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탑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막 출발하려는 전철에 올랐다. '아뿔사!' 전철이 출발하자마자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는 것을 알았다. 모란에서 내려 반대쪽 플랫폼으로 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빠름' 보다 조금은 늦더라도 '바름'이 더 중요한 가치임을 잊었구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불나방처럼 우루루 몰려가는 인생들도 많다.
주말 아침 전철 안 좌석은 노인들 차지고 젊은이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평일 날은 출근 길과 삶의 터전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루었을 터이니 주말 아침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며 느긋한 시간을 누릴 여유는 이 시대 청장년들의 당연한 권리이지 싶다.
오리에서 M과 H를 만나 영남길 제3코스 탄천을 따라 죽전 보정을 지나 구성으로 향했다. 얼음 풀린 물 가에서 탄천 오리 떼는 먹이 찾기에 한창이다. 사람들은 드문드문 아스팔트와 우레탄으로 잘 포장된 천변을 걷거나 달리거나 반려견을 앞세우거나 페달을 밟는다.
마북삼거리를 지나 구성초등학교 울타리를 따라 돌아가다 보면 계정 민영환 선생의 묘소가 있다. 일제에 외교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을 저지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매국의 오명을 남긴 을사오적들이 누린 한 때의 영화는 백세유방百世遺芳, 계정의 의롭고 아름다운 죽음에 감히 범접할 수 없다.
조금 더 걷다보면 언남동 법화산 자락에 명륜당과 대성전을 갖춘 용인향교가 자리한다. 조선전기에 마북동에 세워졌고 고종 때 현 위치로 옮겼단다. 수묵화 서예 등 강좌를 여는 등 여전히 이 지역 강학의 장으로서 또 인륜을 바로 세우는 유도儒道의 상징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해발 383미터 법화산은 이곳에서 35.6km를 달려 한강으로 흘러드는 탄천의 발원지다. 경사가 완만하고 오르기 편안하여 어르신들이 혼자서나 삼삼오오 오르내리며 스쳐지난다. 그 산 중턱에서 산을 내려오던 여성 한 분이 땅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에 걸려서 넘어졌다. 흙으로 덮인 육산이고 얼었던 땅도 풀려 다친 데가 없어 다행이다. 걸어 넘어뜨리려는 장애물이 어디 나무뿌리 뿐이겠는가.
법화산 남쪽 자락 물푸레마을로 내로와서 구성교차로를 거쳐 동백호수공원에 도착하여 제3구간을 마쳤다. 부근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에 막걸리와 만두를 시켜서 성성한 허기의 빈 공간을 채웠다.
영남길 약 6km 제4구간은 동막과 백현이 합쳐져 생긴 동백리의 호수공원 옆 근린공원에서 시작된다. 구릉지와 얕은 산야가 많은 용인은 개발의 바람이 거세다. 산자락 틈새를 비집고 파고들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빌라와 아파트 군락은 하루가 다르게 산세와 지형을 바꾸어 놓고 있다. 족히 한 계절이 지나면 모습이 달리지는 이곳은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옛말이다.
해발 471미터 석성산 정상까지는 멀지 않지만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그 이름처럼 돌로 쌓은 성처럼 산정은 거대한 바위로 된 난공불락의 요새같다.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 너른 정상에 서면 영동고속도로를 비롯 사방이 툭 트여 시야가 시원스럽다.
하산은 용인시청 쪽으로 군 통신 시설이 들어선 능선을 우회해서 나무계단을 따라 암반으로 된 산 정상에서 내려왔다. 정상 아래 임도가 시작되는 동쪽 사면 아늑한 능선자락에 통화사가 자리한다. 산 위에서부터 거북했던 배를 움켜지고 해우소에 들러 몸속의 짐을 버리니 모든 근심이 함께 떠난듯 가쁜하다.
통화사에서 용인시청까지는 산정 아래를 휘돌아 아랫쪽 긴 능선을 따라 군 부대 철망을 끼고 걷는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용인 삼가리와 어정을 잇던 멱조현, 메주고개 안내판의 고개에 얽힌 전설은 미소를 머금게 한다. 호랑이로부터 시아버지를 구한 며느리의 전설, 쑤던 메주에 내려앉은 쇠파리를 쫓아 주걱을 휘두르며 이 고개까지 왔다는 전설, 두 전설 중 표지판은 후자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쇠파리를 '바람난 서방'으로 살짝 바꿔보면 불경할까?
제4구간을 용인시청에서 마무리하고 번듯한 용인시청사 앞을 가로질러 그 옆 기흥과 에버랜드를 잇는 경전철 에버라인 시청•용인대역으로 갔다. 지상 고가철로 위를 달리는 경전철은 일반 전철보다 폭이 좁고 길이도 전철 한 량 정도로 아담하다. 아침의 지하철과는 달리 경전철엔 젊은 승객이 대부분이다. 경전철은 아래 위 사방 공간이 빈 우주를 유영하는 은하철도처럼 플랫폼으로 나는듯 미끄러져 들어왔다. 마치 놀이동산 기차를 탄 느낌이다. 운행 간격이 6분이라니 이용객들이 무척 편리하지 싶다.
옛 얘기들을 여기저기 간직하고 있는 영남길 3, 4구간 걷기를 마무리하고 뜻하지 않은 색다른 경전철 탑승도 체험한 하루다. 높은 교각 위 궤도를 달리는 전철 창 밖으로 지나온 석성산 법화산 능선이 천천히 스쳐지난다. 뒤에서 봄이 추월하려는듯 빠르게 쫓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