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회 스승을 통한 매헌공의 인품
이상 임회를 통한 매헌공의 자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 가지 임공의 행적을 감안해 보아 10년간 유배 생활을 하고 1623년 인조반정 때 해배되었으므로 1613년경부터 유배된 것으로 보인다.
매헌공 할아버지가 1592년 18세 때 겸복 할아버지와 금성(나주)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여 인연이 되었으며, 임공(본향은 나주)이 유배 생활하기 시작한 해는 매헌공이 38세 때부터이므로 양산에서 임공을 모시면서 상당한 오랜 기간 동안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임공이 1624년 매헌공이 50세 때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18세부터 32년간 교류하여 학문도 그만큼 깊었음을 알 수 있어서. 기장공할아버지는 무신(武臣)이었지만, 매헌공할아버지는 문신(文臣)으로서 최초 자리를 잡으신 분임이 확실하다.
매헌공할아버지께서 관해공 스승께 학업을 할 때 예의 바르고 명석하여 우수한 제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임공의 부인께서 특별히 겸익할아버지를 챙겨 주시고 많은 서적을 선물한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의 계보를 살펴보면 고려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김안국-이황․김인후-임회로 그 적통이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임회는 이와 같은 유학의 대가로서 후대 사람들의 학문과 덕행의 사표가 되었다. 조선의 22대 정조께서 문묘 종사 교서에서 김인후, 조광조, 퇴계, 우계·율곡을 올린다. 하서 김인후의 계승자가 임회이다.
매헌공께서는 형 겸복과 함께 전라도 나주까지 찾아가서 3년간 4서 5경을 수학했으며, 그 후 임회가 여기 양산에 유배되어 10년을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직접 모시면서 공부하였다.
임회의 문화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 직접 학문을 익힌 경우는 겸익할아버지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겸익할아버지의 학식은 최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문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선비로 평가할 수 있다.
누구도 이런 차원의 교육을 대학자로부터 전수 받지는 못했다. 임회공 사후 대상(大喪)을 치르고 그 부인 정씨(정철의 딸)께서 오직 겸익할아버지께만 그 서책을 전하면서 인사했다고 한다.
겸익할아버지는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깊게 즐기면서 선비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겸수 할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그 명성이 높았으며, 학문의 진수를 몸소 익힌 분은 겸익할아버지를 꼽을 수 있다. 우리는 겸익할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그 뜻을 살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