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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아에서 밀레노(1952.2019.2.3)
행 20:13-16
할렐루야
동요가 생각납니다.
1.까치까치 설날은 어젖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2.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받기 좋아하셔요
가사는 이렇답니다. 아! 그리고 왜 까치로 불렸나면 옛날에는 까치를 길조로 여겼고 까치가 울면 좋은일이 일어난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까치로 불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까치가 울어대면 좋은 일이 있는가보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여간 내일, 모레 화요일이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인 설날입니다. 이 명절에는 무엇보다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서 그동안 헤어져서 살던 부모님들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경기가 예년과 같지를 않아서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고 또 보너스도 작아지고 개중에는 월급도 제때에 받지 못하는 그런 회사도 있어서 전과 같이 선물보따리가 크진 않아도 그래도 고향을 찾아가는 마음은 설레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설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평소보다 3배 이상의 긴 시간을 길에서 보내면서도 고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구정연휴가 시작이 되었는데도 주일 성수를 위하여 참석하신 성도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헤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의 4차례에 걸친 선교 여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차, 2차, 3차 선교여행, 그리고 마지막 로마 선교여행입니다. 로마여행은 결과적으로 선교여행이었지만, 바울이 복음을 전한 죄 아닌 죄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간 사건입니다. 본문은 바로 3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이방인 교회들이 드린 구제헌금을 갖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 당시 모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흉년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갈수록 들려오는 소문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이 오기를 벼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알았어도 정작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구세주 되심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니 눈에 가시 같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기만 하면 즉시 체포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런 위험 앞에 바울도 사람이었기에 마음이 착잡했을 겁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바울이 취한 한 가지 행동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울의 생애 가운데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바울은 10년 이상의 세차례의 전도여행을 통해 당시 로마제국의 관할에 있던 지중해, 에게해 연안지역 즉 지금의 터키지역인 소아시아, 지금의 동부 유럽에 속한 마케도니아, 그리스가 속한 아가야 지역에 굵직한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고린도교회 등등. 전도하면서 자기의 땀과 수고가 베어 있는 여러 교회들을 살피고 돌보는 일도 버거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의 현재 위치에서 천킬로 이상 떨어진 예루살렘을 향하여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자기의 사도 됨을 계속 의심하면서 이방 전도 길에 수 많은 방해와 환난을 안겨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본거지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인 예루살렘교회를 향하여 이방 교회들이 모금한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는 것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줄려고 합니다. 함께 하기에는 몹시 불편한 사람들을 향하여 바쁜 것, 먼 길 제쳐놓고 서둘러 찾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예루살렘은 차라리 담을 쌓고 싶은 곳입니다. 자신의 땀과 수고로 세워진 이방 교회의 아성을 더욱 높이 쌓아가는 것이 편하고 쉬운 길이었을텐데, 바울의 마음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진정 무엇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서두르는가? 1세기 바울의 이런 서두르는 발걸음이 없었다면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문명이 될 수 있었을까? 바울의 마음은 예루살렘교회와 이방교회가 나누이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그 연합의 힘으로 주님의 복음이 세계 만방에 전해지는 일에 방해가 없고 순탄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는 말씀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불타는 소망을 이루려는 간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와 담을 쌓아야 마땅하였지만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하나됨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나는 지금 담을 쌓고 있는가? 다리를 놓고 있는가? 불편함에도 이방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에 다리를 놓은 바울과 같이, 하나됨이나 복음 전도 같은 더 선한 목적을 향해 마음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쌓아온 것을 지키고 더 높이 쌓아갈려고 담을 쌓는 일에 급하게 움직이는가? 하나님은 여러분이 더 큰 그림을 그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분열의 시대에서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미련한 자는 다리를 허뭅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발 빠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제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도중 밀레도에 도착하여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다가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13-16절은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가는 여정을 소개했습니다. 유두고를 살리고 그 밤에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바울은 또다시 드로아를 떠났습니다. 사명 자에게는 가야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가고 또 갑니다. 어디로 갑니까? 생명의 복음을 싣고 영혼을 살리려 가고 있습니다.
1.혼자 걸어서 가고자 하는 바울
13절‘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우리는’누가를 포함한 사도바울의 제자들입니다. 두 방향의 길이 나옵니다. 그 길은 육로와 수로였습니다. 누가를 비롯한 모든 수행원들은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러나 바울은 혼자 도보로 가기로 하여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32km를 걸어갑니다. 오직 복음의 열정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걸은 32키로의 길’에서 새롭게 영적으로 무장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홀로 길을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두려운게 인지상정입니다. 바울도 어쩌면 죽음의 위협 앞에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눈앞의 현실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두려움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십자가를 보면 혼란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확신이 넘치게 됩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조차 이겨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홀로 걸으면서 주님 앞에 자신의 구원 문제를 점검해 보았을 겁니다. 자신의 고백처럼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기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십자가 은혜를 깊이 묵상했을 겁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도 기억했을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면 확신이 생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절‘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예수 믿는 성도들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육신이 죽어도 하늘나라에 들어가 주님이 예비해 주신 새 집에서 영원히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번에 서울을 가면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나가 보십시오. 대합실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 총총 걸음으로 갑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떠납니다. 모여 있을 때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았지만 각각 행선지가 다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회 각처에서 모여 살아가니까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행선지가 다릅니다. 영원한 천국입니다. 여러분의 행선지는 과연 어디입니까? 천국이 맞습니까? 이것을 확신한다면 그 어떤 위험도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다시 한번 이런 확신으로 충만해졌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당당히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또 한길은 함께 가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혼자 가는 길입니다. 수행원들이라 바울을 모시고 가고자 했으나 바울이 이렇게 하자고 정해 준 것입니다. 지난 밤 철야집회로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심히 피곤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오순절 안에 도착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해상과 육상 두 길은 바로 오순절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오순절로 가려면 먼저 수행원들의 모습처럼 해야 합니다. 저는 수행원들의 모습에서 기도의 모형을 봅니다. 그들의 간 밤에 자지 못해 몸은 피곤했지만 피곤을 이기고 예루살렘을 향한 배를 탔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노동보다 힘듭니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이기고 이기며 기도해야 합니다.
또 그들은 순풍에 돛을 달고 가는데 혼자 육로로 가겠다는 바울을 모시고 가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였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구하고 사모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잘 모실까 더 영화롭게 할까 더 기쁘게 해드릴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할까 이 땅의 주인은 주님이신데 하나님을 주로 시인하지 않는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안타깝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 한 배를 탔다는 것은 공동운명체입니다.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뜻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목숨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분산 되어 다른 곳에 출장 가 있으면 안 됩니다. 큰 역사를 위해서는 여럿이 합심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기다리던 초대교회는 기도에 전혀 힘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속히 앞서 가서 앗소에서 바울을 기다렸던 것처럼 성령의 계절이 오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열심히 사모하며 마음을 다하고 합심하여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 오순절로 가는 길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궁금한 점은 바울이 오순절을 향해 가면서 쉽고 함께 가는 길을 물리치고 왜 홀로 육로를 택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석가들의 표현을 보면 그때는 4월의 아름다운 화창한 봄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통해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노중에 교인들을 심방하기 위하여, 밤에 배 타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홀로 여행하고 싶어서, 혹은 유대인의 음모 때문에 등의 추측이 있습니다.
그러나 왜 혼자 그 길을 택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점을 풀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석가 롱넥커(Longeneker)는 육로로 걷는 중에 하나님과 은밀한 개인적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지지를 받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이유는 성경이 침묵하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택한 그 길은 하나님과 묵상하기 좋은 환경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말을 걸거나 떠드는 사람도 없고 바다의 풍랑의 위험도 없습니다. 바울은 혼자 걸어가며 누구에게 구애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했을 것입니다. 지난 밤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지 않으셨다면 어쩔 뻔했을까?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걷는 걸음걸음마다 감사요 기쁨이요 찬송이었을 것입니다.
홀로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합니다. 아무리 길이 험해도, 외로워도 여전히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결국 바울은 새 힘을 얻고 용기백배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담대한 모습을 사도행전 27장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갔고, 예상대로 거기서 체포됩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져 로마로 압송됩니다. 그런데 그가 탄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납니다. 배가 난파지경입니다. 그때 선장도, 선원들도, 승객들도, 로마 군인들도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벌벌 떱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나선 바울의 모습은 당당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는 바울이기에 광풍의 와중에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닥쳐오는 위기 앞에 벌벌 떱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 당당해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얻은 축복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사41:10 절‘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 약속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약속을 기억합시다. 마28:20절‘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정말 주님은 이 약속대로 늘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 그럴 겁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송(오 신실하신 주) 가사를 음미해 봅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 바울의 상황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말씀의 묵상이 그러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읽고 또 읽고 듣고 듣고 또 들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내가 깨달는 것이 참 많구나.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구나 비천한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다니.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노래하며 회개하고 믿고 순종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 없으면 오순절의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릅니다. 회개도 모릅니다. 사명도 모릅니다. 아직 받지 못한 것처럼 아니면 혼자 받은 것처럼 착각합니다. 낙심합니다. 하나님을 구함보다 능력과 축복일변도로 나갑니다. 영 분별하지 못합니다. 겸손도 모릅니다. 자기 위치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할수록 악령의 역사 속에 휘말립니다. 성령 운동하다가 하나님의 영광 가리고 교회를 시험 들게 하고 귀신의 말을 듣고 이단까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복음을 압니다. 보혈을 압니다. 회개를 압니다. 은혜를 압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사명을 압니다. 영을 분별합니다. 감사할 내용을 압니다.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를 압니다. 겸손합니다. 순종합니다. 충성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할 줄 알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릴 줄 압니다. 그래서 보는 말씀마다 기쁨이요 찬송이요 눈물입니다. 이렇게 말씀에서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면 심령이 확 열립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도 기적을 베푸시고, 능력을 행하시고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때마다 대중을 피하여 홀로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밤이 맞도록 혼자 산에서 기도를 하시고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찾아 가셔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대중 속에 있었지만 언제나 대중과 함께 있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들을 끝까지 가졌습니다. 신앙인은 이런 고독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홀로 하나님과 대결하는 시간이 절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이 1, 2,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여러 지역을 전도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열정이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주님을 잃어버리기 쉽다는데 있습니다.
2.중단없이 전진하여 밀레노에 도착한 바울
14-15절‘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앗소에서 일행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데 여러 지경을 거쳐서 가게 됩니다. 앗소에서 50Km 떨어진 미둘레네 성을 거치고 또 그 다음 날에는 미들레네에서 80km떨어진 기오 성을 거치고 또 그 다음날에는 사모 섬에 들리고 그 다음 날에는 에베소 남쪽 45Km 지점에 있는 밀레도라는 항구 도시로 돌아옵니다.
기오 섬은 오늘날의 ‘이즈미르’ 섬 부근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시인 호머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사모 섬은 기오에서 다시 8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일찍부터 중요한 해군 기지였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유명한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출생지이며, 유명한 우화작자 이솝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 45km 지점에 있는 항구 도시로 철인으로 불리는 탈레스의 고향이며, 헬라 철학과 예술의 융성지이기도 했습니다. 이곳 밀레도는 바울이 3년 동안 목회했던 에베소와는 매우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오순절 전에 도착하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진행한 것을 봅니다. 바울이 들렀던 곳은 당시 로마 귀족들이 찾는 유명한 휴양지(미둘레네)도 있었고, 로마군이 매일 사열하는 군사도시(사모)도 있었고, 상업이 발달하여 물품이 풍부한 무역항(밀레도)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희귀한 볼거리였습니다. 군사도시만 해도 그렇습니다. 역사가 요세퍼스도 로마군대의 사열식에 대해서 희귀한 볼거리로 소개했습니다. 지금 이런 부대 한 부대만 있어도 큰 관광자원이 될 것입니다. 바빠도 몸도 풀 겸 잠시라도 머물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순절 안에 도착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전진에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오순절의 역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전진하라는 교훈입니다. 부흥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량이 차야 합니다. 기도의 분량이 차야 합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120문도들이 열흘간 전무하며 하나님 경외했고, 1907년의 평양 대 부흥도 계속하여 기도한 결과였고, 역사 이래 모든 부흥도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오늘 성령 충만해도 내일 또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이런 계속적이고 연쇄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운동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밀레노까지 5일간의 걸친 여행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눈뜨면 떠나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쉬지 않고 여행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러한 생활을 한 두 해만 한 것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본 절에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바울의 열정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바울은 한마디로 주님께 미쳐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해야 합니다. 앗소에서 바울이 배 타고 앞서간 일행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대단히 반가운 장면입니다. 하루 동안은 외로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뭔가 텅 빈 것 같고 부족했습니다. 바울은 바울대로 혼자였고 수행원들은 수행원들대로 바울이 없으니 허전했습니다. 그러나 앗소에서 만나게 되자 기쁨이 새로웠습니다.
바로 이것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 성도의 교통을 보여줍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혼자서 기도하고 말씀 보면 되는 줄 알지만 뭔가 안 되고 부족하고 만족이 없고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교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오순절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이지만 성도의 교통도 필요합니다. 앞서 간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들을 돌보고 뒤에 오는 사람은 앞선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남의 믿음을 돕는 것은 허비가 아닙니다. 영적 도움을 받는 것도 은혜이고 도움을 주는 것도 은혜입니다. 주면 줄수록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교통은 예배를 통해서 가장 잘 이루어집니다. 모여 예배만 드려도 심령에 영적 교통이 있습니다. 모이기만 했는데 힘이 생깁니다. 생명의 흐름이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은혜의 모임인데 가기 싫었습니다. 교만한 말 같지만 들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으려고 했더니 주님이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역시 들을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 심령이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성도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상당부분의 문제는 신앙과 삶이 불일치 하는데서 많이 생깁니다. 주일날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 같고, 천사 같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 같아 보이는데, 교회를 떠나 밖으로만 나가면 신앙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안 믿는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하고 다를 바 없는 방법으로 사는 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 직장에서 부장하고 과장하고 싸움이 붙었답니다. 둘이 서로 과격하게 싸우다가 부장은 턱 뼈가 부러지고 과장은 코 뼈가 부러졌습니다. 서로 고발을 해서 경찰서에 끌려와 조사를 받다 보니까 둘 다 잘못을 했으니 합의를 하라고 하더랍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아닙니다. 저놈을 집어넣어야 합니다’,‘저놈을 구속해야 합니다’하고 마구 싸워댔습니다. 서로 그러다가 둘 다 유치장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한참 후에, 부장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성경책을 들고 급히 들어오시더니 ‘오! 장로님 어쩌다가 턱뼈가 부러졌습니까’그러면서 기도를 하고 가시더랍니다. 조금 있다가 과장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오시더니 ‘집사님, 어쩌다가 코 뼈가 부러졌습니까’그리고는 기도를 하고 가시더랍니다.
목사님들이 다녀간 후에 두 사람이 말합니다. 집사란 분 왈‘아니, 장로님! 10년 동안 한 직장에 있었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신앙을 감쪽같이 속이고, 술 마실 때면 그렇게 앞장서서 잘 마셨습니까’그러니까 부장 장로가 하는 말이 ‘자네가 김 집사라고? 자네는 집사라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나쁜 짓이라면 제일 먼저 앞서서 했나’라고 황당해 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이런 분은 혹 안 계시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게 살 수가 있습니까? 신앙에는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는 내적인 변화요, 또 하나는 외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행 9장에 보면,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햇빛보다도 더 밝은 빛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적 변화가 일어나서 서로가 영적 교제가 아름답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고 싶어 시험도 이겨내야 합니다.
16절‘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바울이 왜 에베소를 들르지 않았을까요? 행20:3에도 나와 있듯이 에베소에는 바울을 죽이려는 조직적인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를 탈 것을 알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회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에베소를 들른다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또 다시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을 태운 배는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에베소 만의 입구를 가로질러 기오에서 사모로 행하는 직선 항로를 택한 것입니다.
무엇을 교훈해 줍니까? 오순절로 가는 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령의 사람들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온갖 방해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반드시 마귀의 공작이 있습니다. 영의 일을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에 들르면 큰 일납니다. 사건에 휘말려 들게 되면 사역을 그르칩니다. 뛰어내려 싸우고 싶어도 직선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배를 대라고 손짓해도 귀를 막고 앞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 성령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질고와 환란 등 험한 시련은 물론 밖으로도 무수한 오해와 모함을 당했습니다. 방법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마음이 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는 음모 때문에 길을 돌아오다 보니까 유월절을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의 3대 절기인 오순절만은 예루살렘에서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의 조상들이 지켰던 절기 예배를 그렇게 소중하게 지키기를 원한 것입니다. 또 그만큼 동족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둔 이유는 3대 절기의 하나인 오순절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함이요. 각 지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요. 3차 전도 여행을 속히 끝마치고 로마전도에 가려는 마음이 급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로 77절, 맥추절이라고 합니다.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오순절은 성령강림으로 기독교 교회가 탄생한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오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완전한 믿음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부흥이 옵니다. 성령이 임해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예배와 사랑으로 교통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에 전무하고 앞 만 바라보고 어떤 시험도 다 이겨 이 시대의 부흥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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