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야의 비루한 사람으로 남에게 공덕(功德)을 베푼 것도 없이 관작이 대부(大夫)의 반열에 올랐으니, 이는 내 힘으로 감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대로 덕을 전하고 복을 심어서 끼쳐 준 때문입니다. 옛일을 상고하건대, 고려 때의 직학(直學) 지경(之慶) 이후 육세(六世)째가 바로 우리 아버지인데, 숨은 덕과 지극한 행실이 있었으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적막하게 금위(禁衛) 안에 재직하면서 날마다 여러 무사(武士)들과 주선(周旋)하는 가운데 온량(溫良)하고 근후(勤厚)하며 자상(慈祥)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기를 좋아하고, 남의 과실을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 득실 이해(得失利害)에 대해서는 모두 순응하고 계교하지 않았습니다.
또 고려 때 판전농사(判典農事)가 된 백돈(白敦)의 후손으로 의서 습독관(醫書習讀官)이 된 휘 승수(承秀)란 분이 있어 3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사랑을 독차지한 이가 바로 우리 어머니인바, 어머니의 부의(婦儀)와 모도(母道)에 대하여 종당(宗黨)이 모두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선인(先人)께서 수년 동안 풍질(風疾)을 앓는 바람에 집이 점점 쇠락해지므로, 어떤 이가 향리로 돌아가 힘써 농사지어서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하자, 어머니가 이르기를,‘차마 세 자식으로 하여금 노동복을 입고 전야(田野)에서 늙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 더욱 힘써 가르치고 감독하면서 가난을 잊고 글 읽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낮부터 밤까지 계속 글을 읽으며 모자(母子)가 한 등불 밑에서 불빛을 나누어 각각 업(業)을 다스리다 보니, 글을 강송(講誦)하는 소리와 어머니의 베 짜는 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처음의 뜻을 이루어 부진한 가업을 회복시켰으니, 지금 내가 이미 괴과(魁科)에 급제해서 현달한 관직에 올라 삼세(三世)를 추은(推恩)하여 부조(父祖)가 함께 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사생(上舍生)으로서 음보로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된 난상(鸞祥)은 바로 나의 아우이고, 또 그 아우인 봉상(鳳祥)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졸관(卒官)하였습니다. 또 나의 두 누이가 있는데, 하나는 원종해(元宗楷)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이무남(李茂男)에게 시집갔습니다. 나는 6남 2녀를 두었습니다. 큰아들 방(霶)은 지금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그 다음은 입(雴), 집(), 영(霙)인데 서로 이어 상상(上庠)에 올라서 하나는 헌릉 참봉(獻陵參奉)이 되고 하나는 의금부 도사가 되었으며, 유(霤), 담(霮)은 비록 연소하나 모두 우뚝하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딸은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 이경유(李敬裕)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생원 조공숙(趙公淑)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사인(士人) 허계(許啓)에게 시집갔습니다. 난상의 아들 정(霆), 보(靌)는 모두 진사가 되었고, 봉상의 딸은 3인인데, 큰딸은 이홍헌(李弘憲)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정시혁(鄭時赫)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이유양(李有養)에게 시집갔으니, 또한 모두 훌륭한 사위들입니다. 원씨(元氏) 집으로 시집간 누이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진사 장길(長吉)이 가장 큰아들이고, 형길(亨吉), 정길(貞吉) 및 두 아우와 이씨 집으로 시집간 누이의 2남 2녀도 모두 빼어납니다. 그리고 방 이하 10여 인은 모두 각각 자식을 두었으므로, 매양 속절(俗節) 및 수신(壽辰) 때마다 그들이 당(堂)에 올라 술잔을 올리고 무릎 앞에서 종종걸음을 할 적에는 어머니께서 그들을 다 분별하지 못하시어, 엿을 머금은 채 턱만 끄덕이게 되는 경우가 60여 인에 달합니다.
그리고 오문(吾門)에서 나간 사람은 모두 힘써 배워서 원대한 희망이 있고, 오문으로 들어온 사람들 또한 삼가고 경계하여 금슬이 좋으며, 나중에 태어난 사람은 더욱 뛰어나서 여러 형들보다 더함이 있고 부족함이 없으니, 그렇다면 후일 오문은 거의 창성해질 것입니다. 나는 부재(不才)한 사람으로 준수한 여러 아우들 위에 있는지라, 선대의 아름다운 덕업을 계승하는 일은 스스로 자랑할 수가 없고 오직 제자리 보전하는 것만이 두려울 뿐입니다.”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듣고 몸을 일으키며 말하기를,
“옛날 선민(先民)의 말에‘곡식을 심어 가꾸는 것은 처음 종자(種子)를 심는 데에 달려 있다.’고 하였는데, 옛날에 들은 말을 의심하지 않았더니, 지금 그대에게서 더욱 증험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기유년 10월 7일에 백 부인(白夫人)이 나이 82세로 작고하니, 그해 섣달에 선롱(先壠)에 부장(祔葬)하고, 그 다음 해 여름에 홍군이 그 아들을 시켜 가장(家狀)을 갖추어 보내서 나에게 묘명(墓銘)을 부탁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홍씨(洪氏)는 안동(安東) 풍산현(豐山縣)에서 나왔다. 원조(遠祖) 직학(直學)의 아들 간(侃)은 도첨의 사인(都僉議舍人)으로 세인들이 홍애 선생(洪厓先生)이라 추앙하였고 시집(詩集)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이분의 손자 휘 숙(俶)은 진용교위 좌군사정(進勇校尉左軍司正)인데, 숙이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휘 계종(繼宗)을 낳았고, 계종은 충무위 부사용(忠武衛副司勇) 휘 우전(禹甸)을 낳았다.
홍군이 벼슬을 시작함으로부터 가선(嘉善)으로 대사헌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조정의 부정한 자들을 탄핵하여 다스림으로 인하여, 별제공에게는 통훈(通訓)으로 좌통례(左通禮)가 추증되었고, 사용공에게는 통정(通政)으로 좌승지가 추증되었으며, 내금공에게는 자헌(資憲)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은 본디 부장(部將) 휘 세경(世敬)의 아들인데, 부장이 승지와 재종 형제였는바, 승지에게 후사가 없었으므로 공을 후사로 삼은 것이다. 부장은 경주 배씨(慶州裵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덕(正德) 정축년에 공을 낳았고, 만력(萬曆) 신사년 6월에 작고하니 향년이 65세였다. 묘소는 고양(高陽)의 고봉산(高峯山)에 있다.
공의 휘는 모(某)이고 자는 모이다. 젊어서 글을 배우다가 성취하지 못한 채 그만두고 무예(武藝)를 익히었으나 또 급제하지 못하고 내금위(內禁衛)에 조용(調用)되었다. 그리고 두 차례 변보(邊堡)를 지킬 적에는 수졸(戍卒)들이 노래하며 즐거워하였다.
공은 비록 무예로 이름을 세웠으나 그 성품은 바로 군자(君子)요 장자(長者)로서 친척에게 화목하고 선조를 받드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세상이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히 여기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문필을 그만둔 것을 더욱 뉘우친 나머지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에 더욱 돈독하였다. 그리하여 공부를 하는 데 대해서는 반드시 도 장사(陶長沙)의 분음(分陰)을 아낀 일을 들어서 경계하였고, 일을 만났을 적에는 반드시 한 소열제(漢昭烈帝)의‘악(惡)한 일은 아무리 작아도 하지 말고, 선(善)한 일은 아무리 작아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한 말을 들어서 면려하였다.
승지공이 만년에 비첩(婢妾)을 두었는데, 비첩은 완포(頑暴)하여 법도가 없었고 집에 있으면서 불법한 일 하기나 좋아하였다. 그러나 승지공은 늙을수록 점차 무력해져서 혹은 일체 그를 예법으로 다스리지도 못함으로써, 참소하는 말이 서로 이간질을 하여 형세가 매우 불안하였는데, 공은 항상 두려워하고 조심하였다. 그러다가 승지가 작고함에 미쳐서는, 예전부터 전해 온 재산을 비첩이 승지공을 꾀어 제 소유로 만든 것이 있었으나 일체 묻지 않으니, 비첩 또한 감격하여 기뻐하였다.
공이 일찍이 여러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덕을 쌓아 온 지 오래되었다. 부장공(部將公)의 생신일에는 내가 장차 살진 소[腯牲]를 잡아서 수연(壽宴)을 열어 드리기 위해 소를 깨끗이 닦아 놓고 기다리는데, 마을 사람이 파리한 소를 끌고 우리집 앞을 지나는 자가 있자, 선군(先君)께서 대번에 명하여 그 소와 바꾸게 해서 그 마을 사람에게 생업으로 삼도록 해 주었다. 이것은 비록 조그마한 행실이지만, 수많은 선행(善行) 중의 일부분이니, 후일에 너희들이 의당 본받아 행해야 할 바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그 후손들이 선대의 교훈을 실추시키지 않아서 정성스럽고 신중하고 온후하니, 이대로 간다면 홍씨의 복록이 다하지 않을 것이다. 홍군의 이름은 이상(履祥)이고 군서(君瑞)는 그의 자이다. 형제간에는 맏이가 되는데, 나와 서로 좋게 지낸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온화한 착한 사람이여 / 溫溫吉人
한 시대에 자취는 적막했으나 / 泯迹於時
똑같은 덕으로 배필 만나서 / 媲德有配
하자 없는 쌍벽을 이루었네 / 雙璧無疵
경복을 터잡아 기다리다가 / 基慶以竣
오직 후손에게 끼쳐 주었으니 / 維後之貽
이만한 행실이 그 어딘데 / 孰是行也
기록하지 않을 수 있으랴 / 而可無紀
고봉산의 기슭에는 / 高峯之麓
청룡 백호가 대치해 있는데 / 龍虎對峙
명을 써서 봉분을 표시하여 / 銘以識封
영원토록 드리워 보이노라 / 以永垂示
贈資憲大夫吏曹判書洪公墓碣銘 古云樹田不如樹德。余以爲名言。以是徵於世。班班不一。差試以耳目所覩記。近世如洪氏家所成就者。尤信也。余友君瑞。卽其承家子也。一日。洪君見訪。言及迺家事。其言曰。草鄙之人。無功德及人。爵列大夫。非余力敢任。維世傳德種福以遺之。若稽往古。高麗直學之慶後六世而吾父也。有隱德至行。世無知者。泯泯處禁衛中。日與羣武士周旋。溫良勤厚。慈祥愛物。樂成人之美。不樂言人之過。其於得失利害。率順應而不校。又有高麗判典農事曰白敦之後。有諱承秀。爲醫書習讀官者。有三女。其中最奇愛者曰吾母也。婦儀母道。宗黨式之。先人苦風疾累年。家益旁落。或勸使歸鄕力田以自給則曰。慗使三子襏襫而老於田耶。敎督益力。撥貧佐讀。晝以繼夜。則母子一燈。分光執業。講誦之音。與機杼相和。遂克成初志。光復墜緖。今吾旣捷魁科登顯仕。得推恩三世。父祖與榮焉。有以上舍生蔭補刑曹佐郞者曰鸞祥。吾弟也。又其弟曰鳳祥。文科。卒官成均典籍。元有二妹。一曰元宗楷。一曰李茂男。皆士人。吾有六男二女。其長曰霶。見今爲弘文館校理。其次曰雴曰曰霙。相繼陞上庠。一爲獻陵參奉。一爲義禁府都事。曰霤曰。雖少。皆昂然見頭角。女適社稷署參奉李敬裕。次適生貟趙公淑。次適士人許啓。鸞祥之子。曰霆曰靌。皆成進士。鳳祥之女三人。長適李弘憲。次適鄭時赫。次適李有養。亦佳壻也。元妹有五男二女。進士長吉。最長也。亨吉貞吉及少二弟與李妹之二男女。皆穎秀。霶以下十餘人。俱各有子。每俗節及壽辰。登堂奉觴而趍膝前。阿氏不盡辨。含飴而點頷者六十餘人。出吾門者。俱力學有遠望。入吾門者。亦謹飭諧琴瑟。後出者。逾益奇。有過諸兄。無不及焉。則異日吾門。其庶幾矣。吾以不才。加于羣俊之上。不自多其趾美。惟持盈是惧。余聞言作而曰。自古在昔。先民有言。樹藝在始所種。不疑舊有聞也。今於子。益驗矣。後三年己酉十月七日。白夫人以年八十二下世。以其年臘月。祔葬于先壠。明年夏。洪君使胤子具家狀。屬余銘諸墓。謹按。洪氏出安東豊山縣。遠祖直學之子侃。都僉議舍人。世推爲洪厓先生。有詩集行于世。至孫諱俶。進勇校尉左軍司正。生諱繼宗。司圃署別提。生諱禹甸。忠武衛副司勇。自洪君起家。至嘉善冠惠文立柱後。日彈治朝廷邪枉。別提公。贈通訓爲左通禮。司勇公。贈通政爲左承旨。內禁公。贈資憲爲吏曹判書。公本部將諱世敬之子。部將與承旨爲再從兄弟。承旨無嗣。故以公後之。部將娶慶州裴氏女。以正德丁丑生公。以萬曆辛巳六月卒。得年六十五。葬在高陽高峯山。公諱某。字某。少學書不成去業武。又不第。調內禁衛。再守邊堡。戍人歌樂之。公雖以弓刀立名。乃其性。卽君子長者。睦於親戚。誠於奉先。見世尙文而賤武。益悔其投筆。敎子弟尤篤。其攻文也。必擧陶長沙惜分陰爲戒。其遇事也。必擧漢昭烈勿以惡少而爲之。勿以善少而不爲。勉之。承旨公晩畜婢妾。頑暴不率。居家喜造爲不法事。承旨老益倦。或不能一切以禮法繩之。讒說惎撓。勢甚杌。而公夔夔齊栗。及承旨歿。舊業餂爲其掩有者。一無問。婢亦感悅。甞語諸子曰。吾家世積德盖久。部將公辰日。我將以腯牲爲壽。滌除以竢。里有病瘠牛牽而過吾門者。先君遽命易之。以業其里人。是雖細行。亦侏儒一節。異日爾輩所宜體行。故在今後昆。不墜先訓。肫肫謹厚。循是以往。則洪氏之祿。猶未艾也。洪君名履祥。君瑞其字也。於序爲長。與余善。銘曰。 溫溫吉人。泯迹於時。媲德有配。雙壁無疵。基慶以竢。維後之貽。孰是行也。而可無紀。高峯之麓。龍虎對峙。銘以識封。以永垂示。 - [주-D001] 元 :
- 吾
- [주-D002] 壁 :
- 璧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 홍공(洪公) 묘지명 병서 -월사 이정구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 홍공(洪公)은 안동부(安東府) 풍산현(豐山縣) 사람으로 휘는 수(脩)이고 영숙(永叔)은 자이다. 고려 때 휘 지경(之慶)이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국학 직학(國學直學)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바로 비조이다. 이분이 휘 간(侃)을 낳았는데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이고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나 지은 시문(詩文)들이 선집에 많이 실려 있고 지금도 사람들이 전송(傳誦)한다. 이분이 휘 유(侑)를 낳았는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고 벼슬이 밀직사(密直使)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연(演)을 낳았는데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이다. 이분이 우령낭장(右領郞將) 휘 귀(龜)를 낳으니, 이분이 실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숙(俶)은 우군 사정(右軍司正)이고, 조부 계종(繼宗)은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증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이다. 부친 우전(禹甸)은 충무위 부사용(忠武衛副司勇) 증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이며, 모친 증 숙부인(淑夫人) 장수 이씨(長水李氏)는 생원 수림(壽林)의 따님이다. 공의 생부 휘 세경(世敬)은 부장(部將)이며 기실 승지공(承旨公)의 재종제(再從弟)로 경주 배씨(慶州裵氏)를 아내로 맞아 정덕(正德) 정축년(1517, 중종12)에 공을 낳았다. 승지공이 아들이 없어 공을 아들로 삼아 후사(後嗣)를 이은 것이다.
공은 어릴 때 글을 배웠으나 성취하지 못하고 무(武)를 익혔으나 그것도 끝까지 공부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금위(禁衛)에 조용(調用)되었고 두 차례 변보(邊堡)를 지켰는데 직사(職事)를 잘 수행하여 임기가 차서 떠난 뒤 모든 백성들이 공의 은덕을 잊지 않았다.
공은 성품이 온량(溫良)하고 근후(謹厚)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으며 입으로 남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었으며, 남에게 선(善)이 있으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이 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모두 공을 좋아하였고 향리에서는 공을 장자(長者)라 일컬었다.
일찍이 금중(禁中)에서 숙직하는데 함께 근무하는 동료가 공의 옷을 훔쳤다. 공은 그 사람이 범인인 줄 알았으나 종신토록 내색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부친 승지공이 애첩의 참언(讒言)에 미혹하여 일간(日間)에 공이 불측한 화를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은 공손하게 자식의 직분을 다하여 부드러운 용모, 기쁜 기색으로 부친의 마음을 풀어 드리고야 말았다. 전토(田土)와 노비는 그 애첩이 차지하건 말건 내버려 두고 굳이 따지지 않으며 말하기를 “빈궁(貧窮)은 운명에 달린 것이다. 내 어찌 이러한 것들을 얻어서 부자가 되고자 하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집안이 더욱 가난하여 양식이 자주 떨어질 정도였으나 공은 개의치 않고 태연하였다. 친척과는 친소(親疎)를 따지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고 제사를 모실 때는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늘 자신이 잘못 무(武)의 길로 들어선 것을 후회하여 자식들에게는 각고하여 학문에 힘쓰라고 가르치며, 선정(先正)의 격언(格言)들을 자상하게 얘기해 주어 공부를 독려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세 아들이 모두 문학으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장남은 특히 경술(經術)과 문장으로 당세의 명경(名卿)이 되어 위 삼세(三世)에 추증의 성은을 받게 하였으니, 판서(判書), 통례(通禮), 승지(承旨)는 모두 그의 덕분이다.
공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문경 백씨(聞慶白氏)는 고려 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인 돈(敦)의 후손으로 증조 휘 상결(尙潔)은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이고, 조부 계증(繼曾)과 부친 승수(承秀)는 모두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이다. 모친은 용인 이씨(龍仁李氏)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에 태어났으며, 시부모를 예(禮)로써 모시고 남편을 공경과 순종으로 받들었다. 그리고 자녀 훈육도 어머니의 도리에 맞았고 집안을 다스림에도 법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공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술과 음식을 장만해 두는 것이 모두 공의 뜻에 맞았다. 빈한한 살림에도 늘 풍족한 듯 편안한 모습이었고 여공(女工)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노년에 이르고 신분도 높아졌으며 자식들이 누차 전성지양(專城之養)으로 모셨으나 길쌈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으니, 그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부인 소생이다.
장남 이상(履祥)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역임했으며 가의대부(嘉義大夫)로 벼슬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이르렀다. 둘째 난상(鸞祥)은 기묘년(1579, 선조12)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고 누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여 음보(蔭補)로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셋째 봉상(鳳祥)은 문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이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도원수(都元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다가 아군이 패전하자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장녀는 원종해(元宗楷)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이무남(李戊男)에게 출가하였다.
대사헌은 안동(安東) 김고언(金顧言)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6남 3녀를 낳았다. 장남 방(霶)은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이며, 둘째 립(雴)은 생원(生員)이고 헌릉 참봉(獻陵參奉)이며, 셋째 집(
)과 넷째 영(霙)은 모두 생원이며, 다섯째 류(霤)와 여섯째 제(霽)는 아직 어리다. 장녀는 참봉 이경유(李敬裕)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생원 조공숙(趙公淑)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허계(許啓)에게 출가하였다.
형조 좌랑은 전취(前娶) 남씨(南氏)에게는 후사가 없고, 후취(後娶) 구예연(具禮淵)의 따님에게서 2남을 낳았다. 장남 정(霆)과 둘째 보(靌) 모두 진사(進士)이다.
전적은 권응시(權應時)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3녀를 낳았다. 장녀는 이홍헌(李弘憲)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정시혁(鄭時赫)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이유양(李有養)에게 출가하였는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원종해는 5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장길(長吉)은 진사이고 둘째는 형길(亨吉)이고 셋째는 정길(貞吉)이다. 장녀는 최종직(崔宗直)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이무남은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욱(昱)이고 장녀는 정석로(鄭碩老)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방(霶)은 1남 3녀를 낳았고, 집(
)은 1남 1녀를 낳았고, 영(霙)은 1남 2녀를 낳았고, 류(霤)는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이경유는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몽익(夢翼)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조공숙은 1남 2녀를 낳았다. 정(霆)은 1남 3녀를 낳았다. 보(靌), 홍헌, 이유양은 각각 1남 1녀를 낳았다. 정시혁은 1남 2녀를 낳았다. 최종직은 1녀를 낳았다. 정석로는 3남을 낳았다. 이욱은 2남 1녀를 낳았다. 이상은 모두 아직 어리다. 내외손은 모두 60명이다.
공은 만력(萬曆) 신사년(1581, 선조14) 6월 8일에 졸(卒)하였고, 그해 9월에 고양(高陽)의 치소(治所) 서쪽 고봉산(高峯山) 기슭, 신좌을향(辛坐乙向)에 안장되었다. 공이 졸한 지 29년 뒤 부인도 졸하였으니, 실로 기유년(1609, 광해군1) 10월 7일이었으며 그해 12월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게 되었다.
장사(葬事)를 지낸 지 얼마 뒤 대사헌이 상복을 입고 와서 행장과 책을 주면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내가 대사헌 형제들과 종유한 지 오래이고, 또 나의 변변찮은 여식(女息)이 그 집의 며느리가 되었기 때문에 통가(通家)의 의리가 있다. 늘 보면 부인은 연세가 여든을 넘었는데도 강녕하였다. 매양 시절마다 축수(祝壽)하는 잔치에 나도 반드시 참석하면 부인은 백발의 몸으로 북당(北堂)에 앉아 있고 대사헌도 백발의 몸으로 금대(金帶)를 띠고 그 앞에서 효성을 다하고 있었으며, 아들과 손자들이 줄지어 앉아서 번갈아 가무(歌舞)를 올리고 있었다. 내가 당(堂)에 올라 술잔을 올리며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그 광경이 눈에 삼삼한데 어이 차마 이 글을 쓴단 말인가. 그렇지만 의리로 보아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무릎을 꿇고서 행장을 읽고 서문을 쓴 다음 명(銘)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생각건대 먼 윗대에 직학이 / 遠惟直學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 壯元大科
비로소 집안의 복록을 열었지 / 肇啓其嘉
이에 뒤를 이어서 자손들이 / 繄子若孫
덕을 높이 걸고 재능을 떨치니 / 揭德振華
대대로 문장의 집안이었어라 / 文章世家
그 후대엔 가운이 연이어 어려워 / 後乃蹇連
막히어 운수 통하지 못한 채 / 窒而未通
그대로 공의 대에 이르렀도다 / 爰及于公
공은 하급의 직책에 머물며 / 混于抱關
몸소 집안을 다시 일으켰으니 / 啓慶自躬
그 쌓은 음덕이 얼마나 컸던고 / 積之何豐
덕스런 배필은 정숙한 분이라 / 德配幽貞
뛰어난 아들들을 낳았으니 / 篤生俊英
옥인 양 난초인 양 훌륭했도다 / 玉潤蘭榮
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 乃魁多士
집안의 옛 명성을 이었으니 / 克紹家聲
이 나라의 동량이어라 / 邦國之楨
누군들 현달하지 않았다 하랴 / 孰云不顯
이미 번성하고 또 창달했으니 / 旣蕃又昌
선경이 집안 가득 넘치도다 / 善慶洋洋
저 고봉산을 돌아보니 / 睠彼高峯
길이 상서롭게 발복하여 / 長發其祥
백세토록 길이 빛나리라 / 百世之光
忠武衛副司直
贈吏曹判書洪公者。安東府之豐山縣人。諱脩。永叔字也。麗朝有諱之慶。狀元及第。官至國學直學。是其鼻祖。生諱侃。都僉議舍人。以文章名於世。凡所著詩文。多載選集。至今人傳誦之。生諱侑。賜紫金魚帒密直使。生諱演。寶文閣大提學。是生右領郞將。諱龜。實公高祖。曾祖俶。右軍司正。祖繼宗。司圃署別提
贈通禮院左通禮。考禹甸。忠武衛副司勇
贈承政院左承旨。妣
贈淑夫人長水李氏。生員壽林之女。生考諱世敬。部將。實承旨公之再從弟。娶慶州裵氏。生公於
正德丁丑。承旨公無子。子公爲繼。公少學書不成去。業武又不肯竟。選調禁衛。再守邊堡。能擧職事。考滿。咸有去後思。性溫良謹厚。與物無競。口未嘗言人過。卽人有善。欣欣然若己有之。以故人無賢不肖。咸愛之。鄕里稱爲長者。嘗直
禁中。同舍郞竊公衣。公知其人。而終身不形色辭。承旨公惑於嬖妾。讒搆日間。變將不測。公則恭爲子職。婉容愉色。懽其心乃已。土田臧獲。悉聽其掩有而不與辨曰。貧窮有命。吾豈必得此而求富乎。由是家貧屢空。而處之裕如。睦姻親無間疏昵。奉祭祀必盡誠敬。常以誤入武途爲恨。訓諸子刻苦學問。諄諄以先
正格言。不懈程督。故三子皆以文學顯科第。長公尤以經術詞華。爲世名卿。推恩三代。判書通禮承旨。皆其贈也。貞夫人聞慶白氏。高麗判典農寺事敦之後。曾祖諱尙潔。通禮院奉禮。祖繼曾。考承秀。幷醫書習讀官。妣龍仁李氏。夫人生於嘉靖戊子。承舅姑以禮。奉君子以敬。以順訓子女得母道。理家有法。終公之世。酒食脂瀡之備。咸適公意。處約而常若豐。勤於女工不少懈。及老且貴。諸子累奉專城之養。而績紝之具未嘗去手。蓋其天性然也。三子二女皆其出。長曰履祥。文科狀元。歷華要秩嘉義。官拜司憲府大司憲。次曰鸞祥。己卯生員。累擧
不中。蔭補刑曹佐郞。次曰鳳祥。文科典籍。壬辰之亂。爲都元帥從事官。兵潰。沒於陣。女長適元宗楷。次適李戊男。大司憲娶安東金顧言女。生六男三女。男長霶。文科弘文校理。次雴。生員獻陵參奉。次
,次霙。皆生員。次霤,次霽幼。女長適參奉李敬裕。次適生員趙公淑。次適許啓。佐郞前娶南氏。無后。後娶具禮淵女。生二男。長霆,次靌皆進士。典籍娶權應時女。生三女。長適李弘憲。次鄭時赫。次李有養。皆士人。元宗楷生五男二女。長長吉進士。次亨吉,次貞吉。女長適崔宗直。餘幼。李戊男生二男二女。長昱。女長適鄭碩老。餘幼。霶生一男三女。
生一
男一女。霙生一男二女。霤生一女。皆幼。李敬裕生一男一女。男曰夢翼。女幼。趙公淑生一男二女。霆生一男三女。靌,弘憲,李有養各生一男一女。鄭時赫生一男二女。崔宗直生一女。鄭碩老生三男。李昱生二男一女。皆幼。內外諸孫。共六十人。公卒於萬曆辛巳六月初八日。其年九月。葬高陽治西高峯山麓辛坐乙向原。公卒之二十九年。夫人卒。實己酉十月初七日。其年十二月。祔窆公塋。葬得日。都憲公纍然衰絰。授狀若書。乞文於廷龜。廷龜忝與諸公從遊蓋舊。又拙女入其門爲婦。故有通家之義。常見夫人年逾八十尙康寧。每時節上壽。廷龜
必與其席。夫人白。髮坐北堂。都憲公亦白髮橫金帶。戲於前諸子諸孫列坐成行。歌舞迭獻。廷龜升堂奉觴。嘖嘖嘆者屢矣。森然在眼中。尙忍爲此文哉。顧義有不敢辭者。乃跪而讀狀。序而銘之。銘曰。
遠惟直學。狀元大科。肇啓其嘉。繄子若孫。揭德振華。文章世家。後乃蹇連。窒而未通。爰及于公。混于抱關。啓慶自躬。積之何豐。德配幽貞。篤生俊英。玉潤蘭榮。乃魁多士。克紹家聲。邦國之楨。孰云不顯。旣蕃又昌。善慶洋洋。眷彼高峯。長發其祥。百世之光。
첫댓글 9세조 수(脩)께서는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으로 추증되어 족보에 수록되어있습니다.
생원공계에서 양자로 오셔서 조선최고의 가문으로 번성케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