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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4일 아산 UBF 주일메시지(부활절 말씀)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누가복음 7:1-17
요절/누가복음 7: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권위는 창조주의 권위이며 부활의 주, 생명의 주인의 권위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듣고 부활의 주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굳게 믿고 의지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 말씀만 하사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자 유대인들의 장로 몇 사람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문제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로들은 로마 백부장의 부탁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백부장은 로마군 백인대의 리더입니다. 보통 15년의 군경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시는 티베리우스가 로마제국의 황제였습니다. 그 시대는 대규모 정복전쟁이 없었습니다. 전쟁 없는 시대 군인들은 폭력을 일삼고 힘없는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합법적인 폭력집단의 일선 지휘관이 백부장입니다. 로마군 백부장이 다른 백부장들과 달리 예수님께 장로들을 보냈습니다. 그의 종 때문이었습니다. 백부장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치유 소문을 들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자기 집에 오셔서 그 병든 종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부탁을 하러 온 장로들은 이 백부장이 경건한 사람이며 유대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왔다고 보증 하면서 은혜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로마 역사를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은 치명적인 병에 걸렸을 경우 가족 친지 친구조차 길거리에 내놓고 방치하였습니다. 중한 병에 걸린 사람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길거리에서 죽어갔습니다. 하물며 종은 주인의 육체노동을 대신하거나 주인에게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여야 존재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종이 병 들어 육체노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익을 제공할 수도 없습니다. 가족도 병 들면 버리는 시대인데 병든 종은 버려져 굶주림과 질병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하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이 종의 주인은 달랐습니다. 백부장은 군인으로써 인간성이 황폐한 사람이 되기 쉬웠지만 그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생명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병들어 고통 받는 인생에 대한 긍휼이 있었습니다. 그는 생명을 이용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사람을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제가 젊은 날 아름다운 많은 것을 많이 보았으나, 못 볼 것도 본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자기영광의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손님이 오는데 학생들이 적어 부끄럽다고 학생들 데려와서 자리를 채워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았습니다. 센터나 요회 사람 숫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집요한 시도를 보았습니다. 사람을 자기 영광을 위하여 동원할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짓을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이런 짓은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본국의 물질지원을 받는 해외에서는 본국에서 손님 온다고 하면 사람 모두 끌어 모아 활발하게 무슨 큰 일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려 애씁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자기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훌륭하세요’ ‘위대하세요’ 해주는 사람,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긍정적으로 봐줍니다. 말씀 열심히 전하며 인생을 다 바쳐도 ‘나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문제가 없나? 꼬투리 찾아내려고 하다가 악감정에 사로잡혀서 미움과 시기심에 갇혀 버립니다.
사랑과 긍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옛날 한 번 가졌다고 자족할 것이 아니라 계속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사랑했지만, 허물을 보고 난 후 마음에서 밀어낼 수 있습니다. 한때 불쌍히 여겼지만 죄 짓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랑했던 것을 주장하지 말고 지금 딱딱한 마음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예전에 불쌍히 여겼던 것을 내세우지 말고 지금 미워하는 마음 있는 것을 솔직하게 뉘우치고 긍휼의 마음을 갖고자 힘써야 합니다. 사랑과 긍휼은 노력하는 것이지 자연생성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양심이 마비된 자들은 미워하는 마음과 그 시기심 가득한 추악함을 감추고자 옛날 사랑했었다며 자기의 선함을 내세웁니다. 어둠의 세력에 속한 자들은 지금 악감정을 인정하지 않고 예전 불쌍히 여겼다 주장하며 하나님을 속이고 양심을 속이고 사람 앞에서 자기 합리화를 일삼습니다. 그런 추한 모습을 남들은 다 알고보고 있는데 혼자 남을 속일 수 있다 여기며 자기 영혼을 해롭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청하는 백부장의 간절한 기도에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그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백부장 집에 가까이 왔을 때, 다시 백부장 친구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백부장의 친구들은 백부장이 전해드리라 한 말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백부장은 자기 집까지 오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그냥 말씀만 하시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시기만 하여도 하인이 나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를 알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깊이 알고 믿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사회적 지위나 정치적인 관점, 자기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예수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높고 위대하며 존귀하신 분이며 자신은 이방인이요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런 귀하신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며, 그저 말씀만 하시면 하인이 나을 것이니 말씀만 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백부장은 권위에 대하여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존재하고 있는 권위와 그 힘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속한 군대에서 사령관에게는 사령관의 권위가 있습니다. 천부장에게는 천부장의 권위가 있고 백부장에게는 백부장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는 말이 나타냅니다. 권위의 힘은 말의 힘이며 명령으로 표현됩니다. 로마군단장의 명령은 6000명의 절대 복종으로 나타납니다. 천부장의 권위는 600명의 절대 복종으로 실현되고 백부장의 권위는 60명 병사들과 속한 보조병의 절대 복종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세상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하여 말씀의 권위가 미친다는 것을 백부장은 믿었습니다. 공간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질병아 떠나갈지어다!" 하시어도 질병은 떠나가는 것을 백부장은 믿었습니다. "저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었습니다. 백부장은 종 때문에 급하게 예수님께 오시기를 간구하였지만, 자신의 기도가 수정될 것이 있음을 발견하고 얼른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이야 말로 최고의 믿음이라 칭찬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믿음 중에서 최고로 그는 믿음의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만나 본 믿음 중에서 가장 좋은 믿음이라고 하셨으므로 이보다 더 큰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대로 그가 사랑하는 종의 병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2. 청년아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뒤에는 제자들과 무리가 따랐습니다. 나인의 뜻은 ‘아름다움’, ‘기쁨’ 입니다. 기쁨의 성 문에 도착했을 때 성안에서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왔습니다. 죽은 사람은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가족구성원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매우 큰 스트레스 입니다. 과부는 죽음에 의하여 가족구성원과 이별을 이미 경험한 사람입니다. 과부가 되는 과정을 겪고 과부가 된 후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과부는 그동안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사회적 방어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상처까지 거듭하여 받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라난 아들이 위로를 주고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또 죽었습니다. 이 여인은 죽음에 의하여 가장 소중한 것을 모두 잃었습니다. 이 여인을 위하여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같이 울어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보셨습니다. 과부의 아들의 죽음과 함께 하며 슬피 우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14절을 보십시오. 과부에게 “울지 말라” 하신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이 누워있는 관에 손을 대어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유대 장례는 관뚜껑을 열고 매장지로 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에 누워 있는 죽은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을 눕혀놓은 관을 메고 가는 죽음의 행렬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청년에게 “일어 나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성 나인에서 나온 행렬은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죽음에 지배당하여 슬퍼하고 가슴을 찢으며 울부짖는 사람들의 행렬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성에서 사람들과 오순도순 정답게 살지만, 죽음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마는 우리 인생의 본질이 이것입니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갑니다. 죽음은 기쁨, 행복, 소망, 평화 모든 좋은 것을 다 빼앗아 갑니다. 죽음은 누구도 이길 수 없으며, 죽음이 준 슬픔과 고통은 망각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을 보면서 사람들은 나도 죽겠지 절망합니다. 과부의 큰 통곡소리를 들으며 ‘혹시 우리 아들도 죽으며 어쩌나’ 사람들은 죽음이 쏘는 염려와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인생을 삼킬 뿐 아니라 그 강력한 영향력으로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까지 슬픔에 빠지게 하고 염려와 두려움에 빠져 아무 힘을 쓸 수 없게 하며 행복하게 살 소망까지 다 빼앗아 버립니다. 죽음은 가장 강한 것을 우리 인생에게 쏘아 인생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이 행복하게 여기는 것을 다 삼켜버리며, 죽음은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을 비웃으며 인생을 철저한 어둠에 가두어 놓습니다. 세상에 누가 이 어둡고 강한 죽음의 세력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죽음보다 강한 것이 없습니다.
슬퍼하며 통곡하며 몸부림치며 관을 따라가는 이 행렬에는 바로 나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메고 가는 관 속에는 예전에 내가 아끼고 사랑했고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 누워 돌아오지 않은 먼 길로 떠났고 또 나도 그 안에 누워 떠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나의 사랑했던 사람들은 다시 나로 인하여 슬퍼하며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며 통곡할 것입니다.
“울지 말라” 생명의 주 예수님께서 죽음의 행렬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를 멈추게 하시고 “울지 말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쏘는 것에 맞아 쓰러지는 우리들, 죽음의 세력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하는 우리를 해방하러 오셨습니다.
논어 11편 선진편에는 계로가 죽음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살아있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 대답하는 것이 나옵니다. 죽음에 맞서지 않겠다는 것이며 죽음문제에 대한 회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 아래 눌려 슬퍼하는 우리 인생에게 “울지 말라”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관을 메고 가는 행렬을 멈춰 세우십니다.
죽어 관에 누운 청년에게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슬픈 죽음의 행렬을 멈추어 세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죽어서 관에 누운 청년에게 “일어나라”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최대의 원수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주시러 오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시자 죽었던 청년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죽은 청년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미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청년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다시 살아난 아들을 주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아 보셨다고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신 생명의 주님이심을 입증하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다시 나이 들어서 죽었을 것입니다. 이 청년이 다시 살아난 것은 진정한 부활,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5:52,53절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한 번 죽음의 강을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을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것을 통하여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예수 안에서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은 다시 죽는 부활이 아닙니다. 다시 죽지 않는 부활, 다시 썩지 않는 부활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활의 새 몸, 신령한 몸을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다시 살아나 예수님과 같이 신령한 몸으로 살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는 말씀의 권위, 부활의 권위를 가지셨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은 진정한 산 자들이 되었습니다.
로마에는 자주 대규모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 증세가 나타난 사람들을 길에다 내놓았습니다. 작은 증세만 나타나도 환자들은 가족들에 의하여 친구들에 의하여 길에 버려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들의 이기심, 친구들의 이기심, 너 때문에 나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의하여 버려지고 방치된 채 길에서 죽어갔습니다. 고통스럽게 죽은 자들은 시체조차 방치되었고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때,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길에 나가 도처에서 버려진 환자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전염병으로 죽은 자들의 장례까지 치러주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믿음을 충격과 놀라움으로 목격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성도들은 죽음에 전혀 영향 받지 않고 부활의 믿음과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자신들도 다른 성도들에 의하여 장례를 치르는 상황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고 기쁨과 소망으로 담대하게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주 예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며 로마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4세기 중엽 로마황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 전파를 극도로 싫어하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자였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놀랐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물론이며 이교도들 가운데 불쌍한 자들까지 돕는다’며 편지에 썼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의 성도를 세상은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의 모든 세계가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아 기독교 신앙은 급속도로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기독교 전파가 못마땅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성도들이 행하는 장례를 사람들이 보는 낮에 행하지 말고 밤에만 행하라는 칙령을 내려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세상 황제의 권력도 힘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생명은 육체의 생명이 있고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수명을 다하며 끝이 나는 것이며, 영적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써 예수님 안에서는 누구나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주시는 생명으로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며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영적인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 새로운 몸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 안에서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인 생명을 누리지만 우리는 장차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몸을 입고 영원히 주 예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우리의 모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 세워진 모임입니다. 우리센터가 개척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했는지 모릅니다. 저를 조롱하였고, 저의 가족들도 모욕과 멸시를 오래 겪었습니다. 일체 반발하지 않고 참은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 뿐인 양을 빼가려고 하였고 양들이 오기 시작할 때는 각 사람들을 하나하나 뒷조사하였으며, 초창기 헌신하는 자매들을 향해서는 시집가면 다 빼앗길 사람들이라며 조롱하고 이상한 형제들을 데려와 마치 쇼 윈도우 구경시키듯 우리 자매들을 구경시키며 상품취급 하는 일까지 겪었지만 따지지 않고 화내지 않은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떠합니까? 코로나를 겪는 지난 2년 동안 거리두기와 모임금지로 인하여 캠퍼스 모임을 못하는 동안 세 명의 형제들이 어려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에 빠진 사람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형제들을 열 사람이나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인터넷으로 계속 글을 써댔지만,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캐나다 서부와 동부, 프랑스와 카타르와 우크라이나와 과테말라와 아르헨티나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세계선교 센터가 되게 하셨습니다.
최아브라함 선교사가 에밀리 목자와 미국 선교가정을 이루었고 이요셉 목자가 죠세핀 선교사와 또 새로운 선교가정을 이룹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호서대와 나사렛대와 남서울대와 공주대와 코리아텍과 순천향대 개척 뿐 아니라 세계선교 역사를 가장 열심히 섬기는 센터가 되도록 복주셨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찬양 합니다.
계속 예수님 부활을 믿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계속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참고 선을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활신앙으로 일어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청년으로 축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Asan UB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