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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권. [고대] 그리스 시대, Période Hellénique 35
제4장 아리스토텔레스와 리케이온 Aristoten et le Lycée 151
[#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와 작품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385년 에게 해 북쪽에 있는 즉 칼키디케 동쪽에 있는, 마케도니아 지방 스타게이로스(Stagire, Στάγειρος), 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367년[열일곱]에 입학한 플라톤의 학교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스승이 죽고 난 후에, 그는 스승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아타르네우스의 참주인 헤르미아스(Ἐρμίας ὀ Αταρνεύς) 영향 하에 있는 아이올리스(L'Éolide, ᾈολίς) 지역의 아소스(Assos, Ἄσσος)으로 갔는데, 그 중에 크세노크라트(Xénocrate de Chalcédoine, Ξενοκράτης, 전396-전314)도 있었다. 헤르미아스는 그 당시 두 강대국인 마케도니아와 페르샤 사이에서 정치를 잘 했다. 전343년[마흔하나]에 레스보스(Lesbos, Λέσϐος)섬에 있는 뮈틸렌(Mytilène, Μυτιλήνη)에 있었다. 이때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le roi Philippe II, ὁ Φίλιππος, de Macédoine, 전382-전336)에 불려가서 수도인 펠라(Pella, Πέλλα)의 궁정에 머물면서, 어린 알렉산드로스(Alexandre, Ἀλέξανδρος, 전356-전323)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인들 가운데서 권력있는 자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그 중에는 안티파트로스(Antipater, Ἀντίπατρος, 전397–전319)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Callisthène d'Olynthe, Καλλισθένης; 전360경–전328)가 알렉산드로스 친구들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나중에 그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가 전335년에 아테네로 되돌아왔을 때, 아테네에서는 도시가 쇠퇴하여 침묵 속에 있는 가운데에서도, 민족주의 당파가 아직도 존속했다. 사람들은 이 재외거류민[아리스토텔레스]을 마케도니아 편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아카데미아로 돌아가지 않고서, 뤼케이온(Le Lycée, Λύκειον)에 새로운 학교를 세우고, 13년 동안 가르쳤다. 전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고서, 데모스테네스(Démosthène, Δημοσθένης, 전384-전322)가 아직도 이끌고 있었던 아테네의 민족주의당이 행한 반마케도니아 운동의 위협을 받아 아테네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유산이 있는 에우보이아 지방의 칼키스( Chalcis Χαλκίς, en Eubée, Εὔϐοια)로 은퇴하였고, 거기서 전322년 63세로 죽었다.
그의 생애는 플라톤의 생애와 아주 다르다. 그는 영혼의 깊이에서도 고귀한 귀족 출생의 정치적인 아테네인이 아니었고, 철학을 도시 정부와 분리하지 않으려했던 그런 아테네인도 아니었다. 사변적 탐구에 몰두한 이 인간은 도시국가로부터 분리되어 연구하는 인간이며, 행동할 기회가 더 많았다고 하더라도 정치학 자체를 학문과 역사의 대상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플라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들만을 알고 있고 그의 교육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을 모르는데 비하여,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대중들을 위해 쓴 저술들에 대해서 아주 작은 단편들만 남아있고,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가정교사로 가기에 앞서서 아마도 아소스에서 행한 강의들을 위한 강의록들이든지 또는 뤼케이온에서 교육을 위해 작성되었던 강의록들이다. 말하자면 대학교의 교수 자신이 작성했던 노트들은, 문학적 완전함에 대한 어떠한 탐구가 아닐 지라도, 또는 가끔 강의 전개를 위해서 단순히 방점들을 찍었던 것일지라도, 제자들의 노트들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 작품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52)
1. 많은 대중들에게 행해진 젊은 시절의 저작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이것을 대중적 담론라고 불렀다), 즉 이 대화편들은 키케로가 그의 유창함에 대해 ‘황금의 강물’라고 말하면서 좋게 평가했던 것에 적용될 수 있다. 그 나머지로서는 독일 문헌학자 로제(Valentin Rose, 1829–1916)가 집성한 몇몇 단편들이 있다. 그것은 우선 에우데모스 윤리학편인데,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대화편이다. 그리고 [소실된 초기 대화편 작품으로] 프로트렙티코스(권고, 설교)라는 작품은 퀴프로스(Chypre, Κύπρος) 섬의 왕자인 테미손(Thémison Θεμισων, s.d.)에게 행한 설교인데, 이에 응답으로는 아마도 이소크라테스(Isocrate, Ἰσοκράτης, 전436–338)의 한 제자가 행한 것으로 여기는 담론인 데모나코스에게가 있다. 이 담론의 저자는 송사들의 실천에 무관심하여 우회하고 있으면서,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에게 대해 불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실된 초기 대화편 작품으로] 철학에 대해(선에 관하여)편이 있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학당에서 벗어나는 시기의 것이다. 이 작품은 철학적 사유의 역사 이후로서, 이데아들의 이론들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었고, 별들의 신성을 증명했던 천체 신학에 의해 완성되었다. (152)
2. 학술적 저작들의 총서
도구(Ὄργανον)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논리학 총서: 「범주론(Κατηγορίαι)」, 「해석론(Περὶ Ἑρμηνείας)」(판단들에 관하여), 「변증론(Τοπικά)」(토론의 규칙들에 관하여), 「소피스트 반박들(Σοφιστικοὶ Ἔλεγχοι)」, 「분석론 전편(Ἀναλυτικὰ Πρότερα)」(일반 삼단논법에 관하여), 「분석론 후편(Ἀναλυτικὰ Ὕστερα)」(증명에 관하여)이다. 사람들은 여기에다 수사학(Tέχνη ῥητορικὴ)과 시학(Περὶ ποιητικῆς)을 덧붙일 수 있다.
자연배후학/형이상학(τὰ μετὰ τὰ φυσικά)이란 제목으로 된 제일 철학에 관한 모음집이 있다. 이 저술은 12권으로 되어 있은데, 그리스 대문자[대문자는 숫자를 표현하기도 한다]로 매겨져 있고, 여기에 제1권의 보충으로 한권(Petit alpha α: 작은 알파편)을 더한다. 이 분류가 유일한 주장이 아니다. 이 작은 알파편[제2권]은 따로 일종의 ‘자연학의 서설’로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알파편은 에우데모스(Eudème, Εὒδημος, 전370경-300경)의 조카인 파시클레스(Pasiclès, Πασικλές, s.d.)의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델타편[제5권]은 철학적 개념들의 다양한 의미들을 지적하고 있다. 제타, 에타, 세타[제7, 8, 9권] 편들은 실체론을 형성하고 있고, 여기에 이오타편[제10권]을 덧붙여야 하고, 그리고 뮈편[13권](1장에서 9장, 1086a 20)으로 연속된다. 알파[제1권], 베타[제3권], 감마[제4권], 엡실론[제6권], 뮈(1086a 20이래로), 뉘[제14권] 편들은, 비록 이데아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 본인 스스로가 플라톤학자들 중에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기보다 앞선 시기이다. 카파편[제11권](1장에서 8절까지)은 제자들의 노트일 것으로 보이며, 앞선 그룹과 동일한 시기에 연관되어 있으며 이 그룹의 편들을 요약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람다편[제12권]은 신학적 개론이자, 다양한 실체들에 관한 일체의 개론서이며, 그 자체로서도 충분하다. (이 중에서 제8장을 제외해야 한다. 이 장은 혹성들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매우 필연적인 천구들에 수에 관한 특별한 탐구이며, 또한 이 장은 천문학자인 칼리포스(Callippe de Cyzique, Κάλλιπος, 전370경–300경)와 연관이 있다. 칼리포스는 전330년에 아테네 지역의 책력을 개혁할 것이다).
자연에 관한 저작들: 자연학(Φυσικὴ ἀκρόασις)이 있는데, 이 책의 가장 오래된 부분은 1권, 2권 7권 8권인 것으로 보인다. 천체론(Περὶ οὐρανοῦ), 이 책은 소실될 대화편인 철학에 관하여(Περὶ φιλοσοφίας)에 참조를 표시한 것으로 보아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 같다. 생성소멸론(Περὶ γενέσεως καὶ φθορᾶς). 기상학(Μετεωρολογικά), 이 책의 4권과 마지막 권은 종종 진위를 의심받았다. 까르뜨롱(Carteron, 1891–1929)에 따르면 진위가 의심스런 저작인 역학 문제들도 있다. (153)
생물학적 저술들의 총서도 있는데, 과학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동물들의 부분들와 동물들의 생식 그리고 작은 개론서들로서 동물들의 걸음걸이와 동물들의 운동이 있다. 동물사도 있다. 이 생물학적 총서에 심리학적 총서를 이어 붙일 수 있다. 중요한 개론서로서 영혼론이 있고, 이어서 소품들로서는 감각론, 기억과 회상론, 잠과 각성론 꿈들(Des reves, Περὶ ἐνυπνίων) 꿈의 예언, 장수와 단명 론, 젊음과 늙음, 숨쉬기가 있다. (153)
도덕 정치 저작들의 총서로서는, 에우데모스 윤리학은 첫째 작품으로 플라톤에 매우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있다. 정치학은 두 가지 다른 영감을 다루고 있는데, 하나는 에타편과 쎄타편의 것인데, 이상국가의 이론을 포함하고 있고, 알파, 베타 감마 편들은 입문인 셈이다. 다른 하나는 델타, 엡실론, 제타 편들로 매우 광범위한 역사적 귀납 추론으로 출발하는 실증 정치의 탐구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만년의 시기, 즉 그가 몇몇 도시국가의 정치체들을 서술 했던 시기에 나온 것으로 그 정치체들 중에 첫째로 아테네의 헌정체를 다루고 있다. (153)
마지막으로 몇몇 위작들을 첨가해야 할 것이다. 이 위작들은 저술들의 총서들 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이 학파의 작업에 의한 생산물들이다. 이것들 중의 하나는 문제들인데, 이것은 제1질서에 관심을 갖는다. 다른 하나는 대윤리학이다. (154) (48MMF) (57UMJ)
제1절 기관[도구]: 변증론들 - I. L'organon: les Topiques 154.
[도구(Organon, Ὄργανον), 「변증론(Topiques, Τοπικά)」]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 논리학,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추론하는 사유들의 내용과 독립적으로 되어 있는 추론의 규칙들 부여하는 논리학의 일부분의 발명자이다. 이 논리학은 사람들이 추론하는 사유들의 내용과 독립적으로 되어 있는 추론의 규칙들이다. 그러나 이 겉보기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도구라는 이름으로 재통합된 논리적 저술들은 이 논리학의 체계적인 진술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겉보기에 이 저술들이 장(章)들의 제목에 따라서 논리학의 고전적 지침서들로 정돈되어 있다. 즉 1. 「범주론」, 이는 항목들의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 2. 「해석론」, 명제들의 이론이다. 3. 「분석론 전편」, 삼단논법 일반에 대한 이론이다. 4. 「분석론 후편, 증명의 이론이며, 다시 말하면 필수적인 전제들이 있는 삼단논법의 이론이다. 5. 「변증론/전제론」, 변증법적이고 개연적인 추론의 이론이며, 이 이론의 전제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견해들일 뿐이다. 6. 「소피스트 반박들」, 연설적인 추론의 이론, 즉 생략 삼단논법이며, 이것의 전제들은 청중들을 설득하기 위한 방식으로 선택된다. 삼단논법들 중에 앞선 두 개의 논제들은 요소들을 제시한 것인데 비해, 이 삼단논법은 셋째 논제에 의해 연구된 공통적인 기관/도구이며, 이 셋째는 과학자들, 변증론자들, 연설가들이 똑같이 사용하는 것으로, 이들 각각은 다른 전제들을 가지고 다룬다. (154)
실재 사정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을 발견하기 앞서서 「범주론」과 많은 부분의 「변증론」(제2권에서 제7권까지)을 썼다. 그는 우선 건전한 토론의 규칙들을 생각하면서 추론의 규칙들에 관해서 숙고했다. 이미 플라톤의 소피스트편과 파르메니데스편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논리적 틀(용어들의 분할과 분류, 초기 류적인 것들의 규정, 속성과 주어와 관계)에 대한 생각이 토론의 조건들로부터 생겨나는지를 보았다. 무엇보다도 비논리들과 논쟁술들이 이유 있다는 것이 문제거리였다. 이러한 정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열렬한 변증론자들로부터 생겨났다. 그런데 변증론자들은 주제를 제시하는 교수의 절차도, 또한 적어도 과학을 만들어내는 과학자의 절차도, 갖추지 않았다. 변증론은 우선 한 대담자가 제시될 주제를 검토할 다른 대담자에게 그 주제를 제시하는 대화론이다. 이 검토는 예 또는 아뇨로 응답하게 될 수밖에 없는 질문들 각각에게 그 질문들에 맞는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탐문의 목표는 일반적으로 응답자를 스스로 모순되게 만들면서 그 응답자를 반박하는 것이다. (155)
사람들은 어떤 치환에 의해 플라톤이 이 변증법을 철학의 전부로 만들었는지를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이런 희망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론 즉 토론의 기술을 확실함에 기여하지 못하기에 연습의 수준으로 낮추었다. 왜냐하면, 이 변증론은 사물자체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사물에 관한 견해들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변증론을 이처럼 정의한 것, 이것은 추론의 논리적 구조 때문이라기보다, 변증론이 함축하고 있는 인간적인 연관들 때문이다. 건전한 토론에서 사람들은, 기술적인 주제일지라도 모든 사람들로부터든지 유능한 인간들로부터든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명제들을 출발점으로서 삼는데 주의해야 한다. 더하여 제시된 질문들은 너무 쉽지도 않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대답이 무용하기 때문이고, 또 너무 어렵지도 않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즉석에서 그것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절차는, 그것의 일치와 불일치를 제시하기 위하여 판단들을 비교하고 분석하는 데로만 이끌 수 있을 뿐이다. (155)
그러나 이런 훈련은 필수불가결하다. 이 훈련에서 우리는 처음에는 논리학의 틀이, 그러고 나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의 틀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첫째 근심은 어휘에 관한 것이다. 토론에서 혼란은 사람들이 다른 사물들을 동일한 단어들로 또는 동일한 사물을 비슷한 단어들로 지칭하는 것으로부터 온다. 필수불가결한 예비지식은 토론에서 사용된 단어들에 주어진 다양한 의미들을 나열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이 「카테고리」편에서 다루어졌으며, 형이상학/자연배후학의 델타편은 이 어휘들의 탐구들에 전념하고 있다. 동일한 사물들을 구별하는 것보다 동일한 단어의 다양한 사용을 구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155)
명제의 이론에 관해 주목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기초에 속한다. 모든 명제가 주어와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의 거대한 범위의 주제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 주제를 그는 가끔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사실상, 그는 수사학에 귀착하는 형식들을, 즉 서원, 기도와 같은 언어적 형식들을 알고 있다) 언어의 분석에서가 아니라 변증법적 문제들의 분석에서 빌려온다. 이 때문에 변증법적 모든 문제들이란 하나의 속성이 주어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묻는데 있다. 한 주어에 한 속성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비논리학들은 변증법을 불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자기 이론으로 이끌었던 것은 변증법의 필요들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습관적으로 명제를 진술하는 데는 고전적이 된 형식, 즉 A는 B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B는 A에 속한다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명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서 전제(προτασις, 명제)라고 하며, 말하자면 사람들이 대담자의 동의를 구하는 주장이다. 전제들의 분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보편전제들로서(보편긍정전제 또는 보편부정전제) 그리고 개별전제들로서(개별긍정전제 또는 개별부정전제) 고전적 분할은 처음에는 마치 문제들의 분할처럼 제안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문제는 한 속성이 주어 전체에(또는 부분에) 속하는지(또는 속하지 않는지)를 자문하는데 있다. 이것이 네 가지 전제들의 정식이다. (156)
더하여, 변증법적 문제의 범위를 파악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묻는 속성의 류(類)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속성이 말하기를 주어는 무엇인가? 또한 속성(l'attribut)은 주어의 성질을 진술하는가? 속성은 자신에 필연적으로 속하는 성질을, 또는 단지 우발적으로 속하는 성질을 진술하는가? 토론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구별해야할 많은 경우들이 있다. 왜냐하면, 많은 오류들은 사람들이 권리 상으로 전제들을 뒤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믿는데서 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왜냐하면 A가 B전체에 속하기 때문에, B가 A전체에 속한다고 인정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뒤바뀜은 A가 B에게 고유함일 경우에만, 다시 말하면, A가 B에게 필연적이고 배타적으로 속하는 경우에만 인정될 수 있다. 이런 류의 고정관념들로부터 사람들은 속성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유명한 구별을 보게 된다. 류, 종, 차이, 고유성, 우발(accident) 이다. 이 중의 첫째 세 개는 플라톤의 분할의 실행에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중의 첫째 세 개는 플라톤의 분할의 실행에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 분할(la division)은 주어가 무엇인지(즉 주어의 본성 sa quiddité)를 제시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분류란 처음에는 가장 일반적인 등급(la classe, 층위)을 규정하고 그러고 나서 이 등급을 여럿으로 분할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층이, 예를 들어 동물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류(le genre)가 된다. 류에서 하부 층들이 분리하는 것, 그것은 차이들(종차들)이고, 예를 들면 이성적(raisonnable) 이란 것이고, 류와 종차의 종합이 종(l'espèce)이고, 예를 들면 인간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속성들의 각각이, 플라톤의 분할에서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뭣꼬라는 질문에 대답이다. 류와 종차는 각각이 따로 다루면 종의 본질의 부분을 지적하고, 함께 다루면 본질 전체를 지적한다. 이러한 정식이 정의(定義)이다. 반대로 고유함과 우발은 주어의 본질의 일부를 이루지 못하는 속성들, 다시 말하면 이뭣꼬라는 질문에 응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고유함은 주어의 본질에 필연적으로 의존한다. 고유함은 이 주어로 배타적으로 속하기에, 마치 2직각의 동등성은 다각형들 가운데 삼각형에만이 속하는 것과 같다. 우발은 반대로 주어에 속하지 않는다. (157)
「변증론」은 실천적 적용들에서, 이 층위들 중에 어떤 층위에 주어진 속성이 들어가는지를 증거하는 수단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속성은, 만일 사람들이 그 주어 아래 포함된 모든 종들에 속하는 경우에만 류로서 인정될 것이리라(「변증론」 IV, 1장).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만일 응답자가 인정했던 속성부여하기가 유효한 경우에만, 또 만일 류로서 제기되었던 것이 오히려 고유함이 아닌 경우에만 등등, 그것은, 토론하도록 허락하는규칙들이지, 그러한 속성부여하기를 발견하도록 하는 규칙들이 전혀 아니다.. 이러한 것이 「변증론」 속에서 주어진 정의 작업의 유명한 규칙들의 특성이다. 변증법은 이뭣꼬라는 질문에 응답할 수 없는 것인가? 왜냐하면 인정된 질문들만이 예 또는 아뇨에 의해서 대답하게 하는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확립할 수 없는 변증법은 이미 제안된 정의를 시험에 맞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인데, 예를 들어 그 변증법은 정의가 오직 정의된 것 만에 맞는지를, 사람들이 정의에다가 이웃하는 류와 종적 차이 측면에서 고유함을 자기도 모르게 도입하지는 않는지를, 사람들이 마치 비교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용어들이 했던 것처럼 동의어들과 비유어들을 이용하지 않았는지를, 찾기 때문이다. (157)
이 토론들의 실천은 아리스토텔레스를 3가지 문제들을, 즉 자기 논리학을 지배할 문제들을 제기하는 데로 인도한다. 즉 전제들의 전환, 범주들의 전환, 대립들의 전환이다. 첫째는 자발적인 용도에 의해 이끌려지는데, 사람들은 응답자가 인정하는 전제들과 상호호환 되는 전제들을 적용하는 토론에서 이 용도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만일 사람들이 모든 선은 쾌락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면, 사람들은 모든 선이 쾌락이라는 것에 합의된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을 부추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호호환은 만일 속성이 오직 주어에만 속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다시 말하면 자기의 고유함의 하나일 경우 또는 그것의 정의가 이룬 정식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 경우에서 속성이 주어들 속에 속하지 않는 용어들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전칭긍정전제는 특칭긍정전제로 전환된다. 반대로 전칭부정전제와 특징부정전제는 서로 전환되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158)
둘째 문제, 즉 카테고리의 문제는 또한 토론의 필요로서 제기되었다. 10개 범주들은 항목들[개념들](주어들 또는 속성들)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의미이다: 즉 이들을 다음처럼 지적할 수 있는데, 실체로서든지(인간, 말), 언제으로든지(시간의 부사들과 보어들), 한 존재가 있을 수 있는 장소로든지(장소의 부사들과 보어들), 한 사물의 성질이든지(성질 형용사들), 사물이 무엇에 관계하든지(이중, 절반), 그의 상황이든지(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그의 소유이든지(구두짝 또는 무기들), 그의 능동행위든지(그것이 자르거나 또는 불 지르거나), 그의 수동행위든지(잘려지거나 또는 태워지거나)이다.이 분류 작업이 언어의 분석에 도움이 된다고 할지라도, 분류작업은 전적으로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왜냐하면 흰 것이라는 실체적인 것이 언어의 형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체가 아니라 성질을 지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별들은 오히려 변증론에서 생겨난다. 토론이 명석해지기 위하여, 한 속성이 류인지 또는 차이, 종, 고유함, 우발인지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그 속성이 이 10개 범주들 중에서 어떤 범주 속에 들어가는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한 개념이 류이라면, 그리고 예를 들어 류가 한 성질(색깔)이라면, 그 개념의 차이와 그것의 종들은 또한 성질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만큼이나 더욱 더 신중한 주의가필수적이다. 게다가 여러 의미들의 각각은 다른 범주들에 속한다. 예를 들어 좋은(bon) 이란 용어는 범주 속에서 생산[능동적 작용]의 범주에 넣을 수 있고(건강을 생산하는 치료제로서), 성질의 범주에 넣을 수 있고(덕성 있는), 시간의 범주에 넣을 수 있고(때에 맞는 기회), 양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다(좋은 정도). 몇몇 경우들에서 범주들 덕분에 변증론자는 고유한 것과 우발적인 것의 구별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어떤 사교장에 혼자 앉아있다면, 거기에 앉아있다는 것은 그 자신으로서는 우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그들의 회합에 지속하는 한에서 그는 참석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고유함이 된다. (159)
셋째 대립들의 문제는 특히 플라톤식 변증법의 문제이다. 심지어 한 토론이 가능하기 위하여(왜냐하면 모든 문제는 예 또는 아뇨를 요구하는데 있기 때문에), 적어도 아뇨란 예와 연관해서만, 즉 오류는 진리와 연관해서만, 타자는 동일자와 연관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소피스트편에서 플라톤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론의 실행에 염두를 두었기에, 서로 소통되는 주제들이 어떤 것들인지, 서로 배제되는 주제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규정하려고 힘쓴다. 다른 전제가 전칭 주어에 대해 부정하는 것을 한 전제가 전칭 주어에 대해 긍정이라 주장할 때(모든 인간은 정의롭다, 어떤 인간도 정의롭지 못하다), 이 전제들은 반대로 말해진 것이고, 동시에 진리일 수는 없다. 이들 두 전제는 모순된다. 하나가 긍정인데, 다른 하나는 부정이다. 즉 모든 인간은 희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희고 또는 어떤 인간도 희지 않다고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둘 사이의 모순으로부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라는 것이 필연적이다.또한 속성들의 쌍들이 어떤 것인지를, 그 쌍들의 하나가 다른 것을 소통하는지 배제하는지를 규정해야만 한다. 용어들의 4가지 대립관계들이 있다. 즉 관계항들(두배이고 절반이고), 반대항들(선하고 악하고), 소유와 박탈(눈밝고 맹인이고), 모순(환자이고 환자아니고)이다. 이 대립관계들 중에서 첫째와 넷째의 의미는 파악하기 쉽다. 왜냐하면 두 관계항들은 서로 서로를 함축하고 있고, 그리고 두 모순들은, 둘 중의 하나가 필연적으로 주어에 속하면서, 다른 하나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두 개의 다른 반대되는 그룹들은 수 천 가지의 주의들을 요한다. 우선 사람들이 대립항들을 어떤 류에서 다루는지를 규정해야만 한다(색깔의 류에서 희다와 검다든지, 수에서 짝수와 홀수 든지). 그리고 토론을 배타적으로 이 류에 관계시켜야만 한다. 그러고 나서, 두 경우들을 구별해야 하는데, 반대 항들이 중간 항을 갖지 못하면서, 한 항의 자리가 다른 항의 자리의 배제로 이끄는 경우가 있으며(짝과 홀), 그리고 반대(다른)의 경우가 있다(흰색과 검은 색; 흰색이 아닌 것이 억지로 검은 색으로 강요되지 않는다). 이 후자의 경우에서 반대항들의 규정은 매우 어렵다. 만일 흰 것의 반대항이 검은 것이고 다른 어떤 색도 아니라면, 그것은 색깔의 류에 있어서 검은 것이 흰 것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된다. 가능한 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항들의 경우, 그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도달한 반대항들의 거의 정확하지 못한 정의이다. 소유와 박탈 항들에서, 사람들이 이 항들을 주어에 관련시킬 경우에만, 항들이 의미를 갖는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해한다. 여기서 주어는 그 주어에게 박탈될 수 있는 무엇을 본성상으로 소유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눈멀지만 돌이 눈멀지 않는다. 그러하지 않을 경우게 궤변론은 진리가 될 것이다. 궤변론은 인간이 뿔을 가졌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이 뿔들을 상실했을 때를 아무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160) (48NKE)
제2절 기관(연속): 분석론들 - II. L'organon(suite): les Analytiques 160.
토론을 위하여 매우 잘 볼 수 있게 만들어진 논리적 틀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에 대한 자신의 모든 이론을 끌어냈다. 사람들이 우선 제기된 주제들의 귀결들을 끌어낸 필연성은 사람들이 토론하는 사실들과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것을 그가 깨닫기에 이르렀다. 전제를 제시하는 교수, 이를 토론하는 변증론자, 이를 설득하는 연설가 등은 그들의 출발점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나름으로 엄밀한 추론을 사용한다. 이것이 삼단논법이며, 다시 말하자면, 사유에서 속성을 주어에 엮는 통합을 보게 하는 절차이다. 이때 통합은 무매개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추론을 그 자체로서 연구하는 것이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추론 속에서, 몇 가지 사항들이 제기되고, 이 사항들이 제기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한 사항이 그것들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로서 나온다.” 이런 연구가 「분석론 전편」의 대상이며, 세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삼단논법들의 발생(제1장, 1-26), 삼단논법을 발명하는 수단들(27-30), 모든 타당한 추론들을 삼단논법으로 환원 이다. (160)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삼단논법의 착상을 줄 수 있었던 것은 플라톤의 분할이다. 왜냐하면 분할은 삼단논법의 한 방식으로 알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할은 한 속성(죽는다라든지)을 한 주어(인간이라든지)에 재통합하는데, 일단 이 주어가 하나의 류(동물이라든지)의 부분에 속하는 것이 인정되고, 그리고 이 류는 두 개의 종으로(죽는다와 불멸이다) 분할되기 때문이다. 물론 ‘죽는다와 불멸이다’에서 인간은 첫째 항 속에 들어가게 되지만 말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논리적으로 위계를 갖는 세 항들이 있다. 이 논리적 위계질서 덕분에 셋째 항에 의해서 다른 두 항이 통합된다. 그러나 그것은 “약한 삼단논법”이다. 즉 필연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삼단논법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 삼단논법은, 두 종(즉 죽는다와 불명이다)의 어느 것에다가 인간을 위치시켜야 하는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어떠한 매개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중 항인 동물을 가지고서 ‘죽는다’는 속성보다 더 넓은 류 항목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적인 위계의 관념을 간직하자. 그리고 세 항이 있었다는 것을 가정하자. “이 세 항은 어떤 항들이 이 다른 항들에 연관 속에서 있으며, 마치 마지막 항(소전제)이 중간 항 전체 속에 있듯이, 그리고 중간 항은 첫 항(대전제) 전체 속에 있다”. 이런 결과로 “양극단들의 삼단논법”이 나온다. 만일 A가 B전체로부터 긍정되었다면(대전제), 그리고 B가 C전체 또는 일부로부터 긍정되었다면(소전제), A는 필연적으로 C전체 또는 일부로부터 긍정된다. 마찬가지로 만일 A가 B전체로부터 부정된다면[대전제], 그리고 B가 C전체 또는 일부로부터 긍정되었다면[소전제], A는 필연적으로 C전체 또는 일부로부터 부정된다. 이러한 것이 완전한 삼단논법, 즉 삼단논법 제1격이다. 이것은 A, B, C 사이에서 논리적 위계의 면밀한 검토로부터 무매개적으로 결론들을 끌어낸 것이다. 또한 이 위계화된 개념들은, 플라톤의 분할에서처럼, 결론의 주어의 실질(la quiddité) 속에서 파악하도록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자. 이 개념들은 또한 고유함들과 우발들로 되어 있을 수 있는데, 개념들이 지적된 조건들에 만족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161)
이 세 가지 항들 사이에서, 이미 지적된 항들과 다른 논리적 위계가 ‘극단들의 삼단논법’을 가능하게 하는가? 확실히 가능하다. 그리고 매개[중간] 항은 대전제에서 포함되면서도 소전제를 포함하는 것이 필연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만일 매개 항이 대전제항 전체로부터 긍정된다면(대전제), 그리고 소전제항 전체로부터 부정된다면(소전제), 이로써 대전제항은 소전제항 전체로부터 부정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삼단논법 제2격이다. 이것도 삼단논법이지만 불완전한 삼단논법이다. 왜냐하면, 항들의 위계에 대해 무매개적인 검사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삼단논법을 증명할 필요가 있고, 다시 말하면 이것을 제1격의 삼단논법으로 환원할 필요가 있다. 이 증명작업은 소전제를 전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소전제가 전칭부정이기에(매개념이 소전제 전체로부터 부정된다면), 이 증명작업은 전칭부정전제로 전환되어야 하고(소전제는 매개념 전체로부터 부정된다), 그러면 삼단논법은 또한 제1격이 속하게 되는데, 제1격의 제2식이다. 이 증명작업은 다른 세 양식의 증명방식의 예로서 쓰일 수 있고, 또 두 극단들 사이에 매개항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동일한 개념적 연관들을 삼단논법 전체의 기초에서 재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분명하게 통용된다. (162)
경우에 따라 또 다른 삼단논법이 있다. 여기에서는 대전제와 소전제는 매개항 전체에 서로 서로 속하는 경우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소전제는 대전제에 가끔 속한다고 권리상으로 결론을 낼 수 있다(삼단논법 제3격). 이 경우에서 위계는 앞서 말한 격의 위계와 반대이다. 왜냐하면, 매개항은 대전제와 소전제 보다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 불완전한 삼단논법을 완전한 삼단논법으로 변형하는 것은 쉬운데, 전칭긍정으로 되어있는 대전제를 특칭긍정으로 전환하면 저절로 전환된다. 그리고 매개념은 대전제의 부분에 속하게 된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삼단논법에서 생겨나는 개념들의 위계질서를 확립한다. (162)
플라톤의 분할에서는, 속성이 주어의 본질을 표현했던 것처럼, 전제들은 항상 필연적이다. 사람들이 이 조건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필연적인 전제들을 갖춘 삼단논법이 있다고 믿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전제들이란 오직 우연적이고 가능적일 수 있거나 또는 결코 필연적이지는 않는 사실상의 진리도 진술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나온다. 즉 전제들의 양상이 알려졌을 때, 세 가지 격의 각각에서 결론의 양상을 규정하는 문제이다.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결론도 필연적이라고 보는 경우, 즉 제1격의 필연적 전제들을 갖춘 삼단논법의 경우에서만 제외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한 모든 경우에서 결론의 양상을 증명한다. 전환을 이용하면서든지, 불합리로 환원하면서든지.
삼단논법의 복잡한 메카니즘은 변증법으로부터 나왔다. 왜냐하면 이 결론들은 해결해야할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 결론들은 응답을 허용해야 하는 삼단논법에 앞서 의문으로써 제기되었다. 삼단논법은 종종 앞선 긴 탐구들로부터 태어났다. 어느 속성이 주어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 하는 의문이 일단 제기되면, 의문을 해결할 수단을 찾아야만 한다. 이러한 이유로 두 가지 목록을 만들어야 했다. 하나는 대전제항의 가능한 모든 주어들 만들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소전제의 가능한 모든 속성들을 가지고 만들어야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을 지시하는 속성들 속에서 다음의 류를 넘어서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서). 이 두 목록의 공통적 부분 속에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매개항을 발견할 것이다. (163)
매개항을 더듬더듬 찾는 이 탐구는 일단 발견된 삼단논법의 엄격한 메카니즘과는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들이 어떻게 진리를 거짓으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가를 제시할 때, 이 대조가 명증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결론의 진리는 전제들의 진리를 어떤 방식으로도 보증하지 못한다. 또한 삼단논법의 완전한 정확성에도 불구하고 연역이 착각인 경우도 있다. 이것은 순환 검증의 경우인데, 여기서 [순환논증이란]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결론을, 그 자체 속에 그 결론을 전제로서 가지고 있었던 그 삼단논법으로부터 데려와 결론의 전제로써 사용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제 어떻게 전제들이 정당화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 삼단논법의 기술(l’art)은 필연적으로 결론을 전제들에 연쇄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술은, 이 전제들 자체들이 앞선 삼단논법들의 결론들로부터 나오지 않는 경우에, 전제들을 제기할 어떤 수단도 주지 못한다.. (163)
여기에서 삼단논법의 세 가지 모두를 유지하는 세 가지 기술들 사이에 구별이 자리를 차지한다. 즉 증명의 기술이라는 필연적 필증법(l'apodictique), 변증법, 수사법이다. 이 필증법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 「분석론 후편」이다. (163)
과학 또는 증명을 제공하는 삼단논법은 결론이 전제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삼단논법일 뿐만 아니라(이것은 모든 삼단논법의 공통적 특성이다), 결론도 필연적인 삼단논법이다. 그런데 결론은 전제들이 그 자체로 필연적일 경우에만 필연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양상 삼단논법의 규칙이다. 즉 매개념이 대개념에 필연적으로 속한다면, 그리고 소개념이 매개념에 필연적으로 속한다면, 소개념은 대개념에 속한다는 규칙이다. 따라서 과학적 삼단논법 즉 증명작업은 본성상으로 전제들로부터 특징지어진다. 전제들은 진리이어야만 한다. 전제는 첫째이어야 하고 동시에 무매개적이어야 하며, 그 귀결에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전제들을 그자체로 증명해야 하고 그리고 나서 그것의 전제들을 증명해야하고 무한히 계속되어야 한다면, 과학[학문]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전제들은 결론의 원인을 포함해야 한다. 결국, 전제들은 논리적으로 결론에 앞서야만 하고, 결론보다 더 쉽게 인식되어야 한다. (164)
이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인가? 우선 다음과 같은 공통의 공리들(les axiomes)이 있다. “한 속성이 동일한 주어에 동시에 또 동일한 연관으로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공리들은 보편적 조건들이며 또는 모든 과학의 공통적 원리들이다. 그리고 그 공리들은 개별적으로 아무것의 원인도 포함하지 않는다. 원인을 포함하는 증명할 수 없는 전제들, 그것들은 그 자체의 속성을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즉 정의들(définition)을 가르치는 전제들이며, 또한 증명작업의 “고유한 원리들”이다. 매개념은 사물의 실질(la quiddité)에서 빌려온 것이어야만 한다. 매개념, 본질 또는 실질(essence ou quiddité), 이유, 원인 사이에는 일종의 등가가 있다. 이리하여 천문학자들은 월식의 본질이 달과 태양 사이에 지구의 진입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진입은 매개항이며, 이 매개항을 통해 사람들은 달이 가려지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만일 모든 물체가 빛의 근원으로부터 이렇게 떨어져 있어서 가려진다면, 그리고 만일 달이 그것으로부터 이렇게 떨어져 있다면, 그 결과로 달은 이르러질 것이다. 그것은 항상 매개항이 대항목의 본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소항목으로부터 긍정되었기 때문이며, 대항목 또한 소항목을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직각이란 2직각의 절반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고, 또 반원 속에 그려진 직각도 2직각의 절반이기 때문에, 그 2직각의 절반인 직각도 하나의 직각과 동등하다는 것이다. 또한 초기에 [고대 페르샤인들인] 메데인들을 공격했던 아테네인들은 다음차례로 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반대자를 공격할 수 있듯이 반대자가 다음차례로 당신들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산보를 한다는 것은, 산보가 소화를 쉽게 해주기 때문이며, 그리고 건강한 인간은 소화를 쉽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개항은 항상 대항목의 본질 또는 본질적 측면을 두드러지게 한다. 소전제는 소항목의 본질을 긍정하는 단순한 전제일 수 있다. 결국 결론은 필연적일 것이다. (164)
확실한 것은 증명에서 결과가 분석적으로 원인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달의 월식)는 원인(둥근 물체의 진입)과 동일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적 연결 표현은 증명을 특징으로 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동일한 연결이 모든 삼단논법에서, 즉 논증적이든 아니든 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이 증명과정에만 맞는 연결방식을 생각하게 되자마자, 사람들은 매개항과 결과 사이에서 원리에서 귀결에 이르는 편차의 연결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귀결은 매개항에 대한 실재적이고 효과적인 우선성을 함축하는 경우이다. 원인의 삼단논법, 즉 이유의 삼단논법은 개념들의 단순 놀이보다 훨씬 더 멀리 나갈 것이다. 그것은 실재성 자체에 도달할 것이다. (165)
그러나 과학의 이론이 여기에서 기관을 넘쳐나기 시작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이점에서와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그 이유는 정의를 증명하는 것이, 즉 정의를 가지고 삼단논법의 결론을 만든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관은 무능하다.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이 불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증명 전체는 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 대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나 정의는 본질을 진술하지만, 다른 사물로부터 한 사물을 긍정하지는 못한다.게다가 이 증명을 실행하기 위하여 본질의 원인은 본질 자체와 차이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본질 자체는 [현재로] 있지 않는 무엇이며, 왜냐하면 한 사물은 사물 자체적으로 그리고 무매개적으로 [현재로]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변증론」도 할 수 없듯이, 「분석론들」도 정의들에 도달하기 위하여 실증적 방법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의 지위는 적합하다. 그것은 예외 없는 원리이다. 우리가 이 원리를 배울 수 있는 경우는 단지 앞선 어떤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경우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정의가 최초이고 무매개적이기 위해서, 그 정의는 기원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기원은 감각적 지각이다. 여기에서부터 기원은 귀납추론에 의해 나온다.귀납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변증론들/전제론들」에서 말하는 추론인데, 이 추론은 하나의 류에 하나의 특성을 속성으로 부여하기 위하여, 그 특성이 그 류 하에 포함된 종들에 속한다는 것을 보게 하는데 있다. 이리하여 “고대인”은 담즙의 부재는 동물에게 있어서, 예를 들어 굽 하나인 동물들, 즉 사슴들의 예를 들면서, 장수의 징후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보다 최근의 관찰에서는 이 동물들에다가 돌고래와 낙타를 보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납법은(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귀납법은 개체들이 아니라 종들에 근거한다), 그것이 충만되어 있다할지라도, 장수와 담즙부재 사이에서 연결방식의 필연성을 우리게 알게 할 수 없다. 이 연결방식은 생리학적 분석에 의해서만 지성적으로 파악될 수 있으리라. 생리학적 방식은 생명의 유지에서 간의 역할을 제시하고 또는 담즙에서 자연적으로는 배설물들인 분비액을 보게 한다. 이 분비물이 간에 해를 끼치고 그 귀결로서 생명에 타격을 준다. 따라서 귀납법은 본질들의 인식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166)
증명하는 과학의 개념작업은 토론을 위하여 처음에 만들어진 하나의 절차를 교육에 적용하게 할 뿐이다. 그런 이유로, 과학은 무엇보다 먼저 확실하지 않은 모든 전제들을 배제하면서 가르치는 교수의 기술이며, 이때부터 기하학처럼 독단적으로 그러나 변증법론자처럼 질문에 의하지 않는 절차로 행할 수 있는 교수의 기술이다. 그러나 이 전제들의 확신은 그 자체로서는 과학의 대상 즉 재료일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이때에 전제들이 삼단논법의 결론들이 되어야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면, 증명작업이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이 가능하기 위하여 전제들이 필요하다. 이 전제들 그 자체는 증명불가능한 것이 되어야 하며, 과학의 대상들이 아니게 된다. 어떻게 이 전제들을 발견할 것인가? 변증법론자 또는 수사학자는 이 전제들을 경우들에 따라 공통적이고 이미 밝혀진 견해에 맞게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은 확실성을 얻지 못한다. 과학자는 이것을 누구에게 요구하는가? 이 의문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체에 틀로 주어지고, 우선은 그의 형이상학의 틀로 주어진다. (48NKI)
제3절 형이상학 - III. La Métaphysique 166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자연배후학]은 사실상 플라톤 변증법의 거부에 이어서, 남겨진 빈자리를 차지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인 한에서 존재의 과학이며, 또는 존재의 원리들과 원인들의 과학이며, 본질적 속성들의 과학이다”. 형이상학은 매우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 한다. 무엇이 한 존재가 [현재]있는그 무엇이도록 만드는가? 무엇이 말[馬]이 [지금 여기] 있는말이도록, 조각상이 조각상이도록, 침대가 침대이도록 만드는 가? 중요한 것은 단어 이다(est, 있는)가 정의상으로 갖는 의미를 아는 것이다. 거기서 그 정의는 존재의 본질을 진술하고 있다. 그 귀결로서 자연배후학/형이상학(Métaphysique, τὰ μετὰ τὰ φυσικά)은 매우 많은 부분에서 정의의 개론으로 남게 된다. 정의의 문제는 플라톤이 변증법에 의해 해결했다고 믿었으나, 실재성으로 있지도 않고, 이미 만들어진 정의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변증법에서 유래하는 것도 아니며, 정의들을 원리들로서 사용하는 증명의 과학에서 유래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새로운 과학에서 유래한다. 새로운 과학이란 존재인 한에서 존재에 전념하는 제일철학, 즉 욕망된 과학이다. (197)
틀림없이 이다(est, 지금 있는)란 단어는 그 단어가 정의에서 다루는 단어와는 다른 의미들을 지닌다. 그 단어는 본질적 속성, 즉 고유함(그 인간은 웃고 있다)을 지칭하는데, 또는 우발(그 인간은 백색이다)을 지칭하는데 쓰일 수 있는데, 그 우발은 게다가 아홉 범주들 중의 하나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고유함의 존재는 우발의 존재처럼 한 실체의 존재를 가정한다.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성질의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또한 그 성질이 무엇인지를 질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선 하나의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이 모든 의미들은 이 제일 실체로부터 파생된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대상은 그 원초적 의미에서 존재의 자연(la nature 본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자연은 모든 파생된 의미들로 넓혀지는데, 왜냐하면 이 모든 의미들은 원초적 의미에 연관되어 있다. (167)
그런 이유로 해서 형이상학은 우선 공리들을 확립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리들 없이 사람들은 존재에 대해 어떤 의미로도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동시에 긍정하고 또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있다고 또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동일한 속성이 동일한 주어에 동시에 그리고 동일한 연관에서 속한다고 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원리들의 부정은 테아이테토스편의 프로타고라스의 주제와 동등한 것이다. 거기서 프로타고라스는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진실하다고 선언했다. 이 증명할 수 없는 원리들의 확립은 게다가 실증적 증명일 수 없지만, 단지 이 원리들을 부정하는 자들의 반박일 수는 있으리라. 전적으로 이런 변증법적인 반박은 반대자들에게, 그가 겉으로는 원리들을 부정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원리들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게 하는데 있다. 긍정과 부정 사이에 중간이 없다는 것, 그것은 사유의 조건이다. 반대적인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은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그리고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진실한 것과 거짓인 것이 동시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반박이란 반대자가 자기 주제에 맞게 부여한 예들의 불충분함을 제시하는 데 있다. 특히 상황들에 따라 감각적 인상들의 변이는 그에게 어떠한 증거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일 건강한자에게 달콤한 포도주가 환자에게 쓴맛이라면, 포도주가 그 환자에게 쓴맛으로 나타는 것 같은 동일한 찰나에서는 그 포도주는 그에게는 달콤하지 못한 것 같기 때문이다. 감각적 인식은 그 자체로 공리를 검증한다. (167)
적어도 형이상학의 임무는 새로운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물리학자에게서처럼 해체에 의해 존재들의 구성 요소들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듯이 마찬가지로 플라톤에게서처럼 퇴행적 변증법에 의해서 최고의 실재성에까지, 즉 지적 직관의 대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일반화의 과정을 통해서 모든 실재성에 공통하는 특성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또한 형이상학은 온선의 과학, 즉 목적인의 과학도 아니며, 운동인의 과학도 아니고, 오히려 형이상학은 그 자체 바깥에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은 본질에 대한 보다 더 일반적인 과학이다.왜냐하면 온선[목적인]과 운동인은 그것들 자체 밖에 수학적 존재들과 같은 것들인 움직이지 않는 사물들을 두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모든 실체를 하나하나 그리고 나서 집단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실체에 공통하는 무엇을 연구한다.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공통적인 무엇이 있다는 것, 그것은 불 또는 물과 같이 구체적 요소들이 아니라, 실체의 각각이 본질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본질은 그 각각을 류 속에 분류하게 하고, 또 차이에 의하여 각각을 규정하게 해준다.이러한 관점에서, 감각적 실체들과 비감각적 실체들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하지 않아야만 하고, 마찬가지로 소멸할 수 있는 것과 소멸할 수 없는 것 사이에도 구별하지 않아야만 한다. 형이상학의 영역은 비감각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사물들의 범주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 영역은 훨씬 더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은 존재인 한에서 존재를 연구하기에 최고 류에 도달했다는 착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플라톤주의자들과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의 오류가 있다. 이들은 존재라는 최고 류를 대하는 것처럼(또는 일자l'un에 대해서처럼, 이것은 사람들이 있다est라고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un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동일자le même에 귀착한다) 말하면서, 이어서 분할의 방법에 의해 존재의 차이들을 수단으로 모든 등급들을 규정한다. 논리적 오류이다. 왜냐하면 차이(예를 들어 두 발)는 그 용어 속에서 류(동물)를 - 차이는 류의 차이이다 -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는 논리적 규칙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위 말하는 존재 각각의 차이로부터 사람들은 각각의 차이가 있다(est)고 말할 수 있다는 것도 논리적 규칙이다. 따라서 존재, 즉 보편적 속성은 그러한 것에서 류가 전혀 아니다. 다른 존재들은 류의 종이리라. 제1의 류들은 범주들이고, 일자로서 존재는 류들 그 위에 있으며 모든 범주들에 공통이다.(I, 2) (168)
일자로부터 또는 존재로부터 류를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그 귀결로서 모든 실재성의 생성자를 만들기 위하여, 플라톤의 변증법은 출발점으로써 존재를 다루기보다 대립자들의 쌍들을, 즉 존재와 비존재, 일자와 다자, 유한과 무한들을 다룬다. 이 쌍들의 혼합으로써 변증법은 실재성의 모든 형태들을 생겨나게 하리라. 형이상학은 또한 변증법의 이러한 출구를 닫고 있다. 대립자들은 원초적 원리들이 아니라 실체들의 존재 방식들이다. 사물은 실체이며 그러고 나서야 유한하거나 무한하다. 그런데 실체는, 다시 말하면 인간 또는 말은 “반대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 첫 원리는 변증법의 출발점일 수 없다. 대립자들의 과학은 형이상학의 하부의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형이상학이 자연학의 원리로서 어떤 거대한 역할을 간직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169)
만일 존재가 최고 류도 아니고 대립자들의 쌍에서 하나의 항도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술어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존재를 원초적 의미로서 다룰 때, 존재가 술어가 되는 실재성들만, 오직 그것들만이 개별적 실재성들이며, 즉 소크라테스 또는 말(馬)이다(τόδε τι, 이것인 것). 이 실재성들이란 형이상학에 의해 연구되는 실재성들이며, 개별적인 것들로서가 아니라, 실재성이 어떤 사물로서 있는 한에서 연구되는 실재성이다. 그런데 거기에 심각한 어려움은 없는가? 감각적이고 운동하고 사라지는 사물들이 실재적으로 어떤 것인가? 과학은 지성적이고 고정된 사물들의 모델에 도달하는 것과는 달리 가능한가? 이로부터 유명한 양도논법이 나온다. 하나는, 하나의 대상이 과학의 대상이라 하자, 그때는 그 대상은 보편적이고 따라서 실재적이다. 다른 하나는, 대상은 실재적이고 따라서 감각적이며, 진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과학으로 다룰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보편적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을 이끌어 갔던 것인데, 그가 한 것은 생성의 실재성들에다가, 즉 견해(opinion, δόξα)의 대상들에다가, 관념들의 안정된 실재성들을, 즉 학문(science, ἐπιστήμη)의 대상들을 중첩하는 것이었다. 이 학문의 대상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닫혀 진 출구인데, 이 때에 그의 중요한 고민들 중의 하나는 생성 그 자체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는 안정되고 영구적인 요소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169) (48NKB) (57VKD)
제4절. 이데아들의 이론에 대한 비판 IV Critique de la théorie des idées 169
이 형이상학의 개념작업은 어떤 의미에서는 플라톤 정신에 충실히 남아있다. 개체적 실재성들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과학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실재성들 때문인데, 즉 개별적 사물들이 포함하고 있는 안정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적인 실재성들 때문이다. 플라톤의 착각은 안정된 실재성들을 마치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써 간주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플라톤은 관념들을 따로 떼어내면서, 하나의 실체를 상상하고자 원했다. 그런데 이 실체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창안되었던 학문의 대상들이었으리라. 소크라테스는 학문을 정의들을 이끌어 내는 귀납방식들 속에다가 위치시켰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도덕론에서 사용했던 이 방식을 자연전체로 넓히면서 관념들 속에서 정의들 속에 진술되었던 본질들에 상응하는 실체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감각적 사물들을 실체들에게 사물들의 참여에 의해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아주 당연하게 변증법적이다. 중요한 것은 관념들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보다, 플라톤의 철학이 제1철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1철학은 통합되어 있다고 믿었던 두 사항들을, 즉 과학과 실체를, 분리되게 두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이 비판이 매우 다양하게 여럿으로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비판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열쇠로 수렴될 수 있다. 때로는 관념들이 과학의 대상이며, 그래서 관념들은 실체들이 아니다. 때로는 관념들이 사물들의 실체들이고, 따라서 관념들은 과학의 대상일 수 없다.
첫째 관점을 고려해 보자. 사람들은 플라톤학자들이 관념들의 현존을 증명하는 세 가지 논증들을 안다. [첫째] 다자들 그 위에는 일자이다. 대상들의 다자성은 동일한 성질들을 소유하면서도, 예를 들어 아름다움과 같이, 이 성질이 모든 대상들 그 위에 현존하기를 요구한다. [둘째] 과학들로부터 끌어낸 논증들이다. 왜냐하면 기하학적 정의는 그의 대상의 현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한번 사라진 사물을 고집하는 사물의 표상이며, 이것은 감각적 사물들의 흐름에 더 이상 복종하지 않은 과학의 대상으로부터 안정성을 함축하는 것이다.그런데 이 세 가지 논증들을 진실하다고 가정하면, 이것들은 너무 과도하게 증명한 것이리라. 왜냐하면 사람들이 통일성이라고 주장하는 다수인 사물들은 사람들이 정의한 사물들이며, 결국에는 사람들이 일단 사라졌다고 표상되었던 사물들인데, 그 사물들은 양들, 질들, 관계들과 같은 실체들과는 아주 다른 것 일 수 있다. 따라서 이 논증들은 실체들이라는 관념의 현존과 동일한 자격으로 질들 또는 관계들이라는 관념들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다.그러나 실체가 아닌 사물의 관념이 어떻게 실체일 수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만일 하나의 질이란 관념이,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는 대로, 이 질의 존재 자체라면, 그러면 그 질은 그 자체가 질이라는 결과에 이른다. 좀 더 멀리 나갈 필요가 있다. 심지어는 한 실체의 관념도 또한 실체일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실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주의에서 관념들이 당연히 실체여야 하는 것처럼, 만일 이 관념들이 정의의 대상들이라면, 이 관념들은 하나들일 수 없다. 이 때문에 모든 정의는 류와 차이[종차]들로 조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두발 달린 동물이라고 정의된다. 이 조성작업은 정의된 것의 통일성에 장애가 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두발 동물은 유일한 존재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관념들의 이론이 진리이라면, 조성작업은 통일성과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과 두발이라는 두 항들은 각각 하나의 관념을, 즉 하나의 실체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 속에 두 개의 실체들이 있고, 인간은 자기 단위[통일성]에서 보면, 자기 실체성을 상실한다.그러나 더 나아가, 동물 류의 단위는 종의 단위보다 더 잘 저장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일 동물 류가 하나라면 그것은 종들을 형성하기 위하여 반대되는 차이들과 동일한 연관 속에, 예를 들면 두 발 동물과 여러 발 동물에, 동시에 참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따라서 그 동물 류는 여럿이어야 하고, 그것의 단위는 우리의 사유 속에 있지만 실재성 속에는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이다. (171)
결국, 플라톤의 논증작업은 그것의 귀결들로 밀고 나가보면, 존재의 각 분류에서는 그 작업이 원했던 대로 하나의 관념이 결코 아니라, 무한히 많은 관념들을 정립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러하다면, 다수의 닮은 각 사물들에게 하나의 관념이 상응해야 한다 하더라도, 그 규칙은 우리가 감각적 인간과 인간의 관념을 생각할 때 적용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항들에게는, 두 항들이 닮았기 때문에, 제3의 인간이 상응해야 한다. 제3인간들에 의해 형성된 그룹에게는 제4의 인간이 상응해야 하고, 그리고 무한히 계속된다.이렇게 해서 관념의 실체성은 곧 상실되어 갈 것이다. (171)
이리하여 만일 관념들이 정의될 수 있다면, 관념들은 실체들이 아니다. 반대로 만일 관념들이 실체이라면, 관념들은 과학의 대상들일 수도 없고, 과학의 수단들일 수도 없다. 관념들은 실체들이라면 과학의 대상들도 수단들도 될 수 없다. 이어지는 모든 논증작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들을 가지고 감각적 사물들의 설명원리들을 만들고자하는 의도를 빌려온다. 관념들은 사물들로부터 실현된 본질일 뿐이다. 그리고 관념들이 형이상학의 문제에 잘 대답했다고 우긴다. (감각적) 인간이 한 인간이게 하는 것, 그것은 그가 인간 그 자체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착각이다. 우선 관념들은 고정된 실체들이므로, 관념들은 항상 동일한 방식의 원인들이어야 하고, 따라서 관념들은 감각적 사물들의 생성을, 즉 그것들의 탄생도 소멸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관념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부동성의 원인일 수 있으나 운동의 원인일 수 없다. 더군다나 관념들이 어떻게 작동했을 것인가? 확실히 사물에 내재하는 자연처럼 작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념들은 그것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념들은 운동인도 더 이상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어떠한 추상적인 것도 어떠한 보편적인 것도 개별적 사물을 생산할 수 없다. 개별적 사물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항상 현실적 개별 사물이다. 즉 집을 만드는 자는 건축가이며 “인간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이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생성관점은 또는 다양한 생성들의 관점은 소위 사물들의 모델들이라고 우기는 플라톤의 허구에 대립된다. 이 모델들이란 사물들 자체인데, 그것들에게 사람들이 표현으로서 그 자체(en soi)를 덧붙인 것인데, 그것은 사물들을 설명하기는커녕, 사물들을 이중화했을 뿐이다. (172)
어떠한 본질적인 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했던 논증에 의한 비판에 보태지지 않았다. 그 논증을 관념들의 학설과 비슷하게 전개했던 학설들에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끌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선 수학적 존재들의 학설에 반대로 이끌었다. 그 존재들은 플라톤이 관념들과 감각적 사물들 사이에 매개들로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수학적 수들에의 이론에 반대로 이끌었다. 이 수들은 [플라톤 사후 아카데미아 초대학장인] 스페우시포스(Σπεύσιππος, 전407-전339)에 의해서 최고 실재성들로 세워진 것이다. 결국에는 [2대 학장인] 크세노크라테스(Ξενοκράτης, 전396-전314)에게서 이상적 수들의 이론에 반대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반대도 더 이상 가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적 본질들로부터 그 자신이 관념들에 대해 말했던 그것을 말할 수 없듯이, 관념들이 감각적 사물들을 이중화하게 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감각적 사물들은 다른 자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성상 차이는 정확하게 그 자신이 관념들에게 행한 비판에 역행하는 비판의 출발점이다. 즉 그 비판은 수와 수가 설명을 담당하는 사물 사이의 연관에 대해 완전히 추상적인 특성이다(그는 그 추상적 특성을 특히 이상적 수들의 참여자들에게서 신호로 알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천문학이라는 전형의 과학들은 가시적인 하늘 대신에 원과 구로 이루어진 수학적 구축으로 대체하여서, 그 과학들은 실재성의 감각작용에 머물고자 하는 과학들보다 실재성에 더 가까이 나아간 것이 아닌가? 그 과학들은 진실로 플라톤주의자들의 강한 힘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그 자신은, 조화이루는 것과 같은 과학들에서 산술학은 감관들이 알게 해주는 합의점들의 이유 또는 본질을 부여해 준다는 점을 바로 인정하였다. 그 결과로서, 수학적 실재성들은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인가? 만일 천문학자들의 하늘이 감각적 하늘과 구별되는 실재성이라면, 우리가 하늘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그 자리 자체에 움직이지 않는 하늘이 있어야 만 할 것이다. 수학적 존재는 결코 실재성이 아니다. 수학적인 존재는 추상작업으로부터 태어난다. 추상작업은 형태들과 한계들을 보며, 이것들을 그것들의 내용으로부터 분리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들이 실재적인 실체들을 가능하게 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늘의 형태들과 규칙적인 운동들은 결국에는 자연적 이유들인 것과 마찬가지였으므로, 심지어 그는 사람들이 그 당시 시도했던 관점과 같은 현상들에 대한 수학적 구축작업들도 거부했다. 수학들은 사물들의 술어들에만, 양들에만 도달할 뿐이며, 있는 그대로의 존재인 실체에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 형이상학을 발견하리라는 기대는 이것들의 측면에서 나오지 않는다. (173) (48NLF) (17:32, 57VKD)
{ 출브B24철1권04A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