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는 학생아카데미
이처럼 세포 조직의 확대와 아카데미 조직의 활성화에 따라 흥사단은 새로운 활기를 얻게 되었고, 다양한 수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해 나갔다. 1964년 10월 5일 제 3차 약법을 개정하여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고, 동맹독서· 동맹체조· 동맹작업 등 단우의 수련 프로그램을 강화하고(1965년 9년 19일 예비단우 동맹수련 요강 제정), 1964년 4월 15일에는 <동광>, <단보>, <공함>, <새벽>의 맥을 이어서 새로운 기관지 <기러기>창간호를 발행하고,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수백 회에 걸친 전국적인 순회강연을 통하여 도산사상과 흥사단주의를 전파하였다. 이 순회 강연에는 주요한ㆍ장리욱ㆍ안병욱ㆍ신상초 등의 단우를 포함하여 저명한 단내외 인사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의 열정적 활동은 도산의 사상과 흥사단 운동을 청년 학생들의 가슴에 아로새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아카데미는 그 수와 양에 있어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대학생 서울아카데미의 경우,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대성빌딩 4층의 집회실이 좁아서 고민을 할 정도가 되었다. 그 대안으로 본부에서 학교별 분활 방침을 확정하여, 68년부터 ‘대학생 서울 아카데미’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등의 순으로 분할되기 시작했다. 물론 1964년에 이미 성균관대 도산연구회가, 1966년에 건국대 개척자회가 창립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며, 고등학교도 1967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선두로 학교별 아카데미가 창립되기 시작하여 양적으로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대학생 아카데미는 전반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지향하는 대학 동아리로 변화하였다. 유신 이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학생운동 중심의 아카데미 운동은 저항적, 투쟁적 성격이 점점 강화되어가면서 80년대 중반에는 서울, 부산, 광주, 대전, 청주 등의 대학 아카데미는 완전히 학생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대체로 대학생의 의식화 커리큘럼을 통해 세계관의 변화를 모색하는 철학과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학습, 한국 근대사 학습을 통한 민족운동에 대한 이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는 정치경제학 및 사회철학 학습을 통해 실천적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런 학습과정을 거친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대학생 아카데미는 비록 지역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었으나 대체로 민주화 운동의 주력으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단 지도부로서는 심각한 지도력의 한계를 느끼는 한편, 이념 상의 이질화 문제와 아울러 관리와 통제에도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 아카데미 운동은 한국 학생운동사에 기록될만한 양적·질적 성과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흥사단 내적으로는 조직을 확산하고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단우 양성에 기여했다. 현재 흥사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들이 거의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또한 입단은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아카데미 출신들이 흥사단 정신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