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싸움의 고장 청도
박 완 규
어쩌다 내가 고향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청도, 소싸움의 고장” 이라고 말하며 잘 알고 있다는 듯 끼어든다.
오랫동안 객지생활을 하다 보니 모임에서나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고향이야기를 자주 하게 된다. 그럴 적마다 나는 내 고향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도불습유(道不拾遺)의 고장이라고 자랑한다. 산세가 아름답고 인심이 후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도라고 하면 소싸움과 특산물인 청도반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지역의 유례보다는 축제나 먹 거리에 더 호감을 가지는 것이 요즘의 추세인 것 같다.
내 고향은 온 동네가 감나무 숲으로 이뤄져 있었다. 감나무에는 여기저기 소들이 메여져있었고 아이들은 송아지들과 함께 뛰놀며 소똥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고향을 떠올리면 맨 먼저 감나무와 소 가 연상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할 것이다.
고향에서는 매년 소싸움 대회가 열렸다. 내가 소싸움을 처음 보게 된 것은 중학교 다닐 때였다. 친구들로부터 한내거랑(大川)에 소싸움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교복차림으로 어른들 틈에 끼여 소싸움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동내 아이들과 소먹이다가 우연히 벌어지는 싸움과는 그 강도가 달랐다. 소라고 하면 근면하고 느리고 순한 줄만 알았는데 머리를 맞대고 뿔로 치고받는 광폭함을 보고는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소의 눈망울이 왜 그렇게 무서워 보였는지, 나무장대로 소싸움장의 경계를 만들어 놓았지만 싸움소가 곧장 뛰쳐나올 것 같이 불안했다. 뿔이 부러져 피를 흘리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기어이 끝장을 내고야말겠다는 자세에 혀를 내 둘렀다.
어릴 때 황소고집이란 말을 많이 들었지만 황소고집이 그렇게 센지 몰랐다. 결국 힘이 달린 소가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면서 싸움은 끝이 났다. 이긴 소의 주인은 소 등에 올라타고 춤을 덩실덩실 추고 같은 동네 주민들은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며 승리를 만끽했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소한마리 제대로 키울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헛간의 소 우리는 늘 비어 있고 사랑채의 가마솥은 여물대신 목욕물을 데우곤 했다. 늘 싸움소같이 잘생긴 황소 한 마리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오던 차에 아버지께서 송아지 한 마리를 사오셨다. 수송아지인데도 머리가 적고 목덜미가 가늘었다. 잘 먹이다보면 살도 찌고 싸움소처럼 인물도 나겠지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풀을 먹이고 여물을 썰어 쇠죽을 끓여 주었지만 좀처럼 살이 찌지 않고 잘 자라지를 않았다.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소를 몰고 나가면 친구들이 “너 네 소 암소같이 생겼다”고 놀려대곤 했다. 소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것이 속이 상했다. 소는 클수록 유달리 광대뼈만 치솟아 올랐다. 친구들과 어울려 소싸움을 시켜 보았지만 도저히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고삐로 뒷다리를 휘갈기면서 밀쳐도 보았지만 목을 돌리며 눈만 부라리는 모습이 점점 더 밉게만 보였다.
될 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부모님께서도 더 이상 소를 키워봐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며 내다 팔기로 작정을 했다. 아버지께서 오일장이 열리는 날 삼 십리 길인 읍내 우시장까지 세 차례나 소를 끌고 다닌 끝에 겨우 팔수 있었다. 소가 워낙 야위고 못생겨 살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싸움소 같이 잘생긴 소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 땅에 농경문화가 정착된 후 소먹이는 목동들 끼리 즉흥적으로 시작한 놀이가 규모가 확산되어 부락단위 또는 씨족단위로 번져 온 것이라 한다. 주로 추석놀이 행사로 전해져 왔는데 일제강점기에 우리민족의 협동단합을 제어하기위해 일제가 폐지시켰다고 한다. 일부 마을에서 몰래 그 맥을 이어오다가 광복을 맞아 부활되어 고유의 민속놀이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내 고향 청도에서는 1970년대부터 마을마다 대표 소를 선발하여 소싸움경기를 해 왔다. 이긴 소 주인에게 쌀 한 가마씩을 상으로 주었는데 이렇게 시작한 소싸움경기가 민선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부터 지역문화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1990년부터 참가범위를 영남지역으로 확대하였고 1999년에는 문화관광부 지정 “한국의 10대 지역 문화 관광축제”로 선정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축제로 인정받았다.
질적인 면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으로 면모를 굳혔다. 최근에는 현대식 상설 소싸움 장을 건립하여 기반시설을 완벽하게 갖추었고 일본 싸움소를 끌어들여 한일친선투우대회를 개최하거나 주한미군 로데오경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유치하여 그 명칭도 “청도국제소싸움대회”로 변경되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소싸움대회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상설소싸움경기장을 개장하던 작년대회에는 고향 군수님의 초청을 받았다. 출향 인사들과 함께 경기장을 둘러보았는데 각종 문화시설과 휴식 공간, 지역의 특산물전시장, 이벤트 등 향토의 정취를 한곳에서 보고 체험 할 수 있게 훌륭한 시설로 갖춰져 있었다. 소와 관련된 각종 농기구 전시장에서는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했다. 고향에 대한 자긍심이 가슴 가득 느껴졌다. 소싸움의 고장 청도 촌놈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도를 대표하는 것들이 많지요. 감, 복숭아 등등. 그 중에도 소싸움대회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인 것 같습니다. 우리집에도 큰 황소가 있었습니다. 내가 싸움을 자주 붙이자 할아버지께서 "소가 어떻게 되면 니는 중학교에 가지 못할끼라"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옛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청도의 진면목에 대해 선생님으로부터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소 싸움의 고장, 자랑스러운 청도,.............
그 때에 가난은 삶에 밑천이 되지 않았을가! 생각해 보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잘 살고 있습니다...가난했던 유년시절의 삶의 밑천이 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