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강해7 (갈3:1-5)
제가 목회를 오랫동안 경험하면서
가끔 자기 본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에 목말라 하시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늘 주일날 설교듣는 것으로 만족을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디서 유명한 성경공부 있다고 하면 그곳을 쫓아다니시기도 하고
그것도 만족이 안되어서 유명한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해보고....
좀 신앙이 자랐으면 좋겠는데, 늘 믿음이 없는 것 같고
어떻게 하면 좀더 믿음을 더 크게 가질 수 없나 해서
늘 영적으로 목말라 하시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자세가 참 좋은데,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면도 있어요.
왜냐하면, 아이가 태어난지 몇 년만에 어른이 되기 힘든 것처럼
우리 신앙도 그렇거든요.
우리 신앙을 보면, 아이가 자라는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요.
아이를 키워보면, 처음에는 모유를 먹다가 어느 시점이 가면 이유식을 먹고....
어느 시점에 가면 밥을 먹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자라는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태어난지 며칠이 안되어서 아기가. 아 나 맨날 엄마 젖만 먹어야 해?
고기국에 김치하고 밥 달라고 하면 그게 정상이겠습니까?
그건 비정상적인거죠.
아무리 젖을 떼고 싶어도 젖을 떼야 할 시기까지 젖을 먹어야 되요.
그리고 이유식을 뗄떼까지 이유식을 먹어야 하고요.
그러다가 나중에 장성하면 밥도 먹고 고기도 먹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성장하는거죠.
여러분도 아이가 커가는걸 주위에서 보셨지만,
그 아이가 커 가는거 눈으로 본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커 가는게 눈에 안보여요.
자신은 더 하죠. 자기 자신은 자신이 커가는걸 더더욱 몰라요.
그런데 어느날 친척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보면 뭐라 그래요.
야야....너 작년 볼 때는 이렇게 안컸는데, 1년새 이렇게 컸나?...그러고 감탄하죠.
근데, 자신은 커 있은거 알아요 몰라요?...모르죠.
어떤 땐 같이 사는 가족도 몰라요.
다른 사람이 내가 성장한걸 이야기하는거 보고 내가 좀 컸나?..이러지
나는 모릅니다. 가족도 몰라요. 안그래요?
우리 신앙이 이래요.
꾸준히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늘 그 생활이 그 생활이지만,
별로 신앙이 발전이 없는거 같아 보이는데
어느날 다른 사람이 보면, 내가 커 있는 줄 알아봐요.
뭐 유별나게 안그래도 꾸준히 먹는거 잘먹으면 일상적이라도, 그래도 성장해요.
우리가 매주 그냥 교회나와서 똑같이 예배드리고 그게 그거예요. 별다른게 없어요.
그래도 그게 나를 성장시켜주는 힘이 있어요.
그런데, 뭐 유별나게 특별한걸 먹어야 금방금방 키가 쑥쑥자라고 어른이 될거 같지만 그게 안그래요.
하루아침에 어른이 될 수가 없어요.
신앙도 그래요. 꾸준하게 우리가 매주 빠지지 않고 예배드리고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이 성장되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 하니까.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이런 착각에 빠진거예요.
처음에 사도바울에게 신앙을 배울때는 그런걸 몰랐는데,
사도바울이 다른곳에 가서 전도를 하는 동안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기독교인들이 들어와서 하는 말이
너네들 믿기만 하면 구원받다고 하는데 천만에 말씀이야,
우리가 지키는 율법을 다 지키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고 구원이 없어....그러는 겁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갈라디아 교인들도 생각해 보니 이거 구원받는게 너무 쉬웠잖아요.
그냥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게 너무 쉽고 한편으로는 밋밋하고 그런겁니다.
아무것도 하는거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니까.....
근데, 가만히 보니까, 유대기독교인들은 할례도 받고, 율례를 지킨다고 지키고 하는거 보니까 저게 믿는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훅 빠지게 된 겁니다.
그래, 내가 뭔가 해야 그래도 구원받는 느낌이 있지,
맹탕 놀면서 입으로 시인한다고 구원 받을바에야 구원 안받을 사람이 어딧냐...싶었던 겁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한 이방인으로서 열등의식도 좀 있었던거 같아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전통과 율법을 잘 지키고 뭔가 경건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 같았거든요.
우리도 유대인의 생활을 보면 아마 그런걸 느낄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전통을 고수하면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많습니다.
아마 우리가 작년 여름에 청년들과 함께 비전트립을 미국에 갔을 때,
유대전통 복장을 하고 다니는 유대인들을 보고 신기해했을 겁니다.
뭔가 묘한 매력이 있었어요.
아직도 그들은 그들만의 전통을 고수하는걸 보면서 존경과 경외심이 느낄 수 있듯이
아마 이 당시 갈라디아 교회도 그런걸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경건해 보이고, 절제된 그들의 삶은, 분명 우리에게는 도전이 되고, 존경심을 갖게 하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수단이 되거나, 조건은 아닌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어떤 신앙의 경건성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 그리고 그분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받았다. 은혜 받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나의 나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잊은 갈라디아 교회인들에게 호되게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짜 신앙을 가르치는 거짓교사를 멀리하고 쫓아버리라고 진노합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떤 특별한 뭔가 자기만족이 채워질 때 성장하는 것 같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활하는 이 일상의 삶에서 꾸준한 믿음의 생활을 해 나갈 때, 나도 모르게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것입니다.
갈급함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영적 갈급함이 필요하지만, 조급함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갈급함과 조급함을 우리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적 갈급함이 자칫 조급함으로 바뀔수 있어요.
조급해지면 실수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조급함이 아니라, 갈급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갈급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용히 기다리는 겁니다.
일상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겁니다.
그러나 조급해지면, 분주해 지기 시작합니다.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고,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어려워요.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복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짓교사들로 인해 율법주의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복음으로 시작했는데 율법주의자로 변하는 갈라디아 교회 교인처럼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율법에서 복음으로 우리를 자유케 해 주셨는데
오히려 복음을 받고도 율법주의자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갈라디아교인들입니다.
바로 갈급한 신앙이, 조급한 신앙으로 바뀌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조급한 신앙이 되면, 자꾸 비진리를 찾게 되고, 복음아닌 율법을 찾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저주는 은혜를 팽개치고, 자기가 뭔가를 이루고자 애쓰게 됩니다.
제가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사실 제 말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어떤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를 베푸신 구원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살아야할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자냐 복음주의자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자유자로 사느냐
아니면, 율법의 종으로 사느냐를 판가름 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자유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8:32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1절 말씀이 바로 그 책망아닙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구도자처럼,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고행을 겪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40일을 금식기도 했네. 신앙을 위해서 직장도 포기하고, 가족도 버리고 기도원에서 100일 기도하는걸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 바로 율법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신앙생활을 위해서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살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삶을 유지하면서 다만, 세상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라...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답게 살아라고 하시지 그 삶을 포기하고 버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변화산 사건 아닙니까?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을 올라가셨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모습을 보이신 겁니다.
얼굴에서는 해같이 광채가 나시고, 옷은 빛이 나고..
목소리가 들리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그럽니까?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셋을 짓고, 하나는 주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자...그러잖습니까?
무슨 얘깁니까?
저 골치아픈 세상에 내려가서 살지 말고, 이 황홀한 곳에서 그냥 살자는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 그러십니까?
그래 니말대로 여기서 살자 하신게 아니라, 내려가자고 하시고
산을 바로 내려오셔버리잖아요.
뭡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외면하고 버리지 말고, 피하지 말라는 거 아닙니까?
세상속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삶의 자리라는 겁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켜나가는게 중요합니다.
모든 세상사람들과 같이 살지만, 아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을 살지만
우리가 그들과는 좀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의 삶이라는 것인데
그게 뭡니까?
믿는자답게 생각하고, 믿는자답게 행동하는거, 믿는자답게 사는걸 말합니다.
이게 믿는자의 삶이고 일상이고, 믿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우리의 믿음은 점점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성자의 삶을 원하시는게 아닙니다.
거룩하게 사는걸 원하십니다.
그 거룩이라는게 무슨 특별한 성자와 같이 사는게 아니고
방금 말씀드린것과 같이 세상과 구별되이 사는걸 말합니다.
세상을 등지라는게 아니라....세상을 버리라고 하는게 아니라
세상속에 살면서 세상사람들과는 다르게, 구별되게....이게 거룩입니다.
어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그런 외형적 구별이 아니라,
삶의 구별입니다. 생각의 구별입니다. 말과 행위의 구별입니다.
이게 거룩함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 얘기를 하는겁니다.
복음의 삶이란, 바로 그런 구별된 삶이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런 복음의 삶, 자유를 주셨는데
지금와서 다시 율법적인 얽매인 삶을 살려고 하느냐....이 어리석은 자들아 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두란노교회는 이런 책망받는 갈라디아교회의 율법적인 신앙이 아니라,
복음의 삶을 살고, 구별된 삶을 사는 그래서 날마다 해마다 우리의 신앙이 더욱 견고하고 든든해서 어떤한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성장하고 성숙한 교회와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