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鉉九(신현구) 1881---1931.6.17
대한독립애국단 국민장(國民章) 충남 논산 출생
선생은 고향에서 많은 인사들을 동원하여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임시정부를 돕기위하여 자금조달을 전개하고 임시정부와 연락하자 임시정부로부터 대한독립 애국단을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아 동지 권인채(權仁采)등과 대한독립애국단을 조직하여 서울에 본부를 두고 동생 현창(鉉彰)을 임시정부에 밀파하여 보고 하도록 하자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명의로 감사장이 수여 되였다,
선생은 더욱 열성을 다하여 동지 권인채(權仁采)를 통하여 김상덕(金相德)으로 하여금 강원도에 애국단 지부를 설립 하도록 하자 김상덕이 철원으로 내려가서 박연서(朴淵瑞)강대여(姜大呂) 김완호(金完浩) 이용우(李用雨)김철회(金喆會) 박건병(朴健秉) 오세덕(吳世悳) 등 동지를 규합하여 철원에 애국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명의로 이봉하를 도(道)단장에 강대여를 서무국장에 김완호를 재무국장에 박연서를 통신국장에 박건병을 학무국장에 김철회 이용우를 외교국장에 각 임명하고 사령장을 발급하면서 각 군단 면단을 조직하도록 명 하였으며 그뒤 충청남도에도 조직을 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연(金泰淵)을 맞아 상의하고 임시정부와 각 독립운동 단채사이에 연락을 더욱 긴밀 신속히 하여 독립운동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애국단 산하단채를 통하여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기로 하고 김태연으로 하여금 김순호(金順浩) 김교선(金敎善) 등과 합작 하기로 하였다,
동년 11월 김교선의 집에서 安敎一(안교일) 申相均(신상균) 李정邦(이정방)등 여러 동지들과 회합하여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할겄을 맹서하고 혈성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초청을 받아 상해로 출발하기 직전에 일본경찰에게 채포되여 징역 5년의 언도를 받아 복역 하였다,
출옥후 선생은 1927년 1월 心鏡(심경)잡지에 항일 사상을 고취하는 논문을 계제하여 다시 일본경찰에 채포되여 3년6개월을 언도받아 복역하다가 1931년 6월10일 병보석으로 풀려 낫으나 순국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발취
광명시 철산동 56/103 후손 신공철
평산신씨 사간공파 파조 할아버지의 차남 敬宗(경종) 할아버지의 계열 이며 전북井邑 希達(희달) 할아버지의 후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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