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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와 호의 차이
□ 자(字)
자(字)는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관례(冠禮:성인식) 때 성인이 되었다는 징표로 새로 지어주는 별명이다. 자의 사용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송나라 사유신(謝維新)의 ≪고금합벽사류비요(古今合璧事類備要)≫ 속집에 강숙(康叔)의 호칭이 문헌상으로 처음 나타나는 자이다.
주나라 초기의 동기(銅器)에 나타나는 '영이'(令彛)라는 글자에 자로 추정되는 '영'자가 쓰여진 것으로 보아 이미 주나라 초기에 자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명(本名)이 태어났을 때 부모에 의해 붙여지는 데 비해 자는 윗사람이 본인의 기호나 덕을 고려하여 붙이게 되며, 자가 생기면 본명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명을 휘명(諱名:부르기를 삼가야 하는 이름)이라고도 한다(줄여서 "諱"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글을 아는 사람이면 성명 외에 자와 호(號)를 가졌는데, 이는 2가지 이상의 이름 가지기를 좋아하는 복명속(複名俗)이나 실제의 이름 부르기를 꺼리는 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윗사람에게는 자신을 실명으로 칭하지만 동년배 이하의 사람에게는 자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른 사람을 부를 때, 같은 또래나 아랫사람에게는 자를 불렀고, 임금·스승·부모가 신하·제자·자녀를 부를 때는 실명을 사용하였다. ≪논어(論語)≫에서 공자(孔子)는 제자 안연(顔淵)을 회(回), 자공(子貢)을 사(賜)라 부르고 있다.(顔淵의 "淵"과 "子貢"은 자임)
≪예기(禮記)≫에 의하면 남자 20세, 여자 15세가 되면 자가 붙는데, 여자의 자에는 자매의 순서를 나타내는 백(伯)·중(仲)·숙(叔)·계(季)를 붙이고, 남자는 그 실명과 의미상 관련이 있는 자를 붙여 그 위에 백·중·숙·계나 자(子:남자에 대한 미칭)를 붙이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공자는 본명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는데 중(仲)은 아우라는 뜻으로 공자에게는 형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지었고, 니(尼)는 그가 이산(尼山)에 기도를 드려 낳은 아들인 것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에서 여자는 자를 거의 가지지 않았고, 남자의 자에도 형제간의 차례를 나타내거나 같은 글자를 넣어 짓는 일이 흔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설총(薛聰)의 자가 총지(聰智)였던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자의 사용이 보편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설총과 동시대인이었던 원효(元曉)는 자가 없다. 어쨌거나 옛 문헌에서 실명이 아닌 자로 지칭한 사례가 많아 자를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 호(號)
본명이나 자(字)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으로 아호(雅號)·별호(別號)라고도 한다. 이 역시 2종 이상의 이름을 가지는 풍속이나 본명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한국이나 중국 등 주로 동양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호가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사대부·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 중국의 경우 호는 당나라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송나라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이태백(李太白)이나 송나라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본 이름인 이백(李白)이나 소식(蘇軾)보다도 호가 널리 알려진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 호의 사용이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자들간에 학문적 교류와 편지 교환이 일반화되면서 본명보다는 호나 자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는 대부분이 거처하는 곳〔所處以號〕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뜻〔所志以號〕, 좋아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거처하는 곳이 바뀜에 따라 호가 달리 사용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물건이 여럿인 경우 호는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호의 종류에는 아호·당호(堂號)·택호(宅號)·시호(諡號) 등이 있는데, 아호는 문인·학자·화가·서예가 등이 풍아(風雅)한 취미로 즐겨 썼고, 당호는 본래 집의 호를 말한 것으로 그 집의 주인을 일컫기도 한다. 택호는 벼슬이름이나 출신지를 붙여 그 사람의 집을 부르고, 시호는 선왕의 공덕이나 재상·학자 등의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였고, 제자나 고향사람들이 지어 올리던 사시(私諡)가 있다.
아호와 당호의 경우는 뚜렷한 구별이 없이 혼용되기 일쑤였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 이규보(李奎輔)의 경우는 초기에는 시·술·거문고 세 가지를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호하였다가 나중에는 구름에 묻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좋아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호를 바꾸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로 호의 사용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주로 자신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친 곳을 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황의 퇴계(退溪), 이이(李珥)의 율곡(栗谷), 서경덕(徐敬德)의 화담(花潭)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문인들을 지칭할 때도 퇴계문인·화담문인·율곡문인 등으로 호를 사용하였다. 성리학자 조식(曺植)의 호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용어로서 노장사상에 관심을 가진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호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조선 후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500여 개가 된다. 김정희가 많은 호를 사용한 것은 시·서·화에 두루 능하였던 예술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대표적인 호는 추사·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선객(仙客)·불노(佛奴)·방외도인(方外道人) 등으로서 유·불·도 삼교사상을 망라하는 호를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
조선 후기 이래로 호 사전의 성격을 띤 많은 "호보(號譜)"들의 편찬은 호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해주고 있다. 1945년에 편찬된 ≪대동명가호보(大東名家號譜)≫에는 호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있는데, 당(堂)·암(巖)·실(室) 등으로 끝나는 호가 많았다.
내용별로는 자신이 거주했던 곳이나 인연이 있었던 곳을 따서 지은 경우와, 인생관이나 수양목표를 한 경우, 완호물(玩好物)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주시경(周時經)의 ‘한힌샘’, 최현배(崔鉉培)의 ‘외솔’ 등의 호가 나타났으며,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김정식(金廷湜)의 소월(素月), 박영종(朴泳鍾)의 목월(木月) 등의 호도 우리에게 이름보다는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 외에 이상백(李相佰)의 호 상백(想白)과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호 이호우(爾豪愚)는 이름과 호의 음을 같게 한 경우이다. 오늘날에는 사회체제가 다원화되면서 2종 이상을 쓰는 호보다는 자신의 실명(實名)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문학·예술 등 일부 분야에서 호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호를 통하여 당시 인물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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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들의 아호
유명 선인들의 아호
포은 (圃隱) 정 몽주(鄭 夢周)
매죽헌(梅竹軒) 성 삼문(成 三問)
매월당(梅月堂) 김 시습(金 時習)
퇴계 (退溪) 이 황(李 滉)
율곡(栗谷) 이 이(李 珥)
토정(土亭) 이 지함(李 之函)
우암(尤庵) 송 시열(宋 時烈)
다산(茶山) 정 약용(丁 若鏞)
수운(水雲) 최 제우(崔 濟愚)
녹두(祿斗) 전 봉준(全 琫準)
송제(松濟) 서 재필(徐 載弼)
일성(一醒) 이 준(李 雋)
한헌샘 주 시경(周 時經) 우리말 아호 사용.
만해(萬海) 한 용운(韓 龍雲)
우남(雩南) 이 승만(李 承晩)
백범(白凡) 김 구(金 九)
도산(島山) 안 창호(安 昌浩)
해공(海公) 신 익희(申 翼熙)
매헌(梅軒) 윤 봉길(尹 奉吉)
월남(月南) 이 상재(李 商在)
고당(古堂) 조 만식(曺 晩植)
중수(中樹) 박 정희(朴 正熙)
현대 정치인들의 아호
김 대중 (金 大中) .......... 후광 (後廣)
김 영삼 (金 泳三) .......... 거산 (巨山)
김 종필 (金 鍾泌) .......... 운정 (雲廷)
이 회창 (李 會昌) .......... 경사 (俓史)
조 순 (趙 淳)................. 소천 (小泉)
박 찬종 (朴 燦鍾) .......... 우당 (尤堂)
이 기택 (李 基澤) .......... 일민 (一民)
정 대철 (鄭 大哲) .......... 만초 (萬初)
김 상현 (金 相賢) .......... 후농 (後農)
김 윤환 (金 潤煥) .......... 허주 (虛舟)
어느 노타리 클럽 회원의 아호 들
해엄(解嚴) 해암(海岩) 송재(淞齎) 삼천(三泉) 수산(水山) 호암(晧岩)
청운(靑雲) 성원(盛原) 영재(榮栽) 후암(厚岩) 한송(閒松) 혜천(惠天)
해당(海堂) 석촌(夕村) 인향(仁鄕) 해강(海崗) 상경(尙敬) 월산(月山)
청풍(淸風) 현매(賢梅) 산방(山房) 연곡(連谷) 하주(何洲) 용천(龍泉)
남천(南泉) 금산(金山) 백암(白岩) 성두(星斗) 오원(梧園) 소담(素潭)
예광(藝光) 란파(蘭坡) 향곡(香谷) 운야(雲野) 현재(玄栽) 광덕(廣德)
감천(甘泉) 풍산(豊山) 인우(仁雨) 와평(瓦坪) 대천(大川) 운현(澐顯)
농은(農隱) 월랑(月朗) 동암(東岩) 소백(素伯) 창봉(昌奉) 곽제(郭齊)
청계(淸溪) 예암(藝岩) 예당(藝堂) 송산(松山) 남제(南濟) 일봉(一峯)
정암(頂岩) 우성(友盛) 월곡(月谷) 무문(無門) 연농(蓮農) 남산(南山)
만경(晩耕) 운자(雲자) 원심(圓心) 청경(淸耕)
* 유명인들이였던 사람들의 아호나 자 ,당호를 볼때
서로 상충 상극하는 이름으로 않좋은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대 유학자 였던 사람도 작명은 엉망이다
이름을 바궈 성공한 사람들 - 아호
- 아 호 -
유명 인사나 독특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호(雅號)를 많이 사용한다. 아호란 말 그대로 아름답고 우아하게 나를 지칭하는 이름으로서 반드시 유명한 사람들은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도 자신의 발전과 품위를 위해 얼마든지 아호를 가질 수 있다. 아호 역시 사주나 본명의 부족한 운을 보완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으며, 아호를 사용함으로써 크게 알려지는 경우도 많다. 소설사, 시인, 서예가, 학자들이 작품을 집필하거나 발표할 때 쓰는 이름은 필명(筆名)이라고 한다.
유명인들의 아호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대중(金大中) - 후광(後廣)
강세황(姜世晃) - 표암(豹菴)
강희맹(姜希孟) - 사숙재(私淑齋)
강희안(姜希顔) - 인재(仁齋)
곽재우(郭再祐) - 망우당(忘憂堂)
관 우(關 羽) - 운장(雲長)
길 재(吉 再) - 야은(冶隱)
김동인(金東仁) - 금동(琴童)
김만중(金萬重) - 서포(書鋪)
김병연(金炳淵) - 난고(難苦)
김수장(金壽長) - 노가재(老歌齋)
김수흥(金壽興) - 퇴우당(退憂堂)
김시습(金詩習) - 매월당(梅月堂)
김안로(金安老) - 희락당(喜樂堂)
김옥균(金玉均) - 고균(古筠), 고우(膏雨)
김자점(金自點) - 낙서(洛書)
김정호(金正浩) - 고산자(古山子)
김정희(金正喜) - 완당(阮堂), 추사(秋思)
김종서(金宗瑞) - 절재(節齋)
김좌진(金佐鎭) - 백야(白冶)
김창업(金昌業) - 노가재(老稼齋)
김홍도(金弘道) - 단원(檀園)
김홍집(金弘集) - 도원(道園)
남효온(南孝溫) - 추강(秋江)
문익점(文益漸) - 삼우당(三憂堂)
박문수(朴文秀) - 기은(耆隱)
박 연(朴 堧) - 난계(蘭溪)
박영효(朴泳孝) - 현현거사(玄玄居士)
박인량(朴仁亮) - 소화(小華)
박인로(朴仁老) - 노계(蘆溪)
박종화(朴鍾和) - 월탄(月灘)
박지원(朴趾源) - 연암(燕巖)
오늘날 보통 사람들은 성(姓) 다음에 이름 하나만을 갖지만 조선시대에는 본명 외에도 서너가지 이름을 갖는 게 상례였다. 우선 아명(兒名)은 어렸을 때 부르는 이름으로서 아무쪼록 무병장수하라고 개똥이, 말똥이 등 천하게 지었다. 이는 높은 유아사망률에 따른 미신 때문이었다. 즉 이름을 너무 예쁘게 지어 귀여움을 받으면 귀신이 데려간다고 여겨 일부러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악귀를 막는 한자를 아명으로 썼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관례(冠禮)를 올리면 부모에게 받는 이름이 관명(冠名)으로 곧 본명이다. 그러나 이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윗사람의 본명을 입에 담는 것은 불경(不敬)으로 인식됐다. 관명이 휘명(諱名)으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죽은 조상이 시조나 입향조(入鄕祖)일 경우 본명을 곧바로 사용하는 것은 최고의 금기사항이었으니 이것이 곧 기휘(忌諱)이다. 예컨대 조상의 이름에 '밝을 소(昭)'자가 있을 경우 축문 가운데 '감소고우(敢昭告于)'의 '소'자를 같은 뜻을 지닌 '명(明)'자로 바꿔 '감명고우'로 쓰는 식이다.
따라서 성인이 되면 관명 외에 자(字)를 갖게 되는데 본인이 짓기도 하나 통상 윗사람이 하사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 외에도 문인·관료·예술가 등 유명인들은 호(號)를 가졌는데 이를 높여 부르는 말이 아호(雅號)이다. 그러나 이는 사대부 남성들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평민들은 평생 아명을 썼으며 특히 여성은 출가하면 이름조차 없어지고 본관과 성씨만 남았다.
경남 합천군이 '새천년 생명의 숲' 공원의 이름 변경을 추진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호를 딴 '일해(日海)공원'을 검토하고 있어 논란을 빚고 있다고 한다. 합천군은 강이름을 딴 '황강공원'과 '군민공원' 등은 "대외적 이미지가 약하다"면서 "우리 고장이 배출한 전직 대통령의 아호로 군민의 자긍심 고취와 대외적 관심도를 높일 수 있다"며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광주학살의 최고 책임자이자, 수천억원을 횡령하고도 "가진 돈이 29만원밖에 없다"는 말로 민초들을 허탈하게 만든 장본인의 아호를 따는 게 과연 고향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여줄까.
雅號는 자신의 또 하나의 얼굴
-‘姓名學으로 본 아호풀이’
로타리에서는 회원 사이의 호칭을 雅號로서 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 西歐의 로타리안들이 서로 친근하게 愛稱이나 닉네임으로 부르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號는 그 사람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상징적 별칭이다. 따라서 호를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가늠케 한다. 그래서 호를 하나 얻기까지 나름대로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일단 고상해야 하고 자신을 단적으로 잘 표현해야 하고 뜻과 더불어 발음도 좋아야 하고……, 하지만 의외로 아주 우연한 기회에 생각지도 않게 얻어지는 경우도 있다. 호를 얻기까지의 내력을 살펴보면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심오한 것이 있는가 하면 박장대소할 것도 있다.
다음에서는 국내 유명인들의 아호에 얽힌 갖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전 현직 및 정치인들의 호에 얽힌 재미있는 作號(작호) 유래와 그 내력을 소개한다.
유명인사의 雅號
옛날 사람들은 이름을 존엄한 것이라 여겨 행세한 사람은 한두 개의 호를 가졌는데 전파문화에 젖어 있는 요즘 사람들은 연예인들의 예명은 줄줄 외워도 집안 어른들의 호가 무엇인지,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는 수가 많다.
삼국시대 이후 옛 선인들은 호를 보편적으로 써왔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도 한때 호는 이름보다 더 알려지기를 원했고 유행처럼 성행하기까지 했다.
白凡(백범), 月南(월남), 雩南(우남), 海公(해공), 외솔, 省谷(성곡), 未堂(미당) 등 유명인사들의 호는 어쩌면 이름 석자보다 더 친숙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즘은 멋과 운치가 넘쳤던 호가 차츰차츰 잊혀져 가고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아직도 호를 갖고 간혹 사용하기도 하지만 현대인들은 거의 호를 사용하지 않으며 호를 갖고 있어도 이를 부르기 쑥스러워 한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을 보면 아호는 인격이 고매한 문인이나 학자 또는 예술가들이 본명 외에 쓰는 아명 또는 별호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인격이 있고 없음보다는 호를 지녀야만 권위가 있고 대가가 되며 어른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아호를 마치 무슨 감투마냥 지니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호는 그 사람의 품격에 따라 멋과 운치를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호는 미숙한 젊은이보다는 원숙한 노년에 어울린다. 자연히 연로한 사람들이 호를 쓰기를 즐겨한다.
우리의 동양화단에서는 이상범보다는 靑田(청전), 김은호, 노수현, 허백련보다는 以堂(이당), 心仙(심선), 毅齊(의제)가 더 알려져 있고 서예가 손재형, 김충현, 김응현은 素筌(소전), 一中(일중) 그리고 如初(여초)라고 해야 금새 알아들을 정도다.
노정치인이나 예술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명보다 오히려 아호 쓰기를 좋아했고 남들이 호를 불러주면 은근히 기뻐했다. 유명인사들이 갖고 있는 호는 대부분 다른 사람이 지어 주었거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으로 작호의 내력을 보면 갖가지 일화가 담겨져 있다.
오래 전의 이야기를 한 토막 회상해 보자.
“滄浪(창랑),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 당의 대들보는 海公(해공)과 維石(유석)이야. 대통령 후보는 둘 중에서 골라야 할 것 같네. 常山(상산)과 海葦(해위) 그리고 말수가 적은 雲石(운석)의 뜻은 어때…… 낭산(朗山), 藝齊(예제), 玉溪(옥계), 海岩(해암)도 다른 의견들이 없겠지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三然(삼연) 곽상훈 씨가 자유당 정권과 맞서서 싸워야 할 야당의 중진들 앞에서 털어놓은 말로써 60년대 말 한참 인기를 끌었던 라디오 드라마 ‘정계야화’중의 한 대목이다.
창랑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 해공은 신익희 전 국회의장, 유석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신병 치료하러 미국에 건너가 가료 중에 숨진 조병옥 박사, 상산은 김도연 선생, 해위는 윤보선 전대통령, 운석은 장면 전총리, 낭산은 김준연 박사, 예제는 윤제술 씨, 옥계는 유진산 전신민당 당수, 해암은 박순천 여사 등 기라성 같은 당대의 쟁쟁했던 야당 정책가들을 가리키는 아호들이다.
이제는 다 고인이 되었지만 이들이 한참 정치일선에서 활약하던 시절만 해도 엇비슷한 나이의 상대방을 부를 때는 언제나 이름 대신 쉽고 부르기 편한 호를 거리낌 없이 자연스레 썼다.
雅號는 자신의 또 다른 얼굴
아호는 원래 스승이 지어주었다. 스승은 글방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의 호를 지어주고 성년임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아호를 불렀다. 최근에는 옛날과 달라서 친구들끼리 술자리에서 “네 호는 이거다” 하면서 서로 지어 주거나 자기 스스로 부르기 좋은 것으로 골라 짓기도 하고 선배들이 지어 주는 것을 받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호를 가장 즐겨 썼던 사람들은 문인들이었다. 서예가나 화가들은 낙관을 찍기 위해 주로 썼고 작가들은 필명을 쓰기도 했지만 호를 자기 이름 대신해서 자주 이용했다.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나이든 대학 교수들은 정년 퇴임자리에서 후학들이 기념논문집을 발간하거나 증정할 때는 호를 논문집에서 밝히기도 한다.
아호는 특수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나 일부 국한된 계층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녀 노소 모두가 가질 수 있고 빈부나 직업의 귀천도 따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호는 한 사람이 하나씩만 지니라는 법도 없다. 여러 개 가져도 아무도 탓할 사람은 없다. 마음에 들면 얼마든지 호를 지어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역사 인물 중 김시습 같은 이는 매월당, 동봉, 청한자 등 여섯 개를 지녔고, 글씨로 이름을 날렸던 秋史 김정희는 호가 1백 개를 넘어 百號堂이라고도 불렸다. 호를 지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 이 높아지고 호가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호는 보통 두 자가 많으나 세 자도 있고, 그 이상이 되는 것도 있다.
호에는 주로 바위[岩], 달[月], 냇가[江], 구름[雲], 뫼[山], 해[日], 개천[川], 돌[石], 골짜기[溪], 바람[風], 눈[雪], 비[雨], 정자[亭], 집[堂] 등 자연을 나타내는 것들이 많았으며 자신을 낮춤의 뜻으로 비유한 적음[小], 백성[民], 아래[下] 등도 있고 소[牛], 말[馬] 등 동물과 풀[草] 등을 가리키는 것들도 자주 사용했다.
한글학자 최연배 선생은 외솔로 유명했고, 이효상 전 국회의장의 한솔, 한글학회 한갑수 씨의 눈메, 작가 박승훈 씨의 외별, 시조작가 이병기 씨의 가람,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 씨의 한뫼, 국어학자 김윤경 씨의 한결 등은 순수한 우리말에 한글로 표기된 대표적인 호로 꼽을 수 있다
白凡선생 아호에도 민족사랑
많은 인사들의 호를 분석해 보면 자신이 태어난 곳, 바꿔 말해 향리를 기리는 뜻에서 고향 산천의 지명을 택해 사용한 호가 많았음을 엿볼 수 있다.
전북 고창군 인촌땅에서 태어난 김성수 전부통령과 휴전선 북쪽에 걸쳐 있는 강원도 통천군 아산고을에서 출생한 정주영 씨, 충남 금산군 진산면 옥계리 출신의 유진산 씨, 초대 농림장관을 지내고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경기도 강화군 죽산땅 출신의 조봉암 씨 등은 각기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따서 仁村(인촌), 峨山(아산), 玉溪(옥계), 竹山(죽산)을 호로 삼았다.
김대중 대통령도 출생한 곳의 지명을 땄다. 전남 신안군 하의도 섬마을의 후광리를 따서 後廣(후광)이라 했다.
태어난 고장의 산이름을 빌려 호로 삼은 인사도 있다. 충북 청원군 동산면에 있는 팔봉산 밑에서 첫울음을 터뜨린 소설가 김기진은 뒷산 이름을 그대로 옮겨와 八峰(팔봉)이라 했고, ‘내 고향 남쪽바다’의 시조시인 이은상의 호 鷺山(노산)은 그의 고향인 마산에 놀러왔던 이광수, 박종화, 양주동 등 문인들이 이은상의 생가 뒷켠에 서기가 넘치고 수려하게 솟구쳐 있는 鷺飛山(노비산)을 보고 가운데 글자만을 빼버리고 노산이라고 불러준 것이 그대로 호가 돼 버렸다.
사학자이며 국어학자였던 이희승은 자신의 자그마한 체구를 작고 볼품없이 마구 차이는 조약돌에 비유해 一石(일석)이라고 했는데 그는 일석이라는 호로 인하여 아인슈타인, 다시 말해 독일어로 ‘한개의 돌’이라는 새 별명까지 덤으로 얻었다. 청포도의 시인 이활은 감방에 수감되어 있을 때 수인번호 264를 그대로 호로 정해 李陸史(이육사)라고 했다.
법무부장관을 지냈던 홍진기 씨는 그의 호를 詩經(시경)에서 따왔다. 주나라는 오래된 나라이지만 하늘의 명은 지금까지도 새롭다는 글귀에서 맨 마지막의 新民(신민)을 維民(유민)으로 바꿔 호로 정했다.
호는 이처럼 사람마다 지은 동기나 그 심오한 뜻을 나름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호는 또 사람 따라 선대와 후대로 나눠 탄생연도를 달리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인생무상과 겸손의 뜻이 짙게 배어 있는 것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이병철 씨의 호인 湖巖(호암)은 호수와 큰바위라는 뜻으로 55년 말께 친구인 午溪(오계) 전용순 씨의 권유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86년 대학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孝이야기, 論語이야기 등의 TV 강의로 인기를 얻고 있는 김용옥 씨의 호 ‘도올’은 초나라의 역사에 나오는 이름으로 뽕나무라는 내용을 안고 있다.
성격까지 담고 있는 雅號
쌍용그룹을 창업했던 정계거물 김성곤 씨는 인생을 늘 반성하는 자세로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省谷(성곡)이라 했다.
자유당 때 재무부장관을 지낸 송인상 씨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흠모하는 뜻으로 자신의 출생지인 강원도 회양에서 淮(회)자를 따고 이승만의 아호 雩南(우남)에서 南(남)자를 택해 淮南(회남)이라고 했다.
언론인이며 수필가였던 김진섭은 언제나 졸졸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살겠다는 심정으로 들을 廳(청), 개울川(천)을 합쳐 廳川이라 했다. 평생 나무와 벗하고 지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호를 나무들의 친구라는 樹友(수우)로 해버린 임학자 임창식 교수의 호는 운치와 멋을 뛰어 넘어 차라리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운치와 멋 넘치는 예술가들
문인들의 호는 아무래도 멋이 흐른다. 나무와 달과 자연을 사랑하면서 시의 소재를 그것에서 찾았던 박영종 시인은 그의 호인 木月(목월)을 무척이나 아꼈다. 그래서 아마도 박목월은 누군지 알아들어도 박영종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기영 한국일보 창업주의 호 百想(백상)을 일러 천병규 씨는 백 가지 얼굴을 가진 인물에 가장 걸맞는 아호라 했다.
백상은 무슨 일이든 성취시키는 사람, 바꿔 말해 불가능이 없는 인물, 문필에 능한 사무가, 화술에 뛰어나고 위트와 임기응변에 능한 사교가, 대부형인 정치인, 수리에 밝은 경제인, 만능 스포츠맨에다가 예술을 좋아했던 다정다감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범한 발상의 소유자로 뛰면서 생각했던 인걸에 걸맞는 호를 가졌다.
하지만 본인은 백상이라는 호보다는 늘 많은 사람들이 쉽게 불러주던 ‘왕초’라는 제2의 아호를 더욱 좋아했다.
국내 최초의 新羅 김유신의 號
옛 사람들은 이름은 고귀한 것이라고 해서 임금이나 스승, 아버지만이 부를 수 있었고 평교 사이에는 字(자)를 대신해서 불렀고 나이 어린 사람들 간에는 보통명사격인 號를 불렀다. 그래서 어른이 ‘춘부장의 함자가 무엇인고’ 하고 물의면 ‘무슨 자, 무슨 자입니다.’하고 대답하고 감히 직접 대놓고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의 호는 고려 때부터 본격적으로 썼다.
신라의 명장이었던 김유신의 龍華香徒(용화향도)라는 호가 최초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것은 호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필명으로 더 많이 썼다고 되어 있다.
호의 유형을 살펴보면 자기가 살았거나 태어난 고을 주변의 지역적 특성이나, 지리적 특성, 다시 말해 산이나 강 이름에서 따오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기록을 보면 우리 선대들이 가장 흔하게 썼던 호는 松庵(송암)이었다.
특히 호 가운데서 제일 많이 인용한 글자는 農(농)으로 학식있고 덕망 높은 선비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성명에는 아명과 관명, 시호라는 것이 있었다. 아명은 乳名(유명) 또는 少名(소명)이라고 했는데 아주 어렸을 때 불렀던 이름으로 예를 들면 율곡의 아명은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꿈에 용을 봤다고 해서 見龍(견룡)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冠名(관명)이란 관례를 치른 후 아이시절에 부르던 이름을 버리고 새로 지은 이름으로 율곡의 관명은 珥(이)였다. 字(자)는 숙헌이고 호는 율곡이다. 시호는 문성공으로 이것은 임금이 그의 생전에 공덕을 칭송해서 죽은 뒤에 추존하는 것으로 흔히 文(문), 貞(정), 恭(공), 靖(정), 良(양), 孝(효), 莊(장), 安(안), 景(경), 章(장) 등 1백여 자로 국한해서 썼다.
옛 사람의 이름, 특히 군왕의 이름 등에 僻字(벽자)을 골라 썼던 것은 아무나 쉽게 부를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책을 읽다가도 임금이나 스승, 아버지의 함자와 같은 자가 나오면 음을 바꿔 읽거나 건너 뛰어 버리는 것을 예의로 삼았던 것이다.
歷代 대통령 아호
李 承 晩:雩 南
尹 潽 善:海 葦
朴 正 熙:中 樹
崔 圭 夏:玄 石
全 斗 煥:日 海
盧 泰 愚:庸 堂
金 泳 三:巨 山
金 大 中:後 廣
***
자 와 호의 필요성
[1] 아호(雅號)의 유래
사람은 누구나 출생하면 성명 삼자를 지어 부르게 되는데,
우리의 선조들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가장 존귀하게 여겨,
남들이 함부로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겨서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는 뜻에서 아호나 당호를 지어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호(號)는, 자기 자신이 지어서 부르는 자호(自號)와
집안의 어른이나 스승, 또는 친한 친구들이 지어서 부르게 되는 아호(雅號)와 당호(堂號)가 있고, 이 밖에도 별호(別號), 택호(宅號), 시호(諡號), 법명(法名) 등이 있습니다.
[2] 아호(雅號)를 지을 때의 참고사항
1. 아호 작명의 주의 사항
1) 작명대상자의 환경이나 인품과 직업에 걸맞는 이름이어야 하고,
2) 지나치게 고상하지 않아야 하며,
3) 저속하거나 자기를 비하 하는 뜻이 되지 않아야 하고,
4) 부르기 편안하고 쉽게 싫증이 나지 않아야 하며,
5) 지나치게 어려운 글자는 피하는 것이 좋으며,
6) 발음이 타인의 놀림감이 되어서도 아니되며,
7) 자신의 사주에 도움되는 소리오행과, 자원오행등 <작명의 제반 요건>에 맞는 아호를 작명함 이 바람직합니다.
2. 아호 작명의 소재
1) 가능한 작명대상자의 직업, 기호, 취미, 덕행등의 뜻을 취하는 경우,
2) 작명대상자의 성장지와 특별하게 인연이 있는 지명의 글자를 일부 취하는 경우,
3) 산천초목(山川草木)이나, 자연물, 천문(天文)등의 글자를 취하는 경우,
4) 기타 자신의 삶의 의지나, 단체의 의지를 담고자 하는 형이상학적인 이미지를 취하는 경우 등이 있으며, 작명자의 도덕관이나 인생관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아호에 많이 쓰이는 글자
강(岡), 강(崗), 강(江), 건(乾), 겸(謙), 경(耕), 경(景), 경(庚), 계(溪), 고(皐), 곡(谷), 관(觀), 광(光), 금(琴), 남(南), 담(潭), 당(堂), 당(塘), 동(東), 련(蓮), 리(里), 매(梅), 민(民), 명(明), 봉(峰), 산(山), 삼(三), 상(裳), 석(石), 선(仙), 성(星), 소(笑), 송(松), 실(室), 아(我), 암(岩), 암(庵), 암(巖), 양(陽), 역(易), 옥(屋), 요(堯), 운(雲), 원(苑), 원(園), 원(遠), 원(元), 월(月), 유( ), 은(隱), 인(人), 인(仁), 인(印), 일(一), 장(章), 재(齋), 전(田), 정(精), 정(亭), 정(井), 정(貞), 정(庭), 중(中), 지(地), 천(泉), 천(川). 청(靑), 청(淸), 촌(村), 취(翠), 파(坡), 포(浦), 포(圃), 하(河), 하(遐), 향(香), 헌(軒), 호(湖), 훈(薰), 화(和), 화(華), 해(海).
4. 유명 인사들의 아호 사용례(무순위, 존칭생략)
尨村(황희), 師任堂(申氏), 栗谷(李 耳), 退溪(李 黃), 海月(최시형), 義庵(손병희), 秋史(김정희), 白凡(김 구), 後廣(김대중), 雲庭(김종필), 祐碧(이회창), 虛舟(김윤환), 巨山(김영삼), 雲石(장면), 百想(장기영)등등.
~이중에서 조선시대의 <황희> 정승의 아호인 방촌(尨村: 삽살개 짖는 마을)이 가장 뛰어난 <자연미와 인간미>가 있다는 평(評)이 있습니다.
[3] 아호의 필요성
오늘날 다양한 사회 생활이나, 취미활동, 단체활동, 창작활동 등으로
교제의 범위가 넓어지고, 대화의 상대방이 막역한 사이가 아니고는,
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아호가 있으면, 예의에 벗어나지 아니하고,
부담 없이 부를 수 있는 생활의 지혜가 됩니다.
바쁜 현대인들도 자신에게 적합한 아호 하나쯤 지어 부르는 여유를 가져 보는 것도 삶의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호(號)는 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2종 이상의 이름을 갖고자 한 풍속(復名俗)과 본이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實名敬避俗)에 의해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어진 이름이지요.
중국은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송나라 때에는 호를 가지는 것이 보편화 되었고,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호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원효의 호는 소성거사 (小性居士) 였으며, 낭산(狼山) 아래에 살면서 음악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던 음악가는 우리가 잘 아는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는 기록들이 남아 있지요.
그렇다면, 호는 누가 지을까요 ?
호는 자신이 짓기도 하고 남이 지어주기도 합니다.
추사는 오재봉선생이 수집한 <<추사선생아호집>>에 의하면 호가 무려 503개나 되었다고 하고, 이규보는 호가 6개나 되지요.
호의 종류는 오늘날에는 보통 아호(雅號)와 당호(堂號)를 많이 짓지요.
아호라는 말은 ? 글자 그대로 시나 서화를 하는 작가들이 사용하는 우아한 호라는 뜻이고,
당호는 본래 집(正堂)의 호를 말하나,
그 집의 주인을 일컫게도 되어 아호와 같이 통용됩니다.
이와 같이 호와 당호는 자신이 짓기도 하고 남이 지어주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호를 짓는 기준이나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지요.
고려시대 이규보는 그의 <<백운거사록(白雲居士綠)>>이란 책에서
"거처하는 바를 따라서 호로 한 사람도 있고, 그가 간직한 것을 근거로 하거나, 혹은 얻은 바의 실상을 기준으로 호를 지었다"라고 말하였지요.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 신용호라는 사람은 호를 짓는데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요. 즉 ,
첫째, 소처이호(所處以號):
생활하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처소를 호로 삼은 것(예컨대 도곡 김태정 선생은 도곡이란 지명을 호로 삼았지요)
둘째, 소지이호(所志以號):
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자 하는 뜻을 호로 삼는 것(예컨대 여초 김응현 선생은 항상 처음과 같은 자세로
공부에 임하겠노라고 여초(如初:처음과 같이)라고 하였지요)
셋째, 소우이호(所遇以號):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호로 삼은 것(퇴계 이황 선생은 고향으로 물러나 시내를 벗하면서 공부에 전념하겠노라고 퇴계(退溪)라고 하였지요)
넷째, 소축이호(所蓄以號):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호를 삼은 것이지요.
호의 글자 수는? 몇자가 ? 알맞을까요?
호는 글자수가 두 자인 경우가 가장 많고,
한 자,석 자, 넉자로 된 경우도 있고, 그 이상의 글자수로 된 것도 있지요.
추사 김정희는 10자호를 싸용한 경우도 있는데 "향각자다처로향각노인(香閣煮茶處로香閣老人)"이 그것이지요.
아울러 한글작품에 사용되는 한글 호에 대해서도 말씀드리지요.
주시경 선생의 "한흰샘", 이병기 선생의 "가람", 최현배 선생의 "외솔" 등은 널리 알려진 한글호이지요.
서예가 가운데도 "꽃뜰 이미경 선생, 갈물 이철경 선생께서 한글호를 사용하였지요.
이병기 선생은 자신의 호를 짓게 된 경위를 그의 일기장에서 술회한 바가 있었지요.
그의 일기장에는 "가람은 강이란 우리말이니 온갖 샘물이 모여 가람이 되고 가람물이 나아가 바다물이 된다.
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이니 근원도 무궁하고 끝도 무궁하다. ...중략...우리말로는 가람이라하고 한자로는 임당(任堂)이라 하겠다"라고 호를 지은 연유를 밝히고 있지요.
옛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호를 지으면
호를 짓게 된 변(辨)이나 기(記)를 짓기도 하고,
남에게 호를 지어 줄때도 그 글자의 출전이나 뜻을 밝힌 글을 주기도 하였지요. 이런 종류의 글을 호변(號辨) 혹은 호기(號記)라고 하지요.
지금까지
호를 짓는 이유와 호를 짓는 기준 등등에 대해서 소략하게 답변 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책 몇 권을 소개드리지요.
우리나라 역대 명인들의 호를 적어 좋은 <<호보(號譜)>>는 좋은 자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호에 대해서 더 자세한 것을 알고자 하시는 분께서는
이두희 외 저, <<한국인명자호사전>>, 계명문화사, 1988. 강헌규 외 저, <<한국인의 자, 호 연구>>, 1990.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 호 (雅 號) 란 ?
아호는 이름 이외에
누구나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애칭이다.
아호는
예술가. 문학가. 철학가. 정치가.. 등 대외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인사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다.
국어사전에는
예술가들이 이름 이외에 사용하는 호칭이라고 되어 있으나,
아호의 역사 는 고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불교에서는 法名,
기독교, 천주교에는 세례명,
컴퓨터 P.C통신에는 I.D가 있고,
서양에서도 이름대신 애칭 즉, 영문 이니셜을 따서 부르는 것처럼 아호도 하나의 애칭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어른의 이름을 존함(尊啣)이라 하여, 함부로 부르지 않았으며,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것을 천시하는.. 주로 양반들 계층에서 아호를 널리 사용하였다.
조선 말기에 평민까지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유명 정치인 또는 작가, 예술인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일반인들도 누구나 아호를 가지는 것이 좋다.
※아, 호 짓는 법
아호는 흔히 스승이나, 친지가 지어주거나 스스로 자작 (自作)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친지끼리 아호를 지어 줄 때에는 통상 2~3개를 지어주고 그 중에서 본인이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의 아호는 겸손을 미덕으로 하여 높고 고귀한 문자보다 소박하고 정감있는 문자를 많이 사용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겸손에 있는 것이다.
간단히 아호의 작법(作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뜻이 있는 문자를 사용하여야 한다. (인생관이나 좌우명을 알수 있다.)
둘째
직업이나 성격에 알맞은 문자를 선택하여야 한다....
셋째
이름과 마찬가지로 부르기 쉽고 듣기 좋아야 한다.......
넷째
음양오행이나 수리오행에 서로 상극되는 경우를 피하는 것이 좋다......
다섯째
아호 두 글자의 획수를 합하여 길한 수리(數理)로 사용해야 한다...........
여섯째
겸손한 문자를 사용해야 한다. ..................................................................
※...아호 (雅號)의 소재 (素材)
아호를 지을 때 가장 기초가 소재의 선택이다.
비(雨)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도 봄비가 내리는 날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춘우(春雨) 라는 아호를 가지고 싶지 않을까?
즉, 개인의 성격과 직업에 따라 소재를 변화 시킬수 있는 것입니다.
소재를 분류시키면, 다음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첫째 : 이상 (理想)과 신념 (信念)의 소재 (素材)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신념이나 좌우명(座右銘)
또는 목표 (目標)나 생각 등을 형이상학 (形而上學)적인 표현이나 의지 (意志) 의 표현으로 승화(昇華) 시키는 문자로 아호를 만드는데,
대표적인 예로서
김구 백범의 경우는 白 + 凡 즉, 모든이가 평등함을 추구한 뜻 이 있고,
양주동 박사 무애 (无涯)는 끝이 없는 일을 하려는 의지로 볼 수 있고,
작고한 김윤환 의원 허주 (虛舟)는 빈배이니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아호가 아닐까요 ?
둘째 : 지명(地名)의 소재 (오행분류 土)
평소 그리워하는 고향의 지명이나, 가고 싶은 곳의 지명 사랑하는 사람의 고향등을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이 율곡(栗谷)은 경기도 파주의 율곡촌을 뜻하고,
이승만 우남(雩南)은 서울의 중구도동 우수현 (雩守峴) 남족, 서경덕 화담(花潭)은 개성의 화담을 지칭한다.
셋째 : 산 (山)과 바위 고개 등 자연의 소재 (오행분류 土)
가장 많이 소재로 삼는데, 산의 고고함과 바위의 불변 등 지조(志操)나 의리(義理)의 대표적인 비유다.
다산 (茶山) 정 약용, 가산 (可山) 이 효석 , 거산 (巨山) 김 영삼 등의 인물을 대표적으로 볼 수 있다.
넷째 : 강 (江) 호수(湖水) 바다 (海)의 소재 (오행분류 水)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바로, 순리(順理)와 복종(服從) 그리고 자연의 칭송(稱訟) 등의 뜻으로 사용하며
대표적으로, 단계 (丹溪) 하 위지(사육신의 일인), 퇴계 (退溪) 이 황, 해풍 (海風) 심 훈, 해공 (海公) 신 익희, 만해 (萬海) 한 용운 등이 있다.
다섯째 : 해(日) 와 달(月) 그리고 별(星)의 소재(오행분류 火)
인간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하늘에 있다고 판단하여,
기원(祈願)과 소망(所望) 그리고 희망(希望)의 소재로 하는.....
월남(月南) 이 상재, 몽양(夢陽) 여 운형 등이 사용하였으며, 해(日)와 별(星)은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여섯째 : 초목(草木)과 꽃의 소재(오행분류 木)
사군자(四君子)인 송 (松), 죽 (竹), 매 (梅), 국(菊)을 비롯하여,
낙엽(葉), 숲(林) 등을 소재로 하여, 의지(意志)와 불변(不變)을 또한 아름다움과 힘을 나타내는데 적합하며,
대표적으로 다산(茶山) 정 약용, 중수(中樹) 박 정희, 도원(道圓) 김 홍집 , 송제(松齊) 서 재필 등이 있다.
일곱째 : 기후(氣候)와 계절(季節)의 소재와 기타
한난(寒暖)과 조습(燥濕) 그리고 사계(四季)를 뜻하는 문자의 사용으로,
개성(個性) 과 의지(意志)를 표현하고, 그 외 모든 분야에서도 소재를 찾을 수 있다.
운(雲) 우(雨) 설(雪) 상(霜) 한(寒) 서(暑) 춘(春) 하(夏) 추(秋) 동(冬) 등의 글자 이외에 호(虎) 견(犬) 용(龍) 구(龜) 학(鶴) 조(鳥) 돈(豚) 계(鷄) 등의 동물이름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아호
유명 선인들의 아호
포은 (圃隱) 정 몽주(鄭 夢周)
매죽헌(梅竹軒) 성 삼문(成 三問)
매월당(梅月堂) 김 시습(金 時習)
퇴계 (退溪) 이 황(李 滉)
율곡(栗谷) 이 이(李 珥)
토정(土亭) 이 지함(李 之函)
우암(尤庵) 송 시열(宋 時烈)
다산(茶山) 정 약용(丁 若鏞)
수운(水雲) 최 제우(崔 濟愚)
녹두(祿斗) 전 봉준(全 琫準)
송제(松濟) 서 재필(徐 載弼)
일성(一醒) 이 준(李 雋)
한헌샘 주 시경(周 時經) 우리말 아호 사용.
만해(萬海) 한 용운(韓 龍雲)
우남(雩南) 이 승만(李 承晩)
백범(白凡) 김 구(金 九)
도산(島山) 안 창호(安 昌浩)
해공(海公) 신 익희(申 翼熙)
매헌(梅軒) 윤 봉길(尹 奉吉)
월남(月南) 이 상재(李 商在)
고당(古堂) 조 만식(曺 晩植)
중수(中樹) 박 정희(朴 正熙)
현대 정치인들의 아호
김 대중 (金 大中) .......... 후광 (後廣)
김 영삼 (金 泳三) .......... 거산 (巨山)
김 종필 (金 鍾泌) .......... 운정 (雲廷)
이 회창 (李 會昌) .......... 경사 (俓史)
조 순 (趙 淳)................. 소천 (小泉)
박 찬종 (朴 燦鍾) .......... 우당 (尤堂)
이 기택 (李 基澤) .......... 일민 (一民)
정 대철 (鄭 大哲) .......... 만초 (萬初)
김 상현 (金 相賢) .......... 후농 (後農)
김 윤환 (金 潤煥) .......... 허주 (虛舟)
= 끝 =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런데 순우리말을 그대로 쓰는건 안될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순 우리말 그대로 쓰는 것이 더좋습니다.
강 부회장님의 윤슬....뜻도 좋고 어감도 아주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