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유월이 오면 어린 시절 겪었던 6.25전쟁 때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어머니에 이어 지난 봄 아버지마저 떠나신 올 여름엔 부모와 함께 겪었던 그때의 추억이 더욱 뇌리에 사무친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기억의 조각들을 엮어 보았다. -2007년 6월- (가족 카페에서 옮김)
♧♧♧
<난중일기 - 6.25回想>
(1) 아아, 잊으랴
- 57년 뒤에 쓰는 일기-
1950년 6월 25일 (일)
새벽에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내가 그 사실을 당일에 알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른들한테서 들었다 해도 열 살 소년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 느끼지 못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 날이 주일이어서 나는 틀림없이 교회에 갔을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도원동교회 유년주일학교에 매주 빠짐없이 출석하였다. 집은 서울 효창동에 있었다. 용산선 철롯둑 바로 아래 일렬로 늘어선 적산가옥이었다. 교회에 가자면 집 뒤 철둑을 넘어서 간다. 철둑에 올라서면 역사(驛舍)가 없는 간이역 미생정역의 플랫폼이 시작되는 곳이다. 철길을 가로질러 반대편 도원동 쪽으로 철둑을 내려서면 새창고개 올라가는 길이다. 이 길을 건너 효창의원 옆 골목길로 교회를 다녔다. 효창의원은 동생이 아팠을 때 사경에서 회복한 적이 있는 개인병원인데, 지금 병원은 없어졌으나 그 옆 골목길은 아직도 있다. <왼쪽사진: 지금의 도원동교회>
도원동교회 예배당은 지금은 다시 지었으나 그 때는 이층 목조건물이었다. 유년주일학교는 아침 일찍 시작했다. 유년부 학생들은 국민학교 아침 조회 때처럼 예배당 마당에 반별로 줄 지어 모여 선다. 그리고 한 주일 동안에 외워야 할 작은 성경요절 카드를 받는다. 요절 카드를 모으는 재미가 있었다. 학생들이 다 정렬하면 한 줄씩 차례대로 건물 바깥으로 붙어 있는 목조계단을 올라가 이층 예배실로 들어간다. 예배실 바닥은 일본식 다다미였다. 거기서 주일학교 선생님과 함께 앉아서 예배하고 반별로 성경공과를 공부했다. 예배실 양쪽 벽에는 반별 성적을 보여 주는 포도송이 밑그림이 그려진 성적표가 붙어 있었다. 매주 보라색 포도 알이 늘어나 포도송이가 커지기를 바라면서 참 재미있게 공부했다.
도원동교회 옛 모습 -1948년 6월 교회 창립 기념일 단체 사진. 우측 적산가옥 2층 예배실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사람들
집 뒤편 철둑과 미생정역 주변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무척 깃든 곳이다. 사실 그 때는 그 철로가 어디 가는 철로인지, 플랫폼만 있고 기차도 잘 서지 않던 그 간이역 이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역 이름이 미생정역이었다는 사실은 이 글을 쓰면서 알아낸 것이다. 지금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 근처에 한 쪽 플랫폼만 남아 있는 미생정역은 용산선의 간이역이었다. 용산선은 일제 때 용산-원정-미생정-공덕리-동막-서강으로 뻗어나가는 철로다. 서강에서는 당인리와 신촌으로 갈라져 나갔다.
광복 전인 1944년에 이미 폐역되어 기능을 잃은 미생정역의 플랫폼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연날리기, 제기차기, 자치기, 딱지치기, 구슬치기도 하고, 여름 밤에는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플랫폼에 앉아서, 지금은 서울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은하수를 바라보고 별을 세기도 하고 동요도 불렀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해는 져서 어두운데’ ‘아가야 나오너라’ ‘서산 너머 해님이’ 등을 연달아 불러댔다. 레일에 귀를 대고 기차 오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기차가 다가오기 전에 레일 위에 조약돌이나 대못을 얹어 놓았다가, 기차가 지나간 뒤 돌이 가루가 되고 못이 납작해지는 것을 즐기는 위험한 장난도 했다. 큰 아이들은 신호대기 중인 열차의 빈 화물칸에 올라타고 용산을 거쳐 서울역까지 갔다가 역무원에게 들켜서 혼나기도 하고, 당인리 쪽으로 타고 가서 발전소 근처 한강에서 미역 감고 오기도 했다.
철둑 아래 있는 집 사람들은 철둑 비탈 여기저기에 호박 구덩이를 파고 호박을 심었다. 호박이 자라면 철둑 비탈에 자생하는 우거진 환삼덩굴과 호박넝쿨을 긴 막대기로 헤쳐 가며 여름 내내 애호박을 따 먹을 수 있었다. 비탈 자락 평평한 곳에는 텃밭을 일궈 상치, 쑥갓, 아욱, 가지, 고추, 옥수수, 피마자, 강낭콩 따위도 심었다. 아이들은 비탈에서 메뚜기도 잡고 잠자리도 잡았다. 여름 밤 비탈 수풀에선 베짱이를 비롯한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반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그 철둑 비탈엔 환삼덩굴만 무성하고, 그 플랫폼엔 개나리 수풀이 우거졌다. 그리고 철둑 아래 적산가옥들은 거의 없어지고 빌라라고 이름 붙인 다세대주택이 들어섰다.
<개나리꽃이 만발한 추억의 미생정역 플랫폼 - 그 뒤쪽 옛 집터에 들어선 빌라 건물>
57년이 지난 올 6월에도 여전히 철둑에 무성한 환삼덩굴 - 덩굴엔 잔 가시가 많다.
1950년 6월 26일 (월)
여느 날처럼 학교에 갔다. 효창공원 앞 금양국민학교다. 이 날은 학교가 뒤숭숭했다. 어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쳐들어 왔는데 국군이 용감하게 물리치고 황해도 38선 이북의 해주를 점령했느니, 북한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났느니 하면서 술렁거렸다. 실제로 26일인지 27일인지 학교 운동장 상공에 난데없이 정체불명의 비행기 두 대가 날아와 낮게 선회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기록을 보니 북한 비행기가 전쟁이 터진 25일부터 서울이 함락되기 전날인 27일까지 매일 김포비행장을 공격하려고 날아왔다고 한다.
<6.25 때 서울 상공에 나타난 북한 비행기>
1950년 6월 27일 (화)
어수선한 하루였다. 북한군이 서울 가까이 미아리고개 너머까지 왔다는 소식이었다. 아닌게아니라 간간이 멀리서 포성도 울려 왔다. 밤에 우리 가족은 우리 집에서 한 집 건너 이웃집으로 갔다. 왜 이웃집에 갔는지는 어른들께 물어보지 못해 잘 모르겠으나, 우리 집이 동사무소 옆이기 때문에 혹 북한군이 동사무소를 공격할까 봐 이웃집으로 피신했는지, 아니면 그 이웃집 주인이 국군 영관급 장교여서 전쟁에 관한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집 식구들과 함께 뜬눈으로 자정을 넘겼다.
1950년 6월 28일 (수)
이웃집 거실에서 28일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갑자기 거실 앞 유리창이 환하게 밝아지고 축구공만한 불덩이 같은 것이 철둑 위 하늘로 해처럼 불쑥 솟아오르더니 이윽고 우르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유리창이 요란하게 떨렸다. 날이 새고 나서 이것이 바로 한강 인도교 폭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국군이 다리를 폭파했지만, 국군도 다 철수하지 못하고 피난민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 상황에서 다리가 끊겨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끊어진 한강인도교
28일 아침, 서울은 완전히 딴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밤 사이 북한군에게 점령된 것이다. 총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전투도 없이 고스란히 넘어간 듯하다. 거리에 인민군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동사무소와 파출소 앞에 완장을 찬 사람들이 나무책상과 의자를 내다 놓고 행인들에게서 서명을 받고 있다. 북한을 지지한다는 서명이라고 들었다. 우리 가족은 도화동 마포국민학교 근처의 어느 집으로 잠시 피신하여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그 집이 누구네 집인지 모르나 어른들끼리는 친분이 있는 집이라고 느꼈다.
1950년 6월 29일 (목) ~ 7월 14일 (금)
도화동으로 피신한 그 집에 얼마 동안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불과 하루 이틀 정도라고 생각된다. 우리 집으로 되돌아와 학교에 다시 나갔다. 학교 본관 왼쪽에 있는 4층짜리 별관에 4학년 우리 반 교실이 있었다. 교실은 삼분의 일 정도 자리가 비었다. 아마도 피란을 간 모양이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도 안 보였다. 다른 반 여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이런 질문을 했다. 인민군이 좋은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했다. 아무도 손 들지 않았다. 이어서 국군이 좋은 사람 손 들라고 했다. 모두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황급히 손을 내리라고 지시하고 혹시 누가 와서 묻거든 인민군이 좋다고 하라고 했다. 선생님은 만약을 대비해서 우리를 훈련시켰던 것이었다. 산수와 자연 과목만 배우고 국어와 사회 과목 시간엔 북한 노래를 가르쳤다. ‘장백산 줄기줄기’(김일성 장군 노래)와 ‘아침은 빛나라’(북한 애국가)였다.
<지금의 금양초등학교>
그 때는 본관이 이층이었고, 지금 붉은 색 별관이 그 땐 흰색 건물이었음
서울 상공엔 매일 호주기(전투기) 편대가 높이 떠서 꼬리에 흰 줄을 뿜으며 북쪽으로 날아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B29 폭격기도 육중한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B29가 나타나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비행기 주변에 하얀 목화송이 같은 것이 팝콘 터지듯 수를 놓았다. 지상에서 쏘아 올린 고사포탄이 터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비행기가 맞아 떨어지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 아마도 포탄이 비행기만큼 높이 올라가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우리 동네에서 호주기가 폭격하는 것은 보지 못했으나, B29는 거의 매일 날아와 한강철교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B29는 폭격할 때 전투기처럼 고개를 숙여 내려오지 않고 그냥 수평으로 유유히 날아가면서 폭탄을 떨어뜨린다. B29 소리가 나면 아이들은 철둑에 올라가 한강철교를 폭격하는 장면을 구경한다. 비행기는 한강 하류에서 상류로 향해 날아가면서 여의도 상공쯤에서 폭탄을 여러 개씩 투하한다. 폭탄은 비행기가 날아가는 한강철교 쪽으로 비스듬히 낙하한다. 이윽고 폭발하는 굉음이 들려 온다. 철둑에서 한강철교가 보이지 않았지만 폭탄이 떨어지는 광경은 볼 수 있었다. 듣기로는 한강철교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아서 매일같이 폭격한다고 했다. (계속)
<B29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는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