굽어보니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듯 착각을 일으켰다. 어제 북한측 안내원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짧은 일정이라 금강산의 전모를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해금강, 표훈사 등 못다본 명승지는 통일 후로 미룬 채 평양 모란봉 교예단(서커스)의 공연을 보기위해 온정리를 향하여 발길을 재촉했다. 25달러의 관람료가 아깝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과연 북한의 서커스 수준은 세계적이었다. 묘기가 백출할 때 마다 우리들은 산행의 피곤함도 잊은 채 환희와 박수갈채를 보냈고 진한 동포애를 함께 느꼈다. 유람선의 마지막 밤을 마감하면서 그 동안 친해진 몇 분의 동료 교사들과 뒷풀이 겸 선상좌담을 하면서 아름다운 금강산의 풍광을 본 후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이 많았다는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북한의 참담한 실상에 대한 연민이었고, 그 아름다운 금강산이 김일성 부자의 선전 문구로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연수단을 슬프게 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3박 4일간 북녘 땅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우리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한 정당성을 학생들에게 올바르게 알리고 통일정책에 대한 지식을 체계화하여 일선 교단에서 당당하고 자신 있게 학생들의 통일교육에 앞장서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