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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목숨 걸고 보급하고자 한 딘테일의 열정이 없었다면 성경이 우리들 손에 오는데 시간이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시12: 6-7은 주께서 성경을 지키시고 보존하신다는 말씀을 읽는중 성경이 어떻게 우리 손에 왔는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성경이 오늘날 어떻게 우리손에 들어 왔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자신의 거룩한 사람들이 직접 쓴 자필원본으로 성경기록들을 주셨다(벧후1:21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자기들을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 자필원본에서 필사하여 사본들을 만들었으며 처음의 자필원본과 그 후의 많은 사본들은 수명을 다한 뒤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성경을 번역하려면 번역의 대본인 본문(Text)이 필요한데 이땅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담은 사본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누군가가 현존하는 사본들을 편집해서 본문을 만들어야 했었다. 현존하는 신약성경 사본들은 약 6000개이다. 이 사본들은 대개 서방계열, 동방계열,안디옥계열, 알렉산드리아계열로 난눈다. 이중 서방계열이나 알렉산드리아계열에 속한 것은 그 수가 몇 개 되지 않아 소수사본(1%미만)이라 하고 안디옥 계열의 사본들은 다수를 차지하여 다수사본, 보편적 사본, 비잔틴 사본이라 불린다. 이 사본들을 번역하여 영어성경, 독일어 성경이 나왔다.
1. 죤위클리프의 영어성경 번역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에는 로마 천주교의 교황이 각 나라의 정권과 결합하여 로마카톨릭교를 강요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로마카톨릭교는 그들 천주교를 믿지 않고 성경대로 믿으려는 무리들을 핍박하였고 13세기 경에는 그 무서운 종교 재판소를 통해 신앙을 고수하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핍박하였으며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참혹한 고문과 죽음을 당하였다. 이처럼 천주교회가 1000년 이상 온 세상을 암흑시대 속에 가두어서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직접 대할 수가 없었고 국가 법으로도 성경을 개인이 가질 수 없게 하였으며 또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아 필사본성경이 일반화하는 것도 불가능한 시대였다. 그런데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영국 기독교 신학자이다. 그는 1361년 필링엄 주교대리가 되었다.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위클리프도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교황에 대한 공세로 가톨릭 교리와 교회법을 비판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공격을 가하였다.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러 동기는 그의 설교 가운데서 싹텄다고 여겨지기도 하였다. 당시는 개인이 성경을 소지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성경은 소수의 가톨릭 사제들만의 전유물 이었다. 위클리프가 내건 유명한 구호 가운데 하나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구호는 사람들이 성경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제도를 가져왔음을 확인해 준다. 위클리는 성경만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링컨은 위클리프의 구호를 가져다 유먕한 연설을 하여 민주주의를 미국에 정착시켰지만 이 말의 원조는 위클리프임을 알아야 한다. 마침내 위클리프는 1382년에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천주교 공식 라틴벌게이트성경 즉소수사본으로 번역한 로마카톨릭라틴벌게이트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영어성경이야말로 위클리프의 가장 큰 업적이다.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완역 한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면 국민을 위한 정치가 오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최초의 영어성경 번역자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그가 번역한 성경을 통해 로마카톨릭의 가르침과 성경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출회를 당했으나 1384년 그가 죽을 때 까지 계속해서 성경번역을 했다. 그때까지는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번역성경은 일일이 손으로 필사를 하였는데 보통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는데는 열 달 정도 걸렸다고 하며 그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도서관사서의 일년치 봉급과 맞먹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어 1382년 5월에 열린 교회회의에서 위클리프의 많은 저서가 정죄 받았고, 그의 모든 글들은 금서로 공포되었다. 그는 1384년 12월 중풍이 악화되어 죽었다. 영국 국회는 법령을 제정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영국의 아룬델 대주교는 교황에세 ‘저 사악한 위클리프를 처치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뒤 1408년에 그의 지휘하에 옥스퍼드 회의가 열려 어떤 형식으로든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도 그런 책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결정했고 이 결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영어 성경이 평민들의 손에 들어가자 큰 위협을 느낀 교황 요한23세는 콘스탄츠 공회를 열어 위클리프의 성경을 이단으로 결정하고 이미 죽어 무덤에 안치된 위클리프의 유골을 캐내어 불사를 것을 결의하였다.
그가 죽은후 21년이 지난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된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위클리프가 죽은지 44년이 지난 1428년 위클리프의 죄는 라틴 벌게이트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에 대한 형벌로서 이단 판결과 그의 저작을 불태우고 그의 무덤을 파헤칠 것을 결정한다. 새로운 교황의 명에 따라 그의 뼈를 태운 후 남은 재를 에이번(Avon) 강의 지류인 스위프트(Swift)강에 쏟아부므로써 위클리프는 또 한번의 부관참시를 당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일반 백성들의 손에 오기가 얼마나 험난한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카톨릭의 교황의 암흑시대로부터 벗어나도록 자필원본 성경을 사본으로 전해오는 성경을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셨는데 첫 번째가 인쇄술의 발명이다. 세월이 흘러 독일에서는 요한 구텐베르크라는 사람이 인쇄기를 발명하여서 1450년에서 1455년 사이에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라틴어 성경 인쇄한 획기적이 사건이 일어났다.
2. 최초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윌리엄 틴데일 (William Tyndale)
이번에는 윌리엄 틴데일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위클리프와 틴데일을 역사적으로 이렇게 평가한다. "위클리프는 성경의 일부를 번역했다는 사실보다는 남들에게 영향을 미친 점이 더 높이 평가되는데 비해, 틴데일은 대부분의 성경을 자기 손으로 직접 번역했던 인물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위클리프는 소수사본에 의해 번역된 천주교 공식 라틴벌게이트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지만 딘테일은 다수사본 으로 만든 에라스무스의 본문을 갖고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틴데일이 태어날 때(1494년)만 해도 일찍이 1408년에 만든 헌법(위클리프의 번역판에 대한 대책으로 비공인된 영어 성경을 일체 읽어서는 안된다는 금지령)이 여전히 실효성을 갖고 있었다.
윌리엄은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림이었다. 그는 젊은 청년시절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사제가 되기 전에 언어와 논리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일곱 개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마음으로 불타있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많은 사제들이 라틴어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그들 자신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했다.
1500년대의 영국은 단하나의 교회인 로마가톨릭만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정부는 교회가 모든사람에 대해 자체적으로 법을 집행하도록 허용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많은 액수의 돈을 내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을 돕기 위해 한일은 거의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가난해서 빈민굴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교황을 대표하는 월시추기경(CardinalWolsey)은 500명의 종들을 거느리고 궁전에서 살았다. 한편 영국에 있는 모든 성경은 라틴어로 씌어 있으므로 일반 백성들은 성경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회 허락없이 영어로 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땅과 재산과 생명을 잃게 된다. 따라서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교회와 정부의 적으로 간주 되었다. 따라서 감히 영어로 주기도문이나 십계명을 가르치는 남자나 여자들은 즉시 화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은 성경을 일반인들의 언어로 옮기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성경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이 직접 성경을 읽게 되면 교회의 가르침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윌리암은 옥스퍼드와 그후 캠브리지에서 공부를 마친후 부유한 가정의 가정교사가 되었고,마을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는데 윌리엄은 우리가 행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그의 설교가 그지역의 지도자들을 분노케하자 그는 런던으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틴데일은 우연히 어떤 신학자와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대화는 논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의 “교황의 법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법 없이 사는 게 낫지.”라는 신성 모독적인 발언에 틴데일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득 차서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을 무시하는 바이며, 차라리 쟁기를 끄는 소년이 그보다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오.” 이런일로 인하여 틴데일에 대한 불평은 점점 더해갔으며 그들은 끊임없이 틴데일을 보고 이단이라고 말하면서 많은 일로 그를 고소했다. 많은 시달림과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는 그 지역을 떠나 런던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설교하게 되었다.
틴데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눈에서 가려진 것이 교회내의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랫동안 바리새적인 성직자들이 행한 가증스런 행위들과 우상숭배가 식별하기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궤변으로 판단을 흐리게 하고, 본문의 내용과는 다르게 성경을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서 그들의 행위를 경멸하는 자들을 옭아매었다.
교회성직자들의 가증한 행위를 잘알고 있던 중 딘테일은 성경이 모국어로 번역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이 보통 사람들의 눈 앞에 그들의 모국어로 제시되어서 그들 스스로 본문의 뜻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평민들을 진리 위에 세울 수 있는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친다 해도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궤변과 그들 자신의 전통으로 진리를 덮어버리거나 본문을 속여서 다르게 설명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틴데일은 성경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정으로 가득찼다.
런던에서 틴데일은 성경 번역을 착수하기 위해 런던에 있는 주교에게 승인을 얻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후 출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변호하고 있었던 만큼 주교는 그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여 그만 퇴짜를 맞고 말았다. 하지만 윌리엄의 설교를 좋아하는 한 부유한 사업가가 그를 돕기로 했다. 그는 윌리엄에게 독일로 건너가 그곳에서 번역작업에 매달리라고 충고 했다. 그래서 틴데일은 1524년에 독일로 이주해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독일에서 그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루터를 만나 서로 대화도 하였다. 그는 먼저 신약에 손을 대어서 A.D. 1525년경에 최초의 영어성경을 출판되게 되었다. 그후 윌리엄은 그를 후원한 사업가를 통해 인쇄된 성경들을 곡식주머니에 넣어 영국으로 몰래 들여 오곤했다. 1526년 초, 많은 신약성경이 '상품을 넣은 상자, 술통, 옷 짐짝, 밀가루와 옥수수 부대 등에 숨겨진 채' 잉글랜드로 밀반입되었다. 윌리엄의 신약성경이 영국에 도착하자 수요가 너무나 커서 다른 인쇄업자들이 점점 더많은 인쇄본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틴데일의 신학 서적들, 특히 신약 번역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 해외로까지 퍼져 나갔으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수많은 유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불경건한 사람들은(대중들이 자신들보다 더 현명하게 되는 것을 시기했으며, 진리의 찬란한 빛으로 자신들의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적지 않은 소요를 일으켰다.
헨리8세는 틴데일의 번역에 반대했고, 교회 공직자들은 성경을 구입해서 공개적으로 불태우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반대가 오히려 영어로 번역된 성경 판매를 도와주었고 틴데일이 죽을 때까지 잉글랜드에서 5만부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당시 재미난 일화가 있다. 한번은 유럽을 방문하던 어느 주교가 한 상인과 접촉해 틴데일 신약성경을 모두 사겠다고 나섰다. 속셈은 그것을 모두 잉글랜드로 가져가서 런던에서 불태울 생각이었다. 한 친구가 틴데일에게 그렇게 하면 빚을 모두 갚고 최근에 수정한 부분을 포함시켜 더 많은 부수를 인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거래가 성사 되었다. 주교는 그 책들을 모두 확보했고, 패킹햄(상인)은 고맙다는 소리를 들었고, 틴데일은 돈을 벌었다'
이 일 후에 틴데일은 신약을 다시 수정하고 새롭게 인쇄해서 초판의 세 배나 되는 양의 성경을 영국으로 보냈다. 주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팩캥톤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게 많은 신약이 해외로 나가다니. 자네가 성경 모두를 내게 사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이에 팩킹톤은 “분명 나는 구입할 수 있는 모든 성경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후에 더 많은 성경을 인쇄했습니다. 그들이 활자와 압인기를 가지고 있는 한 이 일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압인기까지 다 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에 주교는 웃었고 그래서 그 문제는 거기서 일단락 되었다. 윌리엄은 지칠줄 모르고 헬라어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각각의 단어를 주의 깊게 선택하였다. 비록 그가 영국인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언어를 시용하긴 했지만,거기에는 시와 같은 아름다움과 리듬이 있었다.
하나님의 진정한 종인 윌리엄 틴데일은 교황과 같은 오만한 성직자들의 뿌리와 기반을 흔드는데 쓰인 하나님의 도구였으며, 주께서 선정하신 특별한 지체였다. 어둠의 통치자는 틴데일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교활한 방법을 사용했다.
3. 순교자 윌리암 딘테일의 외침
어떤 이들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어떤 이들은 평민들이 그들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들은 성경이 그들 모두를 이단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통치자들을 그들의 목적에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은 성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게 반역하도록 만들 것이라고도 말했다.
사람들로부터 성경을 빼앗고자 하는 영국 성직자들의 패역한 책략은 너무나 엄청났다.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되는 것도 견디지를 못했다. (틴데일이 말한 바와 같이) 이는 세상을 어둠 속에 가두어 두고, 헛된 미신과 가짜 교리로 자신들의 욕망과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만족시키며, 자신들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추악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영국의 성직자들은 영국에 들어온 딘테일 성경은 수천에 달하는 이단적 교리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어느 정도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책이 보급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왕의 동의를 기어코 얻어냈으며 서둘러 선언문을 작성하고 공표해서 틴데일의 번역 성경을 금지시켰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더 나아가서 그의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런던의 등기부에서 주교들과 토마스 모어 경은 틴데일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열심히 찾아서 조사했다. 틴데일이 어디서 누구와 모였으며, 그 집이 어디 있으며, 그의 키는 얼마며, 외출할 때는 어떤 옷을 입는지 등을 조사했다. 조사한 자료들을 가지고 그들은 틴데일을 파멸시키기 위한 그물을 한 올 한 올 엮어갔던 것이다.
영국의 왕과 왕의 측근들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유럽으로 스파이들을 보냈지만 윌리엄틴데일(WilliamTyndale)은 10년동안 붙잡히지 않았다.
이 조용한 사람이 무슨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영국의 지명수배 명단 첫머리에 놓였단 말인가?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조차도 그의 삶이 거룩함의 모델임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의 유일한 죄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사형위기 속에서도 다시 구약성경 번역을 착수하였다. 그러나 교회지도자들은 격분했다. 그들은 윌리엄의 성경을 소지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체포하고 투옥시키고 사형에 처함으로써 그에 맞서 싸웠다.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윌리엄은 구약성경 번역에 매달리면서 이곳저곳을 자주 옮겨다녔다. 한번은 어느 만취한 인쇄업자가 그를 찾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들 중 한사람 앞에서 그에 관해 이야기했다. 윌리엄은 아슬아슬한 때에 그소식을 듣고서 자신의 소중한 번역본들을 가지고 가까스로 피신할 수 있었다
윌리엄 틴데일은 앤트워프시에 머물면서 토마스 폰츠의 집에 약 1년을 유숙했다. 그곳에 헨리 필립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어떤 숨은 목적을 가지고 그곳에 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때 틴데일은 여러 차례에 걸쳐 상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런 수단을 통해 헨리 필립은 그와 안면을 트게 되었고 곧 틴데일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으며 그와 한두 번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틴데일은 그와 더 깊은 우정을 갖게 되었고 그를 폰츠의 집에 머물도록 주선하였으며 그에게 자신의 책들과 다른 중요한 연구물들을 보여 주었다. 틴데일은 이 반역자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폰츠는 앤트워프에서 18마일 떨어진 바로 이스시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한 달이나 6주 정도 일을 보게 되었다. 그가 없는 동안 헨리 필립은 폰츠의 집으로 가서 그의 부인에게 틴데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 후 그는 다시 가서 브루셀에서, 그가 데려온 장교들을 집근처와 거리에 배치했다. 정오쯤에 그는 틴데일에게 가서 함께 저녁을 들자고 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틴데일은 필립과 함께 나갔다. 폰츠의 집을 나가는 길은 길고 입구가 좁아서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가 없었다.
틴데일은 자기 앞에 필립을 가게 했으나 필립은 겸손을 가장해서 틴데일을 자기 앞에 가게 했다. 틴데일은 그렇게 큰 키가 아니었기 때문에 앞에 갔으며 키가 큰 필립이 그 뒤를 따랐다. 그는 문 양편에 장교들을 배치시켜 놓았던 것이다. 뒤에 선 필립은 틴데일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장교들에게 체포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었다. 장교들은 그를 감옥에 가둔 후에 폰츠에게 틴데일의 단순함에 동정을 표하는 바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를 황제의 변호사에게 데려갔으며 그 다음은 행정고문관이 폰츠의 집에 와서 책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을 가져갔다. 틴데일은 앤트워프에서 18마일 떨어진 빌보데 성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서 틴데일은 변호사를 대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자신이 답변하겠다며 거절했다.
그는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설교했으며, 성 안에서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많은 논의 끝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황제의 칙령으로 오그스버그 모임에서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마지막 옥중에서도 히브리어 성경과 히브리어 문법책과 히브리어 사전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마지막 화형을 받는 현장에서도 '주님, 잉글랜드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윌리엄 틴데일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틴데일은 그가 젊은 날 고백했던 말처럼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쟁기를 모는 소년이 성직자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할 것"이라는 고백처럼 살다가 갔다. 그의 죽음 직후에 한친구가 성경을 인쇄하여(윌리엄의 번역본 전부를 포함)헨리8세에게 바쳤다. 그것은 박해없이 유포되도록 허용된 최초의영어성경이 되었다.
나중에 윌리엄의 번역본은 1611년에 왕에 의해 공인된 킹제임스성경어법의 90%이상을 제공했다. 윌리엄의 번역본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책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