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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빙하우스 Hermann Ebbinghaus 1850-1909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6.(P.304)
독일 심리학자
에빙하우스는 1850년에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지방의 뷔페르탈(Wuppertal), 즉 오늘날 바르멘(Barmen)에서 태어나 1909년(59살)에 자하젠-안할트(Sachsen-Anhalt)의 할레(Halle)에서 죽었다.
페히너(Gustav Theodor Fechner 1801-1887)가 감각에 적용했던 심험 심리학을 기억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작품으로 심리학의 토대들(Fondements de la psychologie, 1908)이 있다. (43UNA) 일반적으로 주저는 기억에 관하여(Über das Gedächtnis: Untersuchungen zur experimentellen Psychologie 1885 이다. (43UNA)
에베르하르트 Johann August Eberhard 1739-1809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6.(P.304)
독일 철학자.
에베르하르트 1739년에 자하젠-안할트(Sachsen-Anhalt)지방의 할베르슈타트(Halberstadt)에서 태어나 1809년(70살)에 베를린(Berlin)에서 죽었다.
그는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의 제자이며, (Neue Apologie des Sokrates oder Untersuchung der Lehre von der Seeligkeit der Heiden, 1772; Nouvelle Apologie de Socrate)에서 크리스트교의 독단과 싸웠다. 칸트 철학의 반대자로서 그는 두 개의 잡지, 즉 Das Philosophische Manzin(1788-1792), Philosophisches Archiv 1792-1795를 만들었다. 칸트는 그에게 소논문으로 응답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사유와 감각의 일반 이론 (Allgemeine Theorie des Denkens und Empfindens, 1776; Théorie générale de la pensée et de la sensation), 철학 일반 역사(Allgemeine Geschichte der Philosophie 1788, 1796; Histoire générale de la philosophie), 근원적 크리스트교의 정신(Geist des Urchristentums, 1808; Esprit du Christianisme originel)(43VKH)
궁지 (l')échec 낭패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6.(P.304)
어원적으로 페르샤 언어로 샤(shâh)는 왕(le roi)을 의미한다. 기획(entreprise)에 대해 출구 없음을 뜻한다.
궁지는 서양 장기(l'échec)라는 동일한 이름의 놀이에서 나왔다. 그 놀이에서, 특히 이 놀이의 목적이 되는 상황, 즉 특징적인 상황을 지칭한다. 그 상황에서 모든 측면에서 공격을 받은 왕은 더 이상 달아날 수 없는 경우이다.
인간활동의 영역에서 잘못(faute)과 궁지는 구별되어야 한다. 잘못은 어떤 도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잘못에 책임을 진다. 궁지는 기술적(techinque) 의미를 지닌다. 궁지는 개인적 활동의 제한을 의미한다. 즉 나베르(Jean Nabert 1881-1960)가 윤리학을 위한 기본(Eléments pour une ethique, 1943)에서 궁지란 “목표로 했던 목적과 실재적 목적 사이의 벌어진 틈”을 의미한다. 심리학적으로 건전한 개인은 이 궁지를 극복한다. 그러나 이 궁지는 특히 청소년의 시기에 일어나며, 학업의 궁지 또는 사랑의 궁지는 그 개인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 결과로 정신분석학의 프로이트 학파에서 묘사한 “궁지의 품행”(conduites d'échec)가 나오며, 이 개념은 “운수의 콤플렉스”(comlexe de destinée)로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개인은 항상 자신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궁지로 치닫는다는 것과 같은 조건 속에 필연적으로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개인의 사랑의 모험들이 한상 동일한 계기에서 그리고 유사한 조건들 속에서 무너지게(craquer)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자기의 운명(la destin)이 있다고 끝내는 믿게 된다.
궁지는 죄의식과 억압(inhibition)의 감정들로부터 출발된 것이리라. 그리고 이 감정들에 반작용으로 “보상의 메카니즘”이 나오게 될 것이리라. 그 보상 메카니즘으로 허풍(la vantardise), 허담증(fabulation, 모래성 쌓기), 세계에 대한 거부, 종교적 소명 등이 있다. 참조: 프로이트, 융. (43VKH)
[궁지란 용어는 라포르그(René Laforgue 1894-1962)에 의해 정신분석학에 도입된 개념이라 한다. 그의 작품으로 궁지의 정신병리학(Psychopathologie de l'échec, 1939)가 있다. 그 개념은 궁지신경증(névrose d'échec) 또는 궁지징후(syndrome d'échec)에 쓰이있다. 프로이트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Jenseits des Lustprinzips, 1920; Au-delà du principe de plaisir)에서 운수의 신경증(Nevrose de destnée)를 썼다고 한다. 참조: Jean Lapkache et J-B. Pontalis, Vocabulaire de la pscyanalyse, PUF, 1981. pp 277-278. (P.525) / 우리는 운수(la destinée), 사명(la destination), 운명(le destin)을 구별하여 번역한다. 아마도 여기서 쥘리아가 “운수의 콤플렉스”는 운수의 신경증(Nevrose de destnée)일 것이고, “궁지의 품행”은 “궁지의 운수”일 것이다.(43VKH)]
반향 언어증 (la) écholali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6.(P.304)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에코(ἠχώ, êkhô), 반향(l'écho)와 랄레(λαλη, lalê), 수다(le bavardage)의 합성어이다. 한 개인이 들었던 소리, 즉 단어나 구절들을 직접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향 언어증은 약 6살-7살의 어린이가 언어에 해당한다. 이 나이에, 사람들이 여러 꼬마들을 서로 함께 내놓았을 때, 집단적인 종알거림(gazouillements)과 독백들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반향 언어증을 특히 암시를 받은 환자들에서도 관찰할 수 있고 또 중요한 지적 결함의 경우에도 발견할 수 있다. (43VKH)
[참조 6개월에 첫음절의 반복, 옹아리(Babillage, gazouillis, lallation, jasis)로서 마-마-마(ma-ma-ma)또는 빠-빠-빠(pa-pa-pa) 등이 나타난다. 9개월이면 옹아리가 사라지고 몇몇 단어가 등장한다. - Norbert Sillamy, Dictionnaire de la psychologie, Larousse, 1991, p.30. (P.273) 「옹아리(Babillage)」 - 위 경우 “6살-7살”이란 달(moi)을 나이(age)로 잘못 기술한 것이 아닐까? (43VKH)]
에크하르트 Eckhart, Eckart Johannes, dit Maître, v. 1260-1328)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6.(P.304)
독일 신비주의 철학자이다
에크라하르는 1260년경에 독일 고타(Gotha) 가까이 있는 호흐하임(Hochheim)에서 1260년경에 태어나 1327년경(약 67살)에 프랑스 아비뇽(Avignon) 또는 독일 쾰른(Cologne)에서 죽었다. [1326년(66살) 쾰른의 대주교는 그에 대해 종교재판을 시도했다.]
그의 체계는 아주 산만한 범신론이다. 그는 범신론을 어떤 유일한 신의 신앙과 조화시키고자 애썼다. 그의 엄밀한 사유는 어떤 신비주의를 포함하고 있는데, 신비주의에 합리적 외관을 부여하고자 애썼다. 독일 철학의 특징이 되기에 충분한 그의 사변적 신비주의는 19세기 독일 철학에, 즉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에 큰 영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이 영향에서 합리적 변증법은 낭만주의 영감을 감싸고 표현하게 될 것이다. (43VKI)
절충주의 (le) éclectism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7.(P.304)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에크레게인(ἐκ-λέγειν, eklegein) 즉 선택하다(choisir)에서 나왔다. 유일한 체계로 세울 원리들을 여러 다른 학설들로부터 빌려오는 방법을 말한다.
이 철학 학파의 이름은 19세기 꾸장(Victor Cousin, 1792-1867)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모든 철학적 체계를 고려했던 이 학파는 네 가지 근본적 형식들로 귀착하였다. 즉 관념론, 감각론, 회의주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특히 체계로서 절충주의는 이 형식들의 각각에서 긍정적인 측면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르누비에(Charles Renouvier 1815-1903)와 뗀느(Hippolyte Taine, 1828-1893)는 꾸장이 좋은 곡식과 가라지 사이의 주어진 몫(partage)을 어떤 정확한 기준에도 맞지 않게 분배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오늘날 절충주의는 약간의 비난의 뉘앙스를 가지게 되었고, 그리고 그것을 피상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사상으로 생각하게 한다. (43VKI)
정치 경제학 (l')économie politiqu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6.(P.304)
17세기 초기에 작가이며 경제학자인 몽크레티앙(Antoine de Montchrestien, sieur de Vasteville, 1575-1621)가 정치경제학 개론(Traité de l'éconimie politique, 1615)에서 부의 생산, 분배, 소비에 대한 연구를 지칭하기 위해서 창안된 표현이다.
정치경제학은 사회들의 진화와 변형의 핵심 열쇠를 토대에 부여하고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18세기에 이래로 흄(David Hume, 1711-1776),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 등에 의해 철학적 반성을 목적으로 한다. 맑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역사를 철학의 근본적 주제로 만들었고, 정치경제학을 특권적 지위의 과학으로, 즉 우리에게 세계[사] 진화의 진실한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과학으로 만들었다.
오늘날에, 프랑스의 “계획경제”(planification)의 문제는 소위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들을 사회주의 구조의 모습으로 변경하는 데 대한 이론적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그리고 자본주의 체계와 공산주의 이상 사이에 종합을 이상적이고 안정된 경제제도의 어떤 사회에서 예감하게 한다. 또한 결국에는 “세계 공동 시장”(Marché commun)의 문제가 세계의 균형의 문제를 일으킨다. 이런 시대에서 정치 경제학은 철학자에게 역사를 탐문하고 인식하는데 식견을(lunette) 갖추게 한다. 정치경제학이 정치가에게 역사를 예견하게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정치경제학은 그에게 역사를 만들어가게 할 수 있다. (43VKI)
교육 (l')éducation‘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6.(P.304)
라틴어 두카레(ducare)에서 나왔으며, 인도하다(conduire)를 의미한다.
어린이를 [인성을] 형성하게 하여, 그를 어른의 상태로 나아가게 “지도하는”(diriger) 행위를 말한다. 사람들은 이 용어가 심지어 어원적인 의미에서 지적인 측면과 도덕 또는 심리학적 측면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교화”(l'instruction)란 지적인 것에 제한되며, 도덕론(le moral)을 밝히는 것이다.
교육의 원리들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성인(l'homme 인간)을, 그리고 자기 운명을, 만든다는 생각들에 따라서, 개념상으로 변했다. 우선, 라블레(François Rabelais, 1483-1553)에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로 나가는 길이 있다. 라블레는 “잘 채워진 머리[지성]”를 원했는데 비해 몽테뉴는 “잘 마들어진 머리[지성]”을 원했다. 그리고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에서 꽁트(Auguste Comte, 1798-1857)로 나가는 길도 있다. 루소는 자연과 연관을 강조하였고, 자연의 광경은 인간 영혼에 도덕적 근본 원리를 불어넣게 된다고 보았다. 꽁트는 반대로 정신을 선한 의리로 형성하고 개혁하기 위해 사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오늘날, 현대문명이 전문인들을 요구하고 점점 더 부분적이고 기술적인 교화[정보 교육]에 힘쓴다고 할지라도, 인간적인 일반 교육[인문학일반]이 노동자와 기술자들의 [인성] 형성을 할 수 있고 또 기술의 진보와 근대 세계의 변형이 이루어짐에 따라 영속적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그래도 우선 교육의 목적은 교화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사회적으로 적응하는 것이고, 인격적인 자유로운 판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43VLA)
평등 (l')égalité 동등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77-78.(P.304)
동일한 두 성질들 사이의 관계 또는 같은 본성을 지닌 두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도덕적 관점에서, 1789년의 「인권 선언(De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에서 s는 “모든 인간은 권리상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살아간다”(tous les hommes naissent et demeurent libres et égaux en droit)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평등을 생각하는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1. 사람들은 평등이란 “각자에게 동일한 것”(à chacun la meme chose)을 부여하는데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산술적 평등이라 하며] 즉 교환적 정의(justice commutative)이다. 그것은 평등이 사회주의에 영향을 입은 모든 사회에서 또는 새로운 국가들[소련, 중공, 북한, 쿠바 등]에서 토지와 재화를 분배할 경우에 실행되는 것이다. 이 평등의 형식은 18세기 말에 프랑스 공산주의자 바뵈프(François-Noël Babeuf, dit Gracchus, 1760-1797)에 의해 권장되었다.
2.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 말했던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à chacun selon ses besoin), 또는 보다 분명하게 “각자에게 노동에 따라, 능력에 따라”(à chacun selon son travail, selon son mérite) 부여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비례적 평등”(l'égalité propotionnelle)이라 하며, 즉 분배적 정의(justice distributive)이다. 이러한 것은 맑스에 의해 생각되었다.
사람들이 이해하기로, 이 평등은 인간들의 실질적 상황에 따라 불평등의 원천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실질적 상황에는 강한 자, 약한 자, 근면한 자, 게으른 자 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회피할 수 없는 이 물질적 상황의 불평등을 넘어서, 모든 시민들은 사회적 법 앞에서는 평등하고, 도덕적 평등은 모든 인간들에게 행해진다. 이제 각 나라들이 또는 각자의 처한 상황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칸트가 말한 “동일한 근본 권리를 존중받아야” 하며 즉 그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43VLA)
에고 ego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8.(P.304)
라틴어 에고(ego)는 나(je), 주체(sujet)를 의미한다.
정신분석학에서 자아(moi)를 지칭하기 위한 표현이며, 자아란 사회적 의식인 초자아(le surmoi, super-ego)와 심리적 경향들이며 개인적 욕망들인 그것(ça, Id) 사이에서 균형이라 정의된다. 만일 “초자아”가 “그것”이 추상작용들이라면, “에고”는 실재적 인격에 해당하며, 주체, 세계, 다른 사람들과 관계의 특별한 형성에 관계한다. [자아, 세계, 이상(사회적 관계)는 철학의 주제에 가장 기본적 정초(fondation)이다. 이 세 개념을 어떻게 형성하는 가에 따라 철학의 방향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자아가 오성적 측면이면, 세계는 합리적 구조로 해석하고, 이상을 조작적 세상 속에서 관계들을 양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자아가 자연의 내적 권능의 발현이면, 세계는 자기 발생적이며, 게다가 사회라는 이상은 자아 의 실현의 장일 것이다.(43ULI)]
자기중심주의 (l')égocentrism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8.(P.304)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만드는 경향이다.
삐아제(Jean William Fritz Piaget 1896-1980)와 클라파레드(Eduard Claparède 1873-1940)는 자기중심주의가 4-6살의 어린이에 있어서 성격의 진화(l'évolution, 발달)에서 정상적인 상태임을 확립하였고, 이 자기중심주의는 초기 나이에서 유기체적 이기주의와 진화된[발단된] 어린이 보다 사회적 태도 사이에서 매개적이다. 이 용어는 그 자체로서는 경멸적이지 않지만, 어른에게 적용될 때 경멸적이다. 어른에게서 자기중심주의는 원칙적으로 “넘어서”(dépassé)야 하는 것이다. (43VLA)
이기주의 (l')égoïsm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8.(P.304)
라틴어 에고(ego)에서 나왔으며, 에고는 나(moi)를 의미한다. 이기주의는 모든 것을 자기에로 귀착시키는 자의 지적 태도를 말한다.
형이상학적 도식에서 보면, 이기주의는 타자들의 현존을 착각(illisoire)이라고 또는 적어도 의심스러운(douteuse)라고 생각하는 학설이다. 이런 형이상학적 견해를 받아들이 것을 오늘날에는 거의 포기하고 있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이기주의는 스스로를 옹호하고 유지하고 발전하는 경향, 요컨대 합당한 경향을 지칭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기주의는 자기보존본능의 측면일 뿐이다. 여기 까지는 이 용어가 경멸적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좁은 의미에서 이 용어가 타인의 관심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면서 자기 자신에 한정하여 과도하게 집착할 때 경멸적이 된다. 따라서 이기주의란 비정상의 성격 또는 비사회성의 요인으로 쓰이는 경우에, 이 개념이 부부(le couple)의 경우 즉 “둘만의 에고이즘”(égoïsme à deux)으로 또는 부부와 자식의 경우에 “셋만의 에고이즘”(égoïsme à trois) [한마디로 가족이기주의]로도 확장되어 쓰인다.
도덕적 도식에서 보면, 이기주의는 이타주의(l'altruisme)에 대립된다. 따라서 이 이기주의는 자기중심주(l'égocentrisme), 또는 개인주의(l'individualisme)로 불리기도 하고, “참여”(engagement)의 일반적인 모든 형식에 대립된다. (43VLA)
자기성찰 (l')égotism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8.(P.304)
[일반적으로 스탕달에게 볼 수 있는 자기 성찰과 분석을 중히 여기는 문학의 한 경향]
스탕달(Stendhal, Marie Henri Beyle, 1783-1842)이 창안한 개념이며, 그리고 나서 현대 철학에 의해 채택되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긴의 감정을 정체하고 그 감정을 더 잘 향유하기 위하여 그 자신에 관해 실행되었던 분석을 지칭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성찰은 이미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Connais-toi toi-même)이래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의 수상록(Essais)에 이르기까지 이 긴 전통은 자신의 심리학적 인식을 둘러싸고 있는 감성적 즐거움을 고려하는 경우이다.
이 용어는 또한 도덕적인 측면에서, 품행의 중요한 규칙과 같은 개인의 완성에 대한 탐구로 쓰인다. (43VLA)
형상적 éidétiqu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8.(P.304)
[후설의 본질은 사람이나 생명이 아니라, 사물이나 수학적 도형과 같은 것에 대한 본질을 형상적 본질이라 한다. 생명의 본질은 에이데틱(éidétique)이 될 수 없다는 점이 베르그송과 후설의 차이이다.(43VKA)]
그리스어 에이도스(εἶδος, eidos)란 단어에서 나왔으며, 형상(la forme), 본질(l'essence)을 의미한다. 이 형상적이란 용어는 사물들의 본질과 사물들의 의미화(signification)에 관한 것이다.
이 용어는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현상에서 자주 사용된다. “형상적 환원”(réduction éidétique)이란 사물의 본질을 구별해 내기 위하여, 어떤 표상의 내용을 무한정하게 변하게 하는데 있다. 여기서 표상의 내용이란 예를 들면 정서(l'émotion)의 표상도 들어가며, 그리고 사물의 본질이란 상황에 적응되기에 순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만 정서들의 보편적 성격을 말한다. [이 측면에서 보면 현상학은 물체적 사물의 본질보다 인간의 정서의 본질을 규명하고 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1970-80년대에 물체 또는 수학적 본질의 규명으로 배웠을까? - 아래 설명은 수학적으로 넘어간다. 이에 이상하다는 것이다.] 후설은 예로서 자주 삼각형의 기하학적 예를 취한다. 만일 삼각형의 여러 형태들을 무한정하게 변화하게 한다하더라도, 사람들은 거기서 모든 특수성들과 독립적인 삼각형 일반의 “본질”을 구별해 낼 수 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방식이며, 베르그송은 수학에서 도형의 본질 찾기처럼, 사람의 본질 찾기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아챘기에 플라톤의 철학이 심리학적으로 전도되었다고 보았다. 베르그송의 입장에서 삼각형의 본질과 달리 생명은 지지점도 바닥도 없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여기서 리좀의 흐름, 노마드적 생성을 보았을 것이다.(43VLA)] 이 일반적 본질을 개별적 각각의 경우에 덮어씌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질에 환원이라 한다.
심리학적으로 사람들은 형상적(éidétique) 분석과 발생적(génétique) 분석을 구별한다. 정서의 어떤 형상(éidétique)은 본질을 분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적 사건의 조건들, 즉 생리학적이고 심리학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이 정서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아주 다른 의미에서 사람들은 심리학에서 형상적 이미지를 말하는데, 이것은 시각적 이미지의 측면에서 개별적 분명함[분명한 표상]을 제시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특히 14세에서 16세의 경우에서이다. [이것은 삐아제의 학설에서, 이 나이에 추상적 도형을 인식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과 유사하다. 이 시기에 수학의 추상에 대한 실재성을 논할 수 있다.] (43VLA)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1955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9.(P.304)
독일 출신의 물리학자.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탔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 바덴 뷔르뎀베르크(Baden-Württemberg)지방 튀빙겐(Tübingen)의 울름(Ulm)에서 태어나 1955년(76살)에 미국 뉴저지(New Jersey)주의 프린스튼(Princeton)에서 죽었다.
아인슈타인는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의 이론의 창시자이다. 그의 이론은 16세기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이론만큼이나 강하게 또 지속적으로 우리시대의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인간이 세계에 중심이 아니며, 인간은 세계에 상대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혁명”이라 말할 수 있다. 즉 현상들의 상대성 원리는 18세기와 19세기의 철학자와 과학자, 뉴턴(Isaac Newton 1642-1727)에서 꽁트(Auguste Comte, 1798-1857)까지 주저하면 진전시켰던 “인식의 상대성” 원리와 동일한 방향에서 그리고 그 원리 보다 훨씬 더 멀리 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성 이론은 우주에 대한 철학적 이론도 아니고, 과학의 형이상학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주의 과학적 설명일 뿐이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우주의 모든 현상들의 관계 만들기를, 특히 중력 현상과 전자기 현상들의 관계 만들기를 의미한다. 이 이 이론은 과학의 모든 자료를 통합한다. (43VLD)
생의 약동 (l')élan vital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9.(P.304)
생명의 창조적 경향이다. 이 경향은 특별한 유기체들을 통해서 전개되며, 종의 연속성을 보증하고 존재들의 진화를 생겨나게 한다.
이 표현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Evolution créatrice, 1907)에 의해 유명하게 되었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Deux sources de la morale et la religion, 1932)에서 베르그송은 생의 도약이 승화될 때, 생의 도약은 창조적 용솟음을 자극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이 창조적 용솟음이란 그 기원에서 정신적 도덕적 위대한 창조들이고, 그리고 신비주의 자체이다. (43VLD)
엘렉트라 콤플렉스 (complexe d')Electr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9.(P.304)
참조하라: 외디푸스 콤플렉스(Oedipe complexe). (43VLD)
엘레아 학파 (l'école d')Elé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9.(P.304)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콜로폰(Colophon, κολοφων) 출신인 크세노파네스(Xenophane 기원전 580-485)에 의해 세워진 그리스 철학 학파이다. 그 학파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들로는 파르메니데스(Parménide, 기원전 540-450)과 제논(Zénon 기원전480-420경)이 있다. 이들은 감관들에 의해 알려진 다수와 변화를 지닌 물리적 세계와 이성에 의해 알려진 절대적이고 보편적이고 불변하며 영원한 과학의 대상인 세계 즉 오직 실재적이고 지적인 세계 사이에 깊은 차이를 확립하였다. 엘레라 학파 철학자들은 존재의 부동성을 확립하였고,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 Ἠράκλειτος, 기원전 약540-480)와 그 제자들과 대립된다. 이 후자들은 전자들과 반대로 모든 사물의 영속적 생성을 강조했다.
엘레아 학파는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기원전 427-347)의 형이상학에 영향을 주었다. 참조: 아킬레스와 거북이, 제논. (43VLD)
광기의 찬미(Eloge de la Folie, 1511) 우신예찬(愚神禮讚)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79.(P.304)
에라스무스((Erasme, 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1466-1536)의 풍자적 작품이다. 광기의 유비적 등장인물은 여성이며 귀에 무거운 방울을 달고 말을 한다. 다른 그 반대자 이성은 스스로 자시 자신에 대해 매우 확신한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불안한 상태로 이끌고 그리고 나서 지성이 도달한 진리란 모순들이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즐거운 음정으로 그리고 현상적으로 해가 없는 음정으로 말하는 에라스무스는 중세의 열광주의와 독단주의와 싸웠다. 그러한 것은 진실한 인문주의의 이름으로 그의 태도이다. 그의 태도는 사람들이 정확한 명칭을 붙여서 “르네상스의 세기”라고 불리는 세기의 정신에 부합하는 태도이다.(43 VLD)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0.(P.304)
에머슨은 미국 철학자이다. 그는 1803년에 미국 매서츄세츠(Massachusetts)의 보스톤(Boston)에서 태어나 1882년(79살)에 매서츄세츠(Massachusetts)의 콩코드(Concord)에서 죽었다. 그는 초절주의(transcendantalisme)라 불리는 것에 토대를 마련하고 했으며, 사람들은 초절주의를 시적 신비주의로서 정의할 수 있다. 그는 개인적 의식이 전통 신앙과 전통 교리 즉 성스런 책이나 교회 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하였다. 에머슨에게 있어서 [인간의 또는 생명의] 영혼은 정신적 문제에서 최고의 심판자이다. 그는 1840년부터 1844년(41살)까지 현대시대(Temps moderne)과 자연의 방법과 개조된 인간(Méthode de la nature et l'homme réformé)에 과한 강연을 출판했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는 영국인의 특성론(Les Traits du caractère anglais, 1856)(53살) 등도 있다. (43VLD)
마음의 동요 (l')émotion 정서...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80-81.(P.304)
동요란 알맞거나 또는 힘드는 의식의 상태를 일반적으로 동반하는 감동적인 삶(la vie affective)의 표출을 말한다. [영미 철학에서 정서(the emotion)라는 것으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프랑스철학과 그 차이가 너무나 크다.]
동요란 변할 수 있는 지속의 혼란이며, 균형의 단절(une rupture d'équilibre)을 의미한다. 가끔은 폭력적인 이 혼동은 운동들의 증가 - 예를 들어 화돋음, 열정 등처럼 - 를 끌어내기도 하고 또는 반대로 운동들의 중단 - 예를 들어 두려움, 사랑의 불꽃 등처럼 - 을 가져오기도 한다. 따라서 동요란 때로는 자극(l'excitant)의 방식으로, 때로는 깜짝 놀람(stupéfiant)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신체에 미치는 반향은 기절(syncope)로까지 갈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자주 입에 침이 마름, 얼굴이 붉어지거나 또는 창백해짐, 살갗의 소스라침(l'horripilation), 즉 소름끼침(hérissement) 또는 닭살 돋음(chair de poule)으로 모방된다. 어떤 이들은 [심적] 동요가 실재성(réalité 현실)에 부적응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이 부적응이란 매우 허약한 원인에 비례관계에 맞지 않게, 게다가 두뇌중추의 불충분한 조절 때문에 생기는, 동요의 반작용이 상응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보다 일반적 규칙으로, 따라서 심적 동요는 일시적인 불균형으로 남아 있다. 이 불균형에 이어서, 한 유기체가 상황들에 스스로 굴복할 때 그 유기체가 실행한 노력이 완수 되었음을 표시한다. 이렇게 생겨난 혼동(trouble)의 본성에 따르면, 사람들은 충격적 동요( l'émotion-choc)와 감정적 동요(l'émotion-sentiment)을 구별한다. 전자는 오늘날 낡은 표현법이 되었고, 동요적 충격(le choc émotionnel)으로 용어가 대체되었다. 그런데 후자의 동요는 전자의 동요보다 더 지속적이며 또한 더 잘 번진다. 예를 들어, 도덕적 동요(l'émotion, 감동, 감격), 미학적 동요[감동], 행복감(l'euphorie) 등이 그러하다. (43VLD)
*정서의 본성 Nature de l'émotion
사람들은 오랫동안 정서(l'émotion)를 마치 반작용(la réaction)처럼 생각했다. 예를 들어, 내가 곰을 보았을 때, 내가 두려움을 느끼고(정서). 달아난다. 사르트르는 「정서들의 이론 소고(Esquisse d'une théorie des émotions」(1938)에서 정서라는 것은 반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품행(conduite)라고 제시했다. 그것을 생겨나게 하고 유지하는 것은 인간이다. 예를 들어, 저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강요당하거나, 초기 제안에 대해 자기에게 책임을 지우려고 강요당하는 사람은 상황을 부정하기 위하여 “화를 낼”(se mettre en colère) 수 있다. 정서는 어떤 마술적(magique) 품행이며, 자신만의 모든 힘으로 세계를 변하게 하려는 노력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정서는 무의식적일 수 있는 의도를 폭로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정서들에 대한 책임질 수 있고, 이 정서들은 우리가 우리 인격으로서 행하는 선택을 표현한다.
[이 정서의 문제가 프랑스에서 70년 후반에는 철학 일반의 문제에서 떠난다. 나로서는 아마도 이 이유가, 두려움, 공포, 불안 등의 문제를 정신의 심층문제로서 인격의 분열증 현상이나 도덕론의 죽음 문제에 흡수에 되었거나 또는 종교적 심성의 현상으로 넘어갔거나, 정신분석학에서 대상없는 공포에 불안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죽음 충동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43VLA)]
정서성 (l')émotivité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1.(P.304)
생생한 동요들(l'émotions, 감격들)을 체험하는 성향을 의미한다.
정서성은 소위 말하는 외분비(exogène)이며, 다시 말하면, 외부에서 태어난다[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걱정(l'anxieux)을 동요(l'émotif)와 구별하게 한다. 반대로 걱정(l'anxiété)은 내분비(endogène)적이다. 걱정과 동요 사이의 자주 일어나는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도식적으로 생각하여 사람들은 이 후자(동요)에는 시험동안에 맘 고생을 겪는데 비해, 전자(걱정)는 시험을 기다리면서 맘 고생을 겪는다. 예를 들어, 두려움(la peur)도 동요의 한 형식이다. 예로서 나는 사자를 두려워한다. 불안(l'angoisse)은 걱정의 한 형식이다. 불안은 두려움이긴 하지만 규정된 어떤 대상과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알랑(Alain)이 말했듯이, 그 불안은 “두렵다는 두려움”(une peur d'avoir peur)이다. 어떤 성격을 정의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 사람들은 동요의 정도, 활동의 정도, 심층 반향의 현존(또는 부재)에 따라 성격을 구별한다. 이 심층의 반향이란 주도(primarité)적으로 또는 부차(secondarité)적으로 와 닿는 사건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방식을 의미한다. 참조: 성격학(caratérologie) (43VLD)
엠페도클레스 Empédocle 기원전 490-430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1.(P.304)
그리스 철학자이다. 엠페도클레스는 기원전 490년경에 시실리(Sicile)의 아그리장트(Agrigente)에서 태어나 430년(60살) 경에 펠로포네소스(le Péloponnèse) 반도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철학자가 올림픽 경기에서 한번 승리를 했던 인물이라 하고, 또는 그는 특출한 정치가 였다고 하며, 또 4원소설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란 물, 공기, 흙, 불을 말한다. 이것은 근대 화학의 시대에까지 채택되었다. 그는 자연 현상들 가운데서 모든 통합과 모든 종합의 원리를 “사랑”(Amour)라고 이름짓고, 모든 분할의 원리를 “증오”(Haine)라고 이름짓는다.
사람들은 그를 진화론과 돌연변이의 오랜 옛 선구자로서 간주한다. 말하자면, 그의 이론에 따르면 새로운 종은 자연 속에서 갑작스럽게 솟아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94년에 다알리아(dahlias) 꽃의 예처럼. (43VLD)
[달(Anders (Andreas) Dahl, 1751-1789) 스웨덴 식물학자이며 린네의 제자이다. 그의 이름을 따서 달리아(Le dahlia) 꽃의 이름이 있다. 달리아 꽃(Asteraceae dahlia)은 1791년에 명명되었다. 위키영어(enWiki)판에는 1802년 파리 식물원이 처음 받아들였고, 1804년 둘째 종이 네델란드 식물원에서 재배에 성공했다고 한다. 달리아 종은 중앙 아메리리카 멕시코 더운 지방이 원산지이며, 30종이 있다. - 아마도 위의 년도가 1894년이 아니라 1804년일 수 있다.(43VLD)]
경험적 (l')empiriqu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1.(P.304)
경험과 관찰이 방법적이든 방법적이 아니든 간에, 경험과 관찰에 근거한 것.
이 용어는 18세기 이래로 사용된 개념이며, 사람들은 약간 경멸적 의미라고 기꺼이 주목한다. 경험자(l'empirique)란 호의적이고 위임장 없는[면허 없는] 마을의 접골사(rebouteux)이며, 매우 자주 돌팔이 의사(le charlatan)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 단죄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은 전통의 일상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그리고 이론, 가설, 발명이 표현하는 정신의 창조적 기여에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과학은 반대로 경험을 높은 수준에서 요청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우리들의 상식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공통 경험과 예를 들면 온도계와 같은 척도를 도구로 사용하여 사물을 양적으로 표현하는 과학적 경험을 구별한다. 경험이 실험실에서 존비되고 조건이 갖추어진 경우를 사람들은 “실험”(expérimentation)에 대해 말한다. (43VLD)
경험주의 empirism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1.(P.304)
경험적 절차의 일체를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 견해를 수용하면서 “경험주의의 모색”(tâtonnements de l'empirisme)이란 말을 한다.
이 용어는 또한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흄(David Hume, 1711-1776)에 의해 전개된 학설을 지칭한다. 이 학설에 따르면, 인식은 전적으로 경험으로부터 도출된다는 것이다. 경험론은 합리론(rationnalisme)에 대립되며,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생득 관념이론에도 대립된다. (43VLD)
엔키리디온(Enchiridion, fr. Manuel 또는 지침서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1.(P.304)
에픽테토스(Epictète, Epictetos, 50-125/130)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의 제자 아리아누스(Arrien, en lat. Flavius Arrianus Xenophon, v.95-v.175)에 의해 그의 이론을 요약한 것이다. 이 작품의 핵심적인 열쇠는 우리에 의존하는 사물들과 우리에 의존하지 않는 사물들을 구별하였다. 전자의 에로는 우리 인격, 우리 지성, 우리 의지 등이며, 후자의 예로는 행운의 재화, 상황 등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자들에만 전념해야 한다. (43VLD)
백과사전 (l')encyclopédi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81-82.(P.304)
인간 인식의 총 집합을 의미한다. 즉 백과전서의 지식이란 확장된 지식 총체이며, 우주 내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이리하여 꽁트(Auguste Comte, 1798-1857)는 지식의 모든 영역, 즉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을 통일하여 하나의 백과학(encyclopédie)을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백과학의 지식을 “절대지식(savoir absolu)를 대립시키는데, 이 경우에 절대지식이란 심층의 총체적 지식, 즉 철학이 지혜 또는 자기의 완전한 지식이라 명명한 것을 의미한다. [과학적 지식과 인성적 지혜를 구분하는 것으로 보이며, 소위 인식론과 형이상학을 구분하는 것이다. 인식론의 원리로서 형상 형이상학은 공리와 관념이며, 삶의 인성적 원리로서 질료형이상학은 지혜와 공감을 다룬다. 전자는 외적 대상을 후자는 내재적 권능에 관심을 가진다.(40WKH)]
백과사전(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82-83.(P.304)
백과사전(Encyclopédie)이란 영국인 챔버스(Chambers Ephraïm 1680-1740)가 쓴 백과사전(Cyclopaedia)의 번역을 말한다. 이 책에 대해 서적상인 르브르통(Le Breton)이 1945년에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에게 번역을 부탁하고, 디드로는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의 도움으로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이 작품의 출판은 1751년에서 1780년에 내면서, 폴리오 판(in-folio)으로 17권과 판화 판으로 11권이 1751에서 1772년에 나오고, 보충판으로 5권은 디드로가 관여하지 않고서 1777년에 나왔으며, 그리고 판화판 2권은 1780년에 나왔다. 달랑베르는 「서설의 담론」에서 모든 인식들의 연결의 원리를 정의하고 하고 있다. 이 인식들이란 기억, 상상, 이성에 의해 연결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서설의 달론은 인간 정신의 진보의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철학은 이런 진보의 역사를 한편으로 되돌이켜 정리하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개념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반성 위에 새로운 창조가 나온다는 점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철학의 중요한 태도이다. 철학사와 개념사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이 사전에서 볼테르(Voltaire: Francois-Marie Arouet, 1694-1778)는 「élégance」, 「éloquence」, 「esprit」, 「imagination」 등의 항목들,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de Secondat, Baron de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1755)는 「goût」의 항목을, 룻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음악에 관한 항목들,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 1715-1771)와 신부 꽁디약(Etienne Bonnot de Condillac, 1715-1780)은 철학의 발달의 관한 항목을 맡았으며, 신부 이봉(Yvon)에게 신학을, 올바흐(Paul Henri d'Holbach, 1723-1789)에게 화학을, 도방똥(Louis Jean-Marie d'Aubenton, Daubenton 1716-1800)에게 자연사를, 마르몽뗄(Jean-François Marmontel 1723-1799)에게 문학비평을, 뒤마르세(Dumarsais)에게 문법을,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 Baron de L'Aulne, 1727-1781)에게 정치경제학을 맡겼다. 그리고 이 책의 영혼이자 주창자는 역시 디드로이다.
처음으로 이 사전이 만들어졌을 때, 이 사전은 모든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이 책을 만드는 철학은 철학을 정의한 데카르트 정신이었고, 데카르트의 이성은 모든 정신적 문제에 적용되었다. 즉, 분석과 비판의 정신은 과학의 진보의 이름으로 신부들의 환타지와 우스꽝스런 신앙을 단죄하는 또한 [교회와 왕권의] 권위와 전통을 단죄하였다. (40WKH)
백과전서파들 (l')encyclopédistes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3.(P.304)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가 1751년에서 1772년까지 편집한 백과사전(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의 협력자들을 말한다. 그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이다. 또 이들 중에는 프라드 신부(l'abbé de Prades),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 1715-1771)도 있다. 볼테르(Voltaire: Francois-Marie Arouet, 1694-1778),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de Secondat, Baron de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1755), 룻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꽁디약(Etienne Bonnot de Condillac, 1715-1780)도방똥(Louis Jean-Marie d'Aubenton, Daubenton 1716-1800) 등은 특히 1760년부터 참여하였다. 합리주의, 비판정신, 심지어는 엘베시우스의 유물론, 특히 작품의 혁명적 정신은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행사했다. 그들은 철학적 사유에 관한 교회의 권위의 항목를 표시했고, 그리고 혁명과 민주정의 정신적 조건을 규정하였다. (43VMA)
어린 시절 l'enfanc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83-84.(P.304)
태어나서 청소년에 이르는 인간 삶의 한 시기이다. 여기서 청소년이란 성적인 면과 삶의 조건 면에서 15세와 18세 사이에 이르는 시기이다.
어린이 심리학은 19세기에서 프레이어(William Thierry Preyer, 1841-1897, 영국태생 독일활동)와 더불어 생겨났으며, 삐아제(Jean Piaget 1896-1980, 스위스)와 왈롱(Henri Wallon 1879-1962, 프랑스) 특히 미국의 심리학자 아놀드 지젤(Arnold Lucius Gesell 1880-1961) 등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이들을 구별하게 하는 두 가지 근본적 이념이 있다. 1.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는 양적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차이가 있다. 어린이의 세계는 축소판으로서 어른의 세계와 동일하지 않다. 어린이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부족하기에 [아직] 인간이 아니다. 이 차이는 어린이가 성인과 달리 추론하고 느낀다는 정도에서 질적이다. 2. 어린이의 생물학적 발달(développement)은 사회적 발달에 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 근본적인 견해는 왈롱의 것이다. 어린이 발달의 가장 과학적인 연구들은 그가 태어나서 청소년에 이르는 것은 시기마다 따라가는 것으로서, 이것은 지젤의 연구이다. 그는 세 가지 독창적인 방법을 생각했다. 첫째 얘기테스트(babytests) 방법이다. 그것은 글쓰기 테스트들, 즉 어른에 만 적용되는 심리측정의 테스와 구별되는 방법이다. 둘째로, 영화적 분석(l'analyse cinématographique)의 방법이다. 그 어린이는 옆방과 유리 칸막이를 통해서 영화로 만들어져 분석된다. 셋째로 쌍둥이(jumeaux)의 방법이다. 이것은 유전의 몫과 환경의 영향의 몫을 분리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젤의 삼차원적 방법을 초기 어린이, 5세에서 10세, 청소년(la Premiere Enfance, De 5 a 10 ans, l'Adolescence)에서 읽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인격성의 발달에 대하여 프로이트는 세 가지 근본적인 단계를 구별하였다. 1. 구강단계(le stade bucal, ou oral). 이 시기는 태어나서 두 살의 시기이다. 이 단계 동안에 모든 즐거움 또는 모든 애정(affectivité)은 입(bouche)의 즐거움의 주위에, 즉 빨기(sucage)에 관한 것이다. 2. 항문단계(le stade anal). 두 살에서 4살의 시기이다. 이 단계는 청결을 배움으로서 나타난다. 이 시기에 어린이는 자기 물질(matière, 신체)에 관심을 표시하고, [몸의 상태] “유지하는”(se tenir)데 즐거움을 체험하며, 고집을 피우고 증오하는 파괴 충동을 제시한다. 이점에서 프로이트는 항문-가학성(sadique-anal)의 단계를 말하게 된다. 이 나이에는 연민(pitié)이 없는 시기이다. 3. 팔루스 단계(stade phallique) 또는 유아 생식기단계(génital infantile). 3-4살에서 6-7세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특별한 흥분의 영역이 생식기관들에 이전되며, 동시에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특징인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전개된다.
3살의 나이에 어린이는 인격성으로서 자기 인식을 한다. 이때에 타인에 대한 대치(affrontement)과 자기 자신으로 후퇴(repliement)라는 리듬을 시작한다. 4-5살 경에 은총의 단계(le stade grâce)가 위치한다. 사람들에게 그 시기에 부족함이 있었다면, 어린이는 공격에 의해 반작용하고, 6-7세가 되어서야 차분하게 된다. 7살의부터 어린이는 잠재기(la période de latence)에 들어간다. 7세에서 12살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는 꼬마 기술자가 된다. 얘들은 메카노놀이(Meccano, 조립놀이), 경기 놀이(jeux), 전쟁놀이 등을 한다. 12살에서 14살에 이르면 사춘기(la puberté)가 시작된다. 이시기에 동료(un camarade)의 단계는 친구(un ami)의 단계로 이행한다. 그리고 나서 청소년기가 온다. 이 시기는 자기 자신에 반성(relpliement)과 부모와 대치로 특징 지워 진다.
지성의 발달의 관점에서, 1. 태어나서 10개월에 어린이는 마까끄(macaque) 원숭이의 지성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마까끄 원숭이는 열대 아시아산 원숭이로서 가장 발달된 지성을 가졌다고 한다. 이 시기에 어린이는 반성과 습관을 올바르게 지닐 수 있다. 2. 10개월에서 12개월 사이에 사람들은 발드윈(James Mark Baldwin 1861-1934)이 “순환 반작용”(réaction circulaire)라 불렀던 것에 주목한다. 그 어린이는 딸랑이(le hochet)를 백 번 떨어지게 한다. 그는 이렇게 낙하에 대해 의식하게 되고, 그 운동성을 통제하기에 이르러, 자신의 팔다리를 의지적으로 지도하기에 이른다. 3. 12개원에서 13개월 사이에는 “시차 있는 반작용”(réaction différée)이 나타난다. 어린이는 그에게 보이지 않지만 상자 속에 있는 과자를 욕망할 수 있다. 4. 그리고 나서 지성은 언어의 진보와 더불어 발전한다. 참조: 정신연령. (43VMA)
어린 시절의 정신 (l'esprit d')enfance [유치한 정신]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4.(P.304)
자신 속에 어린 시절의 마음을 알고서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경향.
절대자의 의미, “영혼의 신선함”, 순수에 대한 취향 등은 이러한 태도의 적극적(positives) 구성물들 속에 들어있으며, 이 태도는 관대함과 함께 자주 주목받는다. 이 태도는 그것들만큼은 아니라도 예술가와 작가에는 용기를 주는 것이나, 심리학자들에게는 동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기에 어린시절 정신의 소극적(nagative) 측면에 경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정적 측면에서 심리학자들은 삶 앞에서 도망의 표출로서, 책임들을 회피하는 부드러운 피난, 어른 조건으로서 할당된 몫인 위험과 타협으로부터 피난 등을 당연하게 보았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런 특별성을 주목하면서, 유치한 정신이 잘 유지된다면 그것은 예술가와 시인의 특권(privilège)과 같을 것이며, 또한 어느 정도에서는 그것은 기형성(l'infimité), 즉 고지식한 자이거나 정신적 소외자의 것과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의 세계는 사회적 책임의 세계에 대립되며, 또 인간 노동의 세계와 대립된다. [미셀 투르니에의 “디망쉬”(Dimanche)라는 주인공을 통해 어린 시절이 놀이로 가득해야 한다고 한다.] (43VMA)
참여 (l')engagement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84-85.(P.304)
의무들과 이념들의 충돌 앞에서 중립적이지 않게(non-neutralité) 취하는 태도.
이 참여라는 용어자체는 60년대에 무니에(Emmanuel Mounier 1905-1950)의 인격주의에 참여자와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실존주의에 참여자들에 의해 이목을 끌게했던 용어이며, 겉으로만 현실적이다.
소크라테스(Socrate)는 참여철학을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것을 잘 볼 수 있다. 예수(Jésus)가 성전의 상인들을 몰아냈을 때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도 또한, 당시의 자유주의자(libertins)에 대항하기 위하여 팡세(Pesées)를 작성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볼테르(Voltaire, Francois-Marie Arouet, 1694-1778)도 신교도인 칼라스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관용론(Traité de la tolérance)를 낸 것도 마찬가지다. 사상과 철학의 도식을 향한 “참여”란, 작가와 시민의 구성원들의 참여가 갖는 무게보다 더 무게 있는 위험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철학은, 정숙하게 탐구를 이끈다는 점에서 학문적이고, 게다가 정치적 종교적 선택들과 독립적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기를 바랐다. 적어도 이 참여 개념은 그 자체적으로 논란거리이고 또 결과적으로 논란되었던 것이며, 이것은 고전철학에서 의지적으로 냉담하고, 모호하며,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고전철학을 자유롭게 했다. 따라서 이 이 참여개념이 무관심하게(désintéressée) 남아있다고 이해한다하더라도, 사유는 모든 사람에게 무상혜택(gratuite)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용한 것이기를 바란다. 무니에의 경우에, “참여”란 세계 속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건전한 삶”의 규칙이라고 썼다. 반대로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경우에, 철학자는 말하면서 참여할 뿐이며, 표현함으로서 참여이지 행동하면서 참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철학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편들지 않는다. 철학자는 자신의 동의에 따라 실질적이고 육체적인 어떤 것을 갈망하는 것이고 ... 반성을 우선 그것을 다시 해결하고, 그러나 철학자도 세계와 역사에 얽매여 있다는 진리의 연결들(liens 연쇄들)을 더 잘 철학자에게 체험하게 한다.” (43VMA)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5.(P.304)
엥겔스는 독일 사회주의 이론가이다. 그는 1820년 프로이센 라인지방의 바르멘(Barmen)에서 태어나 1895년(75살) 영국 런던에서 죽었다.
그는 부유한 산업가의 아들이었고, 베를린에서 공부했다. 그의 첫 번째 작품인 셸링과 계시(Schelling et la Révélation, 1842)는 관념론 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끌기 위해 영국으로 갔었는데, 그는 거기서 그가 본 것을 묘사한 것은 영국에서 노동자 계급의 상황(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 1845: Situation de la class laborieuse en Angleterre)에서이다. 여기서 그는 노동 사회학의 기초자로서 역할을 한다. 그는 영국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들 분석하고 서술하였다. 그는 공장이 들어서는 새로운 환경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노동에 의해 제기된, 특별한 문제들을 주목하였다. 1844년에 그는 파리에서 맑스를 만났다. 그들의 상호 우정은 중단없이 계속되었으며, 그들의 협력은 매우 끈끈하여 맑스의 저작 속에 엥겔스의 정확한 부분을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그들은 청년헤겔주의자, 관념론, 기계적 유물론의 비판으로 신성가족(Saint Famille, 1845)을, 또한 사적 유물론의 기초를 설명하는 독일 이데올로기(L'idéologie allemande, 1845-1846)를, 또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 Manifeste du parti communiste, 1848)를 함께 썼다.
엥겔스는 1890년까지 독일 사회주의의 우두머리로 간주되었다. 그는 맑스의 유고작품으로 자본론의 제2부와 제3부를 출판했다. (42LMC)
즉자 en-soi [자기 안에]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5.(P.304)
우리와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물질적 실재성이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모은 사물들, 물체, 우주 등이다. 영혼이 작동하는 동안 현존하는 신체는 또 다른 즉자이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서 “물자체”(chose en soi)는 우리의 감각의 기원에 속하는 물질이다. 물자체는 현상(le phénomène)에, 즉 우리의 정신에 의존하는 표상(représentation)에 대립된다.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는 물 자체로(chose en soi, an sich)와 자기의 내부라는 의미에서 자체 속에(en soi, in sich) 있는 반성하는 정신의 삶을 구별했다. 어떤 경우에는 객관적 즉자의 문제이고, 다른 경우에는 주체의 절대적 경험에 동일한 즉자의 문제이다. 헤겔에 이어서 사르트르와 현대 철학은 즉자(l'en-soi, la chose)를 대자(le pour-soi, 인간 현존)에 대립시킨다. 여기서 즉자는 자신의 불변질성(immuabilité)에 의해 특징 지워지고, 대자는 자기의 운동성과 자기의 자유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43TKA) [프랑스 철학에서 즉자 개념의 다의성은 물자체로, 물자체와 연관해서, 물자체인 신체에서, 의식의 내재성에서 등으로 다양하게 제기되기 때문일 것이다.(43TKA)]
오성 (l')entendement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85-86.(P.304)
오성은 지성(l'intelligence)이며, 인식의 능력(faculté)이다.
오성은 판단(le jugement)과 구별된다. 판단은 삶의 특별한 경우에 오성의 추상적 인식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철학자들은 오성 즉 인식의 능력을 의지(volonté) 즉 판단과 의지의 능력과 구별하였따.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에 있어서, 오성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지칭하며, 논의할 수 있고 논증할 수 있는 이성의 그 위에(au-dessus)에 위치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있어서 오성은 이성의 그 아래(en-dessous)에 위치하며, 오성은 실재적 세계의 대상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반면에 이성은 우리의 무한한 열망과, 그리고 의무의 도덕적 감정과 동일시된다. (43VMA)
열광 (l')enthousiasme 종교적 열광 예술적 영감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6.(P.304)
기쁨의 흥분 상태.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의 대화편 이온(Ion)에서, 이것은 정신을 인간의 선입견 그 위로 고양하고 이동하게 하는 영적인 신들림(possession divine)에 속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스어로 엔 테오스(ên-theos)란 신속에서(être en Dieu)란 의미이다. 다른 한편 호기심의 어떤 것이다. 고대인들은 정열적인 열렬함을 지녔는데, 그 열렬함이란, 철학자가 진리 탐구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상태를 위하여, 열광(l'enthsiasme)이 부여한 것이다. 그 열광은 철학자에게 만큼이나, 음악가에게, 전사에게, 성직자에게 부여된 것이다.
에픽테토스 Epictète, gr. Epiktetos, 50-130)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6.(P.304)
그리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이다.
에픽테토스는 50년경에 서아시아 남부의 내륙에 있는 프리지(Phrygie) 지방의 히에라폴리스(Hiérapolis)에서 태어났으며, 130년경(80살쯤)에 그리스 반도 북서부의 에피르(Epire)지방의 니코폴리스(Nicopolis)에서 죽었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로마에서 그는 에파프로디트(Epaphrodite)라는 사람의 노예로 있었다가 네로(Néron)로부터 해방되었다.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37-68, 재위 54-68)황제와 시기가 맞지 않는다. 시기적으로 네르바(Nerva, Marcus Cocceius Nerva, 30-98, 재위 96-98)황제 시대가 아닐까?]
해방이 되고 난 뒤에, 그는 자기 이론의 교육에 힘썼다. 그와 더불어 그 철학은 덜 이론적이 되었다. 그 철학은 삶의 실천을 위하여 인간에게 품행의 규칙들(les règles de conduite) 소박하게 부여하는 것으로 족했다. 그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며, 그의 제자 아리아누스(Arrien, gr. Arrhiannos, lat. Flavius Arrianus, 95-175, 에픽테투스 제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노트들을 에픽테토스 엔키리디온(Enchiridon, 지침서 Manuel)를 출판하였따. 그의 이론은 “영혼의 부드러움”(douceur de l'âme)을 권장하고, 다른 인간들과 관계들과 품행에서 높은 엄격성을 주의깊게 설파하였다. (43VMA)
에피큐로스 Epicure 341-270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6.(P.304)
그리스 철학자이다. [기원전 341년에 사모스(Samos) 또는 아테네(Athènes)에서 태어나 270년(71살)에 아테네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었고, 어머니는 점장이(devineresse)였다. 그는 대부분의 삶을 아테네에서 보냈다. 그는 아테네에서 306년(35살)에 한 학교를 열었는데, 하늘이 열려진 학교, 즉 그 유명한 “에피큐로스의 정원”(Jardin)이라 불린다. 거기서는 그는 친구들과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는 우리에게 3편의 편지를 남겼다. [세 편의 편지: 「헤로도토스(Hérodote)에게 보낸 편지(자연학에 관하여)」, 「피토클레스(Pythoclès)에게 보낸 편지(기상학에 관하여)」, 「메네세(Mécénée)에게 보낸 편지(도덕에 관하여)」이다] 그 편지에서 자기 이론의 요약, 특히 도덕론이 들어있다. 에피큐로스는 즐거움이 최고의 선(le plaisir est le souverain bien)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이 그것을 약간 가볍게 또는 부당하게 말하게 되는 것처럼 인간이 손쉬운 관능적 쾌감을 포기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복은 지혜, 정신적 교양(la culture), 덕의 실천 등의 보상이라고 그는 이해한다.
그의 이론이 “쾌락의 계산”(calcul des plaisirs)이라고 여기는 것은 상당히 잘못 이해되고 있는 근원인데, 정확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에피큐로스는 우리에게 도달해야될 목표로서 쾌락의 이성적 사용을 제공했고, 또는 그는 쾌락을 적절하게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했다. 1. 쾌락들을 조장하는(favoriser) 것, 2. 쾌락들을 인정하는(admettre) 것, 3. 쾌락들을 달아나게 하는(fuir)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쾌락들을 조장하고,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인지 않는 쾌락들을 인정하고, 자연적이지도 필수적이지도 않는 쾌락들을 멀리할 것을 제안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영혼의 안정(le repos), 즉 아타락시아(ataraxia, fr ataraxie)라는 인간의 특권적 상태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어 아-타락시스(a-taraxis)란 동요(trouble)이 면제된 것을 의미한다.
에피큐로스의 정원은 기원전 4세기에 아테네의 고통스런 사회 속에서 평화의 항구였으며, 활동적 제자들의 은신처였다. 거기에는 소박함과 상대적 금욕생활이 행해졌다. 시인 류크레티우스(Lucrèce, 98-55 기원전)는 에피큐로스 학파의 가장 유명한 제자이며, 사물의 본성(De natura rerum)에서, 에피큐로스가 죽은 후 3세기 후에, 에피큐로스에 대하여 “그는 한 신(un dieu)이었다. 그래 맞어. 그 신은 사람들이 요즈음 지혜라고 부르는 삶의 방식을 발견한 첫 번째 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에피큐로스주의 기원전 2세기 경에 이집트, 안티오크[현 터키 남부 지중해변 지역], 로마에서 발전되었고,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에서 파이드로스(Phaidros, fr. Phèdre)와 더불어 에피큐로스주의의 중심을 이루었다. [위키(fr.Wiki)에서: 파이드로스(Phèdre, Φαίδρος, Phaidros ?-기원전70년경)는 기원전 1세기경의 에피큐로스 학파의 철학자로서 기원전 75년경 아테네 에피큐로스 학파의 대표자였다. - 설명에서 처럼 ‘로마’에서 활동이 많아서 로마에 퍼트린 철학자일 것이고, 게다가 그의 친구이며, 키케로의 친구였던 아티쿠스(Titus Pomponius Atticus 기원전 109-32)에 의해 로마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에피큐로스주의는 17세기에 감각론 철학자 가상디(Pierre Gassendi, 1592-1655)에 의해 새롭게 알려졌고, 앵글로색슨의 철학자들,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등의 공리론적 도덕론에 영향을 주었다. 참조: 도덕론
* [그림 설명: 벨라스케즈(Diego Rodriguez da Silva y Velazquez, 1599-1660)의 「젊은 상인들」(Les jeunes Marchands) 카스트르(Castres)미술관 소장. 에피큐로스의 왈 “내가 향연(bombance)을 하기 위해서 한잔의 우유를 가져다 달라” 에피큐로스의 어린이는 단지 간소한 욕망들만을 갖는다.] (43VME)
부대현상 (l')épiphénomèn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6-87.(P.304)
부속(accessoire) 현상을 말한다.
부대현상주의(l'épiphénoménisme)은 한 이론이며, 이 이론에 따르면 의식은 유기체적(organiques) 현상들의 단순 반영일 뿐이다. 예를 들면, 의지 작용(l'acte)의 의식은 행동의 기원에 있을지 모를 자유로운 결심의 의식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단순 순수하게 [두뇌의] 신경과정에서 동반하는 단순한 미광(un simple lumière)일 뿐이다. 신경망은 우리 작용(l'acte)의 진실한 동기들일 텐데. 의식은 아무 것도 만들지 않으며, 부대현상이다.
[독일 심리학자]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 1850-1909)는 의식을 극장에서 구경꾼에 비교했다. 사실상 의지적 작용의 생리학적 조건들은 정신 속에서 모든 관념의 조건들처럼 또는 의식의 모든 상태의 조건들처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비교감신경과 면역체계는 의식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안에 내재하는 의식이다] 부대현상주의는 검증할 수 없고 또 무용한 가설로 남아있다. (43VMH) (trans, 57PK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