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강북구 미아동의 유래
一 의정부로 넘어가는 마지막 고개 一
미아동彌阿洞은 1865년(고종 2) 에 편찬한 '육전조레六典條例'에
<한성부 동부 숭신방 미아리계>
라는 공식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 고개(돈암현
敦岩峴)를 일명 미아리 고개라고 부르는 까닭에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미아동에 있는 불당골(佛堂谷)에 미아사彌阿寺가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이 절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되너미 고개라는 명칭은 병자호란 때 되놈(호인胡人)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 왔으므로 붙여졌다는 설과 또 하나는 의정부로 넘어가는 고개의 끝이므로 마지막 고개라는 뜻으로 되었다는 설, 그리고 돈암동 쪽에서 길음동 쪽으로 오를 때 힘이 많이 들어 온몸의 기운이 모두 빠지므로 밥을 되로 먹은 고개라는 말이 변하여 되너미 고개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릉동 지역을 사을한리沙乙閑里라고 했으며 사을한리의 약칭인 사아리沙阿里가 미아리로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미아리는 한자 뜻 그대로 언덕에서 쉬어간다는 마을인 만큼 동명과 고개와는 불가분의 관게를 맺고 있다 하겠다. 미아동의 현 위치는 한국전쟁 이후 서울의 인구가 팽창하게 되자 이곳의 야산과 공동묘지가 주택지로 되면서 인구의 급증을 가져와 행정 동의 변천이 컸다.
미아동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육전조례'에 한성부 동부 숭신방 미아리계라고 표기된 이후, 1911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의 행정구역을 5부部 8면面제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곳은 경성부 숭신면 미아리가 되었다. 1914년에는 경성부 숭신면 미아리와 불당동을 경기도 고양군 미아리로 변경하였다가 1949년 서울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미아리는 서울에 편입되었다. 이후 1950년에 서울특별시돔리 명칭 개정 조례에 따라 미아리를 미아동으로 고첬으며 1973년 도봉구가 신설되면서 도봉구에 소속되었다. 1955년 강북구가 신설되면서 이 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여 러 개의 자연 마을이 남아 있다.
● 강북구 수유동의 유래
一 빨래골에 개울물이 넘쳐 흐르다 一
수유동水踰洞은 북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 마을을 넘쳤기 때문에 '물 수水'자와 '넘칠 유
踰'자를 합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로 물이 넘친다 하여 무너미(무네미)라고 불렸다. 또 옛날에 수유리와 인접해 있는 현재의 삼양동三陽洞 지역에 삼형제가 살았는데 맏형은 바보이고 둘째는 개구쟁이, 셋째는 두 형보다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이들 삼형제는 힘을 합쳐서 땅을 확보하고자 싸움을 일삼고 다니므로 이곳 주민들이 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빨래골의 개울을 경계로 막았는데 그 개울물이 넘쳐흘러 수유리라 했다고 한다.
수유동은 조선 초인 1396년(태조 5)에 동부에 속했으며, 그 뒤 1751년(영조 27)에 간행된 수성守成 책자 「도성 삼군 분계 총록都城三軍分界總錄」에 동부 숭신방 가오리계, 수유촌계, 우이계로 되어 어영청 전영에 소속되어 도성 방어에 일익이 되기도 하였다.
수유동의 변천 과정을 보면 1949년 서울시에 편입된 이후, 1952년 행정상 우이리와 수유리를 합하고 우이동으로 개명하였다. 1955년 명칭 및 구역 제정에 따라 수유동, 우이동, 번동을 합하여 화계동으로 개칭하였으며 1973년에는 수유1동에서 수유3동이 분동되고 1975년에는 수유2동에서 수유4동이 분동되었다. 1977년에는 계속되는 인구 증가로 수유1동에서 수유6동이 분동히였으며 2008년 6월 3일 우이4동은 우이동으로, 우이5~6동은 인수동으로 바뀌어 현재는 수유 1·2·3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 강북구 수유리의 빨래골터
조선 시대에는 이들 자연 마을이 군데군데 10~30여 호 정도가 한 촌락을 이루고 있었으며 현재는 주택지로 밀집되어 있다. 당시는 벼농사를 주로 한 농촌으로서 북한산에서 흘러내리는 수원이 좋아 농사가 다른 지방에 비해 비교적 잘 되었으며 비탈진 곳에 보리, 조, 콩 등 일반 농작물이 주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의정부에서 서울로 오려면 장수원~다락원~서원내~쌍갈무늬(쌍문동) ~아랫무너미~ 큰무너미~되너미 고개(미아리 고개) ~동소문 고개로 이어졌다.
수유동은 북한산과 도봉산 등 기암괴석의 절경과 골짜기의 맑은 물이 좋아 1960년 이후부터 인구 집
중현상에 따라 농업은 점차 사라지고 도로변에 상가가 형성되었으며 그 밖의 지역은 대부분 주택가이다. 수유동은 북한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정릉동을 경계로 해서 선열의 묘역이 있다.
한편 가오리加五里는 옛날 미아리 고개에서 장사를 지내는 소리가 임금에게까지 들리자 번잡스러우니
5리를 더 가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수유동 우이초등학교, 중앙교육원 등이 있는 자리이다.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