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 사야도는 사실 수행승이라기 보다는 교학승이다.
그를 비롯해서 그의 제자들, 빤디따 사야도, 찬메 사야도, 따땀마란디 사야도도 교학승이다.
그들은 모두 위암사들이다.
위암사란 누구인가?
미얀마 승가고시 중에서 최고의 천재들만이 통과한다는 바로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20세까지 1차를 통과해야하고 30세까지 2차를 톨과해야만 한다는, 20만의 미얀마 비구 중에서 1년에 5명만 합격 시킨다는, 합격하면 미래가 보장되고, 정부에서 시호가 내려온다는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은 매우 교학적이다.
교학적이라는 말은 경전과 주석서, 그리고 복주서에서 근거를 기필코 찾아 적용한 수행법이라는 이야기다.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경력은 밍군 제타완 사야도의 지도하에 4달간 수행했다는 것이 전부다.
(4개월이라? 아무리 상근기라도 너무 짧은 것이 아닌가? 물론 제자들을 가르치는 틈틈히 자신도 수행을 계속했겠지만)
천재는 빨리 깨닫는다는 이론은 성립되지 않지만, 하여튼 사야도는 짧은 수행을 끝내고 바로 수행지도자로 나선다.
그러나 미얀마의 대부분의 스승들처럼 그도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야도의 제자들, 그러니까 2대 스승들도 수행기간이 짧기는 마찬가지다.
마하시 사야도 지도하에 3~4개월 또는 1, 2년 수행이 수행 경력이다.
(상근기는 수행을 길게 하지 않는다.)
마하시 센터에서 수행한 미얀마 스님들은 3개월 수행하면 모두 수행지도자로 나선다.
(이게 이 문중의 가풍인가?)
마하시 사야도의 삼매에 대한 견해
마하시 사야도의 삼매에 대한 견해는 모범답안이다.
근접삼매나 본삼매 중 하나를 바탕으로 해서 위빠사나 관찰을 하는 수행자를 '사마타 행자'라고 한다. 근접삼매나 본삼매에 의지하지 않고 위빠사나만을 관찰하는 이를 '위빠사나 행자'라고 한다. 사마타 행자라면 근접삼매와 본삼매 이 두 가지 삼매 중 하나를 닦아야만 도와 과를 얻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위빠사나 행자라면 찰나삼매를 닦아야만 도와 과를 얻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사마타 행자, 위빠사나 행자 둘 다 세 가지 거듭관찰(무상, 고, 무아)을 적절하게 닦는 수행자라야만 도와 과를 얻을 수 있고 갈애의 엉킴을 풀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방법론 1권 162페이지, 일창역)
위빠사나 행자는 근접삼매나 본삼매를 닦지 않고 처음부터 위빠사나만 수행한다. 그러면 삼매 없이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난다. 위빠사나가 구족되었을 때 사마디가 생겨난다.
(위빠사나 수행방법론 175페이지)
요컨데 근접삼매나 본삼매를 성취하고서 위빠사나 수행으로 전환할 수 있고,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으로 통찰지를 개발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위빠사나 수행으로 들어가서 수행하다보면 사마디가 생기는데 이것을 찰라삼매 또는 위빠사나 사마디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야도의 견해는 물론 아비담마나 주석서에 나오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물론 반드시 삼매를 성취해야 도과를 얻을 수 있다는 파욱이나 아짠 브람의 견해와는 다르다.
마하시 수행법
이 수행법은 사마타 수행 없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으로 들어간다.
1차 수행주제는 복부의 움직임이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갈 때 복부가 부풀어오르고 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근본 수행주제이다.
복부가 부풀어오를 때와 꺼질 때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명칭을 붙이면서 관찰한다
호흡을 내쉬고 다시 들이쉬기 전의 사이에는 '앉아있음'이라고 명칭을 붙이면서. 앉아있는 몸의 전체를 한 번 스캔한다.
그러면 한 호흡은 이럴게 관찰된다.
"일어남-사라짐-앉아있음"
명칭이야 각자에 따라 다르게 붙여도 상관없다.
"불러옴-꺼짐-앉아있음"
이 사이클을 무수히 반복하는 것이 일차 수행주제이다.
누워있을 때는 "일어남-사라짐-누워있음"이다.
그렇게 관찰하다가 생각이 떠오르거나 망상이 떠오르면 '생각 생각' 또는 '망상 망상'이라고 명칭을 붙이고 생각에 주의를 기울인다.
생각이나 망상이 사라지면 다시 일차 수행주제로 돌아와 '일어남-사라짐-앉아있음'을 반복한다.
소리가 들리면 '들림' 냄새가 맡아지면 '냄새', 맛이 느껴지면 '달콤함, 씀, 짬, 매움, 심 ', 감촉이 느껴지면 '닿음 부드러움 단단함 거침' 등으로.....
수많은 정신현상들은 모두 그렇게 명칭을 붙이면서 관찰한다.
"탐욕, 성냄, 우쭐함, 두려움, 걱정, 비탄, 언짢음, 혐오감, 질투, 인색, 후회, 애착, 등으로....
감각이 느껴지는 것에 따라 ' 통증, 아픔, 고통, 뻣뻣함, 뻐근함, 뜨거움, 차가움, 저림, 쑤심, 쓰라림, 가려움, 피곤함.'등으로....
어떤 생각이든지 느낌이든지, 어떤 대상이든지 명칭을 붙이고 주시하고 대상이 사라지면 다시 본래의 수행주제로 돌아와 '일어남-사라짐-앉아있음'을 계속한다.
행선 중에는 한 발자국을 3단계로 나누어서 관찰한다.
"들어올림-나아감-내려놓음" 또는 "듬-감-놈"
어떤 스승은 6단계로 나누어서 관찰하라고 한다.
"들어올리려고 함(의도)-들어올림-나아가려고 함(의도)-나아감-내려놓으려고 함(의도)-내려놓음"
그렇게 관찰해가다가 번뇌가 일어나면 마찬가지로 멈춰서서 번뇌에 명칭을 붙이고 번뇌가 사라지면 다시 움직이면서 관찰한다.
몸을 들리려고 할 때는 돌리려는 의도를 관찰하고 명칭을 붙이며 몸을 돌린다.
"몸을 돌리려고 함-돌림-돌림-돌림"
밥먹을 때에도 빈틈이 없이 관찰해야 한다.
"보임, 밥을 가져옴, 고개 숙임, 입술에 닿음, 입술을 염, 먹음, 입술에 닫음, 손을 내려놓음, 접시에 닿음, 씹음, 맛을 앎, 삼킴, 위장에 닿음,"
(여기서 마하시 사야도와 떼자니야 사야도가 다른 점이 두 가지다. 하나는 떼자니야 사야도는 절대 명칭을 붙이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명칭을 붙이면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관념이 생겨나서 실제(빠라마타)를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두 번째는 떼자니야 사야도는 대상을 관찰하지 말고 대상을 아는 마음을 보라고 말한다. 대상을 아는 마음을 보면 대상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대상은 대상일 뿐이라고 하면서. 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의 반응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여기서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과 떼자니야 사야도의 가르침이 극명하게 갈린다. 마하시 시야도는 대상을 낱낱이 일일이 보는 것이라고 하고, 떼자니야 사야도는 대상을 아는 마음만 보면 되는 것이지 대상을 일일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을 들어 마하시 사야도는 손이 움직이고 발이 움직이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동작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 일일이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떼자니야 사야도는 손이 움직이고 발이 움직이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아는 마음 작용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 수행법은 한 마디로 말하면 번뇌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번뇌가 들어왔다면 번뇌가 증식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촘촘하게 면면하게 밀밀하게 면면밀밀하게" 이것이 이 수행법의 캐치프레이즈다. 매우 강한 집중을 이용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맛지마까야[M70]에 나오는 일곱 부류의 사람 중에서 '믿음을 따르는 자'에 해당하는 수행법이다. 즉 통찰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강한 믿음과 정진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수행해나가면서 칠정정에 맞추어서 위빠사나 16단계의 지혜를 개발해나간다.
1.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
2. 원인과 조건을 식별하는 지혜
3. 명상의 지혜
4.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
5. 무너짐의 지혜
6. 공포의 지혜
7. 위험의 지혜
8. 역겨움의 지혜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
11.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
12. 수순하는 지혜
13. 종성의 지혜
14. 도의 지혜
15. 과의 지혜
16. 반조의 지혜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에 나오는 이 단계들이 수행자들에게 차례로 일어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럼 공포나 위험, 역겨움이 안 일어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인가? 뭐든지 교과서 맞추려고 하는 것이 교학승들의 한계이다. 떼자니야 사야도는 이런 단계들에 대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한다.)
깨달음
알아차림이 좋아지면 알아차릴 때마다 대상이 휙휙 사라진다. 빠르게 사라진다.
이때 '아! 이렇게 사라져 가는 구나, 무너져 가는 구나. 항상하지 않구나.'라고 숙고하고 반조한다.
항상하지 않는 것을 괴로움이므로 생겨나서 사라지고, '이렇게 끊임없이 괴로움일 뿐이다. 두려움일 뿐이다.'라고 숙고하고 반조한다.
생겨나서 즉시 사라져갈 뿐으로 거기에 확고한 실체가 없으므로, '주재하는 자아가 없고 각자의 성품에 따라 생멸하는 고유성품을 뿐이다.'라고 숙고하고 반조한다.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는 대상은 '무상하다. 괴로움이다. 무아다.'라고 이해되어간다.
대상들이 매우 빠르게 드러날 때에는 그 각각의 대상들에 명칭을 붙이며 따라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이때부터는 명칭을 생략하고 알아차림만 유지한다.
알아차림이 예리해지면 정신과 물질들이 마치 기계가 돌아가듯이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때로는 빛이 생겨나고, 만족감, 희열이 생겨나고, 경안, 가벼움, 믿음, 정진, 평온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도와 과의 지혜가 일어난다.
깨달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일어난 현상들이 사람마다 다양하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상과 알아차림이 탁하고 끊어져 멈추어버렸다.
마치 덩굴 줄기를 자르듯이 대상과 알아차림이 탁 하고 끊어져버렸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이 대상과 알아차림이 탁하고 끊어져버렸다.
마치 움켜쥐던 곳에서 벗어나듯이 대상과 알아차림에서 벗어나버렸다.
마치 매우 단단한 속박에서 벗어나듯이 대상과 알아차림이 벗어나버렸다.
마치 등불이 확 꺼져 버리듯이 대상과 알아차림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밝음으로 도달하듯이 대상과 알아차림에서 벗어나버렸다.
마치 얽매임 속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쑥하고 이르듯이 대상과 알아차림에서 벗어나버렸다.
마치 물속에 쏙 가라앉듯이 대상과 알아차림이 가라앉아버렸다.
마치 달려오던 이를 가로막아 밀어버리듯이 대상과 알아차림이 멈추어버렸다.
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위빠사나 수행방법론 2권 106페이지)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이렇게 반조한다.
"이것이 도와 과, 열반이다."
"내가 열반을 증득했구나. 수다원과를 성취했구나."
그리고 제거된 번뇌들과 아직 남아있는 번뇌들을 반조한다.
반조하고 나서 다시 알아차림을 계속한다.
마하시 센터의 문제
그리고 과의 마음(열반의 행복)에 들어가려면 다시 이전에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림 하던대로 계속한다.
그러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부터 시작해서 생멸의 지혜가 일어나는 것은 정해진 법칙이다.
그리고 삼매에 들어가듯이 결의를 하고 들어가면 처음에는 한 찰라에 일어나지만 점점 길이가 늘어나 5분 10분 한 시간 두 시간 낮동안 등으로 늘어난다.
이것을 과선정(색계와 무색계 삼매와 다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인도네시아 스님이 위빠사나 16단계를 일일이 경험하고 나서 의식이 끊어진 세계에 들어갔다. 의식이 끊어져서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들어갔다 나와서 시계를 보고서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었다는 알았다. 마하시 선원에서 외국인을 지도하는 스님은 그것이 열반이라고 넌지시 인가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한 시간, 두 시간 들어있다 나오는 것을 훈련을 통해 늘려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깨달음에 대해 한국 스님에게 자랑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한국에서 참선을 했던 스님은 그런 상태를 한국의 선불교에서는 무기상태라고 한다고 지적했다. 절대 깨달음이 아니라고. 그것은 귀신굴에 들어간 것이라고 하면서. 인도네시아 스님은 자신의 열반을 부정한다면서 다른 스승들을 찾아서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 받겠다고 센터를 떠났다. 그렇게 이 스님은 2년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마하시 센터에 와서 한국 스님에게 고백했다. 자신의 경험은 깨달음이 아니라고.
마히시 계열(어디라고 밝히지 않겠다.)에서 잠깐 끊어지고 의식이 없는 상태를 가지고 열반을 성취했다고 인가를 받은 많은 한국인들이 떼자니야 사야도에게 와서 자신이 열반을 성취했다고 자랑했다. 떼자니야 사야도는 그들의 깨달음을 모두 부정했다. 그건 깨달음이 아니라고. 깨달음은 어떤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파욱 사야도께서도 의식이 끊어진 것이 깨달음이 아니고 바왕가에 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왕가는 잠재의식이나 무의식과 같은 개념이다. 수행자가 바왕가에 떨어지고 나서 '모든 것이 멈췄다.' '이것이 열반이다.'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께서 열반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바른 설명이지만, 지금 마하시 수행법을 전하는 후대의 스승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깨달음을 인가 받은 한국인들이 그것을 열반이라고 착각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그것을 퍼트리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그런 무기상태에 대해 중국의 선사들이 강하게 경계하는 말씀들이 조사어록에 자주 등장한다. 무기 상태에서 수백년을 있다가 나와도 여전히 욕망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가르침을 설화를 통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해 전해 이해가 없이 바로 위빠사나를 접한 사람들이 깨달음을 착각하는 것이 문제다.
아짠 브람 스님은 깨달음은 행복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깨달음에 대한 기쁨이 넘치면 며칠 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기쁨을 누리고 앉아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붓다께서는 일주일 동안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 기쁨을 누렸다고 설명한다.
어떤 수행법이든지 '나쁜 수행법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한 엉뚱한 오해와 착각은 자신에게도 나쁜 결과를 초래하고 타인에게도 해를 끼친다.
자신이 수다원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죽어서 악처에 떨어진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스스로 자신의 정신 상태를 점검해보면 잘 알 수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