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세기 이전의 역사
쿠르드족의 원형 쿠디족
쿠르드족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여명기에 해당하는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르드족은 역사적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의 흥망성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기원 전 4천년 전 수메르 민족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켰으나, B.C. 2350년 경 서남쪽으로부터 셈족이 쳐들어와서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고 통일된 왕국을 건설한다. 역사가들은 이 왕국이 약 200년 간 존속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 중 50년 간은 지금 이라크의 북쪽에서 남침한 쿠티족이 남쪽 수메르와 아카디아 지역을 정복하여 통치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바로 이 쿠티족이 쿠르드족의 원조라고 역사가들은 주장한다.
이후 쿠르드족은 세력이 막강했던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지배 하에 있다가, 이들 국가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왕에 의해 멸망당하자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페르시아의 경우 사산왕조 (223-642)의 시대로 배화교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쿠르드족도 자연히 배화교를 신봉하게 됐다.그러나 사산왕조 이전의 파르티아 왕국(B.C.247-A.D.224)의 통치 하에 있을때 기독교화가 일부 이루어진 관계로, 기독교로 개종한 쿠르드족은 사산왕조 통치 하에서 종교적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 642년에 사산왕조가 몰락하면서 아랍인들이 침입해 들어왔고,이어서 610-632년에 걸쳐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와 메디나에서 무하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에따라 상당수의 쿠르드족이 개종하였지만, 기독교를 철저히 숭배했던 일부 쿠르드족은 개종을 거부, 심각한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정복전쟁을 통한 이슬람의 세력이 점점 강화되면서 쿠르드족은 더이상 이슬람교에 대항할 수 없어 대량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쿠르드족의 지도자들은 종교적 열정을 보이고,특히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십자군을 물리친 아랍의 영웅 살라딘 장군이 쿠르드족에서 배출된다.
쿠르드족의 흥망
쿠르드족은 이슬람화 이후 아랍계 왕조 밑에서 일개부족으로 지내왔으나 10기에 이르러 마그완, 라트와트 등의 독립왕조를 세우며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쿠르드족이 나라없는 설움을 겪게된 것은 1513년 오스만터어키가 중근동지역의 거의 전부를 정복, 지배하면서 부터이다. 이후 17세기에 오스만터어키와 이란의 사이파와조간의 국경조약으로 조국이 분할되면서, 그동안 강력한 부족국가 통치를 기반으로한 봉건 영주제의 소국가가 군림하는 식으로 민족의 존립이 유지되었던 쿠르드족은 터어키계는 수니파 이슬람을 이란계는 시아파 이슬람을 믿게 된다.쿠르드족은 여러차례 인접 기독교 국가들과 손을 잡고 터어키군을 정복하려 하였으나,결국은 정복당하여 1932년 제 2차 세계대전의 종료까지 오스만 터어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쿠르드족은 여러 가지로 이용당했다.19세기 말에는 오스만 터어키가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을 대량학살하는데 쿠르드족을 이용한 적도 있었다. 명심할 것은 쿠르드족의 대다수가 수니파 이슬람을 믿기 때문에 시아파 이슬람을 믿는 이란에 적대적일 것 같으나, 정반대로 역사적으로 친이란경향을 보여왔다는 점이다. 그것은 쿠르드족이 역사적으로 이란과 깊은 연고를 맺어왔고 언어나 인종적으로 가깝기 때문으로 분석된다.따라서 8년 간의 이란-이라크 전쟁때 이라크의 쿠르드족이 친이란적인 성향을 보였고, 또 이란의 호메이니가 그들을 지원했던 것이었다.
2. 20세기 이후의 역사
20세기 중동의 쿠르드 근대사
쿠르드족은 원래 부족 간의 압력과 갈등, 분열1) 이 심한 민족이었다. 그런 만큼 쿠르드족을 지배하고 있던 나라들은 비교적 손쉽게 이들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쿠르드족이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쿠르드족이 독립투쟁을 하기 시작하면서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례로 중동 인근 국가들은 물론 서방국가들로부터 독립국가의 건설을 지원해준다는 달콤한 약속을 믿고 함께 싸웠다가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버림받고 마는 쓰라린 배신만 수차례 겪어왔다.
1) 쿠르드족의 각기 다른 욕망
a.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자치구로 존재하기를 원함
b.전적으로 독립하기를 원함--이란, 이라크, 터어키
c.이슬람의 형제애로 그들이 속한 나라의 일원이 되길 원함--터어키 일부
d.국가적인 혹은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의 일부가 되고 싶어함
2대에 걸친 배신의 쓰라림
1979년 당시의 쿠르드족 지도자 무스타파 바르자니가 미국으로 건너가 암치료를 받다가 사망하고, 지금 그의 아들 마스우드 바르자니가 쿠르드 민주당을 맡아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 역시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다가 자신의 아버지처럼 배신당하고 지금은 절망감에 빠져있다.
또한 이란의 경우 1970년대에는 쿠르드족을 지원했으나 1975년 이라크와 알제리 협정을 맺으면서 지원을 즉시 중단했다가, 1980년대에 들어와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다ㅣ시 지원을 시작했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군사협력을 막고 이라크 내부세력 약화를 목적으로, 또 후세인 정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들기 위해서 였다.
그 이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후세인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 이란-이라크 전쟁동안 이란의 편을 든 쿠르드족 요새에 대한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화학무기까지 사용해 약 5천 명의 민간인까지 살상하는 식으로 무자비한 토벌이었지만, 당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이란과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라크의 이같은 만행을 묵인해 주었다.
미국의 계산과 속셈
걸프전이 시작하자 사정은 또 다시 급변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국민 스스로가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야 한다" 며 은근히 남부 시아파 반군들과 북부 쿠르드족들을 부추겨 반 사담 후세인 운동의 선동에 나섰다.그 결과 전쟁이 끝난 후 이들 두 세력은 성공적인 반란을 일으켜 양면 협공으로 바그다드시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쿠르드족도 이때가 수난의 역사를 끝낼 수 있는 독립의 호기라고 판단,독립에의 열기를 불태우며 PUK의 지방방송인 '쿠르드 인민의 소리' 방송을 통해 쿠르드 전사들의 무장을 촉구하고 후세인 정권에 대항해 봉기를 강조했다.
KDP와 PUK의 두 주요 게릴라 단체들은 그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연대관계를 유지, '페시메르라스(죽음의 사람들)'로 불리어 가며 전통의상인 불룩한 린네르바지와 두건을 쓰고 산간지역을 누비며 반 후세인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전세가 역전돼 불리해진 쿠르드 반군이 후세인 정권 타도를 위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을때 미국은 의외로 외면하였다. 미국은 걸프전 기간에는 쿠르드족을 선동해서 반후세인 운동을 사주했고, 종전 후에는 후세인 정권 정복투쟁에 적극적인 지원을 보일 것 같은 태도를 보이더니, 후세인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궁지에 몰린 쿠르드족의 지원요청에는 언제 보았냐는 듯이 묵살해 버린 것이다.
쿠르드를 버린 미국
미국은 본질적인 중동의 질서재편에 계속적인 불안요소를 제공하고 있는 쿠르드족이나 남부 시아파가 바그다드를 점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단지 후세인 정권의 약화와 그로인한 이라크 군부 내의 쿠테타를 노리고 쿠르드족의 무장반란을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도 역시 미국 편에서 후세인의 제거를 희망해 왔으나, 쿠르드족과 시아파 이슬람세력의 팽창은 약화된 후세인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고, 게다가 과격파 회교국인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이라크의 영토나 국력이 전전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후세인의 존속을 희망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쿠르드족은 강인한 산악족으로 전쟁에 유달리 용기있는 민족이지만, 나라없이 강대국들의 손아귀에서 사탕발림의 약속에 현혹되어 승산없는 이용도구가 되거나 용병으로 끌려다니는 악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었다.
텐트 하나 없는 피난 길
결국 2백 50만명에 이르는 쿠르드족은 미국에 속고 나라없는 민족의 울분과 설움을 안은 채 비참한 피난길에 오르게 됐다. 그 가운데 터어키 국경으로 도망친 쿠르드족은 자국 내의 쿠르드족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터어키 정부가 국경을 폐쇄하는 바람에 국외탈출도 못하고, 섭씨 영하 10도를 내려가는 눈 덮힌 산 허리에서 식량,의복, 식료품은 커녕 텐트 하나 없이 얼어죽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다.
하루에도 굶주림과 병과 추위에 시달려 죽어가는 어린이, 노약자가 적어도 1천명을 헤아린다고 보여지고 있다. 이렇게 비참한 쿠르드족의 처참한 상황이 연일보도되자 세계의 주요 언론들은 그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했으나, 미국은 이라크의 잘못이라며 이라크의 정부군에 쫓기는 피난민들을 본체 만체 했다.
그러다가 부시 대통령은 반후세인 운동을 부추기고 그 결과로 쿠르드족의 참상을 간접 초래한 미국의 도덕적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책을 급선회, 지난 92년 4월 16일의 특별성명에서 인도적인 이유로 미군을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직접 투입시켜, 이라크군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난민촌을 건설, 안전구호를 돕겠다고 발표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내부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던 당초의 결심을 번복하고 미군을 투입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쿠르드 난민의 극심한 고난과 미국에 대한 분노를 일단 누그러 뜨리고, 미국에 대한 신뢰와 도덕성 회복을 기대한 이외에, 유럽국가들의 긴급 구호 정책에 미국이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번째 합의
이라크 정부도 역시 외국군대가 자국영토에 들어오는 것은 '내정간섭'내지 '주권침해'라고 주장하던 종전의 태도와는 달리 미군주도의 난민촌 건립에 협조할 뜻을 비추었다. 이라크 외무장관은 유엔에서 쿠르드난민의 안전구호를 보장할 것임을 다짐하는 협정에 서명했는데, 그 이유는 자코시의 난민촌 건설을 묵인하는 선에서 미국과 타협을 하고 이라크 국민들에게는 국내 언론을 동원해서 미국의 처사를 비난, 반미감정을 고조시키는 한편, 나아가 유엔의 대 이라크 금수조치를 해제 시키고 보자는 잠정적인 목표달성에 있는 듯 하다.
후세인 정권은 쿠르드족 난민과 반군들에 대해 한편으로는 대규모 살상을 계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의 제스츄어를 계속해서 써왔다. 이라크 정부는 난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계속 호소하고 쿠르드족에게 자치권 인정과 국회에서 일정 수의 의석을 할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의 합의는 서방국가들의 관심이 고조되는 등의 주변 상황을 볼때 다소 이행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지다. 하지만, 쿠르드인들 사이에는 아직도 불신감이 팽배해 있다. 이는 쿠르드족과 후세인 정권 사이에 뿌리깊은 반목, 대량 유혈 보복 사태, 지난 3차례에 걸친 이라크 정부의 약속 불이행 등을 고려할때 당연한 것이다.
후세인이 사라져야 한다
터어키나 이란의 난민들 역시 "후세인이 권좌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이라크 내의 쿠르드족의 권리는 보장될 수 없으므로, 우선 독재자의 제거가 이루어져야 한다." 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구체적으로 들어갈 경우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엇갈리는 문제들이 있다. 한 예로 쿠르드족이 구상하는 자치구에 포함될 키르쿠크는 걸프전쟁 전 하루 3백 50만 배럴, 이라크 총석유 생산량의 25%를 생산하는 이라크의 중요한 유전지대로 이라크 정부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다. 그런만큼 자치지역에 포함시키는데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후세인 정부가 몰락한다고 해도 이라크의 경우 광활한 유전지대를 끼고 있는 쿠르지스탄 지역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여, 또 이라크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는 쿠르드족에 대한 경계심리를 늦추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이라크 북부에 군대를 파견한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오스트리아 등 서방 연합군들의 경우 쿠르드족의 분리 독립을 원치 않고 있다.
제 2의 팔레스타인 ?
따라서 난민촌의 건설도 쿠르드족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다 미국이 염려하는 것은 이라크 내에 쿠르드족의 자치구역을 만들어 주면, 역시 이라크내의 시아파 회교도의 보호를 명분으로 이란이 이라크 내분에 개입할 명분이 생겨, 이라크가 '제2의 레바논화'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번 난민촌의 건설은 걸프전을 계기로 미국이 천명해 온 새로운 세계 질서에 미국의 힘의 과시라는 측면이 반영되고 있지만, 미국 정부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제한된 군사작전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미국의 개입은 쿠르드족의 보호책이 아닌 구호책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하루빨리 이라크에서 군사개입의 발을 빼기 위한, 또 난민촌 건설 후의 관할책임을 유엔에 빨리 이용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러나 지난 5월 9일 후세인 대통령은 이것마저 거절했다. 쿠르드족의 구호활동을 위한 요원들은 받아들여도, 이라크에 주둔할 '유엔 경찰군'의 창설구상은 단호히 거절했다. 따라서 유엔이 작은 규모의 창설군으로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구호품을 전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게 됐다. 그 결과 난민촌은 쿠르드족의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장기적으로 볼때 쿠르드족의 시련은 당장 끝나는 것이 아니며, 쿠르드족 문제의 영속적인 정치적 해결은 상당기간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이라는 부정적 관측이 지배적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걸프 전 발발부터 전쟁의 주된 목적이 무고한 이라크 국민의 살상이 아니라 대통령 후세인의 제거에 있다고 역설해옹 미국이다. 그런데 종전 후 지금까지 후세인 대통령은 건장한채 선량한 국민, 특리 쿠르드족만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20세기의 엑소더스, 쿠르드족의 이라크 탈출은 이런 복잡한 산술의 산물인 것이다.
(자료출처 : 쿠르드족의 친구들, Here kr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