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 풀 -
아버지 1
- 박문자
이 세상 오실 때
아버지도
목청껏 울며 오셨을까.
4남 1녀의 장남으로
2남 4녀의 아버지로 살며
맘 편히 울어본 적 있을까.
삶의 무게
소리 없이 삼키며
표현까지 아끼신 우리 아버지
어린 시절
일 가신 아버지를 기다렸다,
말없이 따라 오는
소라과자 한 봉지
어린 시절
외출하신 아버지가 기다려졌다.
무심히 손에 들린
노란 봉지 통닭 한 마리
끼니가 부족한 날
아버지는 희한하게
입맛이 없으셨고
젓가락 하나 델 곳 없는
바싹 구운 생선 머리를
그리 좋아하셨다
여든아홉
아이가 되고서야
좋은 것 맛난 것 고집하시고
울고 삐지고 떼도 쓰시고
오래 그리웠을
당신의 어머니 그 품으로 가셨다.
* 박문자 : 산청 출신. 현 필봉 문학회 회원, 산청군 청소년 상담 복지센터 근무
날 보는 그녀의 눈은 촉촉했다. 그녀의 눈망울 안에 그녀를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나는 그녀가 되고, 그녀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렇지 않아. 당신과 보낸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격정적인 날들이었어.”
“후회하지 않으세요?”
“물론.”
“날 미워하지 않구요?”
“당연하지. 내가 그대를 미워할 까닭이 뭐가 있을까. 그대가 날 떠났다고? 아님, 그대로 인해 내 삶이 먼지처럼 흩어졌다고? 그렇지 않아. 그대와의 이별은 정말 아팠지만, 그 상처와 추억이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가 되고, 자연이 되었어.”
그녀는 내 말에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녀를 안아주기 위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작은 어깨를 감싸주니 그녀는 그간의 설움이 얼마나 컸던지 소리를 내 울었다.
나는 그동안 풀처럼 이곳에서 삶을 감내하고 버텨냈다. 지독한 외로움과 극한 고통에도 나는 풀처럼 일어섰고, 바람이 불면 누웠다. 지금에야 나는 그녀를 모두 용서하고 품어주지만 사실,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날 떠나던 날,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에 폐인처럼 살았다.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으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나의 떠나간 사랑에 대해 미치광이처럼 주절거렸다. 직장도 가족도 다 필요 없었다. 오로지 그녀에 대한 지독한 추억만이 내 삶이었고, 육신과 정신이었다. 나는 그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고, 그녀를 데리고 간 남편이라는 작자를 청부살인을 해서라도 죽이고 싶었다.
아내와 아이마저 날 떠났을 때, 나는 거의 죽지 못해 사는 몸을 이끌고 이곳, 지리산으로 왔다. 처음에는 외삼촌을 찾아가지도 않았다. 내 처지가 그에게 너무 부끄러웠고 창피해서였다. 무작정 지리산에서도 가장 오지라고 소문난 마을로 가서, 쓰러져가는 움막을 임대하여 살았다.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데 근 2년이나 걸렸다. 지독한 사랑의 열병이 그렇게 끝났다.
“이제 들어가서 친구랑 좀 쉬어. 나는 정리하고 어디 좀 갔다 올 때가 있어서 그래.”
“어디에요?”
“그대는 몰라도 돼. 나 혼자 갔다 오면 되는 길이야.”
그녀는 내가 재촉하자 군소리 없이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간 뒤 나는 자리를 정돈하고 펜션 뒤에 있는 닭장으로 올라갔다. 아까, 그녀의 얼굴을 보니 그때보다 많이 상한 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녀도 나를 위해 회를 준비했듯이 나 또한 그녀를 위해 보양식을 준비하고 싶었다.
펜션 뒤편에서 암탉을 잡은 뒤,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닭을 손질했다. 물이 끓자 나는 손질된 닭과 안내실에 보관하던 인삼을 비롯한 갖은 한약재를 넣었다. 이제 푹 삶으면 되었다. 나는 잠시 틈을 내 안내실에서 눈을 붙였다.
멀리 지리산에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가마솥을 살펴보고 있는데,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새 그녀와 친구가 깬 모양이었다. 나는 가마솥에 있던 닭을 꺼내 쟁반에 받쳐 들고 마당으로 달려갔다. 마당에는 이미 모닥불을 피워놓았다.
그녀들은 내가 먹음직스러운 닭을 탁자 위에 놓자 환호했다. 털털한 성격의 미란은 남자인 내가 안중에도 없는지 허리를 돌리며 춤까지 추었다.
“이런 게 산골에 오는 이유에요. 와! 정말 맛있겠다. 그치? 유희야.”
그녀는 유희에게 제일 먼저 주려고 한 닭 다리 부위를 손으로 쭉, 하고 뜯더니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다행히 한쪽 다리가 있어 용서를 해주려는데 미란은 나머지 다리 한쪽을 마저 뜯어버렸다. 나는 급히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건 안 돼요. 유희가 먹어야 해요.”
그러자 미란은 크게 웃었다.
“알아요, 알아. 티 내기는. 뒤늦게 둘이 바람이 났나 봐. 지금 내가 뜯어서 지금 유희에게 주고 있는데. 나, 원 참, 어디 불륜 남자 없는 여자는 서러워서 살겠나?”
그녀의 말에 유희의 얼굴이 빨개졌고 나는 나대로 무안했다.
“같이 먹어요.”
유희가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자신이 받은 닭 다리를 내게 권했다.
“얘는 네 불륜 남자가 너 먹으라고 준 거잖아. 아무 소리 말고 너나 드세요. 그리고 아저씨! 아까 먹다 남은 소주 있죠? 얼른 가셔서 그거나 가져오세요.”
나는 황망하여 그녀의 말대로 얼른 안내실로 뛰어갔다. 그때였다. 미란이 손나발을 불었다.
“오실 때 기타 가져오는 것 잊지마시구요!”
인삼과 한약을 넣어 오래 삶아서인지 닭은 매우 부드러웠고 맛이 좋았다. 나는 그녀가 잘 먹는 것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친구인 미란 역시 이런 닭은 처음 먹는다며 술과 함께 한 마리 중 거의 절반을 혼자 먹었다.
“너무 좋아. 이제 배부르고 따뜻한 모닥불이 있으니 아저씨 노래 한 곡 듣고 싶다. 유희야. 괜찮지?”
그녀는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잠시 일어섰다.
“노래하기 전에 우리, 따뜻한 커피 한잔해요. 커피가 어디 있죠? 안내실?”
“내가 갔다 올 게.”
“아니에요. 화장실도 갈 겸 제가 갈게요.”
“아. 그래? 커피는 안내실 냉장고 위에 있어. 종이컵도 함께 있을 거야.”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안내실 쪽으로 갔다. 그녀가 없으니 나는 미란과 함께 있는 게 약간 불편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유희가 요즘 어떻게 사는지 다 아시죠?”
내게는 솔직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조금은 압니다만. 남의 사생활이라.”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에요. 가장 친하다는 친구인 저도 유희 가정에 개입할 수 없는데, 아저씨는 오죽할까요?”
나는 그녀가 개입이란 말을 써서 조금 의아했다.
“개입이라뇨?”
그녀는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은 제가 광양으로 시집와서 자주 못가지만, 서울에 있을 땐 꽤 자주 갔거든요. 어떤 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유희가 그놈의 남편이라는 작자에게 맞고 있을 때 가기도 했어요. 물론 유희가 그런 날이면 무섭다고 제게 미리 전화하곤 했죠.”
밝았던 그녀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지고 있었다.
“남편이 유희를 그리 자주 때렸습니까?”
“거의 그렇죠.”
“도대체 이유가 뭐라 합니까?”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자기파괴와 의처증이었어요. 그놈은 널 만나서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로 됐다. 나는 전처와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는데 너 때문에 헤어졌다. 그런 너는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다른 놈과 놀아나고 있다는 등, 전형적인 알코올 중독자의 짓거리를 늘어놓으면서 유희를 팬다니까요. 어떤 땐 내가 놀러와 있었는데도 그런 비열한 행동을 하길래, 그날은 내가 대놓고 그놈과 붙은 적도 있어요.”
“유희 씨 부모님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조금은 알죠. 하지만 절대, 이혼만은 안된다고 하시니까, 그게 미치는 거죠. 나 같으면 당장 이혼하겠건만.”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먹먹했다. 그날 유희의 남편은 자신의 잘못은 숨기고 오로지 자신의 가정이 이렇게 된 것은 방탕하게 생활하는 유희 탓이라고 했다. 그는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아저씨가 도와주세요.”
그녀는 절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요? 어떻게.”
“유희는 지금 너무 힘들어요. 친구인 제가 곁에 있으면 되는데, 저도 결혼해서 멀리 있다 보니 별 도움이 안 되네요. 음, 방법은 하나에요.”
“무슨?”
“아저씨가 유희를 거두어 주세요. 옛날 유희가 잘못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고, 아저씨가 받아주세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제일 나은 방법이에요.”
그런데 그때였다. 미란의 뒤에 어느새 왔는지 유희가 싸늘한 눈빛을 하고 서 있었다.
“미란아! 시키지도 않은 말을 왜 네 마음대로 해? 네가 그렇게 우리 가정사를 잘 알아? 아저씨 앞에서 내 자존심은 어떡하란 말이야.”
그녀가 톡, 하고 쏘아붙이니 미란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고개를 흔들더니 입을 닫았다. 자기 딴엔 친구를 돕는다 했으나 당사자가 이렇게 나오니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둘의 팽팽한 침묵에 지켜보는 나까지 힘들 정도였다. 별수 없이 이번에도 내가 나서야 했다.
“유희야. 그건 오해야. 내가 궁금해서 미란 씨에게 먼저 물어보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 미안해. 그러니, 마음 풀고 어서 커피나 좀 끓여줘. 미란 씨에게도 내가 사과할게요. 필요 없는 말을 자꾸 물어서.”
나는 유희 몰래 미란에게 눈을 찡그렸다.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미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유희에게 사과하고선, 내게 어서 노래를 불러 달라고 재촉했다. 나와 미란의 사과를 받은 유희는 그제야 찡그린 얼굴을 펴고 커피를 끓였다.
가을밤은 봄밤과 또 달랐다. 밤이 되니 기온은 내려가서 약간 쌀쌀했지만, 바람은 선선했고 낙엽 냄새가 은근히 났다. 게다가 밤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은 무엇이라도 다 품을 듯 넉넉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기타를 퉁기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저 꽃잎처럼
(중략)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마냥 청춘일 것만 같은 내 삶도, 앞에 앉아있는 유희도 그렇게 세월만 보냈다. 노래를 듣는 그녀의 눈빛은 쓸쓸했다. 단지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를 감상하는 미란만 감상에 젖었을 뿐, 실상 나 역시 노래하는 내내 입술만 가사를 읊조렸을 뿐, 생각은 유희와 함께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비탄에 잠겼다.
노래가 끝나자 환호하는 이는 미란뿐이었다. 유희는 노래가 끝났는지도 모르는 체, 고개를 돌려 개울을 보고 있었다.
“개울가에 가고 싶은 거야?”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미란 씨도 함께 갈래요? 여기서 조금만 가면 개울이 있답니다. 밤이 되면 물 흐르는 소리가 훨씬 크고 맑은데.”
그런데 미란은 손을 저었다.
“추운데 뭐하러 가요? 여기 모닥불도 있는데 따뜻하게 한잔하면서 노래나 부르면 좋으련만, 정 가고 싶으면 둘이 갔다 와요. 난 여기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테니.”
그녀는 센스있는 여자였다. 유희와 가장 가까운 친구인, 미란은 나와 유희의 재결합을 원하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