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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철 멧돼지. 먹이를 찾다가 사람을 발견한 멧돼지는 잠시 망설이지만 곧 되돌아 천천히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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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통령이 되면 첫눈이 오는 날 공수부대를 동원해 멧돼지를 잡게 할 것…포획량의 10%는 부대에 넘기고 나머지는 도축해 양로원에 주거나 팔면 된다.”
범여권 대선후보가 한 말이다. 그 사람의 튀는 발언이야 새삼 논쟁거리도 못된다. 허나 이른바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그가 가진 자연관과 농민정책이 유신시대의 방법과 유사하니 참으로 어리둥절하다. 하긴 환경부 수장이 국정감사를 앞두고 또다른 대선 예비후보 캠프로 달아나는 판에 그 정도 실언은 애교로 봐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멧돼지가 어쨌길래 군인들까지 동원해 멧돼지를 소탕하겠다고 한 것일까. 사실 산간 농민들에게 멧돼지는 큰 골칫거리다. 고라니, 청설모, 까치나 까마귀도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만 멧돼지의 피해 규모가 가장 크다. 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서울 근교까지 출몰해 사람을 공격한 경우도 있다(물론 사람은 가만히 있었는데 그냥 멧돼지가 사람을 공격했단다). 그러나 이는 특별한 사례에 해당한다.
아무튼 멧돼지가 지금처럼 자주 뉴스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자동차가 없으면 교통사고도 없고, 인수봉이 없으면 암벽등반 추락사고도 없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구 증가와 멧돼지 증가가 맞물려 빚어진 현상이란 의미다.
멧돼지는 현재 살아남은 우리나라 야생동물 중 가장 덩치가 크다. 그런 녀석이 무리지어 내려와 농작물을 뒤엎으니 해당 농민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자연보호고 뭐고 그냥 멸종시켜 버렸으면, 하는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동물이 한 지역의 일부 농토에 피해를 준다해서 멸종 운운한다면 모든 야생동물은 멸종시켜야 한다. 사실 인간의 시각으로만 보면 모든 야생동물은 크든 작든 인간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크게는 곡식창고의 시궁쥐에서 작게는 장독대의 참새똥까지 말이다.
이벤트식 포획작업은 농민들 화풀이밖에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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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멧돼지의 잠자리. 멧돼지는 전망이 좋고 배후에 도피처가 있는 능선 상에 잠자리를 만든다. 그런 곳에서는 시야 확보와 냄새 맡기가 쉽기 때문이다. 보통 조릿대나 철쭉을 꺾어 바닥에 깔거나 바닥을 파고 가장자리에 낙엽을 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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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동물에 의한 피해란 것도 시대와 경제 상황, 국민의식 수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지난 7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쥐 잡는 날’까지 정해놓고 시궁쥐는 물론 애꿎은 너구리, 삵, 족제비까지 죽어나가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쥐약 놓는 집이 몇 가구나 되는가.
또 한때 나라의 새(국조·國鳥)라 지칭했던 까치가 지금은 해조(害鳥)로 추락해 제거대상이 되었다. 야생동물을 인간의 편의에 따라 해로운 동물과 이로운 동물로 나누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다. 비록 현재의 해로운 동물이라 해도 미래에 유익한 생물자원으로 인정받을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멧돼지에 의한 농작물의 피해는 우리 산이 건강하다는 신호로 생각하면 안 될까? 물론 피해 농민들에 대한 대책은 당연히 강구되어야 한다. 그에 앞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 야생동물에 의한 농작물 피해를 천재지변과 같은 수준으로 봐야 하고, 대책은 복지개념으로 풀어야 한다. 왜냐 하면 지금과 같은 이벤트식 포획작업으로는 농민들의 화풀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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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흙 목욕터. 멧돼지는 진흙 목욕을 즐기는데 이는 기생충 제거와 낡은 털 제거, 더위 쫓기 등의 기능적인 의미도 있지만, 그 자체를 매우 즐기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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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에서 몇 마리의 돼지를 사살해봐야 그들은 더욱 영리해지고 교묘해진다. 아울러 죽은 멧돼지의 빈 영역은 더욱 건강한 개체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그 결과 농민들은 자구책을 세우는데, 그 방법이 곧 올무나 덫을 설치하는 것이다. 그런 방법은 불법일 뿐 아니라 멧돼지 이외의 동물까지 죽어나가게 한다.
멧돼지는 사슴이나 산양과 같은 발굽동물 중 가장 널리 퍼져 사는 동물이다. 북으로는 시베리아 남부에서 남으로는 스리랑카까지 서식한다. 현재 가축화된 동물 중 그 원종은 대개 멸종되었거나 멸종위기에 처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집돼지의 원종인 멧돼지는 그들의 분포권 국가 내에서 모두 흔한 야생동물이다. 그만큼 적응력이 높을 뿐 아니라 수를 제어하기 힘든 동물이다.
멧돼지에게도 약점은 있다. 멧돼지는 땅에서 먹이를 구한다. 때문에 겨울 동안 땅을 뒤집을 수 없는 영구 동토대와 적설기간이 긴 지역에서는 살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멧돼지의 증가는 그들의 높은 번식력과 가리지 않는 식성,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천적의 부재, 산림 면적의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농촌 주변의 산들은 민둥산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멧돼지가 흔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창경원 동물원을 재건할 때 멧돼지를 구하지 못해 미국인이 개인적으로 기르던 멧돼지를 기증받아 전시할 정도였다.
- 새끼 멧돼지 보면 얼른 나무 위로 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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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개목. 멧돼지는 진흙 목욕 후 목욕터 부근의 나무에 몸을 비벼 기생충을 털거나 가려움을 해소한다. 베개목은 자신의 체취를 묻히는 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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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가 생활환경권 동물이 된 것도 마을 주변의 민둥산이 숲으로 뒤바뀐 이후부터다. 따지고 보면 멧돼지 개체수의 증가는 이상현상이 아니라 당연한 현상이다. 멧돼지에 의한 농작물 피해 역시 경작지가 계속 확대되어 숲을 파먹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나라 산촌의 경우 경작지와 숲 사이의 완충지대가 없다. 숲과 경작지 사이의 전이지대에 해당하는 초지와 덤불지대가 없다 보니 그 피해가 더욱 심한 것이다.
최근 2, 3년 전부터 사람을 공격하는 멧돼지 소식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때문에 산행하는 입장에서는 걱정스런 마음이 들 것이다. 멧돼지가 사람을 다치게 한 사례는 철저히 사람의 편에서 보도된 것으로 무엇이, 어떤 행위가 멧돼지의 공격성을 점화시켰는지에 대한 분석이 없다.
다행인 것은 정상적인 등산로를 따라 산행에 나선 사람이 멧돼지의 공격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등산로에서 멧돼지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설사 등산로를 벗어나 숲속을 헤맨다고 해도 멧돼지를 만나기는 무척 힘들다. 이는 멧돼지가 멀찍이서 먼저 피하기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새끼를 거느린 어미 멧돼지의 경우 사람에게 덤빌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사람의 출몰이 상시적이며 예측 가능한 등산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숲속에서 새끼가 딸린 어미 멧돼지가 사람을 만나면 어미와 새끼 모두 놀라 도망친다. 그러나 도망친 어미는 곧 유턴해 사람 앞에서 씩씩대거나 사람을 들이받고 달아난다.
때로는 새끼들만 놀라 도망친 것 같은데 난데없이 어미가 나타나 사람을 치고 달아날 수도 있다. 어느 경우건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때 사람들은 멍한 상태에서 대상이 뭔지도 모른 채 얼이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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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멧돼지 발자국. 노루나 고라니와 달리 거의 대부분의 발자국에서 며느리발굽(발굽 뒤의 작은 발굽)이 함께 찍힌다. 2)멧돼지의 똥 모양은 다양한 형태를 이룬다. 사진은 도토리를 먹은 뒤 배설한 똥이다. 3)멧돼지가 나무뿌리를 판 흔적. 멧돼지는 강력한 목, 어깨 근육과 쇠처럼 단단한 주둥이로 겨울철 얼어붙은 땅도 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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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사냥개로 몰거나 계속 추적해 목숨을 노리지 않는 한 어미 멧돼지가 사람을 계속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새끼 멧돼지를 보게 되면 즉시 멀리 물러나거나 굵은 나무 위로 피하는 게 상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존재는 말벌이다. 나는 여태껏 멧돼지를 몇 번 보았을 뿐 다행히 공격 대상이 된 적은 없다. 그러나 말벌에게 쏘여 혼난 적은 두 번 있다. 그 중 한 번은 내 발로 응급실을 찾을 정도로 호된 경험이었다. 따지고 보면 두 번 모두 내가 자초한 것으로, 한 번은 벌집을 촬영하다가, 다른 한 번은 동물을 찾아 억새밭을 헤치고 지나가다가 쏘인 것으로, 아마 벌집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
뱀에게 물린 사람의 태반은 땅꾼이거나 뱀을 잡아 장난을 치던 사람이라고 한다. 산행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계속>
/ 글 사진 최현명 조경·동물연구가·<야생동물 흔적도감>(최태영 공저)
- 새끼 멧돼지 보면 얼른 나무 위로 피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