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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고린도전서 16장 13절~18절)
묵도찬송8성시13신앙찬송314기도말씀찬송301축도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시원한 것,.. 시원한 곳,.. 시원한 사람이 생각나고 그리운 때입니다.
나라의 정치도 시원해졌으면 하고,.. 경제도 좀 시원하게 풀렸으면 합니다. 날씨도 덥다 보니까 이젠 좀 시원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시원해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답답한 사람 말고 좀 시원 시원한 사람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그와 함께 있으면 마냥 즐겁다고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있어요.
만나도 또 만나고 싶고, 헤어지면 아쉽고, 얼마든지 함께 있고 싶고, 잠깐 만
난 것 같은데 벌써 여러 시간이 지나간 것 같은, 말하자면 산소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확실히 이런 좋은 느낌을 주는 좋은 분위기의 사람이 있습니다.
2)그런가 하면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 없으면 아쉽고, 있어도 별것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3)반대로 , 함께 있으면 따분하고, 지겹고, 답답하고, 그저 가능하면 안 만났
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같이 무더위로 지치기만 하는 시간에 서로 서로가 시원한 얼음냉수 같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니코마코스라고 하는 윤리학 교수는 우정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
니다.
첫 번째는 쾌락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사귀는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저 같이 만나서 얘기하고, 얼굴보고…… 그런 것 자체가 좋아서 만날 뿐이
지 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유용성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이득이 많고 배우는 것
도 많고, 또 사귀어두면 이모저모로 유익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만나는, 그런 의미의 우정입니다.
세 번째는 덕성을 위한 우정이 있다고 합니다.
서로가 존경하기 때문에, 그 인격을 존경하기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다 함께 얻을 수 있는 상대라면 가히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
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만나고 싶고 언제든지 함께 있고 싶은 것이 사실
입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우정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시원함'이라는 것은 무거운 마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마치 오랫동안
진 빚을 갚아주는 것 같고, 혹은 거침과 막힘이 있고 뭔가 어색해 있었는데
이것이 확 열리고... 확 트이면서.... 해결사를 만난 것 같이 마음을 열어주는
그런 관계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시원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궁금한 게 많을 때에 소식을 통해서 궁금증을 꺼주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에 잘 안되고 있구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
아니다, 잘 되는 일이다, 라고 설명해줄 때, 깨끗한 마음으로 내 마음을 열어
줄 때, 이런 관계가 마음을 시원케 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헤밍웨이의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뒷맛이 좋은 것이다.' 선한 말, 선한 행위는 언제나 뒷맛이 좋습니다.
'악이란 무엇인가?
뒷맛이 나쁜 것이다.' 뒷맛이 좋을 리 없지요.
그런고로 다같이 느낌에 시원함을 주는 것이 바로 선한 것이다,
또 선한 것이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수있겠습니다.
C.S. 루이스 교수는 말합니다.
'인간은 에로스에 의하여 태어나고...,
스톨게에 의하여 양육되고....,
필로스에 의하여 성장하고....,
아가페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네 가지 의미로 나눕니다.
에로스라는 것은 이성간의 사랑..,
스톨게라는 것은 부모 자식간의 사랑...,
필리아라는 것은 친구간의 사랑...,
아가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사랑 같은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인간은 확실히 사랑함으로 태어나고, 사랑을 위해서 살고, 사랑을 먹고살고,
사랑이 있는 한 살고, 사랑이 살아 있는 한 삶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실은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이유 삶의 행복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가를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한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시원함이 주어질 수
있다면 마침내 내 삶은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마음이 상한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쟁하는 교회였습니다.
불륜관계도 있고,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자도 있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복잡한 교회입니다.
그 많은 문제로 인해서 바울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나깨나 그 마음이 무겁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당장에 달려가서 모든 것을 수습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몇 사람을 책벌해
야 될 것 같고, 심판해야 될 것 같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야 될 것 같습
니다.
문제가 어렵습니다. 또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 더 기다리면서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다 해
결된 맨 마지막에, 평안할 때에 가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찾아갈까, 아니면 편지를 써보낼까'하며 아무튼 좀더 기도하면서 기
다리려고 합니다.
기다리는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러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간다, 간다
하면서도 이런 이유로 인해서 가지 않고 있을 때에 주위의 비난도 많았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지금 그 모든 비난을 감수
하면서 참고 견디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고린도교회로부터 세 사람이왔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세 사람입니다.
스데바나, 이 사람은 유일하게도 사도 바울이 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
스데바나라는 말은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브드나도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행운'입니다마는 그는 아무래도 종의 신분인 것 같이 느껴
집니다. 또 한 사람, 아가이고가 있습니다.
아가이고는 '아가야 사람'이라는 뜻인데 노예의 신분에 해당하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스데바나가 두 노예를 데리고 여기에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18절)"--
정말로 산소 같은 사람들입니다.
시원하게 했다,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바울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느
냐, 또 무엇을 행했기에 시원하게 했느냐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 누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느냐, 오늘의 본문을 보면
저는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15절)"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작정한 사람---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아무 때나 만나도 불쾌합니다.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귐에 있어서도 '저 사람,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구나'하고 느껴지
는 순간부터 우리의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사람---섬기기로 작정한 사람 또한 중요합니다.
여기에 second decision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충성할뿐더러
성도 섬기기로 작정했습니다.
한번 섬기기로 했으면 꾸준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한번 봉사하기로 맹세했으면 죽는 날까지 봉사해야지 무엇을 그렇게 이랬다
저랬다합니까?
저 사람은 틀림이 없다, 남은 생애를 성도 섬기면서 살기로 결심하고 작성한
사람이다--이런 사람을 만나면 편안합니다.
여러분, 성도 섬기기로 작정했습니까? 변함없이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메리히 교수의 말 가운데 '인간자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사회에 있어서 인간자본이 될 수 있느냐, 아주 유익한 자본
이 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돈 있는 사람, 지식 있는 사람, 학력 있는 사람, 경력 있는 사람
이냐,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보다는 의욕이 있는 사람, 그 다음에는 책임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른 판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을 시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복이 없는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없는 사람은 창의력이 없습니다.
내 마음에...... 충분한 감사함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섬김은 짜증스러운 것입
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을 보니 이 세 사람은 바울에게 좋은 기별을 주었습니다.
고린도교회 때문에 답답해하고 있는데, 이 세 사람이 와서 바울에게 얘기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지금 형편이 이렇고 저렇습니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바울의 마음이 시원해졌어요.
걱정하던 것이 사라졌어요.
때때로 만나면 참 편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안 만나면 괴롭습니다.
잠언 15장 30절에 보면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합
니다. 좋은 소식을 들을 때에 척추가 윤택해진다, 건강해진다는 얘기입니다.
또 잠언 16장 24절에 보면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
약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병들었던 사람도 좋은 기별을 들으면 윤택해진다,
병도 치유가 될 수 있다, 양약이 된다 하심입니다.
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25장 13절에 보면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
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
다. 정말 이런 충성된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일을 시켜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또 그 결과가 그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고 합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깊이 상고해보면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
충하였음이니라(17절)"라고 말씀합니다.
이 보충적이고 협력적인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보충했다---
가만히 보면 모두가 독자적인 일들은 많이 합니다마는 남의 일에 협력할 줄
은 몰라요.
뒤에서 조용히 협력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섬기고, 받들고, 봉사할 줄은 모릅니다.
협력할 줄을 모릅니다. 도대체가 이것을 못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내가 남편 협력하고, 남편이 아내 협력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보충적인 협력,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보충했다는 말은 행동으로 옮긴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멀리서 걱정했지만 스데바나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염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소식을 전합니다.
그 소식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희망적이었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문제를 다 알면서도 이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이 시원해
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혹 내가 피곤합니까? 내가 남을 피곤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답답한 중에 더 답답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시원한 사람, 시원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섬김을 기쁨으로 알고,
봉사하기로 결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썩어지는 밀알로, 나로 인해서 생명이 있고 시원함이 있다면 내가 무엇을 못
하고,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그런 인격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시원하게 할 뿐더러, 자기도 시원한 생을 살 수 있을 것
입니다.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
시원한 것, 시원한 곳, 시원한 사람이 생각나고 그리운 때입니다.
나라의 정치도 시원해졌으면 하고,.. 경제도 좀 시원하게 풀렸으면 합니다. 날씨도 덥다 보니까 이젠 좀 시원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시원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시원해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답답한 사람 말고 좀 시원시원한 사람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같이 무더위로 지치기만 하는 시간에 서로 서로가 시원한 얼음냉수 같고 시원한 얼음 수박화채 같은 여러분들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한 사람, 한 가정을 특별히 지목하며 그가 바울과 고린도 교회를 시원하게 해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6:13-18). 그의 이름은 바로 스데바나입니다. 스데바나를 생각하면 교인들의 마음이 시원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골치 아픈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고,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불안합니다. 그런데 스데바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스데바나가 그들을 시원하게 했다는 말의 원어는 ‘힘이 나게 했다(Refreshment)’입니다. 스데바나는 바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힘이 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힘을 뽑아가고 용기를 빼앗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을 잘 하다가도 그 사람을 보면 힘이 빠져서 일하기가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보면 힘이 납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시원케 하는 자였을까요? 첫째로 그와 그의 가정은 성도 섬기기로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였습니다. 여기서 스데바나 집이 ‘작정하였다’는 것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섬긴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헌신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데바나는 그리고 그의 집은 섬기기로 헌신하였습니다. 굳이 아가야에서 고린도까지 올 필요는 없었습니다. 굳이 이 고린도 지역의 강퍅하고 교만한 이들을 위해 수고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이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이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이와 같은 자발적 헌신을 작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섬기는 일에 부르셨다는 강한 소명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소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와 같은 상황을 접하고 나면, 즉 자신의 그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나날이 분쟁 속에 휩싸이고 서로를 불신하고 미워하며, 스스로 잘났다 영적 교만한 모습에 지쳐 어느 순간 그 소명에 대한 열정은 다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스스로 낙심해서, 소위 번아웃 되어 사역의 자리를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그 골치 아픈 상황을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을 달랐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는 이 서신 끝자락에 다시금 그의 이름을 적어 언급하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그 많은 문제 속에서도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은 여전히 신실하게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그의 가정의 섬김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스데바나와 그의 집의 섬기는 일이 고린도 교회에서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인해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마음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은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잘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여기 부족한 것을 채워 주었다고 하여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정서적인 것, 감정적인 것, 혹은 지식적인 것도 다 포함이 됩니다. 그렇게 고린도 교회 곳곳의 부족한 곳을 채워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들의 곳곳의 필요를 채워 주었던 것입니다. 스데바나 집처럼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방문한 곳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채워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것을 보았을 때 부족한 것을 지적하는 사람과 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부족한 것을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과 채우려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은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볼 때마다 그 부족함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부르셨다고 믿고 부지런히 열심으로 그 부족함을 채워 나갔습니다. 성도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볼 때마다 역시 그와 그의 가정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그들의 부족함을 연약함을 채우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이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시원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 여러분 가정의 모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서로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아니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