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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사랑, 그리고 삶의 미학
백훈 소설 [아름다운 흔들림]
김명옥(시인)
1.
우리는 흔히 말의 예언적인 힘을 믿는다.
말 한 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 말이 씨가 된다, 나중에 두고 보자 등 우리 주변에서 말의 예언적인 힘을 증명해 주는 말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문학은 말과 행동으로 이룩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속에는 말의 예언적인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예언자로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엄청난 말의 홍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엄청나게 쏟아지는 말의 홍수 속에서 과연 진실된 말, 생명의 말로서 예언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말은 얼마나 되며, 예언적인 함을 가지고 있는 문학인 또한 얼마나 되는가.
특히 고도의 과학 문명과 현란한 영상 매체와 전자 매체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말초적이고 즉흥적이고 쾌락적인 것을 추구하는 의식구조 속에서 과연 말의 예언적인 힘과 문학의 예언자적인 힘, 그리고 문학인의 예언자적인 힘을 인정해 주는 사람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현대 사회는 급격히 변모해 가고 있다.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에서 예언적인 힘을 가진 말과 문학은 예언성을 잃어버리고 물신숭배라는 현대 사회의 속성과 결탁하여 점점 상업화되었다. 더구나 문학의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가 점점 팽배하는 속에서 이제 문학은 말의 예언자적인 힘을 믿고 분연히 일어나 인간에 대한 위안과 구제의 효능을 다시 발휘할 때가 되었다. 이제 백훈의 소설 『아름다운 흔들림』에 담긴 잔잔한 예언자적인 말의 힘을 느껴 보자.
2.
백훈의 문학은 건강하다. 그의 예언자적인 말은 항상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예가 없다. 그것은 그의 삶이 또한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 본 일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문학은 동시대의 사회상을 그려나가는 동시에 동시대인의 삶이 모습을 그려 보인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또한 항상 우리 주변에서 함께 웃고 울고 떠들었던 사람들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는 어쩌면 ‘영원한 사랑의 순애보’를 그려나가는 작업에서 소설가의 예언자적인 힘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작품 소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외로움의 이미지’와 ‘사랑의 미지지’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의 의미와 작용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한 사내의 마음의 인과를 더듬어 ‘느끼며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외로움과 사랑은 인간이 영원히 풀어야 할 숙제다. 이 영원한 숙제를 풀기 위해 수많은 작가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문학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이라고 한다. 인간은 항상 외로운 존재다. 하나는 외로워 둘이라는 말처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 삶이라면 사랑은 바로 투쟁의 장에서 승리한 전리품이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해 가는 동물이다. 유승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비행기 사고로 잃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닌다.
“비행기 사고라서 그런지 보상금이 제법 많이 나오데. 마누라가 보험도 여러 개 들어 놓았더라구.”
“마누라 덕분에 부자가 되어 직장도 버렸으니 얼마나 편안한 인생이야.”
독설과 자학으로 그렇게도 힘겹게만 느껴지던 외로움이라는 삶이 무게를 세월과 함께 그는 서서히 적응해 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을 집안에 들어앉아 음악을 듣고 책을 보면서 지내거나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지낸다. 새벽의 하늘이건 깊은 밤하늘이건 하늘에 눈을 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느낀다. 또한 시간마다 차고 넘치는 자동차의 물결 속에 따분하게만 느껴지던 차안에서의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차창 밖으로 흐르는 거리의 풍경도 정겹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나른한 삶의 권태마저도 즐기고 싶어진다.
아내의 죽음과 함께 몸도 마음도 황폐해진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흉한 몰골로 다가오거나 한 순간 낯선 얼굴로 다가설 때가 바로 환경에 적응해 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현대인은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메이는 『인간과 자아 탐색』에서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의 원인으로 가치관의 상실, 자아의 상실, 언어의 상실, 고향의 상실 등을 들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으로 삶의 가치 자체를 빼앗기고 사랑이라는 언어마저 실종된 속에서 혼자라는 외로움과 주위로부터의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는 것에도 뭔가 질서가 있어야지. 남들 먹을 때 같이 먹구 남들 잠 잘 때 같이 자구 남들 놀 때 같이 놀구. 이것이 삶의 질서야. 사회생활의 기본이라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해 본 사람만이 사랑을 알고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줄 줄 안다. 그러나 둘이 되는 길을 험난하다. 그 험난한 길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도피하거나 은둔하고 마는 것이 또한 현대인의 속성이다. 그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의 자리를 차고 들어오는 수연에게 집중되기 시작하는 마음의 조급함을 읽으면서도 안 된다는 마음이 외침을 들으며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다. 어차피 삶이란 반복과 숙달의 과정을 통해서 단순한 것을 배워 가는 것이긴 하지만 기왕에 주어진 삶이라면 보기에 좋아야 한다는 생각 또한 현대인의 자기 중심적인 생각임을 부정할 수 없다.
아내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길 위에서 부르는 그의 노래는 바로 고향의 소리요 평화의 소리였다.
어디에도 나의 자리가 없다는 소외감 나는 아무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단절감으로 나는 오랫동안 앓았어......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깨달았어. 내게는 언제나 달려와 그리움, 나의 외로움을 풀어벌릴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래, 바로 이 자리는 나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는 생각을 하곤 해. 이곳에 오면 나는 위로를 받아. 내 삶에 잇어서 일종의 재충전이 이루어지는 곳도 바로 이곳이야.
바다라는 공간은 언제나 꿈과 희망을 간직한 곳인 동시에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는 혼자에서 둘이 되는 방법을 바다에서 찾고 있다. 현대 물질 문명으로 상징되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가 배운 것이 상실이라면 바다에서 배운 것은 삶의 의욕과 극복의 정신이었다. 아내의 죽음 이후 현실 도피의 공간인 서울에서 그를 끌어 낸 친구와의 여행도 바다라는 공간이다. 바다가 주는 밝음의 이미지 속에서 그는 수연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잔잔한 미소를, 하얀 목선과 부드러운 어깨, 그리고 밤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있는 수연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 어깨에 팔을 두르고 싶어한다.
인간에게는 소유 본능이 있다. 그리고 소유한 것을 놓고 이해 득실을 계산해 보는 이기적인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여자는 공주병 환자요 이 세상 모든 남자는 왕자병 환자라는 말이 유행하듯 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수연과 죽은 아내의 여동생인 혜인 사이에서 그는 갈등을 느낀다. 그는 사랑과 갈등까지도 계산해 놓고 있다. ‘믿지 말자, 감정을 믿지 말자.’라고 되뇌면서도 그 소리를 즐기고 있다. 혜인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소리에서 그는 가정이라는 테두리가 주는 평화의 소리도 듣고 있다. 물 트는 소리, 그릇 부딪치는 소리, 숟가락과 젓가락이 내는 소리, 물이 찰랑이는 소리,......에서 하나가 아닌 둘이기를 원하고 있는 내면의 소리도 듣고 있다.
집안에 들어앉아 집밖의 공간을 살피고 있다. 피해 받고 싶지 않고 방해받고 싶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 사실은 흔들리고 싶지가 않아서 미국에 가려는 거야, 그래...... 처음부터 마음에 경계를 했어야 하는데 내가 어리석었어. 냉정히 생각을 해 보자구. 나는 수연씨와는 안 돼. 그야말로 주간지 기사감 아니냐. ‘서경’ 회장의 무남 독녀와...... 나는 다시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 절대로......
더 이상 피해 받고 싶지 않다는 철저한 자기보호 본능 속에서도 사랑이라는 주제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또 하나의 목소리. 그러나 사람이 본능대로 살 수 없듯이 감정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마치 낯선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은 하면서도, 어디론가 늘 떠나고 싶다고 말을 하면서도 한 발만 내딛어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정신적 분열상태를 그는 겪고 있다.
‘서경’의 회장인 수연의 아버지와의 첫 만남에서 사회적인 신분과 극복할 수 없는 환경의 차이를 느끼면 느낄수록,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만큼 무수히 일어나는 양심의 가책 소리를 그는 듣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남녀를 막론하고 신데렐라를 꿈꾸고 있다. 어느 날,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유리 구두를 신어 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쁜 마녀처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 유리 구두가 정말로 우연히 내 발에 꼭 맞는다면 하는 꿈을 꾸어보지 않은 사람 또한 몇이나 될까. 그러나 그가 신은 유리 구두의 마력은 대단하다. 꿈의 궁전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현대인은 허탈감과 무력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무력증과 허탈감을 뚫고 일어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의 방향을 잡았다.
수연 씨...... 나는 알아요. 사람의 삶에 사랑보다 더 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분명 마음이 서로 깊이 통하는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떠나 보려고 하는 이유는...... 그래요, 선택을 수연 씨에게 돌려주고 싶어서예요. 나는 자격이 모자란 사람이니까...... 나는 언제까지든지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조직화된 사회 속에서 혼자라는 소외의식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다. 그는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서울이라는 공간을 도피하여 미국이라는 보다 넓은 공간으로 이동한다.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는 그만큼 복잡한 공간 속에서는 소외의식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또한 그는 유리 구두 신기를 포기하는 대신 유리 구두가 저절로 신겨질 날을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나는 언제까지든지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수연이 주는 ‘밝음’과 ‘당당함’에 비해 ‘초라함’과 ‘부끄럼’이 대비되는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모든 고통을 떨쳐버리고 공간 이동을 시도한다.
웨스턴 애비뉴는 그에게는 도전과 꿈과 새로움을 약속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곳은 꿈과 희망과 낭만을 줄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으로 도피해 온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일종의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외로움이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그곳에서는 둘이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노래도 둘이 그릴 수 있는 사랑의 그림도 없었다.
수연 씨를 만나러 달려오면서 나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우리가 헤어져 있던 석 달이 내게 무슨 의미였나를...... 그저 손님처럼 나그네처럼 이곳의 삶들을 구경하면서 나는 과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그의 말처럼 그가 선택한 도피의 공간은 결국 그에게 삶과 인간사에 대한 회의만을 안겨준 공간이었다. 동시에 그곳은 꿈의 궁전으로 입성할 수 있는 신데렐라의 꿈을 이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공간이기도 했다.
어린 왕자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지요...... 어린 왕자가 사막을 가로지르다 꽃나무를 만납니다. 안년, 꽃나무에게 인사를 건네며 어린 왕자가 물었죠. 사람들은 어디에 있니? 꽃나무는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바람을 따라 다니지. 그들에겐 뿌리가 없어. 그래서 무척 어렵게들 살고 있지...... 그래요, 나는 이제 수연 씨 옆에 비로소 뿌리를 내립니다.
긴 외로움과 그리고 사랑을 찾아 길에서 그리는 그림. 그림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하나가 둘이 되어 뿌리를 내린 삶이 될 때 『아름다운 흔들림』은 바로 인생의 진정한 삶의 미학이 될 수 있었다.
3.
문학은 현대 사회에서 야기되는 가치관이 혼란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인간에게 현실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여 총체적인 삶을 체험하게 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한 편의 소설을 읽을 때 그 속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을 통하여 현실 속에서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경험들을 등장 인물들을 통해 대리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주 건장한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불러 가는 노래는 언제나 질서 정연한 인간 삶의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해 준다. 특히 요즘처럼 극도로 혼란된 가치관 속에서 원초적이고 말초적으로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의 구미에 맞춰 문학이 상업주의로 흘러가는 우리의 현실에서 말의 예언자적인 힘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아름다운 흔들림』 은 마치 한 편의 수채화를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것도 어쩌면 예언자적인 작가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는 말했다. ‘삶은 어디에나 있으며 우리 삶의 미학은 가벼움에 있다.’고.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의 작품 속에서 가볍고 아름다움만이 있는 여행이 아닌 말씀이 살아 있는, 시대를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예언자적인 모습 또한 보여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