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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백석) 경중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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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나누기━━━━⊙ 스크랩 찬양이란? CCM이란 무엇인가?
이반석 추천 0 조회 7 10.11.20 07: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용어의 정의
1) 구약적인 의미
구약은 찬양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구약에서 찬양에 대한 단어는 여러가지가 있다.
(1) 바라크() : 바라크는 구약에서 다섯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의미가 담겨있다.
① 무릎을 ?다.(2 Chronicles 6:13, Psalms 95:6)
(대하 6:13) "솔로몬이 이왕에 놋으로 대를 만들었으니 장이 다섯 규빗이요 광이 다섯 규빗이요 고가 세 규빗이라 뜰 가운데 두었더니 저가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의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시 95: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② 축복하다.(Genesis 28:6, Joshua 24:10)
(창 28:6)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수 24:10) "내가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 고로 그가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③ 송축(경배)하다.(1 Chronicles 29:20, Daniel 6:10)
(대상 29:20) "다윗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매 회중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고 머리를 숙여 여호와와 왕에게 절하고"(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 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④ 찬양을 받다.(Job 1:21)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⑤ 축복을 받다.(Deuteronomy 33:13)
(신 33:13)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컨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과"
(2) 할랄()
할랄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할렐루야'라고 부를 때의 '할렐'과 같은 것으로 강조형 동사이다. 구약에서는 이 단어가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① 칭송(송축)하다.(Psalms 117:1, 145:2)
(시 117: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시 145: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② 자랑하다.(Psalms 44:8)
(시 44:8)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③ 찬송하다.(Isaiah 62:9, 2 Chronicles 5:13)
(사 62:9)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
(대하 5:13)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그러므로 구약에서 이 단어는 "깨끗하게 하다", "드러나게 하다", 혹은 "영광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므로 찬양의 정의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찬양과 경배란 무엇인가?
찬양과 경배란 무엇인가?
1. 찬양이란?
2. 경배란?
3. 찬양과 경배의 목적
찬양과 경배란 무엇인가?
올바른 찬양인도를 위해서는 찬양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한다.
1. 찬양이란
찬양 : 찬양이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방법은 노래나 기도뿐만 아니라 선포도 포함된다.
그것은 찬양 속에 '자랑'이라는 의미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할렐루야의 어원이 되는 '할랄'에는 자랑하다, 뽐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미친체하다라는 의미까지도 포함되어있다.
즉 찬양은 얌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열광적으로 하는 것이다.
2. 경배란
원래는 예배와 같은 말이다.
성경 원어상으로는 예배와 경배가 모두 같은 말이다.
우리 나라 성경 번역시 번역자들의 불일치로 일부 성경(요한복음, 사도행전등)에서만 예배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배라고 하면 회중예배를 의미하고 경배라고 할 때는 본래적인 의미의 경배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경배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찬양과 예배 모두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경배는 너무나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서있을 수 없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하고 선포하는데 초점이 있고 경배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데 초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낮춤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표시,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찬양과 경배의 시간에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표하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결단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찬양과 경배라고 할 수 없다.
3. 찬양과 경배의 목적
어떤 사람들은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르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온전히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시간에 자신의 고백이나, 간증, 또는 간구의 내용을 담은 복음성가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대부분이 요즘 나오는 복음성가들에 대해 무지함을 볼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 신학계의 주장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다. 그들의 배경도 모른체...
미국에서도 가스펠 송은 예배시간에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나라의 복음송의 의미와 미국의 가스펠 송의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찬송가에 들지 않은 대중적인 기독교 음악 전체를 복음성가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미국은 가스펠 송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물론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기독교 음악 전체를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팝송'을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록이나 메탈 같은 것까지 포함하는 대중음악 전체를 가리키지만 '팝'이라는 음악 장르가 따로 있는 것과 비슷하다.)
좁은 의미에서 가스펠 송이라 할 때는 세상을 향한 노래, 즉 안 믿는 사람의 전도를 목적으로 한 노래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곡에서는 복음이 상당히 은유적으로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음악 또한 파격적이어서 안 믿는 자들도 크게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복음성가는 여기에 해당될 만한 곡이 별로 없다. 우리 나라에서처럼 기독교인을 위한 복음성가는 'Gospel hymm'이라고 부른다.
우리 나라는 아직 이러한 분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찬양인도자는 예배시간에 적합한 곡과 적합치 못한 곡을 분별할 수 있어야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 믿으세요'는 전도할 때 부를 노래지 예배용으로는 부적합하다.
'돈으로도 못 가요'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 위한 곡이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므로 부적절하다.
심지여 찬송가에도 부적절한 곡이 있다.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성도를 향해 주의 일꾼이 되자는 내용과 우리 나라가 하나님 안에서 발전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성경에 대한 무지로 '계명성 동족에 밝아'라는 표현까지 있다.(성경에서 계명성은 사단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찬양의 내용이 담기지 않은 곡들은 찬송가라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찬양의 내용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부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찬양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찬송가 102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같은 곡에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과 세상 것을 버리겠다는 다짐이 있을 뿐 찬양하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예수 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고백, 예수를 위해 세상 모든 것을 버렸다는 이러한 고백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선곡시에 생각할 것은 이 곡이 찬양의 목적,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합당한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1. CCM의 뜻은?
동시대(Contemporary)적인 크리스천(Christian)들의 음악(Music)
C : contemporary adj 그 당시의 ; 같은 시대의 ; 동시대의
CCM을 규정짓는 첫번째 기준으로 시대성을 나타낸다. 이 시대성은 가변성을 가지며 그 시대의 유행, 생활양식을 포함한다. 현시점에서의 contemporary는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지금의 우리가 호흡하며 살아가는 지금을 말하는 것으로 이 개념은 CCM을 규정짓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몫을 한다. contemporary라는 개념은 요즘시대에 불려지고 들려지는 모든 종류의 음악을 하나의 단어로써 묶어 내는 것으로 이 단어로 인해서 CCM의 많은 장르들이 존재하는 데 힘을 실어 주게 된다.
C : christian
 만일에 두번째 이니셜인 C가 크리스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CCM이라는 단어와 그것의 입지가 절대로 요즘과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적인 것(유행적인 것)에 충실하지만 두번째 개념을 충족하지 못하면 그 음악은 작곡가의 의도, 작사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반 대중음악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단어가 가지는 위치는 동시대의 모든 것들 중에서 christ, christian이 포함된 것을 말하며 예수가 포함된다는 것과 기독교인이 포함된다는 것에서 여러 가지를 파생시켜 낼 수 있다. 이 개념으로 인해서 복음성가와 가스펠의 개념이 CCM에 포함되게 된다.
M : Music
CCM을 규정짓는 마지막 중요 키워드로써 뜻은 음악이다.
CCM이란 Contemporary한것들중에서 Christian이 포함된 것.. 또 그것들 중에서 음악을 말하는 것으로 혹자들은 새로운 대중문화라고 말하기도 하고. 크리스쳔들의 대중문화, 대중음악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아직 개념이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예를 들자면 95년경 대중음악계에 "가사바꿔부르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고 "헤비스"라는 그룹이 그 당시 유행하던 10여곡을 가사를 바꿔 부른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유행이 교회 청년부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한동안 대중음악(특히 가요)에 가사를 바꿔서 부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이런 유행이 여러 가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지금까지도 일각에서 일고 있는 비판과 논쟁의 이유는 그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대중음악 같은 연주에(Contemporary) 예수찬양과 하나님찬양의 가사(Christian)를 부쳐서 부르는 것(Music)"은 요즘 CCM이 사람들에게 인정되어 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과정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대중음악 같은 연주"라는 표현으로 인해서 CCM자체를 저속하게 생각하거나 싫어할는지도 모르지만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워낙 광범위하기에 대중음악 같은 연주라는 표현 속에는 여러 유형의 연주형태가 들어 있다. 심지어는 혹자들이 상류층의 고급문화라고 여기는 클래식과 이해하기 힘들다는 난해함이 본토에서의 가치와 상관없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비싼 문화로 인식되어버린 재즈까지 말이다.
2. CCM의 내용
'Christian Music'이라는 두 단어가 내용을 규정한다.
CCM에서 주로 다루는 가사의 내용은 4가지정도로 나눠진다.
1)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간구
하나님을 향한 사랑, 개인적인 고백들과 감사들을 음악의 가사로 사용하는
케이스로 CCM중 30 ~ 40%정도를 차지한다.
2) 복음
3) 성도간의 교제
성도간에 아름답게 있어야할 교제를 내용으로 한다.
4) 도덕적인 권고
남녀간의 순수한 사랑, 가정의 행복, 인류의 평화, 인종차별, 약물과 마약 등을 내용으로 한다
3. CCM의 장르
CCM에서도 찬송가로 불려지는 곡들을 많은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앨범에 리메이크해 담고 있기 때문에 CCM과 찬송가가 무엇이 다른가 혼동하기도 한다. 사실 뚜렷하게 구별할 만한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찬송가를 어레인지를 통해 편대적으로 바꾸어 놓은것이 또한 CCM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음의 분류표를 보자.
                                                 가스펠뮤직(Gospel Music)

CC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포크,컨트리,랩,펑크,하드록, 아카펠라,하드코어,메탈 등 다양한 소장르가 존재한다.

가스펠 (Gospel)

빌보드 가스펠차트에 해당하는 주로 흑인들의 음악을 지칭하며 R&B나 소울,그리고 전통적인 흑인 가스펠을 말한다.

프레이즈 앤 워쉽 (Praise and Worship)

85년에 시작한 '호산나 인테그리티'가 대표적인 예로 돈 모엔(Don Moen),그레이엄 켄드릭(Graham Kendrick), 론 케놀리(Ron Kenoly)등 유명한 워쉽리더를 배출해 냈다. 합창단과 같이 대규모로 활동하는 이들은 노래를 단순한 찬양을 넘어서 예배의 주체격으로 승격시켰다...

인스트루멘탈

재즈나 명상음악같은 연주음악을 말한다. 팬플릇연주앨범,바이올린 연주 앨범, 침묵기도시리즈 등 이런 앨범들을 말한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는 위와 같은 구분이 주를 이루었지만. 최근에는 위와 같은 분류와 동시에 CCM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개념으로 분류가 된다. CCM의 장르구분은 어느 협회에서 총괄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유행에 따라 조금씩 변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       
                                                  하 덕 규
                                                   CCM Aartist, CBS `가스펠 아워' 'CCM CAMP' 진행자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란 말은, 사전적 의미와 같이 현대적인 (동시대의,그 당시의) 그리스도인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 (혹은 기독교 음악)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때는 가스펠 음악이 대략 세가지로 구분되던 시기였다.
그 첫째가 성스러운 가스펠(Sacred Gospel), 둘째로 Inspirational, 세째로 contemporary Gospel이었다.
Sacred Gospel은 교회에서 불리우던 음악이었고 Inspirational은 오늘날의 이지리스닝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컨템퍼러리로 분류된 것은 그 당시 남부 가스펠 에서 가장 흔했던 4중창단의 노래를 지칭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남성 4중창 스타 일이 가장 유행하던 대중적 가스펠이었기 때문에 컨템퍼러리로 구분되어진 것은 남부 가스펠이었다
. 이때부터 컨템퍼러리 크리스쳔 뮤직이라는 말은 동시대적인, 대중적인 기독교음악이 란 의미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C.C.M.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에 퍼져나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음악은 각 나라와 지역의 특성과 그 문화의 특성에 따라 만들어지고 불리워 왔다. 또, 지역마다 고유의 악기를 사용해서 그 음악을 연주해 왔다. 그래서 그 내용은 같으나 그 스타일은 독특한 형태로 발전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전자악기가 출현하고 그 악기를 사용한 음악이 전세계에 일 반화됨에 따라 이제는 음악과 사운드의 예술적,기술적 차이와 한계가 거의 없어지게 되 었다.
그에 따라 교회안에서 머물러왔던 크리스쳔 음악도 새로운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 게 되었다. 물론 새 옷을 입은 크리스쳔 음악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큰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전통적인 교회음악이 오늘날의 컨템퍼러리 크리스쳔 음악(Contemporary Christian Music, 편의상 CCM으로 부름)으로 변화된 첫번째 시도는 1964년 미국의 레이랩(Ray Repp)이라는 사람이 카톨릭 교회에 포크(Folk)미사를 선보인 것이었다. 파이프 오르간의 장엄하고 웅 장한 미사곡만을 연상하던 사람들에게 포크음악 미사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듬해인 1965년 랄프 카마이클은 빌리그래함 목사의 선교영화 (The Restless Ones; 쉼이 없는 사람 들)에 음악을 삽입하면서 싱코페이션(박자의 강약을 바꾸거나 전환하는 것)이 가미된 음악 을 사용했다. 전통적인 교회음악에서 사용치 않던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같은 해 유명한 팝아티스트인 배리 맥가이어(Barry McGuire)가 록 음악계의 반항적 물결 을 떠나는 신호처럼 라는 앨범을 녹음했다. 이 앨범은 당시 유행하던 팝 음악 스타일에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다.
 
1967년 미국은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그 운동이 정점에 달했다.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젊은 세대들 간에 반항의 물결이 크게 일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내의 젊은이들은 그만큼 과격하 진 않았다.
그즈음 랄프 카마이클과 커트카이저는 `가서 그대로 전하라'(Tell it Like it is, Natural High) 같은 청소년 뮤지칼로 크리스쳔 음악을 거칠게나마 현대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반전운동과 함께 일어난 미국의 반문화운동은 자유와 평화의 상징,마약(LSD),자유연애, 그리고 록큰롤을 성스러운 것
으로 삼았는데, 이 운동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피크를 이 루었다. ( * 우드스탁 페스티벌: 미국 우드스탁 근교에서 열린 대규모 록 페스티벌, 기성 세대에 반기를 든 젊은이들 50여만명이 조화,평화,사랑을 외치며 이 록 페스티벌에 참여 했다. 미국 히피들의 사상이 대변된 이 페스티벌은 Rock Music의 하나의 전설처럼, 이상적 인 Rock 페스티벌로 얘기되었으나, 몇 개월 뒤에 다른 곳에서 열린 록 페스티벌에서는 그 같은 모토는 사라지고 폭력과 혼란이 난무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러한 히피운동에 반대하는 대항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반문화 히피운동이 내세운 자유와 사랑에의 약속 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 안에서의 진정한 자기실현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환멸에 빠진 세대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참 평안을 발견했다. 참된 존재가치를 발견 한 젊은이들은 그들 세대가 가진 문화의 언어로 새로운 스타일의 기독교문화를 만들기 시작 했다.
 
1969년 래리노먼(Larry Norman)이라는 젊은 아티스트가 캐피탈 레코오드에서 이라는 앨범을 냈다. 이 앨범은 정통 Rock음악에 신앙의 내용을 실은 것 이었다. Larry Norman의 앨범은 크리스쳔록의 선구적 신호탄과 같았다. 이 해에 첫 CCM 앨 범이라 할 수 있는 마일런 르페브르와 홀리스모크의 , 래리노먼의 , 존 피셔의 이 나왔다.
캘리포니아에 새로이 세워진 갈보리교회에서는 태평양연안에서, 회심한 히피들을 위한 대규모침례식을 거행했다. 갈보리는 크리스쳔 음악 이란, 음악이 갖고있는 소리나 외양보다는 그 마음의 조건과 더 관련이 있음을 일찍부터 깨달은 교회였다. 갈보리교회의 척스미스 목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해 그 스타일이 어떻든 지 주님을 위한 음악을 만들도록 했다.
 
그러한 음악들은 당시의 교회음악과는 판이했으나 그러한 음악은 젊은 크리스쳔들의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갈보리교회에서 만들어 낸 음악도 새로운 크리스쳔 문화의 한 부분을 형성해나갔다. 이렇게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새로운 물결은 미국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 물결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일어나게 된 `예수운동(Jesus Movement)'과 중첩되어서 일반매체인 `Time'등을 포함한 수 많은 매체가 이 운동을 다루게 될 만큼 확산되었다.
 
한편 초창기 CCM이라고 할 수 있는 앨범이 아주 열악하게나마 나오기 시작했다. 음악적, 기술적 수준도 낮은데다 제작비용면에서도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초창기 CCM은 초보단계 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음악적 수준은 낮았지만 그 순수성만큼은 그 어느때보다도 돋보인 시기이기도 했다.
 
1970년도에 들어오면서 1971년 갈보리교회에서는 `Maranatha! Music'이라는 음악선교단 체를 설립해서 앨범을 만들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Children of the day, Blessed Hope, Gentle, Country Faith, The Way, Selah, Love song 등의 그룹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1972년 여름, CCM은 달라스의 미식축구경기장인 카튼보울에서 열린 `엑스폴로 72'대회 에서 활동영역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래리노먼, 러브송, 리타쿨리지, 크리스 크리 스토퍼슨, 배리 맥가이어, 안드레크라우치 등이 출연해 전세계에서 모인 사람들 앞에서 복 음이 담긴 새로운 기독교음악을 선보이게 되었다.
또 Word레코드사는 크리스쳔 전문 레이 블인 Myrrh를 설립, 초창기 크리스쳔음악 아티스트들의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가 진행되면서 CCM은 기성 교회의 거부감과 라디오에서 거의 방송되지 않는 악조 건 속에서도 성장해 나갔다.
 
1976년에는 CCM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된 Sparrow사가 설립되었 다.
Word 레코드에서 아티스트와 선곡담당자로 일해오던 빌리 레이 헌은 작지만 선교적 성 격이 강한 레코드 레이블을 세워 배리 맥가이어, 애니 허링, 존 마이클 탈보트, 케이쓰 그린 등의 앨범을 출반했다. 계속해 CCM은 그 질과 양에 있어 성장해갔다,
 
1978년 CCM계에는 큰 영향을 준 두가지 사 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하나는 CCM을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 `CCM'이 창간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초대형 가수 Amy Grant의 등장이었다. `CCM'지는 처음에는 크리스쳔음악계의 종사자 들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점차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보급이 되었고, CCM의 챠트도 집계 하는 등 명실상부한 CCM잡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1979년에는 포크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밥딜런이 `Slow Train Coming'이라는 앨범을 내고 기독인이 되어 공연때마다 거듭난 내용 을 주로하는 노래만을 불러 세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또 1979년에는 크리스쳔 Rock을 비판해오던 Bob Lason이 그 태도를 바꾸게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세속 Rock음악에서 보 았던 위험성이 크리스쳔 Rock에서도 존재할 위험이 있다고 해서 크리스쳔 Rock을 반대해 왔으나 CCM을 자세히 접하고 CCM아티스트들의 확고한 믿음과 그들의 삶을 보면서부터 종전 의 비방하던 관점을 바꾸어 오히려 옹호하는 입장으로 달라지게 되었다.
 
1980년 No Compromise! 라고 뜨겁게 외치며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렬한 선교에의 도 전을 불러일으키던 Keith Green은 자신의 새 앨범을 자유가격제로 판매함을 발표, 충격을 주었다. 그는 구매자가 원하는 가격대로 자신의 앨범을 판매했다. 이같은 판매방식은 돈이 없어도 그의 음악을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1981년 컨템퍼러리 크리스쳔 뮤직 은 양적으로도 성장해서 일반 레코드사에서도 크리스쳔 뮤직을 보급하려는 움직임이 시도되 었다. 그래서 크리스쳔 음악이 일반 시장에도 배급됨에 따라 일반시장에도 적합한 노래를 만드는 경향이 생겨나서 음악영역의 전환에 따르는 문제가 발생해 이른바 `크로스오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2년엔 CCM계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백워드 매스킹에 대한 논쟁이 크리스쳔 음악계를 들끓게 했다. 레코드를 거꾸로 돌려보면 거기에 사탄의 메 세지가 들어있다는 `백워드 매스킹' 문제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어 레코드를 호기 심으로 거꾸로 돌려보는 일이 유행했다.
 
또 1982년 CCM계에 시대의 예언자로 불리우던 케이 쓰 그린(Keith Green)이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케이쓰 그린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에 게 이 시대의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였고, 많은 음악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아티스트였다. 그의 부인인 멜러디 그린은 그가 설립했던 `라스트 데이 미니스토리'를 더욱 확장시켜 수많은 선교사역자들을 길러냈다.
 
1985년 워드레코드는 일반 팝회사인 A & M사와 계약. Amy Grant의 앨범을 일반시장에 보 급했다. 그녀의 앨범 `Unguarded'가 85년 5월에 나오고 그 앨범에 수록된 `Find a way'가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고 크리스쳔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일반 pop챠트에 등장하게 되자 다 시 크로스오버 논쟁이 일기도 했다. 세상과 타협했다는 비판 즉 세속적 성공을 위해 영적인 내용을 의도적으로 줄였다는 비판이 가해지고, 한편 에미 그랜트의 옹호자들은 에미 그랜트 야말로 오랫동안 CCM 아티스트들이 꿈꾸어왔던 일, 즉 일반 팝 음악계에 크리스쳔음악을 통 해 진리를 전파함으로서 진정으로 복음이 필요한 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그 의미를 강조했다.
 
1986년 에미 그랜트의 `Unguarded'는 백만장 이상이 팔려나가 플래티넘 앨범을 수상했고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시기엔 Amy Grant뿐 아니라 80년대를 이 끌어가는 아티스트들이 성장해갔고 1979년 첫 앨범을 낸 이래 스탠다드한 노래로 사랑을 받 게 된 샌디 패티도 대형가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들 외에도 마이클 W.스미스, 마이클 카 드, 트와일라 파리스, 존 마이클 탈보트, 스티브 그린, 랜디 스톤힐, 데이빗 미스, 카 맨, 스티븐 커티스 채프먼, 돈 프란시스코, 필 케이기, 웨인 왓슨, 뉴 송, 챨리 피콕 등이 CCM 계의 선두주자로 일하고 있었고 다니엘 아모스 밴드, 레즈 밴드, 페트라, 화이트 하트, TTS, 러스 태프 등도 크리스쳔 록을 성장시켜나갔다. 스트라이퍼가 헤비메탈을 들고 크리스쳔음 악을 시도하고 화이트 크로스, 샤우트 등 크리스쳔 메탈도 태동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CCM 은 일반 pop의 흐름과 거의 대등한 흐름을 이어갔다. 80년대 중반 스티븐 테일러가 뉴웨이브 스타일의 크리스쳔 뮤직을 선보인 이래로 CCM은 갖가지 다양한 쟝르의 음악 스타일을 원용하 기 시작했다. 크리스쳔 록, 크리스쳔 랩, 포크, 재즈, 에어로빅음악, 묵상을 위한 연주음악 등등 이젠 그 종류가 다양해져 분류조차 어렵게 되었다.
 
  한편 마라나타 뮤직이 성장시켜온 컨템퍼러리한 찬양 등은 호산나 인테그리티뮤직의 프레이즈 앤 워쉽 시리즈로 더욱 그 영역 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으며 비니어드 교회의 워쉽송도 컨템퍼러리 프레이즈 앤 워쉽 분야를 살찌웠다.
또 85년에는 CCM에서도 CD를 제작하기 시작해 음질면에서도 일반음악과 대등한 입 장에 서게 되었다. 또 일반 pop음악에 뮤직비디오(MTV)가 크게 성장하면서 거기에 대한 대안으로 크리스쳔 MTV가 등장했다.
1986년에는 컨템퍼러리 크리스쳔 뮤직이 대학에서 정식으로 가르쳐지게 되었다. 세인트루이스 근처의 그린빌 칼리지는 CCM을 정규학과로 세워서 그 커리큘럼에 CCM의 여러 분야 - 스튜디오 레코딩 테크닉, pop이론과 작곡코스, 실기코스, 무대효과, 프로그래밍, 프로모션, 업계활동 등을 포함시켰다.
CCM의 역사가 30년을 넘어 이제 장년기에 접어드는 1990 년대는 CCM의 새로운 장을 여는 시대가 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크리스쳔 뮤직 비디오 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그런 뮤직 비디오가 방송될 수 있는 CCM전문 TV가 생겨났다.
 
CCM 의 수준은 외적인 면에서 볼 때 이제 일반 팝음악계의 수준에 완전히 도달했으며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악마주의, 쾌락주의로 얼룩져있는 일반 pop음악의 대안으로 복잡한 현대 문화 속에서 효과적으로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다. CCM은 유럽에도 들려지기 시작해 에미 그란트, 샌디 패티, 화이트 하트, 페트라 등은 유럽의 공연에서 성공적 결과를 낳기도 했고, 80년대 말부터 자유화의 물결이 일던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에도 CCM은 들어가게 되었다.
 
1989년 8월 발트해 공화국의 하나인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탈린에서 열린 에스토니아 89는 수많은 결신자를 배출했다. 소련의 공산화 이래 처음으로 열린 CCM공연이었다. 1991년에는 유 럽 각국의 크리스쳔 아티스트들이 스위스에 모여 유럽의 CCM을 모은 앨범 `첫 발자욱'을 냈다. 이들은 유럽 특유의 크리스쳔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에서의 CCM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 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도 CCM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CCM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 는 미국의 음악이, 아시아 각국의 찬양문화가 발전하면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개방화되 는 세계의 추세에 따라 나라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CCM은 더욱 확산될 수 있었다.
 
1990년대는 CCM이 본격적으로 일반 팝음악계로 뛰어드는 시기가 되었다. 내용이 완전히 선교적 입장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CCM의 아티스트로서는 처음으로 에미 그랜트가 1991년 팝계의 정 상을 차지했다. 이어서 가장 뛰어난 CCM 사역자중의 한명인 마이클 W.스미스가 `Place in this world'라는 확실한 복음메세지가 담긴 노래로 빌보드 상위로 진입하게 되었다. `Be Be and Ce Ce Winans'는 리듬 앤 블루스 챠트 1위를 기록했다. Take 6도 그래미상에서 여러 부문을 수 상하는 등 CCM은 일반 팝계에서도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크리스쳔 음악인들이 품어왔던 "일반 pop음악계에서의 복음사역을!" 이라는 슬로건이 실현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마지막 때에 CCM이 일반 문화속에 파고들어가 선보다 악이 더욱 많은 일반음악계를 바꾸고 순 화시키고, 궁극적 목표인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해 수많은 영혼을 구하게 될른지. 아니면 CCM 이 일반 pop음악이 추구하는 인기와 상업주의에 물들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도태되고 말 것인지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될 CCM의 사역을 지켜보아야할 것이다. 위의 글 외에도 우리나라의 CCM과 현재 CCM의 현황과 문제점 등에 대한 글들이 [가스펠 월드]라는 사이트에 있습니다.
 
  CCM의 시작
  미국의 60년대는 우리의 칠, 팔십년대와 별반 다를바 없이 여전히 전통적인 음악들과 세상의 한 곁가지로서 교회가 자리잡고 있었던 시기였다. 신앙은 신앙이었고 문화는 문화였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정은 변하기 시작 했다. 70년대말경 C.C.M지가 나오기 시작했고 Artist들의 활동 또한 활발해져갔다. 이제 C.C.M은 문화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가능한 모든 스타일의 음악에 기독교적인 메세지를 담아내는 작업을 해가기에 이르렀다. 스래쉬 메탈에서 찬송가까지의 이 모든영역을 거머쥔 C.C.M은 태동의 초기에서 부터 이를 듣는 많은 이들과 공방전을 벌여왔다. 일반적인 세상의 시장에서의 청중들과 대중가수들과의 영합과는 달리 C.C.M은 그자체가 가진 혁명적인 본질로 인하여 여전히 전통과 관습속에 있던 크리스챤들과의 마찰은 예견된 것이었다. 특히나 가사의 문제에 있어서 복음 그자체의 직접적인 메세지를 넘어서는 표현방법의 실험적인 시도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했다. 이러한 마찰과 논쟁의 계속적인 물음은“C.C.M의 목적은 무엇인가?′하는 문제였다. 과연 C.C.M의 목적은 무엇인지. 복음의 전달사역인가, 아니면 새로운 교회노래의 출현인가. 어느덧 C.C.M이 태동한지도 30년을 넘어서가는 이때 본질의 확인은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CCM의 발전
초기 C.C.M은 60년대에 미국을 강타했던 예수백성운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육칠십년대의 반전, 반문화운동이었던 히피운동에서 안식과 해답을 발견할 수 없었던 젊은이들이 예수안에서 답을 얻고서 그들의 구원의 기쁨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그들의 표현방법을 가지고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직적인 선교정책의 한 일환이 아니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좋은 것이 표출되어진 결과였다.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과 잡지, 방송, 심지어 TIME지의 표지를 장식하기에 이르른다. Jesus Christ Superstar나 Gospell등의 뮤지컬음악이 Edwin Hawkins의‘O Happy Day'와 같이 일반 팝챠트에 등장했다. Cat stevens는 오래된 영국 찬송가인‘Morning Has Broken'으로, Judy Cdllins는 ‘나같은 죄인 살리신’을 아카펠라로 불러 라디오 히트 챠트 40위안에 오르기도 했었다. 경건한 음악을 만들어내던 레코드 회사들이 (WORD사는 경건 회사라고까지 불렸다) 이러한 현상에 관심을 갖게 된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초기 예수의 알려진 앨범들의 시도결성되고 C.C.M이 전파에 타게 되는 등 C.C.M이 점차 자리잡아감에 따라 점차 그 애초의 의도에 미묘한 변화가 발생했다. 그것은 70년대의 C.C.M사역에 있어서 그 음악들의 최초 소비자가 크리스챤임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곧 C.C.M은 그 본질적인 사명, 즉 대중문화의 순화와 변혁에의 소망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하위문화로서 대항문화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교회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Larry Norman, Love Song, 심지어 사도행전 2장 같은 팀들도 원래부터 일반 대중 레코드사소속으로 활동했었다. 그 당시에는 CROSS OVER의 체로 정복될 것 같지 않았지만 가장 직접적인 사역으로서 시도되고 있었었다. 그러던 것이 칠십년대이후 기독교시장에 너무 큰 비중을 둔 나머지 교회음악의 또 다른 대안으로서만의 위치에 안주해버리게 된 것이었다
 
CCM의 성장
하지만 과거 몇년사이에 C.C.M개척자들의 원래 비전이 Amy Grant, Michael W.Smith, Bebe & Cece Winans등의 잇단 성공에 힘입어 그 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별히 주목할만한 것은 이러한 은유적인 메세지들의 노래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메세지의 영적인 노래들도 일반시장에서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는 Carman의 Addicted to Jesus앨범이 각각 최고 판매량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있는 사실이 아닐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크리스챤 랩그룹인 D.C TALK의 92년 앨범인 에 실려있는 이란 노래는 그 가사가 너무나도 직접적인 복음적인 메세지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챤 시장을 넘어서서 일반쪽에서도 많은 호응을 얻어 M-TV에서도 그 노래의 비디오를 틀고있는 실정이다.
 
CCM의 변천
C.C.M은 과거 5년동안 어느때보다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고있다. 5년전 Amy Grant의 Lead Me On앨범이 사전 주문량 36만의 본거지는 애초 C.C.M의 태동지이자 예수백성운동의 태동지였던 캘리포니아 연근에서부터 미국 음악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Nashville로 옮겨가게 된다. 89년부터 시작된 이동은 91년초에는 SPARROW 레코드사를 비롯하여 많은 크리스챤 아티스트들이 Nashville로 대거 이동하기에 이르른다. 이러한 바탕위에서 90년대를 연 C.C.M사역은 점차 일반시장에도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그사역을 확대해나기에 이르른다.

1990년에는 일반 메이저 레코드 회사인 Warner Bros.가 계열회사로서 크리스챤 음반회사인 Warner Alliance를 세웠으며 중 Michael W.Smith의 뮤직비디오/Place in this World, Friends/는 우리나라 KBS의 뮤직 비디오 프로그램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반면에 크리스챤헤비메탈팀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STRYPER는 롤링스톤지의 인터뷰로 구설수에 오르면서 최근 CROSSOVER적인 앨범‘Against the Law'를 내기도 전에 기독교굴지의 음반 및 유통회사인 BENSON으로부터 배포를 외면당하기도 했다. 90년의 최고 판매앨범은 Carman의 Revival In The Land였다
1991년은 CROSSOVER의 해였다.
3월에 Myrrh와 A&M사는 Amy Grant의 'Heart in motion'을 출반해서 CCM업계력을 견뎌낼 신앙은 매우 필요하다. CCM은 주일외의 나머지 6일을 위한 음악으로 여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성경적 개념을 삶의 모든영역에 적용하기위해 친밀한 시가 및 대중문화를 이용하는 것이다. CCM은 오늘날 대안으로서의 역활과 영적격려의 적절한 문화적 방법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었다. 쉬운 말로 없어서 못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음악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들의 삶에 적절히 활용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보다 많은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삶을 나누는 좋은 소식의 방편을 주신 주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음악, CCM
그 언급의 최초 시작을 따지긴 힘들지만 아마도 그 시작의 본격적인 시기는 89년 Gospel Hour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어느 정도의 관심꾼들의 정보로만 돌려지던 C.C.M 이라는 현대적인 노래들이 본격적으로 일반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흩어졌을때, 그 반향은 상상이외의 것이었다. 타락사탄설부터 시대의 반향, 새로운 종교 혁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반응들이 있었고, 그로부터 5년간 그 수많은 혼란 속에서 Gospel Hour 는 꿋꿋이 지켜왔다. 그러던 G.H가 지난달 그시간을 멈추고, C.C.M의 자리는 '꿈과 음악사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넘어갔다. 그 긴시간의 여유를 다시금 음미(?)할 수 있는 책한권이 나왔다는 사실은 단지 하나의 기록이나, 책한권의 의미를 넘어서는 비중을 가진다.

Gospel Hour에서 C.C.M에 대한 자료로 양동복씨가 쓰고 있다는 책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 있은지 어언 2년 C.C.M에 대한 자료로 목말라 하던 우리나라 상황에서 이 책 한권이 주는 의미는 무척 크다고 할 수 있다. C.C.M에 대한 지난 5년 간의 명암을 하나로 집약시킨 듯한 이 책은 이른바 C.C.M 교과서적인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미국 C.C.M의 태동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실제,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와 자료 그리고 질의 응답은 정말 한줄기 단비 같은 고마움이다.

우리나라 찬양계에 있어서도 이책의 의미는 크다. 솔직히 87년 주찬양 그이름에서부터 본격적 으로 점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한국 C.C.M계는 그이후 G.H군단(?)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고 보아도 큰무리가 없을 것이다. 양동복 P.D를 통해 C.C.M을 접한 하덕규 집사, 그 끈에 연결되어 미국까지 가서 shock 잔뜩 안고 온 박종호, 송정미, 애초부터 작정한 듯한 최덕신, 최인혁 그외... 이런 음악적 자질을 가진 이들을 자극했고, 그리하여 우리나라 찬양계의 수준과 영역을 단숨에 2-3단계 뛰어오르게 한 불씨가 되었던 미국 C.C.M, 하지만 그 본질을 명확히 알기는 사정상 무척 어려웠었다. C.C.M에 대한 그리고 그와 비슷한 류의 언급된 책으로 나온 '크리스찬 락(벧엘사)', 그리고 온전히 세상 락 비판서였던 '락 음악의 위험성(?)' 이 두가지 책자 또한 무비판적으로 번역 들어온 책이었고, 그 논점 자체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논지를 이끌어내서 C.C.M에 대한 비판도 무성했다.

특히 낮은 울타리의 무분별한 비판(초기)과 교계 인사들의 고전음악 사수를 위한 비판의 칼날은 자료의 부족이라는 허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 또는 개인적인 잣대로의 비판, 고전 음악 사수결의에서의 비판.. 사실 문화, 예술 쪽의 기독적 연구가 거의 전무한 우리나라의 실태에서 다양성 이해나 종교 예술,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의 이해는 참으로 역부족이었고, 쌍방간의 공방전은 소모전의 성격만 불러일으키며 휴지기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 원론적인 부분 에서의 이해부족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 공백의 크기는 꽤 오래 지속되었지만 이번 양동복 P.D의 책은 이러한 양방간에 듬직한 자료로서의 역할을 해준다고 할 수 있다.

크게 이책의 의의를 들자면 먼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G.H의 5년간의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두번째로 수많은 논란속에서 제대로된 첫번째 C.C.M 입문서 라는 점, 세번째, 지금껏 논란의 표적이 된 미국C.C.M의 모습을 정지하고 자세히 밝힘으로써 Christian Music논쟁의 차원을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룰 마련했다는 점에서이다. 사실 이책을 엄밀히 따져보면 하나의 자료 이상의 것으로 평하긴 좀 모자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객관적인 사실과 자료의 나열, 번역물의 인용 등은 교과서적인 모습을 지니지만 C.C.M 연구서나 비평, 미래지향적인 논지중심의 책은 아닌 것이다. 이점은 지난 2년간 책나오기를 독촉하던 독자들에게 하던, 그의 핑계처럼 아직은 섣부르고 혹시나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책을 내어야만하는 요구의 시점과의 맞물림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라 해 봤자 Gospel Hour를 통해 들려오는 자그마한 조금의 소식들, 가끔 관심 있는 이들을 통한 소식지들, 그리고 아주 희귀했던 C.C.M 매거진, 구닥다리 은성 음반들이 거의 다였던 것이다. 라이센스와 수입이 시작되던(본격적으로) 92년 초 전의 자료는 거의 없었고 그이후 카리스를 통해서 들어오는 자료들이라고 해서 썩 나을 건 없었다. 좀더 나은 음질을 들을 수 있다는 게 하나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랄까?

어쨌든 카리스의 수입 TAPE들이 나오고 92년말 지방(대구,대전,부산 등)으로 조금씩 배포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젊은 세대들(그중 진보적인 일단의 무리들..)의 관심도 또한 크게 증폭되었다. 아마도 92년 중반에서 93년 말까지 이 1년이 Gospel Hour에서도 가장 호응이 좋을때가 아니었나 싶다. 공개 방송도 꾸준히 진행되었던 때였고.... 그리고 그와 거의 비슷한 때 하덕규 형제의 쉼, 그리고 박종호 형제의 3, 4, 5집 송정미 자매의 앨범, 최인혁 3집, 최덕신 형제를 주축으로 한 주 찬양의 7, 8, 9집 그리고 '회복', 천민찬 형제의 '친구에게', 임마누엘의 3, 4집, 손영진 자매의 2집, 이성균 형제의 1, 2, 3집 이런 핵심적인 앨범들이 이맘 때에 나왔다. 모두들 그수준에서나 음악성, 그리고 스타일까지 이전에 비해서 급상승한 모습을 보여 주었었다. 앨범이란점에서 우리나라 가스펠 역사에서 한자리씩 매김받은 앨범들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앞서서 말했던 것처럼, 이런 현상들의 발화점이 되는, 그리고 그 현상에 수 많은 논쟁들의 포인트가 되었던 미국의 C.C.M현상에 대한 자료들은 턱없이 부족 했고 그 결과 거기에 대한 언급이나 옹호, 비판 또는 그 논점자체가 모호하거나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심했다. 즉 일단은 사실과 자료의 필요성이 더 큰 것이다. 결국 이책은 이책 자체로서 C.C.M에 대한 논쟁을 끝맺는 것이 아니라(저자도 이것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논쟁의 방향적인 측면에서 필자는 이런 점을 기대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이제 이책을 말미암아 미국 C.C.M에 대한 논의에서 한국적 현상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미국적 현상과 논리들을 우리가 납득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쓸데없는 힘을 뺄 것인가? 양동복 P.D의 말처럼 우리나라는 이미 우리나라 상황과 설정에 맞게 C.C.M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사실 지금의 비판들은 미국의 비판들을 그대로 옮겨 온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그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일단 언어가 다르고 사상의 기반이 다르고 기독교에 대한 친밀도, 시장의 크기, Media의 분포, 반응 모든 것이 다른 이 나라에서 C.C.M의 논의는 미국 C.C.M에 대한 논의와는 180도 다른것 일 수 밖에 없다. 유교문화권에서 기독교에 대한 배척도는 겪어 본 사람이라면 익히 알 것이다. 교회 '교'자만 나와도 치를 떠는 사람이 있는 나라와 욕을해도 '하나님'을 들먹거리고 감탄사에 'GOD'이 나오는 나라에서의 반응과 효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선교로써 C.C.M을 하고자 할때 우리나라 상황에서 미국 모델을 적용한다는 것은 1년 내내 가도 라디오에 곡이 한두번 나올까 말까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적용될 성질이 아니다. 과거의 틀, 결코 기독교적이지 못한 틀로 파악할 구조와 상징이 아닌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논의 될것은 C.C.M의 정신, 그 나아갈 바에 대한 온전한 논의와 보다 실제적인 이야기들로 그 논의를 구체화 시켜야 한다.

논쟁은 커뮤니케이션의 방법론적인 논쟁으로 이어져야한다. 음악경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노래, 음악 속에 가사들의 방향과 포인트, 전달력의 가감, 메세지의 전파능력에 대한 실제적인 논의들이 시작되어야 한다. 같은 말이라도 '어'가 다르고 '아'가 다른데 언제까지 우리는 성경을 라틴어로만 읽고 있을 것인가. 마틴 루터와 쯔빙글리는 라틴어를 몰라서 성경을 번역 했던 것인지... 즉, 대중과의 교화점이 되는 언어 사용, 커뮤니케이션의 방법론을 생각하여야만 한다. 성경 구절을 음악에 섞고 스크립쳐 송의 단계를 넘어서는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노랫말들의 논의, 대중을 지향하는 선교의 노래에 있어서 필수로 논의 되어야 할 부분이다.

또 우리가 더욱 살펴봐야 할것은 대중문화의 대량유통 구조에서 발생되는 찌꺼기와 상업적인 논란의 문제이다. 세상의 썩어 문드러진 유통구조 속에서 크리스찬이 개혁할 부분과 또 C.C.M이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을 확보하기 위해 먼저 구축 되어야할 Media 선상에서의 상업주의의 탈피 문제이다. 이미 미국에서도 C.C.M의 영역이 어느정도 커가고 시장성도 넓어지자 일반 Major Record사들의 뛰어들기와 매수의 손길이 펼쳐지고 있다. 상업 우선의 가치관 속에서 C.C.M의 순수한 복음정신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은?
그리고 C.C.M의 참정신이 단지 도구의 유용화가 아니라, 참다운 기독정신의 발현과 자유로울 수 있는 Christian이 되기에 초점이라면, 정체되어 있고 권위위주의 한국 기독교계 내에서 이땅의 종교적 관습을 뒤엎는 시도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참다운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으로의 삶을 우리가 접하는 모든 문화환경 속에서 펼쳐 내야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 누구 한테 기대 할 것인가.
어떻게 펼쳐 낼 것인가.
우리가 세상처럼 두 팔을 치켜들며 데모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나아갈 것인가.

아마도 이제는 모든 논의와 논쟁의 초점이 보다 본질적인데로 돌려져야 하지않을까 생각한다.
노래란 과연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와 더불어 Christian들이 불러야 할 노래, 누려야 할 음악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물음 제기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언어 철학과 커뮤니케이션화 에서 음악사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초점 없는 질타에서 벗어나 발전 지향적인 합의로의 논의가 시작어야 한다.

C.C.M이 단지 현대적인 음악을 통한 선교라는 이해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어떤 목적을 위해 그 모든것이 타협되고 변질되어 버릴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내에서 C.C.M은 진실로 음악적인 것보다 그 컨템퍼러리한 정신, 성육신한 사건의 현대적인 이해와 실천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국의 노래꾼들은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해야한다. 음악은 현대적인데 가사는 항상 내면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어제의 노래이다. 우리의 오늘과 현실에 충실한 이땅의 역사와 문화를 토대로 하는 노래들, 그리하여 이 땅을 바꾸어 버릴 힘을 가진 노래들, 한국 C.C.M에 바라는 소원이다.

하나님께서 부디 이 일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길...
                                                                 PD 양 동복
새로운 대중음악 CCM
1990년대 들어서 우리나라의 대중음악 중에서 새로운 장르로 자리잡은 것이 있다면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줄여서 'CCM'으로도 불리는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이라는 용어는 1980년대말부터 우리나라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음악이 우리나라에 소개된지는 꽤 오래지만 그 용어가 쓰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리스천 음악에 대한 용어의 개념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CCM대신 '가스펠송'이란 말과 이를 번역한 '복음성가'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여왔다. 기독교음악 중에서 찬송가나 성가를 제외한 대중적 스타일의 음악을 '가스펠송' 또는 '복음성가'로 뭉뚱그려 불렀던 것이다. 언어는 이를 쓰는 대중들이 규정해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CCM이란 말이 대중음악계에서 확고한 장르로 자리잡은 바에는 우리도 용어를 구별하여 쓸 필요가 있다. 우선 CCM이 그동안 우리가 써오던 '가스펠송'이나 '복음성가'와는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기로 하자.
CCM이란 말은 미국에서 들어왔다. 미국에서는 19세기부터 '가스펠송Gospel Song'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고 복음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들을 '가스펠음악Gospel Music'으로 통칭해왔다. 그런데 흑인들이 흑인영가에서부터 그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켜가면서 보통 '가스펠'이라고 부르는 '블랙 가스펠Black Gospel'이 하나의 장르로 정착되었다. 흑인들의 가스펠은 그 창법이나 음악스타일이 다른 장르와 확연하게 구분이 되었다.
한편 백인들은 미국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컨츄리풍의 '서던 가스펠Southern Gospel'을 오랫동안 발전시켜 왔는데 이 음악도 다른 장르와 구분이 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이 섞여 만들어진 록큰롤Rock'n' Roll이 등장하면서 기독교 관련음악에도 블랙 가스펠이나 서던 가스펠의 맥과는 다른 음악이 등장했다. 이 음악은 외양으로는 일반 팝음악과 구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기독교적인 것을 다루었다. 이 음악이 바로 CCM이었다. 처음엔 이 음악이 예수음악Jesus Music, 또는 지저스록Jesus-rock으로 불렸다. 일반음악계에서는 이런 음악을 '가스펠' 또는 '인스피레이셔널Inspirational', '릴리져스Religious' 음악으로 분류하다가 1970년대말부터 '컨템퍼러리 크리스천'이라는 용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찬송가풍의 음악과는 뭔가 다른 음악을 하나의 흐름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음반차트전문지인 [빌보드]를 보면 기독교관련음악으로 CCM과 가스펠의 두 차트를 두고 있다. [빌보드]는 CCM은 팝/록 계열의 음악을, 가스펠은 흑인전통 가스펠과 소울,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의 음악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CCM은 일반대중음악의 스타일을 똑같이 갖고 있으면서 내용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담고 있는 음악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반 가요계의 입장에서 보아 스타일은 가요와 다를 바 없는데 내용은 기독교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음악을 '복음성가'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CCM과 우리나라의 복음성가는 같은 선상에 있는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엔 복음성가라고 부르지 않고 CCM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많아진 것이다.
CCM은 그 음악스타일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컨템퍼러리'하다. 요즘의 음악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늘의 시대와 문화상황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문제가 심각한 미국에서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다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음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내용을 담는 노래가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족통일을 이루어 한민족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파하려는 소망이 담긴 노래가 만들어진다. 2천년 전 예수님이 당시 상황에 비춘 여러 가지 비유를 하셨듯이 CCM도 오늘의 상황을 반영하여 기독교 진리를 전파하고 실천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70년대부터 미국에서 '가스펠송', '가스펠뮤직'을 들여오면서 이들을 '복음성가'라는 말로 정착시켰다. 하지만 '복음적인 내용을 담은 음악'으로서의 '복음성가'라는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전통적인 교회음악이나 성가와 대비되는 대중적인 기독교음악'의 뜻으로 일반인의 인식이 바뀌었다. 이렇게 개념인식이 바뀌었다면 '복음성가'라는 말보다는 CCM이란 용어가 더 알맞지 않은가 해서 1980년대말부터 CCM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CCM을 적절하게 우리말로 번역하지 못해 재즈, 팝, 록 등의 이름을 영어대로 쓰듯이 CCM도 그대로 쓰이게 되었다.
CCM은 이제 차트로 구분될 만큼 일반화되버린 이름이기 때문에 굳이 용어사용을 배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포괄적으로 개념을 정리할 필요는 있겠다. 결론적으로 CCM은 첫째, 미국에서 흑인음악인 가스펠과 대비되는 크리스천 음악 즉 팝, 록 계열을 포함한 현대 대중음악스타일을 띤 크리스천 음악(그 가사가 영어이든, 독일어이든, 불어이든, 우리말이든 상관없이)으로 좁게 지칭할 수 있고 둘째, 본질적으로는 '주님의 말씀이 육화된 내용을 지니면서 요즘 시대의 음악흐름을 따라가는 음악'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가스펠뮤직의 간단한 역사
포괄적인 뜻으로의 가스펠 음악은 19세기말 미국에서 발전하였다. 가스펠 송이란 말은 19세기말 미국에서 처음 쓰였다. 1874년 당시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휘틀(D.W.Whittle 1840-1901)의 집회에서 찬송인도자로 활동하던 블리스Phillip Bliss에 의해서 출판된 노래모음집 [가스펠송]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가스펠송은 당시의 대중적인 부흥집회나 산과 들에서 열린 캠프집회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거나 구원에의 기쁨을 간증하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개인적,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음악적으로는 명랑하고 민요적인 요소를 담은 세속적인 스타일이었다.
당시에 불리던 가스펠송을 보면
"하나님의 진리등대","이 몸의 소망 무엔가",
"저 죽어가는 자","저 장미꽃 위의 이슬",
"주 예수 내맘에 오신후","나 주를 멀리 떠났다",
"저기 갈보리산 험한 십자가는","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등
필립 블리스Phillip Paul Bliss, 아이러 생키Ira Sankey, 윌리엄 커크패트릭William J.Kirkpatrick,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 등 당시의 유명한 가스펠송 작사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1920년경 가스펠송은 흑인영가와 재즈의 요소를 혼합하여 생기있고 더욱 힘찬 곡으로 변해갔다. 이런 음악은 후에 미국 북동부 흑인들 위주로 발전해나가면서 리듬앤 블루스, 소울 등의 요소를 가미하여 오늘날 좁은 뜻의 가스펠 음악이 되었다. 이를 밝혀 블랙가스펠이라고 부른다.
한편 백인들 사이에서는 영국의 발라드나 민요를 바탕으로 컨츄리풍의 가스펠송을 발전시켜나갔는데 이 음악은 남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므로 서던 가스펠이라 불렸다. 백인들의 가스펠인 서던 가스펠은 1950,60년대의 주된 가스펠음악이었다. 백인들의 전통 가스펠이 록음악의 요소를 혼합하고 새로운 현대적인 다양한 음악요소를 받아들여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으로 발전하게 된다.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
형식적으로 보면 가스펠 음악 역사중에서 1960년대 중반 이후가 바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 시대이다.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이란 용어는 1970년대 말부터 쓰여졌다. 그 이전까지는 '지저스 뮤직Jesus music'(예수음악),'지저스-록Jesus-rock'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크리스천 음악업계가 자리잡아가고 또 컨템퍼러리한 음악이 일반화되자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이란 용어가 정착된 것이다. 그래서 일반 팝계에서도 이 CCM이란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장르로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의 종합 차트지인 [빌보드]의 예를 들어보자. [빌보드]는 대중적인 크리스천 음악을 '인스피레이셔널Inspirational'이란 장르로 따로 구분해놓았다가 1984년부터 이를 '컨템퍼러리 크리스천'과 '가스펠'의 두 갈래로 더 나누었다. 이때는 미국에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지 5-6년 지난 후였다.
사실 일반 팝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두 가지 장르는 음악스타일로는 일반 팝과 구분이 안되는 것이었다. 처음엔 '인스피레이셔널' 또는 '릴리져스Religious' 등으로 구분해서 형식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다른 음악과 구분될만큼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1970년대 말부터는 이들 음악이 점점 더 컨템퍼러리하게 되어 형식적으로는 일반 팝음악과 구별이 안되었다. 그러나 이런 음악이 뚜렷하게 한 무리를 이루면서 커나가고 있었기때문에 내용으로 구분된 장르가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빌보드 차트에 등장하는 음악은 팝/록/컨츄리/리듬 앤 블루스/메탈/클래식 등 음악스타일로 구분되지만 컨템퍼러리 크리스천은 랩이나 메탈을 포함한 팝/록 계열로 스타일로는 구분되지 않는 장르이다. 다시 말하면 빌보드 지에서 스타일보다는 내용으로 구분하는 유일한 장르인 셈이다.
보다 더 자세히 나누자면 백인 위주의 음악인 팝/록/컨츄리/메탈/발라드/포크 등은 '컨템퍼러리 크리스천'으로 뭉뚱그려지고 흑인위주의 음악인 R&B, 소울 등은 '가스펠'로 뭉뚱그려진다. 그러니까 [빌보드]지의 구분대로 한다면 내용상 '가스펠 뮤직'인 장르는 두 가지, 즉 '컨템퍼러리 크리스천'과 '가스펠'이 있는데 '컨템퍼러리 크리스천'은 스타일상으로는 팝/록 계열이며 '가스펠'은 리듬앤 블루스/블랙 가스펠 계열인 것이다.
그래미상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분류법에 따라서 '컨템퍼러리 팝 가스펠', '컨템퍼러리 록 가스펠', '컨템퍼러리 블랙 가스펠', '컨템퍼러리 소울 가스펠' 등 '컨템퍼러리'와 '가스펠'을 쓰고 있다.
이렇게 CCM은 기독교음악 안에서는 스타일로 구분된 것이며 일반 대중음악에서는 내용으로 구별되어 지칭되는 이중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적인 대중음악이면 다 '가스펠송'을 우리말로 만든 '복음성가'라는 용어로 포괄한다. 그러나 국내 복음성가의 스타일을 보면 거의가 다 CCM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용어를 정리해야할까?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가스펠' 또는 '복음성가'로 알고 있는 음악을 새로운 용어 CCM으로 바꿔 불러야 할까? 아니면 사회적 공통인식대로 '가스펠' 또는 '복음성가'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우리만의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야 할까?
현재 CCM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일반 팝 차트에서도 1위에 오르는 등 일반 팝계에서도 활발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일반 팝과는 다른 기독교적인 도덕과 사랑, 사회정의를 담고 있는 노래가 나름대로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볼 때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운 대중음악으로 등장한 CCM이 대표되는 용어로 쓰여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CCM과 '컨템퍼러리'의 개념
( 1 )
CCM이란 말이 우리나라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말이었다.
CBS의 "가스펠아워"라는 프로그램에서 처음 이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정통찬송가나 고전음악쪽의 기독교음악을 제외한,
대중적인 기독교음악은 '가스펠' 또는 이를 번역한 '복음성가'로 통칭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방송프로그램 이름도 "가스펠아워"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가스펠뮤직 정보가 차츰 정리되면서 우리는 '가스펠' 또는 '복음성가'란 말로는
대중적 기독교음악을 모두 표현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CCM이
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CCM의 본고장인 미국의 CCM이 주로 소개되다보니 은연중 CCM은 미국의 대
중적기독교음악을 지칭하는 것처럼 쓰여져서 미국엔 'CCM', 한국엔 '복음성가'라는 분
류가 퍼졌다. 마치 미국대중음악은 POP, 한국대중음악은 가요... 이런 식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반 대중음악계에서 CCM의 존재를 깨달으면서 CCM을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할때 주로 국내가요를 하다가 크리스천음악으로 크로스오버한 사람들 위주로 소개를
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덕신, 최인혁보다는 하덕규, 김성호,
조하문 등의 이름이 일반대중음악계에 먼저 알려졌다.
그결과 사람들은 CCM을 '가요스타일로 된 크리스천음악' 또는 가요를 하던 이들이 크리스천
음악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생겨났다.
어떤때는 '우리는 CCM을 지향하는 그룹입니다.'라거나 'CCM은 제대로 된 찬양이 아니야'라면서
같은 음악끼리 서로를 구별하려는 일도 일어났다. CCM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다보니 CCM을 서로
자기 잣대로 규정하는 일이 펴져버린 것이다.
사실 우리가 얘기하는 '복음성가'나 '가스펠'이나 'CCM'이나 사실상 다 한가지 범주에 속한다고 봐도
좋다. 이것은 요즘 우리나라 가요가 구미 팝과 그 스타일면서에 전혀 다를 바 없는 한가지 범주의 음악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들이 서로 다른 범주를 가진다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개념의 혼돈이 일어났다.
그 결과 같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서로 다른 음악을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짙어지다보니
'저런 음악이 어떻게 크리스천 음악인가'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런 혼돈을 풀어보기 위해 가요의 예를 들어보자. 남진, 나훈아의 전성시대의 가요는 미국의 팝과 확실히
다른 것 같았다. 그래서 팝과 가요는 단순히 영어와 우리말의 차이만이 아닌, 뭔가 구별된 용어였다.
그러나 지금은, 김건모와 주주클럽, 에쵸티와 조성모의 노래를 듣는 지금은,
가요와 팝은 구별된 용어가 아니다. 우리 가요도 미국의 팝과 똑같이 랩, 레게, 모던록, 얼터너티브 록,
리듬 앤 블루스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던 록을 하는 가수에게 '그런 음악을 어떻게 가요라고
할 수 있나?', '그런 음악을 하면 안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발라드나 트로트만을 해야 가요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같은 맥락에서 보자. 복음성가와 미국CCM이 뭔가 구별된 듯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
복음성가와 미국CCM의 스타일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뭔가 더 비트가 강하고 진보적인 사운드를
내는 음악만을 CCM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CCM은 대중적인 기독교음악을 거의 다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CCM의 원류인 미국에서는 어떻게 말할까? 그들은 보통 '크리스천 뮤직'으로 얘기한다.
'가스펠 뮤직'이 여전히 대중적인 기독교음악의 대표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실제로 '가스펠 뮤직계'에
관련된 사람들은 '크리스천 뮤직'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그 '크리스천 뮤직'에 '컨템퍼러리'라는 말이 더해지면서 대중적 기독교음악은 그 성격이 더욱 분명해졌다.
CCM은 어떻게 그 용어가 정착되었는가? '가스펠'이라는 전통적인 용어가 있음에도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로, 음악적인 면에서 CCM은 기존의 스타일과 다른 면을 확연히 보여준 음악이었다. 팝/록을 비롯해
새로운 스타일, 다양한 스타일을 반영하는 새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했다.
처음엔 지저스 록/지저스 뮤직 등으로 표현했지만 7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혼동이 있긴 하다. 전통적인 팝음악계에서는 여전히 '가스펠'이란
이름에 익숙해있고, 그래서 '가스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뭔가 어색한 이 음악에 '컨템퍼러리 팝 가스펠',
'컨템퍼러리 록 가스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 음악계에서는 '크리스천 뮤직'으로 일반화되
어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내용적으로 '컨템퍼러리'한 상황을 반영하고 그 의미를 구현하는 음악을 표현하는 용어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수직적인 찬양' 또는 '자기 고백적인 믿음'을 담은 내용만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 문화상을 반영한 음악용어, 내용의 영역을 넓힌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로 'CCM'이 필요했다.
셋째로, 산업적인 측면을 들 수 있다. 가스펠음악이 컨템퍼러리하게 변하면서 점차 산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가스펠 음반산업은 상업적 유통구조에 편입됐고 나아가 여러 문화시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그에 따라 '복음을 담고 있는 음악'이라는 영역에서 벗어나 일반대중음악에서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시장구조에 들어서있던 '블랙가스펠'과도 대응되는 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CCM이란 용어가 정착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CCM이란 말을 바라보고 사용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대중적 기독교음악의 흐름에서, '가스펠', '복음성가', 'CCM'이란 용어가 어떻게 등장했고 쓰이고 있는가를 제대로 바라볼때에 우리는 대중적 기독교음악의 발전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컨템퍼러리 정신과 CCM
1555년, 교황 마르첼루스 2세는 성금요일에 교황의 공식합창단인 시스틴 성당 성가대원을 모아놓고 '속되고 지저분한' 가락을 끌어들여 가사의 분명한 전달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얘기했다.
그 '속되고 지저분한' 가락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다성음악이었다. 교회는 천 년 동안 단선율 성가를, 그것도 사제만이 불러왔다. 암브로시우스 성가로부터 그레고리오 성가를 거쳐 16세기 다성음악에까지 이른 서양교회음악은 기교와 창법에 있어서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만 당초의 숭고하고 엄숙한 정신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이고 유희적으로 타락해 교회의 걱정을 낳았던 것이다.
시스틴 성당 성가대 지휘자였던 팔레스트리나는 얼마 안가서 교황 바오로 4세에게 해고당했다. 다른 성가대원 두 명과 함께 '결혼한 몸'이라는 이유로 ?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그의 음악때문이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들고 프로테스탄트가 유럽전역으로 번지자 가톨릭에서도 이에 맞서 스스로를 개혁하려고 했다. 반종교개혁이었다. 반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안에서 온갖 '불순물'을 씻어내려했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도 그 '불순물' 중의 하나였다.
다성음악을 이미 추방해버린 교회도 있었다. 급기야 로마 교회는 다성음악을 교회에서 완전추방하기로 결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거리의 속되고 야한 가락이 뒤섞인 다성음악을 예배음악으로 쓸 수 없다... 선율이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뻗어나가기 때문에 가사전달에 방해가 된다... 하나님 말씀 전달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결국 사탄의 음악일 뿐이다...
팔레스트리나는 자신이 지닌 온갖 음악적 재능을 쏟아붓고 열과 성을 다해 다성음악으로 예배곡을 만들어 교황에게 바쳤다. 그 작품이 "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였다. 이 음악은 단선율 못지 않게 곱고 순결하면서도 복잡함이 복잡하지 않고 거대한 성당 내부처럼 화려하고 찬란했다. 다성음악을 반대했던 쪽이나 찬성했던 쪽이나 모두 눈을 감았다. 감동했다. 다성음악을 추방하려던 계획은 마침내 취소되었다.
이 이야기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전설과 후대의 추정으로 엮어진 개연적 진실이다.
팔레스트리나의 "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는 단선율 음악과 다성음악이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작품은 트렌트 공의회의 작곡지침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다성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얼마나 쓸모있는가를 증명해냈다. 팔레스트리나는 '俗'을 '聖'으로 바꾼 천상의 음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400여년전, 이탈리아의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과 행적에서 우리는 '컨템퍼러리'의 정신을 본다. 치열하고도 숭고한 그의 정신이 당대의 음악, 당대의 대표적인 문화를 승화시켜 지고한 찬양을 선보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당시 스타일로 독일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성가 '코랄'을 창안했고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 리가 어떤 음악이든 당시 유행하던 음악을 기꺼이 차용해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게 했던 것도 기독교음악 중에서 '컨템퍼러리' 운동이 아니었을까...
2000년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가 새로운 '聖'스러움을 만들어나가는 컨템퍼러리 운동이 계속되어야하지 않을까... CCM은 이런 흐름 속에서 발전되어야 한다.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다성음악, 팔레스트리나에서 바하, 루터에서 웨슬리... 이렇게 교회와 관련된 음악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면서 변화해왔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찬송가를 가져갔고 그 찬송가는 광활한 아메리카대륙의 곳곳에서 오랫동안 간직되기도 하고 독특하게 변형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건너온 흑인들은 토속적 요소와 한으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접점... 이 접점이 오늘날 대중음악의 실마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또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의 실마리이기도 했다.
이제 무대는 미국으로 넘어왔다. 19세기말 대각성기간에 백인과 흑인은 함께 노래했다. 캠프모임에서 이들은 함께 박수치고 춤도 추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가스펠'이라고 부르는 노래가 나왔고 주일 예배에서 '가스펠'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의 음악은 소울, 리듬 앤 블루스로 발전해왔고 백인의 음악은 컨츄리, 스탠더드 팝에 머물러있었다. 여기서 또 접점이 이뤄진다. 컨츄리와 블루스는 록큰롤을 만들어냈다. 록큰롤은 세계를 휩쓸었다.
마할리아 잭슨이 블랙 가스펠을 경지로 이끌고 있을 무렵 백인의 가스펠은 컨츄리스타일의 가스펠(서던 가스펠)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록큰롤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즈음 크리스천 뮤직은 또 하나의 접점을 찾았다.
그런데 이번의 접점은 달랐다. 흑인음악과 백인음악과의 접점을 넘어, 진리를 담은 내용과 록과의 접점을 넘어 하나님과 인간, 교회와 세상에 다 열려진 접점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예수음악Jesus music, 예수-록Jesus-rock으로 불렸던 이 새로운 접점의 음악은 기독교 음악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도 당대의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지 않으면 예외없이 멸망하리라는 외침도 있었고 우리 모두 예비하지 않으면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는 일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자적인 경고도 있었다. 물론 주님의 사랑과 은총도 노래했다.
컨템퍼러리 음악은 음악적으로 랄프 카마이클, 비틀즈 등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전자악기와 매스 미디어의 포장도로를 달려온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컨템퍼러리 음악은 세상의 음악흐름, 그중에서 록큰롤의 껍데기에 기독교적인 내용만을 담은 어색한 만남 이상의 것이었다. 만약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이 일반 세상음악을 빌려와서(때로는 훔쳐와서) 내용만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채우는 단순한 생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시도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컨템퍼러리 음악은 당대의 사회와 문화,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꿰뚫어보고 명확하게 그리스도의 진리와 가치관으로 지적하고 채찍질하고 나아가 해답을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은 단순한 음악적 변화를 넘어 보다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를 던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질적인 단계로 등장했다.
1965년 배리 맥가이어는 당시의 사회상을 신랄하게 그린 "파멸 전야Eve of Destruction"을 발표했다. 이 노래는 너무 저항적이고 급진적이라고 해서 방송을 금지하는 곳이 많았음에도 차트 1위에 올랐다. 그리고 당시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노래로 떠올랐다. 이 노래 이후 배리 맥가이어는 참구원의 문제로 질적인 도약을 했다. 1973년 배리는 "씨앗Seeds"이라는 첫 크리스천 앨범을 냈다. 배리 맥가이어는 문제제기와 저항을 알았고 그 참 해결책도 깨달은 접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노래야말로 CCM의 첫 길을 다지는 노래였다.
공산세계는 폭발하고 있습니다
화염과 총탄이 어지러이 날립니다
당신은 살인을 할만큼 컸지만 아직 선거권은 없군요
당신은 전쟁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손에 쥔 총은 무엇인가요?
요단강마저 시체가 떠내려가는 지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지금은 결코 파멸의 전야가 아니야...
당신은 세상을 파멸로 몰고 있으면서
결코 종말을 믿지 않는군요
(Eve of Destruction, Barry McGuire 1965)
Re 1: 래리 노먼-노래듣기
컨템퍼러리... 래리 노먼
"왜 이 좋은 음악을 모두 악마가 가진단 말인가?"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연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교회뿐만 아니라 예배도 개혁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음악을 개혁했다. 우선 가사를 보통사람의 언어로 바꿨다.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라틴어에서 단순하고 쉬운 언어로 가사를 썼다. 그 가사모델로 당시 유행했던 발라드를 들었다. 시편가사만을 인정하던 것에 비하면 파격적인 것이었다. 곡조도 바꿨다.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독일민요, 대중의 노래, 심지어 메리 여왕의 찬가도 빌렸다. 루터는 신학 다음으로 음악을 놓을만큼 음악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그 음악은 진리를 전하는 능력에 더 중점을 둔 것이었다. 루터는 말했다. "악마 혼자서 좋은 곡조를 다 차지할 필요가 없다." 그는 젊은이들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소리나게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다 소리나게 하겠다고 했다.
300년 후,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쓰는 여러가지 악기를 써서 할렐루야 밴드를 만들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전통적인 곡조를 따라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쉬운 곡조로 연주했다. 그 곡조는 세속곡조였다. 부쓰는 세속음악을 빌려 그 가사를 바꿨다. 그 중에는 지금까지도 불리는 "그 친구 내가 알기전I've found a friend in Jesus", "내 진정 사모하는He's the Lily of the Valley"도 있었다. 부쓰는 당대의 사람들의 언어로 된 노래를 원했다. 당대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흥얼거릴 수 있을만큼 쉬운 노래를 원했다. 그의 음악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했다. 부쓰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좋은 곡조는 다 악마가 가져야만 하는가?"
다시 100년 후, 래리 노먼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새로운 음악과 오늘의 사회를 반영하는 노랫말로 컨템퍼러리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어릴때부터 흑인음악을 듣고 자란 래리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록큰롤을 듣고 가사만 세속적이었지 음악은 가스펠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 음악을 다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1969년 래리 노먼은 드디어 그 음악에 사회와 문화를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분석해 광야에 외치는 가사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울타리에 갇혀있던 기독교음악의 영역을 무너뜨렸다. 쉬운 가사, 쉬운 곡조만이 아닌, 크리스천이면 진정으로 외쳐야할 문제들을 과감히 외쳤다. 래리 노먼은 루터와 부쓰를 넘어선 것이었다. 래리도 물었다.
"왜 좋은 음악은 모두 악마가 가져야만 하는가?"
I want the people to know that He saved my soul
But I still like to listen to the radio
They say rock 'n' roll is wrong, we'll give you one more chance
I say I feel so good I gotta get up and dance
I know what's right, I know what's wrong, I don't confuse it
All I'm really trying to say
Is why should the devil have all the good music?
I feel good every day
'Cause Jesus is the rock and he rolled my blues away
... ...
Jesus told the truth, Jesus showed the way
There's one more thing I'd like to say
They nailed him to the cross, they laid him in the ground,
But they shoulda known you can't keep a good man down
I feel good every day, I don't wanna lose it
All I wanna, all I wanna know
Is why should the devil have all the good music
I've been filled, I feel okay,
Jesus is the rock and he rolled my blues away
내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아직도 라디오 듣는게 좋아요
사람들은 '록큰롤은 나쁜 것이야...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너무 좋아서 일어나 춤을 춰야겠어요
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잘 압니다
난 혼동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좋은 음악은 모두 악마가 가져야만 하는가?'
난 매일매일 기쁩니다
반석이신 예수님이 슬픔을 모두 없애주셨거든요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땅 밑으로 묻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직도 땅 속에 묻어두고 있는게 아닐까요
난 매일매일 기쁩니다 이 기쁨을 잃고 싶지 않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고 예수님은 내 슬픔을 모두 없애주셨습니다
(Why Should the Deveil Have All the Good Music?, Larry Norman, 1973)
비평가들이 가장 의미있는 앨범으로 꼽고 있는 앨범 표지에 실린 래리 노먼
<컨템퍼러리... 래리 노먼 2>
래리 노먼은 일반대중음악이 사용한 록큰롤을 도입하여 본격적인 크리스천 음악을 만든 CCM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록큰롤을 먼저 도입했다고 해서 CCM의 선구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음악스타일에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은 시도는 이전부터 다른 음악인들이 꾸준히 해온 것이어서 사실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처음에 래리 노먼의 음악에 놀란 이유는 파격적인 옷차림과 사운드 그리고 다양한 스타일때문이었다. 그 놀람은 거부감이었다. 파격적인 옷차림과 사운드는 래리 노먼의 음악의 본질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질보다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거부감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래리 노먼은 '컨템퍼러리' 음악의 선구자가 될 수 없었다.
래리 노먼이 열어 놓은 '컨템퍼러리' 음악의 본질은 그 메시지에 있었다. 그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그의 음악은 '컨템퍼러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음악을 통해 '바로 지금 땅을 밟고 있는 우리'를 얘기했다. 그리고 그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아가 그 '질문'에 해답을 명확하게 노래했다. 래리 노먼 이전에는 이러한 본격적인 시도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래리 노먼의 음악을 넘어서는 이들도 없었다. 이 때문에 래리 노먼은 CCM의 선구자로서 CCM의 깃발을 든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보려고 했다. 그의 노래를 살펴보자.
*문명의 편리함을 누리며 안락의자에 반쯤 누워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여전히 가난과 범죄일뿐이다(Living in the 20th Century).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 그 미국은 자유의 땅이다... 누구나 자유와 정의를 누릴 수 있다... 돈만 있다면! - (Step into the Madness).
*달나라에 먼저 발을 딛으려고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한 줌의 쌀이 없어서 어린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The Great American Novel).
*이러한 현실을 알리고 싶어도 사람들은 우리의 메시지를 왜곡하고 있고 언론은 우리의 정신까지도 왜곡해버린다(Stop the Flight).
*그래도 전쟁과 가난을 알려보려고 애쓰지만 우리는 세상에 실제로 평화를 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사진찍어 보내는 일밖엔 할 수 없는, 제 3자의 입장으로 영화를 보듯하는 6시 뉴스일 뿐이다(Six O'clock News).
*래리 노먼은 분개한다. "위대한" 나라 미국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말로는 너무나 잘하는 교회에게 편지를 보낸다(Letter to the Church).
*서로의 발을 씻기기 보다는 서로 더 커지려고만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가 서로 형제라면 왜 서로 사랑하지 않습니까? 왜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까?'(If God is My Father)
*그는 돈 때문에 영혼문제를 타협하지 말라고 노래한다(Camel through a Needle's Eye).
*데이빗 보위David Bowie, 롤링스톤즈Rolling Stones, 비틀즈 Beatles, 지미 헨드릭스Jimmy Hendricks,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등 구체적인 우상을 노래에 등장시키고 누가 참 주인인지를 보여준다(Reader's Digest / Elvis Has Left the Building).
래리 노먼이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투영하면서 진리를 전하려는 노력을 하자 여기 저기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 선구자는 언제나 질시와 배척을 받는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마치 총에 맞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수근수근대면서 내 이름을 더럽힙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예수님을 얘기합니다
나는 얻어맞기도 하고 무수히 발로 채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것처럼 또다시 예수님을 전파합니다
나는 그동안 수모를 무수히 겪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한 말, 내가 부른 노래,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습니다
눈을 감아버리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내가 죄가 많다고 합니다
명성이나 얻으려고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는 다시 예수님을 노래합니다 다시 예수님을 전파합니다
(Shot Down)"
*그는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외딴 섬에 혼자 있는 외로운 소년이었다(Lonely Boy).
*그러나 그 외로운 소년은 지금까지도 우리 모두 하늘에서 함께 보기를 바란다면서(I Hope I'll See You in Heaven)
*우리 모두 예비하자고 손을 잡아이끈다(I Wish We'd All Been Ready).
현실을 직시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노래하려했던 래리 노먼이 갖가지 스타일의 음악을 쓰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 즉 음악적인 스타일과 옷차림과 태도를 보고 '컨템퍼러리'라는 말을 붙였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내용이 컨템퍼러리했기 때문에 겉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외로웠지만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아마도 그의 노래 중 가장 짧은 가사를 가진 노래처럼.
"Looking for the footprints of the Man who wears the sandals
Looking for the footprints of the Man who wears the sandals
(Looking for the Footprint)"
# 괄호 안의 영문은 모두 래리 노먼의 노래제목입니다 #
이 혼동의 시기에 내가 바로 서 있지 못함은...
CCM에 대한 편견

CCM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한국교회의 정서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몇가지로 정리하면 이렇다. 먼저 「CCM은 찬양이 아니다, 가요이다」라는 점이다.
그러나 CCM은 이미 가요와 찬양이라는 형태적 편견을 극복했다.
이 세상의 모든 음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운행 질서를 거부하는 악한 메시지의 음악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고백에 CCM은 기초한다.
또한 누차 강조해왔듯이 대중이 익숙하게 접해왔던 음악 스타일에 복음을 담는 작업이 바로 CCM이다.
CCM이 가요에 가깝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CCM을 통한 복음화의 단초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선행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 하나는 CCM을 교회에서 돈벌려는 하나의 상업 수단으로 이해하는 시각이다.
IMF체제가 들어서면서 우리 CCM 음악시장은 제일 큰 타격을 입었다. 경제위기 속에 문화 소비가 크게 줄고, 이제 막 대중화로 영글기 시작한 CCM시장은 채 무르익기도 전에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숱한 부도의 위기 속에서 현재 CCM 기획사가 문을 닫거나, 또는 가수가 사역을 중단했다는 소식은 없다.
이는 CCM 가수와 사역자들이 이미 상업적 이윤의 여부에 대해 초연해 있다는 증거이다. 또 CCM 가수들의 외모를 놓고 '은혜가 안된다'는 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선교사 비유를 들었지만, 아프리카 선교사들이 목사 표를 내기 위해 경건한 양복 차림으로 원주민들 앞에 설 수 있는가. 음악이나 외양, 스타일 보다는 그들의 중심을 읽을 수 있는 배려 속에 그들의 사역에 대한 이해를 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마지막으로 CCM 음악에 담긴 가사의 문제들이다.
최근 경향도 그렇지만,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수직적인 가사가 크게 적다는 이야기이다.
또 "아멘", "하나님"과 같은 신앙 용어는 거의 들어가 있지 않는다, 무슨 메시지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필자는 그것을 표현의 다양성으로 이해하고 싶다.
찬양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영화롭게 표현하는 방법에는 직설적인 것 말고도 잠재적인 것도 있다. 표현의 다양성 만큼 하나님이 찬양 받으셔야 할 지경 역시 넓어야 한다는 반증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방법과 지경은 넓어야 한다.
태초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염색체가 동일한 것이 없듯, 각자의 신앙고백과 은혜는 다르다.
다양한 은혜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다양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CCM은 이 정신에 굳건히 기초해있다.
CCM은 다양성의 세대를 사는 이들에게 유일한 진리인 복음을 뿌리 내리는 아주 정교한 사역이다.
이는 교회의 적극적인 후원과 협력, 기도가 필요하다.
물론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역이기 때문에 헛점도 보이고, 또 허물도 많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심중에 자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 열정은 세대와 감각, 그리고 신앙배경이 다른 모든 거리를 뛰어넘는 이해의 고리가 되리라 믿는다.

 

CCM에 대한 편견 7

1) 〃이게 무슨 찬양입니까? CCM은 가요에 가깝습니다.〃
가요는 다 나쁜 것일까요?
우선 이것부터 짚어봅시다. 가요 중에도 좋은 것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하고, 또 이 사회에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그런 노래들도 많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크리스천이 쓴 노래들도 상당합니다.
그것이 결국 나중에 CCM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고요...결국 문제는 말초적이고, 상업적인 그런 노래들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부정하는 그런 노래들도 있고요, 그런 노래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지 무턱대고 모든 가요는 다 나쁘다 이런 식으로 단정하는 사람은 사회 생활하는데 불편이 많습니다.
사실 모든 노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음악의 뿌리도 그랬고요. 사실 이러한 편견의 이면에는 세상을 선과 악으로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이원론'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원론'은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이미 기독교 교리가 생기던 때에 이단으로 정죄받은 것입니다. 복잡한 이야기는 각설하고요, 가요에 대해 필요이상의 거부감이나, 또는 들었다고, 불렀다고, 즐겼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좋은 가요, 좋은 대중음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흘렀는데요, '전도'의 방법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 봅시다.
전도는 종합 예술입니다.
피전도 대상의 모든 것(취향, 사고의 틀, 소망하는 바 등등)을 섭렵해야 예수를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전도할때, 무겁고 장엄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까? 적어도 어린이를 가르치려면 '유유상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네들의 목소리, 의식수준, 표현양식을 본따서 가르치고, 또 어울려야 합니다.
그냥 교리책 들고 가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기만 하면 다 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오늘 사는 이들-특히 문화대중의 소통 양식과 접근 방식에 맞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전제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가요 즉 세상 문화는 다 나쁘다'라는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CCM은 가요와 같은 것입니다. 가요 같은 CCM때문에 예수를 안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교회를 알게 된 사례를 저는 여러번 봤습니다.
또한 잘못된 대중 문화에 빠져있던 친구들이 다시 교회 공동체 안으로 회복하게 되는 역사를 여러분 체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벽, 즉 율법과 범죄함을 허무셨습니다.
결국 CCM의 역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처럼 본의 아니게 가로막힌 교회와 세상의 벽을 허무는 그런 사명을 감당하리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2) 〃CCM은 찬양을 이용해 돈 별려고 하는거 아닙니까?〃
CCM은 한마디로 장사가 안되는 종목입니다.
시장층이 얇은 것도 그렇고요, feed back층도 여타 대중문화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열악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안에 자리한 경직된 '거룩 거룩 거룩' 문화가 CCM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풍경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 가수가 앨범을 내려면 적어도 기획사나 아티스트 자신 모두 천여만원의 빚을 지게 되는 것은 보편적인 일입니다.
특히 프로그레시브한 장르들-ROCK, DANCE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장사가 안되는' CCM계에서 계속 이 일을 하려고 할까요. 제가 만나본 바, 이들 CCM 가수들은 이러한 것을 '사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모여서 노래하고 힘들여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CCM의 '탈장삿속'은 미국의 경우, 더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Kieth Green이라는 찬양 가수의 경우-사역지로 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숨을 거둔 사람입니다.- '자유 판매제'라는 것을 도입했습니다.
자기가 이 앨범의 가치를 평가하는대로 자유롭게 지불하고 사갈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을 못내겠다 싶으면 그냥 가져가도 되는 그런 제도입니다.
그런데 훗날 Kieth Green의 앨범은 판매순익에 있어서 제 값 주고 사고 판 가격과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상업적인 수완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 Kieth Green의 건강한 사역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를 바라보고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실족하고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CCM은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IMF체제가 들어서면서 각 기획사와 아티스트들은 수익의 평균 50%가량 줄어들었습니다.
'문화'는 '거품빼기'의 0순위로 보는 것이 사회 전반의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역을 관두거나 다른 일로 전향한 가수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어차피 이 일을 '돈' 바라보며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상업성에 대한 우려'의 잣대를 가난하고 배고픈 CCM사역에 들이댈 것이 아니라 문화적 마녀사냥에 힘쓰는 일부 세력들을 향해 던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기독교계 안에서 제일 장사가 되는 것은 '누구 노래는 New Age더라...'하는 식의 '카더라' 옐로우 저널리즘입니다.
90년대 초반부터 기독교계에 몰아닥친 대중문화를 향한 맹목적인 혐오감과 반감 주입으로 돈 챙긴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은 아니지만-결국 대중문화에서 소재가 바닥나자 '복음성가계에도 New Age가 있더라'라는 식으로 문화 혐오주의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강연이나 잡지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CCM과 상업성...현재로서는 적어도 이 둘은 연관짓기 힘든 것들입니다.
앞으로도 가능성이 있을지도 불투명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 말고는 돈과 소망도 버린 사람들...그 사람들에게 상업성의 올무를 던져서야 되겠냐는 생각입니다.
3) 〃CCM가수들을 보면 은혜가 안됩니다. 옷차림이나 하고 다닌게 그게 뭡니까? 경망스럽게...〃
CCM 가수들이 지나치게 외양에만 관심을 쓴다...이런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에는 그들의 외모만 보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고백하고, 노래하는 대상까지 분명하게 파악하고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것 처럼 쉽고 간편한 것이 없습니다. 솔직히 사람의 원초적인 판단 기준도 외모입니다.
그러나 총체적인 문화 사역인 CCM을 가수들 개개인의 외모만 보고 판단을 한다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ROCK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이 목사님같은 정장차림으로, 드럼을 친다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특히 ROCK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소력을 줄 수 있을까요. 같은 논리입니다.
CCM 가수들이 외양세에 신경을 쓰는 것, 또 나름대로 가꾸는 이유를 가수 개인의 감각적인 매력을 키우려는 것으로만 봐서는 안됩니다.
모든 찬양 사역자들이 하나같이 똑같이 정장차림에 똑같은 말씨에 똑같은 노래 스타일로만 한다면 이 땅에 다양한 문화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문화섭리를 아주 간편화, 단순화 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할례받고, 누가봐도 분명한 유대인이었던 사도 바울 선생은, 어떻게하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심을 수 있을까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문화양식을 맞춰나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CCM 사역자들의 외양과 스타일은 바로 이러한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경건의 모양새는 외양이 아닌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겉만 보지않고, 중심까지 보는 것. 이것은 말 처럼 쉽지 않습니다.
4) 〃CCM은 따라부르기 힘듭니다. 교회에서 쓰지 못할 노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 복음송 문화는 교회에서 얼마나 활용가치가 있느냐에 따라 분별됩니다.
제가 교회 찬양집을 지난해 편집할 때 <보인다 보여 들린다 들려> 악보를 실었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 불려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찬양집 한 권으로 봐서는 종이 낭비를 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그 노래가 '필요없는 찬양'일까요. 교회 내에 찬양 예배 인도자들은 새 찬양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찬양을 알리고 보급하는 일을 '사명'처럼 압니다.
그래서 아무리 CCM 가수들이 콘서트를 자주 열고, 교회 집회에 다녀도, 개 교회 찬양 인도자를 통하는 것 만치는 못합니다.
그러나 찬양 예배 인도자들 중에는 어렵고 복잡한 노래를 가르켜 '이게 무슨 찬양이야?'하며 단정 비슷하게 비판합니다.
사실 교회 만큼 노래 문화가 발달되어 있는 곳도 없습니다.
모이면 꼭 서너곡 씩의 노래(?)를 부르게 되니까요...대중 음악 가수 중에 어렸을때 교회 한 두번 안나가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에는 회중 찬송의 역할이 크지요...엇박자도 많지않고, 멜로디 라인도 단순한 음악들...그것을 통해 찬양 문화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나오는 CCM들은 참 따라부르기 힘듭니다. 거기에 ROCK이 나오고 RAP까지 등장하니 골치가 아플 지경입니다.
찬양 집회 현장에서 쓰이는 노래는 점점 줄어가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문에 CCM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은 경솔한 것입니다.
'효용성'의 가치만으로 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큰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문화적 경쟁력 차원에서 '점점 어려워지는 CCM'을 이해하는 포용력을 주문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요즘 '난해해진 CCM'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필승>도 따라부르는 요즘 세대들의 높아진 감각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5) 〃CCM 가수들은 가요하려다 안되니까 CCM하는거 아닙니까?〃
대중음악을 하다가 복음성가계로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윤향기 목사, 윤형주 장로, 이종용 목사...또 요즘에는 대중음악 가수들이 CCM앨범을 내거나, 또 참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조한, 태사자, 조관우, 손지창, 유리상자, 신형원 등등 입니다.
이들이 복음성가나 CCM을 하는 이유는 이 쪽에서도 돈을 벌어보려는 심산이나, 또는 가요가 안되니 이거라도 해야겠다는 계산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인기가 있고, 없고, 젊고, 늙고 간에 이들은 CCM을 부르고 싶어했고, 대중음악계의 치밀한 상업성와 인기의 이해타산 논리를 무릅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용기'라고 보고 싶습니다. CCM을 하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교회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통해 배출된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이들은 자기 삶의 달란트와 비전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역에 몸담기로 체계적으로 헌신하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음악'이 그들의 목적이었다면 CCM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음악이 목적이되고 CCM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역이 목적이 되고, 음악이 수단이 된다면 그것처럼 아름다운 헌신의 귀감이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 CCM 가수중에는 또 음악적 기량을 살려 대중음악계로 진출하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CCM에서 인정받았으니 이제는 가요계로 진출해보자는 심리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합니다.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원대한 꿈...
바로 그것이 그들 삶의 중대한 목적인 것입니다.
6) 〃CCM에는 '하나님', '예수님'같은 신앙용어가 없습니다. 이게 찬양일 수 있습니까?〃
우리의 정서상 찬양은 '수직적'인 것으로 인식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하나님을향한 우리의 고백이 '찬양'의 온전한 틀로 인식되어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평적인 노래'...
성도 사이에 권면과 교제의 이야기를 가사화 한 것에 대한 것은 '찬송'보다는 '찬양(복음성가)'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편견입니다. 찬송가 중에도 '수평'적인 노래도 많습니다.
<성도여 다 함께>,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등 가사의 대상이 사람에게 향해있는 노래가 곳곳에서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 '예수님', '할렐루야', '아멘'과 같은 신앙용어가 배제되어 있는 노래에 대한지적인줄 압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용어가 들어가 있지 않는 노래는 찬양이 아니다라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런 논리라면 찬송가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찬송가에서 빼야 할 노래입니다. 그야말로무지에서 오는 편견입니다.
찬양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영화롭게 표현하는 방법에는 직설적인 것 말고도 잠재적인 것도 있습니다.
표현의 다양성 만큼 하나님이 찬양받으셔야할 지경 역시 넓어야 합니다.
아마 똑같은 가사의 노래에 곡조는 성악이나 고전 클래식 취향이라면 이런 문제제기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입니다.
7) 〃CCM과 찬양은 구분해야 합니다. CCM은 또, 예배에 쓰일 수 없습니다.〃
CCM은 기독교적인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찬양'과는 다르며, 구분지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배에 쓰일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면서 '찬송가'만이 예배에 쓰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찬송가'의 존재는 특별합니다.
예배에 꼭 필요한 경전-성경과 같은 위상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찬송가'를 감히 '성경'과 같은 반열에 놓는다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이 담긴 책입니다. 그러나 '찬송가'는 찬송가 공회 회원들이 모여서 선곡해서 넣은 곡입니다. 인류 역사의 절대 진리와, 일개 노래책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찬송가에 담긴 곡이 영감이 있다는 논리도 편견입니다.
찬송가 중에는 1800년대 미국 기독교 부흥 역사때 부를 '찬송곡'이 없어서 당대 유행가에 가사만 기독교적으로 바꿔 만든 노래가 상당합니다.
특히 고난주간에 부르는 <오 거룩하신 주님> 멜로디의 경우는 독일의 선술집에서나 부르던 사랑노래였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찬송가를 우습게 보자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가치기준은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노래에 담겨진 가사와 복음을 담은 진리이지, 스타일이나 음악적인 감각은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CCM은 그런 의미에서 정신만 복음에 튼튼히기초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예배에 쓰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수평적, 수직적이건 말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의 지경을 넓히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CCM은 대중음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못 쓴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찬송가도 전형적인 대중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대중이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것이 '대중음악'이라면 찬송가가 더 실질적인 대중음악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건 찬송가에 있으니까 찬양받으셔야 할 것이고, 이것은 경망스러운 CCM이니까 예배에 쓰이면 안돼...하는 식으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
2천년전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무슨 차별이 있는지 곰곰히 돌아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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