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룡이의 벗 " 릴리회 "
느티나무딸기농원 구현진

그림책 <해룡이>의 마지막 장면이다. 나병에 걸려 사랑하는 소근네와 옥이, 만석이, 천석이를 뒤로 하고 집을 떠난 해룡이가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날, 이렇게 눈발이 날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자그마치 열 번이나 보내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식구들 얼굴 한 번 못 본 채 오로지 아이들 신발을 품에 한 번 안아보고는 다시 차가운 세상 속으로 떠나던 날, 이렇게 눈발이 하염없이 내렸다. 아, 이 마지막 장면 ! 그저 눈물만 쏟아진다. 권정생 선생님은 이 글을 쓰면서 해룡이와 내내 함께 하며 어떤 마음이셨을까, 그림작가 김세현 님은 이 눈발을 찍어내리며 얼마나 가슴이 쓰라리셨을까. 난 <해룡이>를 읽을 때마다 그의 인생의 무게에 눌려서 한동안 먹먹해지곤 한다.
지난 2월, 오래 병상에 누워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죽음’이 먼저 간 그리운 이들을 만나러가는 여행길이 맞다면 아버지는 드디어 20년 전 세상을 떠난 엄마를 만나러 가신 거다. 내 나이 30대 중반 어느 날,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엄마를 잃고, 난 아버지를 모시는 일로 엄마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엄마를 생각하면 이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을 잘 살아낼 용기를 잃을 것만 같아서 마음 한 구석에 고이 간직해두기로 했었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그렇게 한 켠에 구겨서 접어놓았던 엄마생각이 참 많이 난다. 연년생 오빠와 나를 키우느라 힘든 터에 여섯 살 터울 동생까지 돌보던 엄마의 모습은 늘 밥하고 청소하고 가족들 챙기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손집안 며느리였기에 한 달에 한번 꼬박꼬박 제사도 지내야했고, 동네 반장 일까지 맡아 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선 반상회가 자주 열렸는데 그 때마다 엄마는 ‘릴리회’라는 단체의 후원비를 조금씩 걷어 송금하는 일을 꼭 하셨다. 나병환자(한센병 환우)를 돕는 단체인데 그 곳 외국인 회장님과 젊은 시절 인연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엄마는 젊은 시절 수녀가 되고자 명동성당에서 수녀과정을 밟기도 했었기에 남다른 봉사정신을 가진 분이었다. 내 어린 눈에는 어른들이 큰돈도 아니고 천 원, 이천 원, 푼돈을 모으는 모습이 좀 웃겨 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이런 게 정성이라며, 또 이래야 부담없이 길게 할 수 있는 거라며 모인 돈을 소중하게 송금하곤 했다. 그 단체가 어떤 곳인지는 자세히 몰라도 내게 릴리회는 왠지 엄마같이 따뜻하고 정겨운 이름으로 남았다.
엠마 회장님을 직접 만난 건 돌아가신 엄마를 칠곡 선산에 묻던 날이었다. 소식을 들은 엠마 회장님과 릴리회 분들이 엄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와주셨다. 이야기 속에서만 듣던 분들을 만나니 엄마가 살아오신 것 같이 반갑고, 한편으론 더 서러워져서 떠나가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엄마는 나를 ‘릴리회’와 ‘엠마 회장님’과 꼬옥 이어주고 떠나셨다. 그 뒤 이젠 내 이름으로 릴리회 회원이 되었고, 계절마다 발행하는 회보도 받아보고, 좋은 일 있을 때마다 초대해주셔서 서로 소식 전하며 지내고 있다.
그 뒤 2012년 2월 서울에서 엠마 회장님을 다시 만났다. 천주교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게 되셨는데 그 시상식장에 초대를 받았다. 이제 회장직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계신 엠마회장님을 다시 만난 것도 참 기쁜 일이었고, 뒤를 이어 회장직을 맡고 계신 이옥분 회장님과 늘 전화로만 만났던 세실리아 실장님, 라우렌시아 간사님을 만나뵙게 되어 아주 반가운 자리였다. 하지만 2~3시간 진행되는 시상식 겸 강연회에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 앉아있는 시간이 꽤 어색했다. 그런데 마침 옆에 앉은 어르신께서 말을 걸어주셔서 조금씩 편해졌다. 그 분은 본인을 의사라고 소개하시며, 우리가 봉사했다고 칭찬받곤 하는데 “우리는 봉사 이전에 의료인으로서 직업정신을 가지고 한센균을 퇴치하는 일을 한 것이다” 라고 하셨다. 맞다, 엠마회장님이 1961년 4월, 29세 나이에 한국에 온 것도 오스트리아 국립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사로서 방문한 것이다. 처음엔 2년 동안 머물 계획으로 왔지만 본국에 결혼하기로 한 사람과의 약속도 못 지키며 한국의 한센병 퇴치를 위해 평생을 바치게 된 것이다. 간호사 엠마의 눈엔 조기발견하여 치료제를 복용하면 나을 수 있는 병인데, 이미 선진국에선 극복된 피부병인데, 한국에선 너무나도 엄청난 천형으로 낙인찍혀 치료도 못 받는 현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칠곡에 카톨릭 피부과의원을 열고 원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 아흔이 가까운 나이까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엠마 님은 죽어서 한국 카톨릭 묘지공원에 묻힐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며 한국이 나의 안식처라고 말씀하시며 즐거워하신다.
몇 년 전에는 대구에 있는 릴리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작은 아파트 1층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사무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흑백 사진이 인상적이어서 여쭈었더니 지금은 고인이 된 김광자 안젤라 라는 분이라고 했다. 사실 ‘릴리회’는 이 분이 만든 후원단체라는 것이었다. 1970년 1월 부산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김광자 님은 한센병의 날을 맞아 카톨릭신문에 실린 작은 광고문구를 읽게 된다. “건강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병든 형제인 한센환자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글귀에 마음이 울린 김광자 님은 작은 선물을 마련하여 부산에 있는 나환자마을을 방문한다. 하지만 900여명이 넘는 분들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며 어렵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빈약한 선물을 내놓지도 못하고 되돌아온다. 이후 직장 여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경험담을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동료여직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조금씩 힘을 모아 돕자”고 의기투합을 하게 된다. 이렇게 20여명이 매월 성금을 모은 일이 씨앗이 되어 ‘릴리회’는 탄생한다. 그리고 이 릴리회는 한국은행 다른 지점으로, 다른 회사로, 지역으로, 나아가 미국 호주 등 타국에서도 꽃피워나가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씨앗을 뿌린 김광자님은 1981년 8월 42세 나이로 직장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생을 마감하기까지 늘 봉사를 실천하셨다고 한다. 어려서는 ‘릴리회’ 하면 엄마와 인연이 있는 엠마회장님을 먼저 떠올렸다면 사무실을 방문한 뒤로는 사무실 한쪽 벽 흑백사진으로 만난 고 김광자 안젤라 님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이제 우리 나라에 한센병은 거의 퇴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센병을 앓은 분들이 모여 사는 정착촌이 전국에 수 십 여개 된다고 한다. 릴리회는 이 정착마을 어르신을 위한 봉사와 의수 의족사업, 2세들을 위한 장학사업 등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나아가 1990년대부터는 밖으로 눈을 돌려 중국과 아프리카의 한센병 환우들을 돕는 일을 병행하고 있다. 한센병은 조기발견하여 치료약만 먹으면 낫는 피부병일 뿐인데 전 세계에는 아직도 해룡이들이 치료도 못받고 가족과 떨어진 채 짐승같은 대우를 받으며 오늘을 살고 있다.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신 5월 17일이 “전국 한센인의 날” 이라는 것이 남다르게 들린다. 그동안 한센인들과 그 가족들은 “흔적없는 삶”을 살도록 강요받았다.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아야했고, 소록도로 강제이주당해야 했고, 가족이라는 이름에서도 지워졌다. 동네어귀에 한센병자가 나타나면 아이들은 돌팔매질을 하고,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며, 당장 쫒아내라고 교육받았다.
해룡이가 문 앞 디딤돌에 두고 간 빨간 주머니, 그 안에는 차곡차곡 정성껏 묶은 돈다발과 종이쪽지가 들어 있었다. 그 종이쪽지에는 “ 해룡. ” 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다른 말 한마디가 없다. 그저 이름 두 자가 전부이다. 얼마나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겠는가, 얼마나 묻고 싶은 일이 많겠는가, 얼마나 토해내고 싶은 한이 많았겠는가. 해룡은 이름 두 글자에 모든 걸 다 묻어두었다. 가장으로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돈다발에 그의 삶의 무게가 묵직하게 얹혀 있을 뿐이다.
이번에 <해룡이>를 읽으니 해룡이 뿐 아니라 소근네와 아이들이 모두 보인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 낳아 작은 행복을 일구어나가던 그 때에 남편 해룡을 떠나보내야 했던 소근네. 어느 날 말도 없이 헤어져야했던 아버지 해룡. 수십 년 동안 이 땅에서 우리가 수많은 해룡이네를 어떻게 대했는지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지금도 그저 길 위를 하염없이 걷고 있을 해룡이에게 따뜻한 희망 한 줄기라도 전하고 싶다. 권정생 선생님과 같은, 릴리회와 같은 “당신들의 벗”이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얘기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벗”이 되어 해룡이와 함께 길을 걷고 싶다.
첫댓글 아름다운 사람들이 길게 이어오는 인연의 고리에 어머니와 딸이 그리고 권정생 선생님이 있네요ㆍ
오래가는 인연^^
귀한 글 잘 보았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에 인사를 드리지 못해 안타깝고 미안했어요.
이런 글을 이렇게 혼자 방안에서 컴퓨터로 읽다니 참담하고 고맙고…
늦었지만 아버님 명복을 빕니다.
1981년 6월 13일 이오덕 일기 – 일직 권 선생한테 갔다. (…) 권 선생하고 아동문학 얘기, 영주 나환자 수용소에 지난 번 권 선생이 갔다 온 얘기 등을 했다. (…) 영주 나환자 수용소에 전 선생(전우익)과 갔다 왔다기에 내가 나환자는 그래도 어지간히 사회와 국가에서 보호 받고 있지만 결핵환자나 심신장애자들은 참 기막힌다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면서 그곳의 나환자들의 참상을 얘기하는데 정말 비참했다. 수용소에 모여 있는 사람들 보니 사람 같지 않고 짐승보다도 못 하더란다. 그들은 거기 오래 있을 수도 없고 일정한 때가 지나면 쫓겨나야 되는데, 갈 곳이 없어 다시 돌아다니다가 그곳에 오는 사람도 있고 정말 그 사람들 보니 하느님이 없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더라 했다.
어느 글에선가 권 선생님이 릴리회 얘기한 것도 읽은 거 같은데 그건 못 찾았고
영주 나환자촌 다녀온 이야기가 있어서...
<해룡이>가 1978년 작품이니까 쓰고 나서 다녀오셨네요...
권정생 선생님이 다녀오신 영주 나환자 수용소는 ‘다미안의 집’이라고
영주와 봉화의 경계에 있는 것인데,
1970년 데레사 캄비에 수녀님이 한센인을 위해 만들어 운영하다가
천주교 안동교구 사회복지회에서 위탁을 받아 운영을 이어간 곳이라 합니다.
지금은 중증 장애인 시설로 바뀌었다고...
현진이 어머니, 릴리회, 엠마 회장님, 김광자님, 1970년, 영주 다미안의 집, 권정생, 해룡이....
그리고 얼마 전 본 일본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 여기서 키키 키린 할머니가 한센병 환자로 나오고..
많은 인연을 생각하게 됩니다. 고마운 인연입니다.^^
영주 '다미안의 집' 알지요. 영주와 봉화의 경계라기보다 봉화가는 길에 있는 정도지요. 지금 우리 엄마가 살고 있는 집에서 걸어서도 얼마 안되는 거리니까. 나도 거기에 치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는데, 뭐 때문이었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피부병 종류였을텐데. 수녀님들이 계셨던 것 같은데 한센인들이 있는 병원인지는 몰랐던 것 같아요. 알았다면 아마 무서워서 못갔었겠죠. 나 어릴 적엔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었으니까. 아마 해룡이도 그렇게 살았겠지요. 아이들이 무서워서 도망가면 그 어여뻣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겠지요.
지난 번 여산 님과 통화하면서.. 위 얘기를 전해주셨죠 ... 이렇게 자세히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야말로 긴 시간 진정어린 독서와 공부 속에서 찾은 내용을 이렇게 앉아서 보네요 ~ 영주 얘기 나올 때 아해 생각했는데..그런 인연이 있구나~ 조각달 님~ 보고싶어요~~^^ 이 곳에서 만난 인연 이혁님도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