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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 AH-30] 200×99매
흰 가시 선인장
安 輝
구갑목단, 삼각목단, 두환, 난봉옥, 태평환, 금관룡.......화분에 물을 주는 날이다. 거실 응접의자에서 물끄러미 내다본 베란다 저쪽 창밖으로 옅은 안개가 낀 것을 보니, 날씨가 좋을 것 같다.
오늘이구나. 강남 어디, 무슨 호텔이라 했던가. 서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전히 갈피를 못 잡겠다. 심란하여 밤잠을 설친 며칠 사이 온 몸이 욱신거린다. 남편은 어젯밤에도 갔다 오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지 않느냐면서 잔치에 참석할 것을 내게 권했다.
아이들 셋 중 직장이 가장 멀리 있는 맏딸과, 대학교 3학년인 둘째 딸이 우유 한 잔씩으로 아침식사를 때우고 새벽같이 집을 나간 다음, 뒤이어 남편이 된장국에 밥 반 공기를 말아먹고는 출근했다. 셋째로 태어난 대학교 1학년 아들놈은 간밤에 또 컴퓨터와 마주앉아 밤을 지새운 모양인지 늦잠이다. 아무래도 오전 10시 이전에는 제 방문을 열어줄 낌새가 아니다.
한개 두개 틈틈이 사 날라 온 화분이 이젠 베란다 양지쪽을 거의 가득 메웠다. 꽃이 잘 피는 것도 아니고, 만질 수도 없는 가시투성이 물건을 왜 자꾸 사오는 거야. 내가 베란다에다가 선인장을 열 개쯤 사다 놓았을 때, 남편은 영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으로 구두덜거렸다. 그러던 것이, 크고 작은 화분의 수가 쉰 개가 넘도록 늘어난 지금은 아예 아무 말이 없다. 물론 남편이 선인장을 좋아하거나, 새삼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화분에 대해 별 관심이 없기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선인장 가꾸는 일이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보니, 물주는 일에서부터 저희들 손을 빌리지는 않는다. 그것이 아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 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다.
선인장 재배의 기본은 원산지의 환경과 기상조건을 잘 아는 것이다. 처음엔 나도 몰랐었다. 화원에서 듣고, 책을 찾아보면서 익힌 지식이다. 사람들은 흔히 선인장은 사막이 고향인 만큼 물을 안 주어도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생장기와 휴면기를 이해하여 관수량을 조절해야 한다. 재배실의 규모, 날씨, 화분의 크기, 기타 배양토의 조성 등이 고려된 물 주기가 필요하다. 알고 보면 결코 다른 식물보다 쉽지 않은데, 대개의 사람들은 쉬운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서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버지의 칠순. 평생을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 천륜, 삭아들지 않는 한을 함께 맺고 살아온 분의 잔치를 놓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십년 전 회갑잔치에 나는 기어이 참석하지 않았다. 그때는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었다. 아버지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가슴속에 시퍼렇게 곤두서 있던 시절이었다. 어린 아이들과 악착같이 살아야 했던, 살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발버둥 쳐야 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 무렵 하루에 백 군데가 넘는 집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며 우유와 주스를 배달하는 일을 했다.
네 아버지 회갑 한단다. 오지 않을 줄 안다만, 연락이라도 해야겠기에 전화 넣었다. 알고 있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분, 어린 시절 내가 사뭇 어머니로 알고 살았던 큰 고모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벌컥 화가 났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가 회갑잔치를 한다던 그날 방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설황(雪晃). 금관속(屬)인 이놈은 최근 들어 꽤나 신경을 쓰게 한다. 볕쬐기, 물주기에 별 문제가 없는데, 하얀 털에 생기가 엷어지고 왠지 시들하다. 병이 들었나, 아니면 병충해라도 든 것인가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어서 더 걱정스럽다.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이다.
“당신 웬 일이에요?”
“응, 할 말이 있어서.... .”
남편의 목소리에 진지함이 묻어 있다.
“무슨 할 말?”
“다름 아니고 말이야.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아무래도 당신 오늘 서울 갔다 오는 게 좋겠어. 그러지 않으면 나도 그렇고, 아마도 당신 평생 마음에 부담으로 남을 것 같아.”
“...... .”
“혈압도 높으시고.... 건강이 전 같지 않으시다면서? 이제 얼마를 더 사시겠어? 당신 기분 모르는 거 아니지만, 이제 우리도 기분대로만 살기엔 너무 어른이 된 거 아닌가? 어때? 내 말이?”
남편은 아주 작심을 한 듯한 어투였다. 가야 한다는 그의 말은 단호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좀처럼 그렇게 길게 말하는 성격이 아닌 남편이었다. 나는 남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내 마음 속에도 이미 같은 결론이 나 있었는데, 그것을 남편이 확인시켜준 것인지도 몰랐다.
“알았어요. 당신 말대로 할게요.”
“그래. 아주 잘 생각했어요. 역시 우리 마누라야. 툭툭 털고 다녀와. 정성껏 축하해드려, 알았지?”
남편은 좀 지나치다싶을 만큼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떼를 쓰다가 멈춘 어린아이를 어르듯이...... .
전화를 끊고 났을 때, 불현듯 단호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슴속을 훑고 지나갔다. 안 돼. 너는 절대로 고모네 집을 떠나서는 안 돼. 아버지 사는 곳으로 찾아와서도 안 돼, 알았지? 그 소리는 또 한 번 온몸에다가 공허한 기운을 퍼뜨렸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 * *
평일이어서 그런지 기차는 그리 붐비지 않았다.
한복을 입을 때의 첫 느낌은 상쾌하다. 그러나 한 나절쯤 지나면 불편한 마음에 빨리 갈아입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모처럼 한복을 입고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세월이 참 많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결혼식에 이 쪽 식구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을 거다. 26년 전 고모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속으로 ‘내겐 아버지가 없다’고 거듭거듭 다짐해온 세월이 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나를 낳자마자 3일을 못 넘기고 숨을 거두었단다. 워낙 허약했었다고도 하고, 무슨 병이 들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출산의 고역을 못 견뎌서 명을 다한 것만큼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 갓 스물 한살. 2대독자인 아버지에게 닦달하듯 몰아친 집안의 재촉으로 동갑내기 처자와 서둘러 치른 혼례였고, 어머니는 혼인 이듬해에 나를 낳고 운명했다.
앞날이 구만 리 같은 아버지의 형편으로서 딸로 태어난 나 하나 끌어안고 살기란 결코 가당한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2대독자 종손의 커다란 사명 앞에 나는 어쩌면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었으리라.
젊은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로 살았던 기간은 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나마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 늦어서야 퇴근하는 아버지는 할머니 무릎에 안겨있는 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해줄 일이 없었다. 나의 행동반경은 할머니의 방으로 한정되었고, 아버지는 건너 방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나는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른 기억이 없다. 정말 부른 적이 없는지, 아니면 단순히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군청이 있는 읍내 고모네 집으로 작은 옷 보따리와 함께 내 손을 이끌고 온 할머니가 내게 한 말 만큼은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내 기억에 꼭꼭 저장되어 이따금씩 생생하게 메아리처럼 되살아났다. 절대로 고모네 집을 떠나서는 안 돼. 아버지 사는 곳으로 찾아와서도 안 돼, 알았지?
차창 밖 저 만큼에 황금빛 가을 들녘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해안을 스쳐 간 두어 차례 태풍 말고는 비교적 천재지변이 없었던 한 해였다. 풍년이 들었다고, 고향이 어쩌고 하는 방송프로그램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했지만, 이제 농사가 잘 됐느니 마느니 하는 주제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별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이 결혼하던 그 해에도 풍년이 들었었다. 고모의 손길 아래 자라면서 근근이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변변한 직장생활을 해보지도 못한 채 이듬해 첫 번째 맞선으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 때는 이미 내가 고모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고, 고모에게 의탁하여 살면서 뼛속까지 스며든 외로움에 지쳐가던 스물 한 살이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대는 고모의 꼬드김이 아니었어도 나는 쉽게 남편을 택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결정은 남편에게 끌리느냐 끌리지 않느냐 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고모의 결정을 거역하기가 어렵기도 했거니와, 신체에 장애가 있는 남자도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그 이와 맞선을 보기도 전에 이것이 나의 운명이려니 여기고 반쯤 결정을 내려놓았었다.
맞선을 보고, 약혼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는데 걸린 기간은 석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고모의 예고대로 결혼식장에는 아버지가 오지 않았다. 나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함께, 나는 공직생활을 한 아버지의 인생에서 지워진 존재, 아니 지워져야만 되는 존재였다. 결혼식장에서 나는 고모네 내외를 부모로 자리에 앉혔다. 그 날 고모는 남 보기 민망할 정도로 많이 울었다.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온 내가 너무도 가련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오기가 뻗쳤던 것일까, 나는 결혼식 내내 결코 울지 않았다. 아니,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순간 곧바로 숨통이 끊어질 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공포심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부터 나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남편은 우리가 처음 신혼살림을 차린 그 두 칸짜리 문간방에서부터, 행여 내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상처를 줄까봐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시아버지는 남편이 아주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아온 시어머니는 연속극에서나 보게 되는, 그렇게 집착에 빠진 못된 시어머니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남편을 일찍 보내고 아들에게 인생을 걸고 살아온 노인네에게는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남편에게 조금만 소홀해도 난리를 치는가 하면, 남편과의 애정표현이 좀 강하게 드러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떤 식으로든 심술을 폭발시키곤 했다.
아마도, 애초부터 그러려니 했던 마음가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소홀하지도, 극진하지도 말아야 하는 그 아슬아슬한 길을 생각보다 훨씬 더 잘 견뎌냈다. 정말 화가 나고 힘들 때 시어머니가 없는 동안 몇 차례 손가방을 내동댕이치거나, 빨래거리로 나온 옷가지를 꾹꾹 밟아본 적은 있다. 언제나 가슴을 짓누르는 나의 과거, 그것이 언제나 큰 약점으로 작용하면서 내 행동을 한정했다.
그런 고통을 누군가 미리 안 사람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의 아버지만큼은 끝내 그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을 지도 모른다. 분명 나 혼자서 짊어질 까닭이 없는 짐이었음에도 나는 그 고난을 나 하나만의 천명으로 받아들였다.
재혼을 한 아버지는 새 어머니에게서 3남 2녀 주렁주렁 다섯 아이들을 얻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공부를 잘 해서 다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잡아 잘 풀렸다. 아버지에게 요절한 전처소생의 딸 하나가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그 동안 집안 일이 있을 적마다 나는 고모의 자식으로 알려졌고, 나 역시 그런 환경에 잘 적응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때 비로소 고모는 내게 비밀을 상세하게 알려줬다. 그때서야 나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이따금씩 되살아나곤 하던 할머니의 다짐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고모는 새로 시집 온 새 어미의 문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공무원인 아버지의 앞날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에둘러서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런 선택의 가치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다.
* * *
강남은 별천지다. 아파트 한 채에 십 수억씩이나 간다는 소문도 그렇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 의상부터 예사동네 같지 않게 세련된 느낌이다, 길거리 공기에서부터 기이한 찬바람이 돈다. 용산 역에서 택시를 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강남 P호텔 스카이라운지 예식장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예정된 잔치시간은 아직 한 시간도 더 남아 있었지만, 홀에서는 클래식 생음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식장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거북이 모양의 얼음조각에서는 물이 연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 누나! 누나가 오셨네? ....어서 오세요.”
출입구를 들어섰을 때 저만큼 접수대 앞에 멀뚱 서있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잰 걸음으로 다가오면서 외치듯 말했다. 맏아들, 그러니까 아버지가 새 장가를 들어서 처음 낳은 큰 남동생이었다. 대기업 간부로 있는 그는 잿빛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매형은 안 오셨어요?”
“응. 그래...회사 일 때문에 못 왔어.”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이년 전 고모가 돌아가셨을 때 상가에서 보고 처음 보는 셈이었다.
그럴 즈음 저 쪽에서 이복동생들이 하나 둘 놀란 걸음으로 다가왔다.
“언니! 이게 얼마만이에요? 잘 오셨어요.”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 여동생이 내 손을 잡으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빛으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어서 방송국에서 근무한다는 남동생도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나머지는 자기 가족들까지 포함해서 인사를 해도 누구인지를 잘 알아보기 힘들었다.
고급스러운 한복을 차려입은 아버지는 행사장 앞쪽에 놓인 의자에서 일찍 도착한 손님들과 담소를 하는 중이었다. 한발 앞서서 거기까지 나를 안내해 간 큰 남동생이 아버지에게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누나 오셨어요!”
화사한 한복빛깔에 가려 처음엔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아버지는 전보다 많이 늙은 모습이었다. 원래 건장한 체구였던 아버지는 살이 많이 내려서인지 몸도 많이 호리고 표정도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에서 반짝이는 눈빛만이 아직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을 뿐, 아버지는 칠순 치고는 훨씬 더 늙은 노인의 얼굴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낯이 많이 달아올라 화끈거렸다. 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그래. 너 왔니? ..... 잘 왔다.....오느라고 애썼다.”
입으로는 그렇게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반기는 말을 했으나 아버지의 몸은 얼어붙은 듯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어쩌면 아버지 역시 나의 등장이 전혀 기대하지 않던 예상 밖의 일이었으리라.
“왔구나! ......어서 와라. .... .”
어디에 있었던지 그 즈음 새 어머니가 나타났다. 오랫동안 왕래가 있는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새 어머니를 만나는 일이 여전히 쑥스럽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고 살아온 분이라, 만약 내가 함께 살았다면 더 없이 소중했을 수도 있는 분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 분명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목구멍에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새 어머니의 안내에 따라 턱 낮은 무대 옆 친척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고종사촌들...그러니까 내가 어린 시절 친형제자매로 알고 자랐던 고모네 식구가 있었다.
무대 위 오른 쪽에 자리 잡은 꽤 여러 명의, 흰색 연주의상을 입은 악사들이 귀에 익은 가요 음악들을 잔잔한 메들리로 연주했다. 나는 고종사촌들과 함께 앉아서 저만큼 손님들과 담소하며 이따금씩 이를 드러내어 큰 웃음을 짓곤 하는 아버지를 이윽히 바라보는데, 가슴속에서 한 줄기 측은한 마음이 솟아났다. 참 좋은 날임에도, 왜 아버지 당신은 그렇게 초라해 보이시는가. 그 오랜 세월을 돌아서서 내 어깨 한번 잡아주지 않을 만큼 매몰차고 꼿꼿하시던 분이 오늘은 왜 이리 가냘프게 여겨지시는가.... . 새삼스럽게 세월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와 내밀었다. 고등학교 교사 일을 하는 여동생이었다.
“언니! 먼 길 오느라고 시장하실 텐데 이거 좀 들어보세요.”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얼굴은 새 어머니를 빼다 박은 듯 닮아 있었다.
* * *
잔치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창하게 펼쳐졌다. 비교적 성공을 했다는 말을 듣는 이복동생들 때문이었겠지만, 하객들도 엄청나게 많이 왔고 행사내용도 푸짐했다. 특히 내로라하는 유명가수와 탤런트들이 여러 명 찾아와 식전행사로 무대에 잠깐씩 서주는 바람에 마치 연예인들이 잔뜩 캐스팅된 쇼 공연장처럼 화려했다. 방송국에 있는 둘째 남동생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경력소개, 축사, 축가, 주인공인 아버지의 인사말까지 정신없이 흘러가던 잔치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금부터 오늘 칠순잔치 주인공의 자녀들이 한 분씩 나와서 아버님께 잔을 올리고 큰 절도 드리고, 또 축하의 개인기를 보여드리는 순서를 진행하겠습니다.”
사회를 보는 코미디언이 걸쭉한 입담을 섞어가며 마지막 코너를 시작했다.
“자! 그럼 첫 번째 순서로 멀리서 기차를 타고 오신 큰 따님 무대 위로 올라오십시오. 어디 계시지요?”
나는 처음에 그가 찾는 사람이 나인 줄 모르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회자가 무대 앞 쪽으로 나와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이에 곁에 서 있던 큰 남동생이 내게 말했다.
“누나! 지금 누나 찾잖아요! 빨리 무대로 나가세요!”
“응? 나?”
큰 남동생은 어느새 내 뒤로 다가와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일어나 무대 쪽으로 나갔다. 치마가 밟혀서 자꾸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형형색색 울긋불긋한 장식을 고루 갖춘 음식들이 수려하게 차려진 잔칫상 저 쪽에 나란히 앉아있는 아버지와 새 어머니의 얼굴이 벌써부터 발그레 상기돼 있었다. 나는 잔칫상 앞에 놓여 진 탁반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둘째 남동생이 술 주전자를 기울여 탁반 위의 잔을 채우고는 그 잔대를 받아들어 아버지 앞에 올렸다.
나는 아버지에게 천천히 큰 절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올리는 절이었다. 절을 하느라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 무심코 울컥 하고 눈물이 솟구쳤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 물었다.
“자! 이제 큰 따님께서 아버님에게 술잔을 바치고 만수무강하시라고 정성을 다해서 큰 절도 함께 올리셨습니다. 이어서 아버님 기분 좋으시라고 재롱 한번 부려 주셔야 할 텐데요. 어떤 재주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사회자가 능란한 몸짓으로 내게 다가와 마이크를 내밀었다. 사회자의 익살이 흥겨웠던지 장내 어디에선가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주춤거렸다. 무엇을 해야 하나?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갑자기 고모 살아계실 적에 곧잘 부르시던 새타령 생각이 났다.
“잘 할 줄은 모르지만, 새타령 한번 불러볼게요.”
나 역시 어쩌다 회식자리에 낄 적에 가끔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다.
“새타령! 좋습니다. 큰 따님께서 아버님의 뜻 깊은 칠순잔치를 맞아서 새타령을 불러 바치겠답니다. 여러분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사회자가 키보드를 앞에 놓고 앉은 밴드마스터와 관중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곡목을 소개했다. 박수소리가 쏟아졌고, 성능 좋은 스피커를 타고 생각보다 빨리 반주가 퍼져 나왔다.
- 새가 날아든다. 왼갖 잡새가 날아든다. 새 중에는 봉황새 만수 문전에 풍년새, 산고곡심 무인처 춘림비조 뭇새들이, 농춘화답에 짝을 지어 쌍거래 날아든다..... .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엷게 웃고 있었다. 미소가 살짝 담긴 얼굴에 붉은 기운이 역력한 아버지는 웅숭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빛에서 흔연한 기쁨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노랫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참아왔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이 가슴속에서 샘물처럼 펑펑 솟아올랐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혼신의 힘을 다해 눈물을 삼키며,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눈물 사이로 영문을 몰라 하는 약간은 뜨악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는 사회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 말 잘 허는 앵무새 춤 잘 추는 학 두루미, 솟댕쑥국, 앵매기 뚜리루, 대처의 비우 소로기...... .
노래를 막 다 마쳐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비명소리 같은 것이 들리면서 누군가가 무대 위로 달려 올라왔다. 곧이어 음악소리도 끊겼다.
나는 깜짝 놀라 눈물범벅이 된 눈을 떴다. 누군가 몇 사람이 아버지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아버님이 쓰러지셨어!”
앞 쪽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의 주인공은 작은 남동생이었다.
“뭐라구?.....뭐라구?....아버님이?...어떡해! 어떡해!”
어느 틈엔지 여동생들도 소리치며 그 쪽으로 몰려갔다. 순식간에 몸이 꽝꽝 얼어붙은 나는 무대 위에 마이크를 떨어트린 채 어안이 벙벙해 어쩌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누군가가 축 처진 아버지를 들쳐 업고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지러웠다.
* * *
내가 부른 새타령 때문에 아버지가 쓰러졌을 거라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음에도, 나는 하필이면 그 순간 아버지가 쓰러진 일 때문에 마음이 착잡했다. 칠순잔치는 엉망이 되었고, 모두들 앰뷸런스에 실려 간 아버지를 바투 따라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 들어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족들의 알록달록한 의상이 병원 복도 안에서 참 어울리지 않는다싶을 만큼 화사했다. 초조로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내게 먼저 다가온 건 새 어머니였다. 새 어머니는 떨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네가 이렇게 잘 왔는데 이상하게 됐구나. 너무 상심 말거라. 괜찮으실 거다.”
또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어쩌면 나보다 더 당황했을 분이었을 텐데도 난감해하는 나를 헤아려 위로를 해 주는 새 어머니의 마음이 처음으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사실 나는 오랜 세월 새 어머니에게 반감을 지니고 살았다. 아버지에게 나를 찾지 못하도록 모진 짓을 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런데도 내게 새 어머니는 나와 아버지를 갈라놓는 장벽처럼 느껴졌다.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고,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허망한 가정이었음에도, 새 어머니만 아니었다면 나는 아버지로부터 다사로운 사랑을 받으면서 훨씬 더 행복하게 살았을 지도 모른다는 미련이 자꾸만 들던 거였다.
세월이 다 지나고 보니 부질없는 미움이고, 덧없는 원망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는 됐지만 부모를 모르고 살아야했던, 아비를 알고도 가까이 하고 살 수 없었던 나의 세월은 참 많은 것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편의 묵극처럼 모두 말문을 닫고 착잡한 표정을 나누면서 병원 복도 의자에 늘어서 앉아있던 우리들에게 젊은 남자의사가 차트를 손에 든 채 다가왔다.
“심근경색입니다. 관상동맥 협착이 왔습니다.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하니까 기다려주십시오.”
의사의 ‘심근경색’이라는 말에 다들 멀뚱한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병인지 잘 알고 사는 사람들이 드문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신가요?”
큰 남동생이 차분한 음성으로 의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사이에 조금은 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괜찮으실 겁니다. 빨리 모셔왔기 때문에 응급처치를 잘 했고, 시술만 잘 되면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실 것으로 보입니다.”
의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시술은 어떤 거죠?”
“PCTA라는 건데요, 우리말로 ‘경피적 관상동맥 풍선 성형술’이라고 하지요. 아주 가는 철사가 달린 작은 풍선도자를 환자의 대퇴동맥을 통해 관상동맥의 협착 부위에 통과시킨 후 풍선을 부풀려 관상동맥의 협착 부위를 넓혀주는 시술입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일종의 배관 공사처럼, 좁혀진 혈관에 파이프를 넣어서 부풀려 주는 것이라 하던가.... .
“위험한 시술은 아닌가요?”
교사를 하는 여동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서며 물었다.
“대체로 위험하진 않습니다만, 이게 정밀한 시술이 되다보니까 아주 드물게는 거의 오천 명 중에 한 명 정도로 문제가 생겨서 곧바로 대수술을 해야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정도는 일반 수술에서보다 훨씬 안전한 셈이죠.”
아마도 관상동맥 성형술인가 뭔가를 할 적마다 그런 말을 해와서인지 의사의 설명은 제법 일목요연하게 들려왔다.
칠순잔치를 하다가 갑자기 병원으로 몰려 온 일이 불유쾌하긴 했어도, 뭔가 시술을 하면 무사할 수 있다하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 다들 조금은 편안해진 낯빛들이었다.
아버지는 관상동맥 성형술을 시술하는 별도의 방으로 옮겨졌다. 이동 병상 위에서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마치 살며시 잠이 들어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가 그런대로 안정된 얼굴이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시술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가족대기실에서 혈관조영을 통해 화면으로 비쳐진 아버지의 심혈관은 부분적으로 실처럼 가늘어진 부분이 두 군데나 있었다. 과장이라는 의사가 안에서 기계를 잡고 시술을 하는 동안 예의 그 젊은 의사는 가족들 곁에서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며 아주 자상하게 경과를 설명해주었다. 혈관을 타고 들어간 철사를 통해 파이프 같은 것이 슬금슬금 들어가 좁혀진 혈관부위에 머물러 고정되는 과정이 낱낱이 보였다.
시술이 끝난 아버지는 절개된 대퇴동맥 부위의 안전한 봉합을 위해 별도의 집중관리 병실로 옮겨졌다.
“시술은 잘 됐습니다. 이제 절개부위를 압박한 상태에서 최소한 12시간 정도는 안정을 취하셔야 됩니다. 잘못 움직이거나 하면 심한 출혈로 비상이 걸릴 수도 있어서 간호사들이 집중관리를 합니다. 그 동안은 아무래도 직접 볼 수가 없으니 가족들은 이제 자리를 떠나셨다가 정해진 면회시간에 다시 오시지요.”
젊은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거기를 떠났다.
* * *
“당신 새타령 때문에 아버님이 그렇게 된 게 아냐. 내가 큰 처남한테 들었는데, 아버님 심장이 나빠지신 지는 꽤 오래 됐대. 협심증 증상이 나타나서 병원에 가자고 여러 번 재촉했는데도 노인네가 고집을 부려서 병을 키웠다는 거야. 혹시나 제 누나가 그 일로 마음을 쓸까봐 걱정까지 하더라고.... .”
며칠 째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내가 딱했던지 저녁 늦게 퇴근한 남편의 말이 길어졌다. 남편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심사를 짯짯이 살피는 눈치였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은 안 하는데, 통 마음이 가라앉지 않네요. 아버지 그렇게 되고나니까, 나 살아온 게 뭐였는지 자꾸만 회의 같은 게 일어나기도 하고.... .”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럴 거야. 마음을 좀 더 느긋하게 먹어봐요.”
아버지의 칠순 잔치가 이상하게 되어버린 일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걱정하지 말고 그만 내려가 보라며 여동생들이 등을 떠밀고 남동생들도 서둘러서, 그날 저녁 나는 집으로 내려왔다.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자꾸만 눈물이 나서 애를 먹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긴 세월을 고여 있던 설움 덩어리가 자꾸만 고개를 쳐들고 울음 알갱이를 피워 올렸다.
집에 온 다음 연 사흘 동안을 나는 도무지 맥을 출 수가 없었다. 외출을 할 의욕도 나지 않아 거의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 역시 내가 부른 새타령 때문에 아버지가 그렇게 쓰러졌다고 딱히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필이면 그 순간에 그런 상황이 벌어진 일에 대해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궁리해도, 내가 새타령을 부른 일이 결코 그 원인이 될 수 없는 일이라면 궁극적으로 그렇게 칠순잔치에 간 일 자체가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던 끝에 나는 다시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왜 하필이면 그 대목에서 쓰러져서 나를 이렇게 곤혹스럽게 하시는가. 왜 이렇게 내게 가혹하신가.... .
남편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는지 아이들도 내 눈치를 보며, 가능하면 내가 성가셔 할 일을 만들지 않았다. 웬일로 아이들은 밥이며 반찬까지 저희들 손으로 해결하고, 이것저것 만들어놓고 내 손을 이끌기도 했다.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아이들은 남편과 함께 내가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왔는지를 가장 잘 아는 존재들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두해 전 고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고모할머니를 외할머니인 양 여기고 잘 지냈다. 그러나 막상 고모가 죽고 난 다음부터는 아이들도 예전 같지가 않았다. 명절이면 달려갈 궁리를 먼저 하던 아이들도 발길을 끊다시피 했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허탈한 심사 속에 빠진 나는 병원에 입원해있는 아버지의 소식을 물어보는 것조차 잘 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내려 온 다음날 큰 남동생에게 한번 전화를 했는데, 다행히 차도가 있어서 좋아졌다고 했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차례 아버지의 소식을 꼬박 전해오는 사람은 교사를 하는 여동생이었다. 여동생 역시 하필이면 내가 막 노래를 부르는 그 때 아버지가 쓰러진 일로 내가 마음을 상할까봐 노심초사하는 낌새였다.
“엄마! 이것 좀 들어보셔요. 파전 좀 구워봤는데, 잘 됐나 모르겠네요.”
맏딸아이가 쟁반을 들고 안방 문을 열었다. 구수한 냄새가 짙게 나는 것으로 보아서 굽자마자 금세 가지고 들어 온 모양이었다.
“그거 참 먹음직스럽구나.”
남편이 먼저 젓가락을 들어 한 점 뜯어서 간장에 찍어 내 입으로 가져왔다. 마지못해 받아먹은 음식이었지만, 나무랄 데 없이 맛이 괜찮았다.
“이제 네가 파전은 나보다 더 잘 굽는구나. 아주 맛있네.”
“아니에요. 엄마가 만드는 것에 비하면 아직 형편없죠.”
크게 한 점 뜯어서 입에 문 남편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제 우리 마음 놓고 맏사위 봐도 되겠네. 너 데려갈 남자 아직도 없냐?”
스물다섯 살. 따지고 보면 이제는 결혼을 생각할 나이도 되긴 했다.
딸아이는 이따금씩 들어온 이야기였던 탓인지 아무 대꾸도 없이 씽긋 웃으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직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표정과 행동으로 보아서 누군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람없이 자라는 일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탓에 어미의 눈에 거슬림 없이 늘 얌전히 커 준 첫사랑 맏딸아이가 고맙게 느껴질 때가 더러 있다. 머지않아 저 아이가 떠나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불현듯 콧잔등이 시려왔다.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고 ‘네, 둔산동입니다’하고 통화를 시작하던 남편의 표정에 긴장의 빛이 퍼졌다.
“아, 예. 아버님. 저 권 서방입니다. .......좀 어떠십니까? ........지난 번 잔치에 참석치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 예 바꿔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어느 틈엔지 벌떡 일어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송화구 쪽을 손바닥으로 막은 채 내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병원에 계신 아버님이야!”
나는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 아버지가 내게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있었던가?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나는 긴장 때문에 손을 떨었다.
“아,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나다. 애비다.”
“네. 좀 나아지셨어요?”
“그래.....이제 괜찮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수화기 속에 실려 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하긴 멀쩡한 젊은이도 병원에서 며칠 지나면 기운이 빠질 판인데, 노인네가 오죽하랴.
“몸은 좀 어떠셔요.”
“이제 많이 좋아졌다. 내일이면 퇴원해도 된다고 그러더라.”
“잘 됐네요. 그런데, 기왕에 병원 가신 거 종합검진 좀 받아보시지요?”
“안 그래도 몇 가지 검사 받았는데, 심장에 생긴 문제 말고는 다 괜찮다고 그러더라. 걱정 말아라.”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목구멍을 올라오다가 그 안쪽에서 턱 걸린 채 더 이상 넘어오지를 못했다. 애증으로 점철된 ‘아버지’라는 이름의 그 분에 대한 복잡한 내 감정의 분열은 아직도 미완인 채로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그럼.... 내 걱정은 말고, 잘 지내라. 그리고 권 서방하고 애들하고 같이 시간 날 때 서울 집에 한 번 왔다 가거라.”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떨리게 들려왔다. 뜻밖으로 아버지는 그리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가 느꺼워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럼 잘 지내렴. ..............참, 그런데 얘야.”
전화를 막 끊으려던 아버지가 다시 나를 불렀다.
“네.”
“네게 꼭 할 말이 있다. .... 내가.......참 너한테 몹쓸 아버지로 오래 살았나 보다. .....정말 미안하구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더욱 떨림이 커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속으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눈물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터져 오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꺽꺽 울고 말았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잘들 지내라. 다음에 만나고.... .”
아버지는 내가 우는 소리를 더 이상 듣기가 힘들었던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어느 틈엔가 안방으로 몰려 온 자식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지켜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남편은 복잡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엎드려 울었다.
* * *
한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가고 창문으로부터 새로운 날이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남편은 혹시라도 내가 더 아파할까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치를 보았고, 아이들 역시 저희들 방에 가서도 내게 신경을 아주 끄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긴 세월을 원망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아버지를 이제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 어쩌면 모진 세월을 어쩔 수없이 그렇게 살아야 했을지도 모를 노인네에게 좀처럼 정리가 잘 안 되는 나의 이 심사는 또 무엇인가. 이게 ‘한(恨)’이라면 이 한을 아주 풀어낼 수 있는 길은 또 무엇일까. 그리고 정작 이 한을 풀어낼 방법이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새벽녘에 눈꺼풀이 너무 쓰리고 무거워 잠시 눈을 붙이긴 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잠을 제대로 잔 것도 아니다. 눈두덩은 여전히 불에 댄 듯 뜨겁고 혀는 말라있었다. 딸아이가 가져다 놓은 보리차를 한 잔 따러 마시고 나니 다시 피곤이 엄습했다. 나는 다시 스르르 잠자리에 쓰러졌다.
밤새 못 자고 부스럭거리는 나 때문에 함께 잠을 설친 남편이 선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소리를 냈다.
“이봐요. 아무래도 이번 주말에 아이들하고 함께 서울 한 번 갔다 와야 되지 않겠어?”
남편은 내가 좀처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결론에 먼저 도달해 있는 것일까. 그런 남편의 말이 내게 곧바로 반발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대답 대신 나는 눈을 감은 채 끄응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그런 내 태도를 남편은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자신의 생각을 한 발짝 더 내밀었다.
“아이들한테는 내가 이야기해놓을 테니 그렇게 합시다. 이제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서도 좀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된 것 같소.”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내 깊은 내면으로부터 용암처럼 끌어 오르는 분노가 도저히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매사에 신중한 편인 남편 역시 그런 내 심중을 잘 헤아려 더 이상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스스로 갈무리하지 못하는 난제를 놓고 남편은 늘 가슴깊이 딱해하는 마음을 눈빛으로 감추지 못하곤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장에 병이 생겨 동맥에 배관공사 비슷한 것까지 한 늙은 노인네를 놓고, 그 분이 본의든 아니든 아무리 내게 모진 아버지로 살았다 해도 지금 내가 못내 고개를 돌리고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내 의식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엄마! 여기 빨리 나와 보세요!”
거실 쪽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엄마가 매일 신경 쓰시던 설황인가 하는 선인장이 꽃을 피웠어요! 아주 이뿐 꽃이에요!”
매일 늦잠을 자던 녀석이 오늘은 웬일로 일찍 일어난 모양이다.
나는 ‘설황’이라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베란다 쪽에서 쏟아져 들어온 햇살로 눈이 부셨다. 아들은 베란다에 놓여있는 수 많은 선인장 화분들 중에서 설황을 찾아내어 그 앞에 서 있었다. 어느 틈엔지 둘째 딸이 그 옆에 함께 서서 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 두 송이가 아니에요, 엄마! 이 꽃 좀 봐요. 어쩌면 이렇게 화려할 수 있죠? 정말 너무 예쁘다.”
나도 처음 보는 꽃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던 날 잠깐 내다보니 설황 이놈은 여전히 시들해보였는데, 그 이후에 나는 심신이 어지러워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렇게 관심 두지 않고 있던 사이에 이놈이 수두룩 꽃을 피워 물었다. 꽃은 이미 두 송이가 만개를 했고, 선인장 정수리 여기저기에 잇달아 열 송이는 더 꽃 순을 피워 올리는 중이었다. 작은 연꽃 모양의 화려한 주황색 꽃잎 한가운데는 노란 수술이 앙증맞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당신이 선인장을 좋아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모래땅에서 가시투성이인 채로 억세게 살아내는 선인장을 보면서 당신은 특별하게 느끼는 바가 있는 거야. 스스로를 닮은 선인장을 키우면서 당신은 위로를 받고 있는 거라고. .....언젠가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베란다를 다 떠나고 난 다음에도 나는 한참 동안이나 화려한 꽃을 피워 올린 설황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느새 마음이 훨씬 더 편안해졌다. 쉰 개가 넘는 소중한 선인장들을 바라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젠 내 마음 밭에도 꽃을 피울 때가 된 것인가..... . 尾 <2008.6.10 草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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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곡님! 소중하게 올려주신 옥필 감사히 읽었습니다... 남편이 참으로 조율을 잘 하는군요. 주인공이 남편을 참 잘 만났다는 생각입니다... ^^*
으음~ 주인공이 친구라던 그 소설이군요. 초고라니 교정 바랍니다. "고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모할머니를 외할머니인 양 여기고 잘 지냈다." 중 '이모할머니를'이 아니라 '고모할머니를'이 맞습니다.
Thanks.....ㅎ.......아빠의 고모가 고모할머니인데, 엄마의 고모도 고모할머니인가?......헷갈렸네요.
정확히는 외할아버지 여동생(누난가?)이니 외고모할머니라고 해야 되나?..... 나도 헷갈림다.ㅎㅎ 어쨌든 이모할머니는 아니라는 겁니다.
읽다 너무 늦어 들어갑니다. 다시 와서 읽을께요
제게는 없는 재능이라 더욱 수수하고 담담한 문체가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집에 있는 선인장이 보고 싶군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