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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가장 연한 색 노랑으로 표지를 했습니다
신채호 시극 공연장에서
홍명희 시집 {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도자료 및 표4의 글 이제 끝으로 그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시인의 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가 그의 작품에 대한 창작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것은 소리다’라고 한다. 이 소리는 ‘실체를 이룰 수 없었던 엉성한 자음과 모음의 낱글자들’이라고 한다. 그의 이 선언적 고백은 그가 그의 시가 어떻게 하나의 소리인 음(吟)으로 자리 잡았음을 밝히고 있다. 소리는 흔적도 없는 실체일 뿐이다. 흔히 경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인간의 무의식은 경험의 총화總和이다. 이 총화는 먼지처럼 무의식의 공간에 부유한다. 이를 교향악적 소재라고 한다. 이는 보이지 않는 소리이다. 그러다가 환자로 발라놓은 창에 바늘구멍이라도 있을 때 햇빛이 내리면 한 줄기 빛줄기가 방안으로 내려오면 빛의 줄기에 부유하던 먼지들이 보여지게 된다. 이 교향악적 소재가 기억의 통로를 타고 보여지는 경험의 실체로 자리 잡는 것이다. 홍 시인은 이와 같이 조립되지 않은 그의 내면의 체험적 언어들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이어져 뿌리를 내리고 자유로운 노래와 시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생명의 출산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홍 시인은 서정 시인이다. 그러기에 시편들은 모자이크처럼 가녀린 색채의 언어들이 서로 다르게 조응하고 이를 상징적 사물의 선택을 통해 마음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제 묶어진 첫 시집을 통해 그가 억지로 빚어낸 기교의 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나오고야 만 자유로의 유영遊泳의 소리가 그만의 시세계를 이루는데 성공하기를 빈다. 첫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 ----박동규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홍명희 시인의 [순위의 재구성]은 대단히 역사철학적인 깊이를 갖고 있는 시이며, 이것은 홍명희 시인의 앎(지혜)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무와 무한, 최초와 최후, 상대와 절대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0의 개념’을 분석하며, 무와 최후와 상대를 배제한 0의 개념은 만물의 터전이 아닌‘0의 감옥’이라는 최종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레드 썬/ 자, 이제 눈을 뜨세요”라는 시구는 붉은 태양과도 같은 절대적 당신(0), 이제 제발 눈을 똑바로 보고 그 모든 사물들과 이 세상의 이치들을 제대로 바라보라는 정언명령이기도 한 것이다. 무가 없는 무한이나 상대가 없는 절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순위는 상대적인 것이지,‘0순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전인류의 아버지이자 스승이며, 그 모든 가치판단을 주재하는 심판관이라고 할 수가 있다. 홍명희 시인의 [순위의 재구성]은 홍명희 시인의 이름과 명예에 걸맞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과도 같은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반경환 애지 주간, 철학예술가 홍명희 시인은 충북 괴산 연풍에서 태어났고, 청주대성여고를 졸업했다. 2016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재학중이다. 홍명희 시인의 첫 시집 {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흔적없는 소리의 실체’를 찾아 ‘자음과 모음’으로 엮어낸 시집이며, 그 ‘소리의 낱글자들’([시인의 말])이 영원한 사랑의 노래로 울려퍼진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랑의 노래’는 울음이 되고, 그 울음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 되고, 핏빛 노을이 된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장엄한 울음([울음]), 이 울음, 이 사랑의 노래야 말로 홍명희 시인의 비극의 진수이자 시적 혁명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 1순위입니다/ 아니, 당신은 0순위입니다// 태초이었거나 신세계의 시작점 이었을 당신의 가치/ 눈앞의 허들을 모조리 뛰어넘는 챔피언/ 어디서나 프리한 당신의 세계// 이 세계에서 당신은 그 모든 것을 거머쥔/ 절대적 존재// 0의 숫자 안에/ 당신은 모든 것을 가둘 수 있습니다// 당신의 넘버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당신이 애호하는 0 안에/ 당신이 옥죄인 초록빛 하늘과 푸른 숲/ 아이들의 향기로운 체취가/ 이름을 상실한 채 오늘도 갇혀있습니다// 무한대로 깊어진 0의 감옥은 종일토록 나른합니다/ 숨쉬기를 포기한 포로들의 습성은 포화/ 이미 당신은 영원한 영순위입니다, 하지만// 레드 썬/ 자, 이제 눈을 뜨세요 ----[순위의 재구성] 전문 고대 그리스에서는 0의 개념을 무無로 받아들이고, 이 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신성모독적인 개념으로 배척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인도에서는 기원전 300년부터 0의 개념을 언급한 사람들이 있었고, 서기 628년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브라마굽타가 그의 {브라마스푸타시단타}에서 최초로‘0’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라비아숫자에서 ‘0’의 발견은 언어의 혁명이자 현대과학의 혁명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0은 첫 번째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나타내고, 두 번째로 자리기호의 역할을 담당한다. 2020은 백의 자리와 일의 자리가 0이라는 것을 뜻하고, 마지막으로 0은 2+0=2, 2x0=0처럼 연산기능을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 최초로 발견하고 사용한 0은 8세기경 아라비아로 전파되었고, 오늘날에는 0은 무한이나 미적분과 같은 새로운 개념과 함께, 역사철학, 또는 자연과학의 중심개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0은 무만이 아닌 무한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 0과 1로 이루어진 수학적 개념이 없었다면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현대물리학의 발전은 물론, 오늘날의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홍명희 시인의 [순위의 재구성]은 0과 1로 이루어진 아라비아숫자에서, 그 첫 번째 순위인 0의 개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0에 대한 역사철학적인 사유를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0은 폭력적인 서열제도와의 싸움에서 기존의 제일 순위인 1을 물리친 절대 권위자이며, 그의 힘은 무한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말할 것도 없이”당신은 제일 순위인 1을 물리친 0순위이고,“태초이었거나 신세계의 시작점이었을 당신의 가치/ 눈앞의 허들을 모조리 뛰어넘는 챔피언/ 어디서나 프리한 당신의 세계”에서라는 시구에서처럼 당신은 신적인 존재, 즉, 종족창시자가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0은 절대적인 존재이고 무한한 존재이며, 그는 그의 숫자 안에 모든 것을 가둘 수가 있다. 0은 최초 보다 더 빠른 최초이고, 이 0 안에서 모든 것이 탄생하고, 모든 것이 그의 일생을 마친다. 초록빛 하늘과 푸른 숲도 펼쳐지고, 수많은 산새들과 산짐승들이 뛰어논다. 넓고 넓은 푸른 바다도 펼쳐지고, 수많은 물고기들과 해초들도 자라난다. 0은 최초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며, 암수 하나인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당신의 넘버에는 출구가”없고,“당신이 애호하는 0 안에/ 당신이 옥죄인 초록빛 하늘과 푸른 숲/ 아이들의 향기로운 체취가/ 이름을 상실한 채”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영원히 갇혀 있다. 이제 0은 첫 번째 아닌 꼴찌가 되고, 이제 0은 최초가 아닌 최후가 된다. 최초인 것, 절대적인 것, 무한한 것은‘0의 감옥’이며, 그 안에서는 “숨쉬기를 포기한 포로들”처럼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가 없다. 홍명희 시인의 [순위의 재구성]은 대단히 역사철학적인 깊이를 갖고 있는 시이며, 이것은 홍명희 시인의 앎(지혜)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무와 무한, 최초와 최후, 상대와 절대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0의 개념’을 분석하며, 무와 최후와 상대를 배제한 0의 개념은 만물의 터전이 아닌‘0의 감옥’이라는 최종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레드 썬/ 자, 이제 눈을 뜨세요”라는 시구는 붉은 태양과도 같은 절대적 당신(0), 이제 제발 눈을 똑바로 보고 그 모든 사물들과 이 세상의 이치들을 제대로 바라보라는 정언명령이기도 한 것이다. 무가 없는 무한이나 상대가 없는 절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순위는 상대적인 것이지,‘0순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전인류의 아버지이자 스승이며, 그 모든 가치판단을 주재하는 심판관이라고 할 수가 있다. 홍명희 시인의 [순위의 재구성]은 홍명희 시인의 이름과 명예에 걸맞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과도 같은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처음엔 그것이 노래인 줄 알았다/ 흐르는 물결에 장단을 맞추고/ 먼 산 너머 아지랑이 부르는 노래인 줄 알았다// 겅충겅충 뛰어 마당을 가로지르며/ 훨훨 타오르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두 팔 감싼 옷자락의 춤사위인 줄 알았다// 하늘을 물들이던 붉은 태양이/ 푸른 바다의 심장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마침내 물결치는 파도마저/ 핏빛 노을로 물들이고 나서야// 그것이 나를 찾는 눈물인 줄 알았다/ 그것이 나를 부르는 너의 쉰 목소린 줄 알았다/ 그것이 온 밤을 새워 너를 찾던/ 내 울음인 걸 알았다. ---[울음] 전문 모든 사랑은 이상적이며, 이상적인 사랑은 혁명적이다. 사랑은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변하고, 이 사랑은 그 어떤 법률과 제도, 또는 그 어떤 전통과 풍습으로도 제어할 수가 없다. 사랑은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으며, 사랑은 결혼을 하고 나면 먼 산 너머 아지랑이처럼, 또는 훨훨 타오르는 불꽃처럼 사라지고 만다. 태양은 인간의 꿈과도 같고, 그것은 무의식적 소망의 충족 욕구와도 같다. 태양이 떠오를 때는 모든 것이 춤과 노래가 되고 이상적인 그의 꿈이 실현된 것 같지만, 그러나 태양이 푸른 바다의 심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핏빛 노을이 될 때는 그의 이상적인 꿈(사랑)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고, 사랑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푸른 바다의 심장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핏빛 노을이다. 사랑은 나를 찾는 눈물이고, 나를 부르는 목 쉰 소리이며, 사랑은 온 밤을 새워 나를 찾는 내 울음이다. 나는 네 곁에 있지만 네가 찾던 나는 없고, 너는 내 곁에 있지만, 내가 온 밤을 새워 찾던 너는 없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이상적인 사랑을 찾는 나르시소스이며, 이것이 홍명희 시인의 [울음]의 기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울음이란 무엇인가? 울음이란‘울다’의 명사형으로 감정 상태에 반응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기쁠 때에도 울고, 슬플 때에도 울며, 너무나도 마음과 몸이 아플 때에도 운다. 사랑은 노래가 아닌 울음이고, 사랑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푸른 바다의 심장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핏빛 노을이다. 꿈이 크면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거나 또는 한낮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과도 같고, 꿈이 좌절되면 서녘 하늘의 핏빛 노을과도 같다. 모든 사랑은 너무나도 간절하고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 너무나도 손쉽거나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나르시소스와 에코 요정, 로미오와 줄리에트,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등, 이 세기의 연인들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모든 시와 서사문학의 죽음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요컨대 최고의 삶의 절정에서 천길 벼랑끝으로의 추락----, 이 극과 극의 사랑 노래는 이루어질 수 없음으로 해서 너무나도 아름답고 장엄한 핏빛 노을이 되고 있는 것이다. 홍명희 시인의 [울음]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고, 핏빛 노을이며, 너무나도 아름답고 장엄한 울음이라고 할 수가 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장엄한 울음, 이 울음이야말로 홍명희 시인의 비극의 진수이자 시적 혁명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홍명희 시집 {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 10,000원 [출처] {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도자료 및 표지글 <자료제공: 지혜출판사> 여러분들께서 응원해 주신 덕분에 대전문화재단에서 지원하는 창작지원금을 수혜받아 예쁜 시집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전국유명 인터넷 서점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많이 응원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2018학번 대전충남지역 국어국문학과 홍명희 올림 |
첫댓글 대단한 성취를 이루셨습니다.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더욱 멋진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첫번째 시집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더욱 승승장구 하십시오.
파이팅입니다.
축하드리구요 예스24에서 주문해서 받아봤습니다.
연노랑색에 제목과 잘 어울리는 시가 소박함과 정교함을 함께 가진듯 합니다.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같은학과 같은 학년이라는 것을 막~~ 자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