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 테르몰리에 있는 해양경찰서로 갔다. 드디어 출항 신고를 하고 허가증을 받기 위해서다. 해양경찰서에 가니 입구에서 젊은 남자경찰이 용건을 묻는다. 그러더니 어떤 여경이 나오고 그 여경은 우리를 바로 앞 건물로 인도한다. 두 칸짜리 아주 작은 건물이다. 거기엔 약간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숙한 사수와 30대 초반으로 젊은 부사수 단 둘이 근무한다, 여기가 입출항을 관리하는 곳인가 보다. 사수는 영어를 못하고 부사수는 영어를 한다. 나는 다음 주 화요일쯤 여기서 출항하고 싶다. 그러나 일기예보에 소나기라고 하니, 수요일에 출항할 수도 있다. 여기서 갑자기 그들의 질문 소나기가 시작된다.
마리나스베바 전의 항구는 어디인가? : 마리나스베바가 처음이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왔으며 여기서 배를 사서 한국으로 출항하는 거다.
어느 한국인가? : 남한이다.
선원은 이 세 명인가? 너희는 가족인가? : 그렇고 그렇다.
다음 항구는 어디인가? 이탈리아에서 다른 항구에 들를 것인가? : 그렇다 일단 마리나스베바에서 오트란트항까지 시험항해다. 이후 별 문제가 없으면 곧장 그리스 크레타로 간다.
나는 미리 정리해 둔 항구 목록을 보여준다. 여기 해경들은 이탈리아 항구 외엔 관심이 없다. 여기도 관할 구역이 있는 게다.
배는 어디로 가나? : 대한민국 강릉이다.
네가 태어난 곳은? : 강릉이다.
너의 주소는? : 강릉이다. 여기서 그들은 미소를 짓는다. 아마 그들도 여기 토박이들 아닐까?
나는 준비한 서류와 우리 세 사람 여권을 몽땅 해경에게 전한다. 뭐가 진짜 필요한 서류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해경이 필요서류는 왼쪽, 불필요한 서류는 오른쪽으로 정리한다. 나는 서류작업을 마친 뒤 왼쪽 서류만 따로 정리해 지니고 다니면 된다. 사수와 부사수는 서로 뭔가 열심히 토론해 가며,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진지하게 서류 확인 작업을 한다. 주로 부사수가 묻고 사수는 오케이를 연발한다. 30분쯤 열심히 서류 작업을 하더니, 나에게 한국의 수입인지 같은 것을 보여주며 사오라고 한다. 나는 은행이 어디냐 묻는다. 그들은 내게 16유로 수입인지 명칭을 써주고, 내 핸드폰 구글 맵을 열어 위치를 알려준다. 가보니 은행이 아니라 주유소에 딸린 편의점이다. 이탈리아 해경이 써준 쪽지를 보여주니, 카드로 하면 17유로란다.
참 희한하다. 정부 수입인지를 편의점에서? 한국도 그런가? 돌아가면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나는 늘 은행에서만 수입인지를 산 기억이다.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며 기다리다 보니 앗! 와이파이가 된다. 얼른 아내와 아이를 데려다가 강릉 집과 카카오 페이스톡을 한다. 부모님이 아기 얼굴을 보고 너무 기뻐하신다. 오늘은 특히나 아버님 생신이시다. 앗! 그러고 보니 발렌타인데이이기도 하네. 그래서 어제 아내가 초콜릿을 잔뜩 사준건가? 아니라면 사랑이 식은 거냐고 따져야지!
수입인지를 사서 돌아가니, 해경의 서류 작업도 막바지다. 내가 준 서류를 모두 돌려준다. 그러면서 이번 주 금요일 오전 10시까지 다시 와서 허가 서류를 받아가라는 거다. 헛! 오늘 오기를 잘했네. 나는 바로 당일 허가가 나는 줄 알았다. 목요일이나 금요일 왔으면 아예 다음 주 늦게나 출항할 뻔 했다. 뭐든 서두르는 성격 덕을 좀 본 상황이다. 나는 몇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었지만, 일단 허가 서류를 받고 나서 묻기로 한다. E.U.국가들은 모두 따로 국경이 없는 상황이니, 그리스 크레타에서 C.I.Q. (항공이나 배를 이용하여 공항 또는 항만으로 출입국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3대 수속으로 세관 검사(customs), 출입국 관리(immigration), 검역(quarantine) )를 하는 건가? 아니면 들르는 나라마다 다 C.I.Q.를 하는 건가? 는 금요일 오전에 질문하기로 한다. 화장실을 물으니 점잖은 사수가 직접 앞 건물 화장실 앞까지 안내해준다. 진짜 보기 드문 친절이다. 이러니 미워할 수 없는 이탈리아다.
모처럼 테르몰리까지 왔으니 잠시 관광하기로 한다. 유서 깊은 성벽 앞에서 사진을 찍고 코인 빨래방을 찾아 빨래도 하기로 한다. 가보니 웬걸 딸랑 밤톨만 한 세탁기 3개에 동전 교환기도 없다. 실망하고 나오면서, 지나다 본 동네 장터에 들렀다. 분위기가 딱 한국의 5일장 분위기다. 갖가지 물건에 입던 옷가지도 내다 판다. 기웃거리며 구경하다, 과일과 야채가게 앞에 선다. 애기머리만한 양배추 하나와 커다란 흰 브로컬리 3개가 3유로다. 과일가게에서 5유로를 주고 이것저것 바구니에 넣는데, 이래도 되나 싶게 많이 담으라고 한다. 키위와 서양배도 덤으로 잔뜩 준다. 야채와 과일을 양손 무겁게 장을 봤는데도 전부 8유로다. 시골 장터 인심이다. 다 좋았는데, 촬영하다보니 웬 흑인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찍혔느냐고 한다? 니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실수지만 그럴거다. 라고 하니 지워 달라고 한다. 짜식 범죄자인가? 눈앞에서 지워주니 인상을 쓰며 물러난다. 나도 니 면상 같은 건 별로 쓸데없다구.
장보기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한다. 전에도 말했지만 비싼 음식이나 싼 음식이나 우리는 이탈리아 음식 맛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냥 다 기본적으로 적당히 맛나다. 검색한 곳은 테르몰리에 있는 나폴리 피자집이다. 이탈리아 지방 도시안쪽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뒷문인 듯 주방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상관 말고 들어오란다. 피자소피아와 봉골레 파스타는 당연히 맛이 끝내줬다. 신문과 방송에 많이 나온 집인 듯하다. 주인과 주방장이 번갈아 나와 음식 맛을 묻고 가게 안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라 권한다. 이런 친절한 이탈리안들과 유모차 실은 자동차만 습격하는 이탈리안들은 같은 종자들일까? 하긴 우리나라도 범죄자는 있지. 외국 나오면 다 애국자 된다드니.
매번 가는 산살보의 Eco wash 코인 빨래방으로 간다. 이번에 이탈리아 와서 여기서만 5번째 세탁인가보다. 전 선주 까를로가 전해 줄 서류가 있는데, 세탁소에서 만나기로 한다. 까를로 사무실이 이근방인 것 같으니 그게 낫다. 오후 3시 30분에 만나기로 했는데, 40분에 왔다. 그래도 까를로는 약속을 잘 지키는 이탈리안이다. 위성전화기는 SIM 카드를 바꿔야 한단다. 다시 뚜마로(내일)라며 웃는다. 나도 웃어야지 별 수 있나? 이제 경유통 7개와 위성전화. 빌지펌프 스위치 커버만 받으면 된다. 뚜마로 뚜마로 해도 이제 며칠 안 남았다. 이탈리아의 하루는 늘 너무 짧다. 오후 5시가 되니 이미 하루가 다 간 느낌. 마리나 샤워실 온수 탱크가 작아서 나는 아침에 샤워하고 아내와 아기는 오후에 샤워한다. 며칠 전 가족이 동시에 샤워하다 찬물이 쏟아져 얼어 죽을 뻔 한 경험을 하고 난 뒤엔 우리가 그렇게 룰을 정했다.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 해경에 출항허가 신청도 했다. 금요일에 허가서를 받고 다음 주 월화 소나기를 피하고 수요일이면 출항이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바다 항해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