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석사학위논문
<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연구
2013년 8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학 전공
이재호
첨부: 논문 원문
첨부: 세 가지 <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첨부 파일에 이미지가 화면에 것 보다 큰 이미지 입니다.
출처: 서울대학교 기관리포지터리 https://s-space.snu.ac.kr/handle/10371/132270
=========================== 이하, 논문 내용에서 발췌 =========================================
이하, 위 그림 하단에 한문 내용. - 전투에 참전한 장수의 일람
(예시, 1. 大將(직책) 嘉善大夫 咸鏡北道兵馬節度使(관직) 李公 諱鎰(성명) 字重卿(자) 龍仁人 (본관)
[참고 1] <정토도> 좌목(육군박물관 소장본 기준, 번호는 필자)
1. 大將 嘉善大夫 咸鏡北道兵馬節度使 李公 諱鎰 字重卿 龍仁人,
2. 助戰將 折衝將軍 咸鏡北道兵馬虞候 徐得運 德久 利川人,
3. 從事官 彰信敎尉咸鏡北道兵馬評事 李用淳 士和 全州人,
4. 承議郞 兼輪城道察訪 沈克明 伯晦 靑松人,
5. 審藥 宣敎郞 李蕙汀 芳叔 全州人,
6. 助戰將 及第 曺大坤,
7. 助戰將 及第 申恪 敬仲 平山人,
8. 助戰將 及第 李瑛 公獻 咸平人,
9. 助戰將 及第 元豪 仲英 原州人,
10. 助戰將 前判官 韓仁濟 濟仲 淸州人,
11. 助戰將 彰信校尉 撫夷堡兵馬萬戶 金億秋 邦老 淸州人,
12. 助戰將 秉節校尉 訓鍊院參軍 朴弘長 士任 務安人. 左衛
13. 先鋒將 折衝將軍 高嶺鎭兵馬僉節制使 劉克良 景善 白川人,
14. 龍驤都將 及第 李[王+發] 汝獻 咸平人,
15. 虎賁都將 前縣監 李宗仁 伯春 全州人,
16. 獅吼都將 及第 禹應台 三彦 丹陽人,
17. 熊搏都將 權知訓鍊院奉事 黃大鵬 冲雲,
18. 彪攫都將 通德郞 通禮院引儀 金慶福 伯綏,
19. 左鶻擊將 及第 徐元禮 肅大,
20. 右鶻擊將 禦侮將軍 都摠府經歷 宋弘得 伯實,
21. 左火烈將 及第 李沃 子潤,
22. 右火烈將 及第 邊良俊 國萃,
23. 左部將 及第 姜仲龍 時用,
24. 前部將 及第 朴知進 退而,
25. 衛將 嘉善大夫 行會寧府使 邊彦琇 君獻,
26. 從事官 前判官 趙儆 士惕,
27. 中部將彰信校尉 訓鍊院主簿 魯興文 斐然 咸平人,
28. 遊軍將 彰信校尉 龍驤衛後部將 李琰 精叔 全州人,
29. 右部將 及第 權洪 寬仲 安東人,
30. 後部將秉節校尉 副司果 宋悌 友叔 南陽人,
31. 斬退將 及第 朴仁鳳 而瑞 務安人,
32. 捍後將 顯信校尉 永建堡兵馬萬戶 朴潤 德用 靈巖人,
33. 一繼援將 中直大夫 富寧都護府使 李時請 詠而(리움소장본: 時請) 丹山人,
34. 二繼援將 朝散大夫 慶興都護府使 鄭見龍 雲卿 東萊人, 右衛
35. 先鋒將 折衝將軍 咸鏡北道 助防將 李薦,
36. 領將 權知訓鍊院奉事 姜萬男,
37. 龍驤都將 折衝將軍 行副護軍 宣居怡,
38. 領將 保人 李用濟,
39. 虎賁都將 折衝將軍 前虞候 金遇秋,
40. 獅吼都將 及第 吳彦良,
41. 熊搏都將 及第 李忠獻,
42. 彪攫都將 前察訪 黃進,
43. 左鶻擊將 宣畧將軍訓鍊院僉正 元熹,
44. 右鶻擊將 及第 李慶祿,
45. 左火烈將 及第 成天祉,
46. 右火烈將 及第 李舜臣,
47. 左部將 顯信校尉 守門將 洪祐,
48. 前部將 權知訓鍊院奉事 辛礎,
49. 衛將 通政大夫 穩城都護府使 楊大樹,
50. 從事官 及第 金聲○,
51. 中部將 權知訓鍊院奉事 金夢虎,
52. 遊軍將 前判官 田鳳,
53. 右部將 訓鍊院習讀 元裕男,
54. 後部將 權知訓鍊院奉事,
55. 斬退將 前萬戶 金光睟 子潤 義城人,
56. 捍後將 承義副尉 西水羅堡權官 林秀蘅 芳仲 寶城人,
57. 一繼援將 通政大夫 鍾城都護府使 元均 平仲 原州人,
58. 二繼援將 奉訓郞 明川縣監.
** 아래 도표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 무과 입격자의 급제년도, 자, 본관 등을 조사해 위 내용과 비교했다고 합니다.
아래 내용은, 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본 사진의 하단에 빨간색 네모칸의 한문 내용과 번역 입니다.
[참고 3] <정토도> 발문 전문 (리움 소장본 기준)
宣廟丙戌, 公陞移本道兵使, 仁威廣覃, 邊圉寧謐. 仍條陳軍務二十九事, 禁令二十七條, 幷錄制勝方略一件, 奏請取講諸將, 以行殿最, 上特令施之.
선조 병술년(선조 19, 1586)에 공이 본도(本道)의 병사로 승진하여 옮기니 인위(仁威)가 널리 퍼져 변방이 편안하고 조용하였다. 이에 군 무 29사(事)와 금령 27조(條)를 조목조목 진달(陳達)하고 이를 [제승 방략(制勝方略) ] 1건에 함께 수록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강론하고 이 로써 전최(殿最)하기를 주청하니 상께서 특명으로 시행하라 하셨다.
方略之詳僃頒行, 自公始焉. 先是, 北邊野人 欵塞內附, 給其衣廩, 留居六鎭城底矣. 尼湯介潛誘越邊野人, 攻陷慶源, 搶奪高嶺, 公時莅慶源會寧, 皆建斬獲之功.
방략(方略)이 상세하게 갖춰지고 반포되어 시행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보다 앞서 북변의 야인들이 변방에 귀순하여 내부 (內附)하니 옷가지와 곡식을 지급하여 육진(六鎭)의 성저(城底)에 머물도록 하였는데, 니탕개(尼湯介)가 변방 너머의 야인들을 몰래 꾀어 경원(慶源)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고령진(高嶺鎭)을 약탈하였다. 공은 그때에 경원(慶源)·회령(會寧)을 다스렸는데 모두 참획의 공을 세웠다.
丁亥, 公自本營巡到慶興, 密 捕何吾郞等誅之, 令虞侯金遇秋, 襲破楸島部落, 蕩其巢穴. 是時, 慶興撫 夷時錢等部强盛, 而夫女只部落最强難制, 公遂將邊事馳啓, 上回諭因許 討之.
정해년(선조 20, 1587)에 공이 본영으로부터 순시하여 경흥(慶興)에 도착해 하오랑(何吾郞) 등을 몰래 붙잡아 죽였다. 그리고 우후(虞 侯) 김우추(金遇秋)에게 명령하여 추도(楸島) 부락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그들의 소혈을 없애버렸다. 이때에 경흥 무이(撫夷)의 시전(時錢) 등의 부락이 강성하였고, 부여지(夫女只) 부락이 가장 강하여 제압하기 어려웠다. 드디어 공이 장차 변방을 도모할 일로써 치계하니 상께서 토벌을 허락한다고 회유(回諭)하셨다.
公以戊子正月, 簽發本道兵, 副以赴戍兵, 使會寧府使邊彦琇, 穩城府使楊大樹爲左右衛將, 高嶺僉使劉克良, 助防將李薦爲左右衛先鋒.
공이 무자년(선조 21, 1588) 정월에 본도의 병사를 징발(徵發)하고 부방(赴防)하는 수병(戍兵)을 더하여 회령부사 변언수(邊彦琇)와 온성 부사 양대수(楊大樹)를 좌·우위장(左右衛將)으로 삼고, 고령진 첨사 유극량(劉克良)과 조방장 이천(李薦)을 좌·우위의 선봉장으로 삼았다.
習陣于行營, 蓐食于德明驛, 左軍由阿吾郞地白顔烟台, 循山而北, 右軍自撫 夷城東, 越江而西, 合圍時錢地面四部落, 焚燒穹廬三百餘所, 斬首幾五百級.
행영(行營)에서 습진(習陣)하고, 덕명역(德明驛)에서 이른 아침에 노상에서 식사를 마치고[蓐食], 좌군(左軍)은 아오랑(阿吾郞) 땅의 백안연대(白顔烟臺)를 거쳐 산을 돌아 북쪽으로 나아가고, 우군은 무이보(撫夷堡)의 성벽 동쪽으로부터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와 합세하여 시전 땅의 네 방면 부락을 포위하여 궁려(穹廬) 3백여 곳을 태워버리고 거의 500급을 참수하였다.
上命遣宣傳官兵曹正郞李大海, 蕩勞將士, 命官公之一子. 是役也, 蓋公勦胡屢功之最著者, 赫赫若前日事也
임금이 선전관으로 병조정랑 이대해(李大海)를 파견하여 장사(將士)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수고를 위로하고 공의 아들 한 명에게 관직을 주도록 명하였다. 이 전투는 대개 공이 오랑캐를 무찔러 쌓은 공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 그 혁혁함이 마치 어제의 일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