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월 상순(10수)
하루시조060
03 01
님이 정녕 남이건만
무명씨(無名氏) 지음
님이 정녕 남이건만 어이 그리 유정(有情)한고
님 없으면 나 못 살고 나 없으면 님 못 사네
지금에 초로인생(草露人生)이니 평생(平生)을 동고동락(同苦同樂)
유정(有情) - 인정(人情)이나 동정심(同情心)이 있음.
초로인생(草露人生) -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은 인생이라는 뜻으로, 허무하고 덧없는 인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동고동락(同苦同樂) - 괴로움도 즐거움도 함께함.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빼면 어쩌고저쩌고, 유행가가 생각나는 작품입니다. 유정과 비정(非情)이 그 점 하나에 의해 갈라집니다. 이 작품의 시심은 중장에 몰려 있군요. 서로가 없으면 못 사는 사이. 우리네 초로인생이라 더욱 그러하다는 말에 꼼짝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곁에서 가늘게 코를 고는 옆지기를 빤히 쳐다보며 동고동락 사자성어를 음미해 봅니다.
종장의 끝은 시조창법상 생략된 것으로 ‘하리라’ 정도로 읽으면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61
03 02
달 밝고 서리친 밤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달 밝고 서리친 밤에 울고 가는 기러기야
소상동정(瀟湘洞庭) 어디 두고 여관한등(旅館寒燈)에 잠든 나를 깨우느냐
밤중만 네 울음소리 잠 못 이뤄
기러기 - 오릿과에 딸린 철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오리와 비슷하나 목이 길고 다리가 짧으며 강, 바다, 늪가에 산다. 가을에 한국에 와서 봄에 시베리아, 사할린, 알래스카 등지로 가는 겨울 철새이다. 쇠기러기, 큰기러기, 회색기러기 따위가 있다.
소상동정(瀟湘洞庭 - 중국 지명인 소상강과 동정호를 한꺼번에 이르는 말.
여관한등(旅館寒燈) - 나그네 객사의 차가운 등불이라는 뜻으로 한시(漢詩)에 곧잘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밤중만 – 한밤중에.
기러기는 작자의 심정을 투사할 대상입니다. 후조(候鳥), 철새인 기러기는 우리나라를 겨울나기로 사용하는 새인지라 조상님들이 자주 불러내어 노래하곤 했습니다. 고무줄놀이에도 가위바위보 놀이에도 '울고 가는 저 기러기'라고 나왔고요. 봄이 완연해진 요즘 기러기들은 짐을 다 쌌는지.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62
03 03
구름은 가건마는
무명씨(無名氏) 지음
구름은 가건마는 나는 어이 못 가는고
비는 오건마는 님은 어이 못 오는고
우리도 구름 비 같아야 오락가락 하리라
님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작품입니다. 이렇게 쉬운 시조가 있을려나요. ‘쉬운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게 이 무명씨 시조들을 두 달 남짓 풀이하고 있는 제 생각입니다. 자, 한 번 보시지요.
구름은 ‘가’고, 비는 ‘오’고. ‘우리’ 속에 숨은 님과 나는 오고가고. 우리네 일상 언어 속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썼고요,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저 오명가명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치가 들어 있고요,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는 한(恨)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 더, 좀 어려운 해석도 가능한데요. 초 중 종장을 나, 님, 우리로 정 반 합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름이나 비 같아야, 어떤 상태여야 오거니 가거니 할 수 있는 건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63
03 04
금준에 주적성과
무명씨(無名氏) 지음
금준(金樽)에 주적성(酒滴聲)과 옥녀(玉女)의 해군성(解裙聲)이
양성지중(兩聲之中)에 어느 소리 더 좋으니
아마도 월침삼경(月沈三更)에 해군성(解裙聲)이 더 좋아라
금준(金樽) - 금으로 만든 술통. 화려하게 만든 술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주적성(酒滴聲) - 술을 내릴 때 떨어지는 방울 소리.
옥녀(玉女) - 마음과 몸이 깨끗한 여자를 옥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해군성(解裙聲) - 저고리 풀어헤치는 소리.
좋으니 - 좋으냐
술과 여인을 비교한 작품입니다. 요즘 인간관계의 한 잣대인 ‘성 인지도’ 입장에서 보면 여인과 술이 비교 가능한 동가 동질의 대상이냐는 반문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명씨 작품의 한 특징이기도 한, 얼굴이 가려진 사내가 대놓고 술 방울 소리냐 저고리 벗는 소리냐 묻고 있으니, 선정적(煽情的)이고 외설적(猥褻的)입니다.
김광균 시인의 시 <설야(雪夜)>에 나오는 ‘먼 데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표현이 무명씨의 시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의심해 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64
03 05
길을 갈 데 몰라
무명씨(無名氏) 지음
길을 갈 데 몰라 거리에서 바장이니
동서남북(東西南北)의 갈 길도 하도 할사
앞에서 가는 사람아 정(正)길 어디 있느니
바장이다 - 서성이다.
하다 – 많다.
길을 찾아 가기가 어려움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하도 할사, 많기도 많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것이겠지요.
길, 사람이 밟아 옮겨가는 길이라는 본래의 뜻보다는 인생길, 역정 등의 2차적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듯합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아, 바른 길이 어디더냐 묻고 있군요.
자주 쓰는 말로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 성어가 있죠. 갈림길 기, 길을 가다보면 갈라지는 길이 나오기 마련인데, 뒤쫒아 가는 사람은 앞서간 사람의 향방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요. 학문의 길, 그 지난함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앞서서 길을 개척하는 사람의 책무가 막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65
03 06
까마귀 검으나다나
무명씨(無名氏) 지음
까마귀 검으나다나 해오리 희나다나
황새 다리 기나다나 오리 다리 짜르나다나
세상에 흑백장단(黑白長短)은 나는 몰라 하노라
~나다나 – 하든지 말든지. 그러하든지 아니든지. 다 를 따 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
흑백장단(黑白長短) - 검거나 희거나, 길거나 짧거나. 세상에는 비슷한 건 몰라도 똑같은 건 없다는 설명이 들어 있음.
세상의 시비장단(是非長短)으로부터 초연해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시비 是非, 이 시 이지만 여기서는 옳을 시 입니다. 아닐 비 도 여기서는 그를 비 이고요.
초장은 까마귀와 해오라기의 깃 색깔, 중장에서는 황새와 오리의 다리 길이를 대조하여 종장의 주장에 대한 예로 들었습니다. 미괄식(尾括式)이죠.
황새가 예전에는 흔했던 모양입니다. 오리랑 비교를 해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요즘은 황새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환경의 변화, 문학작품 속에도 반영된다 싶으니 안타깝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66
03 07
까마귀 너를 보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까마귀 너를 보니 그려도 애닯아라
네 무삼 약(藥)을 먹고 머리조차 검었는다
아마도 백발(白髮) 검길 약(藥)은 못 얻을까 하노라
그려도 – 그리워해도. 다른 해석도 가능한 애매함이 있는 표현입니다. 가령 ‘눈앞에 확실하게 보고 있어도’ 라고 풀어도 의미가 통합니다.
애닯아라 – 애달프다.
무삼 – 무슨.
검길 – 검게 할.
젊음에 대한 희구(希求)를 노래했습니다. 무슨 약을 먹었냐고, 머리까지 검디 검냐고, 지은이의 머리카락은 백발이 더해가건만. 그래서 부럽고 늙어가는 자신이 애달프기만 하다고.
사실은 까마귀가 애닲은 게 아니라 자신의 처지가 그렇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머리 ‘조차’는 몸이 검은 건 그렇다하더라도 머리까지 쇠지도 않았다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67
03 08
꽃은 울긋불긋
무명씨(無名氏) 지음
꽃은 울긋불긋 잎은 푸릇푸릇
이 내 마음은 우즑우즑 하는고야
춘풍(春風)은 불고도 나빠 건듯건듯 하노라
우즑우즑 – 우줄우줄 건들거리는 모양.
건듯건듯 – 건들건들.
봄날의 싱숭생숭한 마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봄바람이 불어서 들뜬 마음을 더욱 부추긴다는 내용입니다. 네 자로 된 의태어가 네 개나 사용되었습니다. 우즑우즑, 건듯건듯은 의미 파악이 잘 안될 수도 있겠습니다. 언어의 역사성(歷史性)에 따라 사라져가고 있거나 죽은 말이 되었다고 봐야겠습니다. 종장의 ‘나빠’는 ‘모자라’의 뜻일진대, 우리네 아이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봄바람은 참 헤살궂습니다. 제 친구 낚시광 하나는 겨우내 기다렸던 출조(出釣)의 기쁨이 봄바람 탓에 오전에만 맛보노라 투덜대곤 합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대류(對流)현상 때문에 오후만 되면 여축없이 바람이 불고. 흔들리는 찌를 바라볼 수 없어 낚대를 거둘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꽃샘바람이나 잎샘바람도 그렇겠지요.
문제는 인간사의 봄바람일 것입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어쩌고저쩌고.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68
03 09
달 밝아 좋다 할까
무명씨(無名氏) 지음
달 밝아 좋다 할까 내 홀로 슬희와라
은하(銀河) 기울고 저 서창(西窓)으로 도질 때에
가뜩에 상사(想思)로 병(病)든 회포 지향(指向) 없어
슬희와라 – 슬프구나.
은하(銀河) - 천구(天球) 위에 구름 띠 모양으로 길게 분포되어 있는 수많은 천체의 무리. 여기서는 은하수(銀河水, 은하를 강(江)에 비유하여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도질 – 도지다(없어졌던 것이 되살아나거나 다시 퍼지다.)로 플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혹자는 ‘사라질’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가뜩에 – 가뜩이나(그러지 않아도 매우.).
상사병(相思病)을 앓는 아픔을 노래했습니다. 남들은 달이 밝아서 좋다는데, 작자 홀로 슬프답니다. 함께 보며 달노래라도 부르고 싶건만 오히려 혼자이니 더욱 애닯은 회포(懷抱)인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몰래 앓는 사랑이 아니라 대놓고 들이대는 스토킹이 더 많다니 이 작품의 진가(眞價)가 더 나갈 듯합니다.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창법에 따른 것으로 ‘하노라’ 정도로 읽힙니다. 지향이 없으니 어지럽겠군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069
03 10
산상에 밭가는 백성아
무명씨(無名氏) 지음
산상(山上)에 밭가는 백성(百姓)아 네 신세(身世) 한가(閑暇)하다
착음경식(鑿飮耕食)이 제력(帝力)인 줄 모르는다
하물며 육식자(肉食者)도 모르거든 물어 무삼하리오
신세(身世) - 처지나 형편.
한가(閑暇)하다 - 겨를이 생겨 여유가 있다.
착음경식(鑿飮耕食) - 샘 파서 마시고 밭갈아 먹음.
제력(帝力) - 제왕의 힘.
모르는다 – 모르느냐.
육식자(肉食者) -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 여기서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비유함.
제력(帝力)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풀어지는 작품입니다. 황제는 하늘의 뜻을 받아 땅을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교화(敎化)를 통해 만물을 통치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무식한 농군일망정 제력에 힘입고 하늘의 은덕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이 작품의 초장과 중장은 농부에게 그런 내용을 아느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는데, 이유인 즉 고관대작들도 항용 잊곤 하는 문제인데 하물며 농군이야 잊고 산다고 죄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하는 시조집 중 어떤 것에는 이 작품이 이이(李珥)라 적혀 있거나 다른 책에는 백호(白湖)라고 적혀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시조집은 개인 문집에 수록된 것 외에는 거의 필사본으로, 시조창의 대본으로 전해내려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