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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1-52, 예수의 유년 시절이 보여주는 사람과 하나님 되심 24.3.3, 박홍섭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보여주는 유일한 성경의 기록입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을 찾아 절기를 지켰던 경건한 가정의 부부인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41-42). 유월절이 어떤 절기입니까?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린 양의 피를 믿음으로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을 때 애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던 하나님의 장자 심판이 건너가고 출애굽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니 유월절에 피 흘려 죽은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출애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진 우리 구원의 예표입니다.
지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신 12살의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는 장차 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본문이 어쩌다 자녀를 잃어버린 아찔한 실종 사고를 다루는 해프닝이 아니라 유월절과 성전을 배경으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먼저 누가는 본문의 시작과 마지막인 40절과 52절에 예수의 유년 시절을 요약하는 말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키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머물러 있어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가더라” 이 말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와 같이 어린 시절을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양육 아래서 키와 지혜가 자랐던 완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41-51에 기록된 예수님의 실종사건은 바로 소년 예수님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과 동행하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완전한 사람인 동시에 하늘 아버지의 집에 거하여 하늘의 진리로 땅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고자 하는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하나의 절기로 묶어서 일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한 주간의 절기 규례를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예수님은 일행과 함께 가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이 사실을 모른 체 그냥 집으로 갑니다. 하룻길을 간 후에야 예수가 동행 중에 없음을 알게 된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43-45). 어떻게 부모가 아이가 없어진 것도 모른 체 하루나 지날 수 있냐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알면 이해가 됩니다. 당시는 절기의 순례길에 친족별로 이동을 했습니다. 남자는 남자 대로 행렬을 이루고, 여자와 아이들이 또 다른 한 행렬을 이루어 함께 길을 떠났고 저녁 무렵에나 한 장소에 모여, 식사하며 무리를 점검하고 다음 길을 논의했습니다. 12살의 예수는 13살이 되면 성인이 되니 남성들 틈에 끼어도 됐고, 아직 성인이 아니었으므로 여성 그룹에 끼어도 됩니다. 요셉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거니 생각하였고 마리아는 아버지에게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지나고 저녁에 같은 장소에 모여보니 아이가 없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요셉과 마리아는 놀라고 당황해서 예수를 찾기 시작합니다. 44-47을 보십시오.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들어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사흘을 그렇게 예수를 찾다가 성전에서 주님을 찾았을 때 거기서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과 함께 있으면서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있던 자들이 다 예수님의 대답과 질문에 담겨 있는 지혜와 통찰을 놀랍게 여겼는데(46-47) 이는 이사야가 11:2에서 예언한 메시아의 특징인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의 반영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주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학생이 교사의 발 앞에 앉아서 배웠습니다. 소년 예수도 선생들 가운데 앉아 있고 선생들이 예수의 둘레에 서 있습니다. 지금 예수는 겸손하게 배우는 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의 질문과 답은 듣는 자들은 다 그 지혜와 대답에 놀랄 정도로 경이로웠습니다. 이는 소년 예수가 단순히 비범한 학생이 아니라 오히려 성전의 스승을 가르치는 참된 교사이신 하나님의 모습에 더 가깝다는 뜻입니다. 이를 반증이나 하듯이 예수님은 왜 말도 하지 않고 성전에 남아 있었냐고 꾸짖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48-49절입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여기 부모가 놀랐다는 말은 앞의 47절에서 선생들과 무리가 감탄하며 놀랐다는 뜻의 ‘엑시스테미’라는 말과는 다른 단어로 화난다는 뜻에 가까운 ‘에크플레소’라는 단어입니다. 마리아의 꾸짖음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49). 요셉을 ‘네 아버지’로 표현한 마리아의 꾸짖음에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한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당신의 신성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의 이 놀라운 답변을 듣고도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50절이죠.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핟더라” 여기가 생각해야 할 지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천사로부터 직접 예수에 대한 말씀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이 낳은 육신의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리아를 통해서 보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1:32, 35). 목자들도 증언했고 마리아가 산모의 정결 규례를 위해 성전을 찾았을 때 시므온과 안나도 이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방의 빛이고 이스라엘의 위로요 예루살렘의 속량이라고 증언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때로부터 12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아직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육신의 부모로 키우고 있는 12년이라는 일상의 반복을 경험하면서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이 아이가 자신들의 구원자 되심을 잊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월절을 열심히 지키면서도 정작 그 주인공으로 오신 소년 예수를 잃어버리고 그의 하나님 됨을 잊어버리고 있는 영적 망각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일행 가운데 당연히 “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행 중에 없었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2박 3일 동안 교회를 위한 신학 포럼 연구위원 MT겸 포럼이 제주도에서 있었습니다. 여러 주제에 관한 토론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뇌과학과 목회에 관한 치열한 난상토론이 굉장히 뜨겁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저녁을 먹고 돌아오다가 제가 지갑을 잃어버리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숙소에 돌아와서 당연히 뒷주머니에 “있겠지”라고 생각했던 지갑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저는 너무 당황했습니다. 특별히 평소에 현금을 잘 안 가지고 다니다가 왜 그날따라 현금을 가지고 있었는지 속도 상하고 각종 카드에다 신분증까지 다 지갑에 들어있었으니 잠시 멘붕이 왔습니다. 바로 카드와 신분증 실종 신고를 하고 저녁 먹었던 식당과 잠시 커피 마시러 들렀던 카페에 전화를 해봤지만 이미 문을 닫아서 연락이 안 되었습니다. 다음날 오전에 식당에 전화해보니 지갑이 없다고 하고 카페는 전화를 계속 안 받아서 카페로 직접 갔습니다.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가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기껏 지갑 하나 잃어버렸는데도 이런 마음인데 자식을 잃어버렸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제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은 덜렁거리는 저의 성격 때문이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왜 예수를 잃어버렸습니까? 영적 부주의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예수님의 실종사건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시고 다시 그들의 영적 감각을 회복시키는 특별한 섭리를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어디서 가장 먼저 찾았습니까? 친척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찾지 못하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방을 뒤져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성전에서 찾습니다. 이 사건을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절기의 의무와 책임을 다 지킨 그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그때, 일종의 성취와 만족을 느끼는 그때 정작 그 절기와 의식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이럴 수 있습니다. 내가 행해야 할 신앙의 책임과 의무를 다 했다고 느끼는 순간, 정작 본질을 놓치는 영적 부주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절기를 지키는데 정작 그 절기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일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없습니까?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으면서, 아니 지금 내 삶에 예수가 없는데도 정작 그 사실조차도 모른 체 하룻길을 지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주하고 바쁜 일상 중에서 어느 틈엔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잃어버리고 나 혼자 나만의 정해진 패턴과 반복되는 일상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걸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3일이나 예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찾으면서도 예수님이 계실만한 곳에서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고 이해하고 알고 있었다면 성전을 가장 먼저 찾아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을 빼고 나머지 장소를 다 찾아 뒤지느라고 3일이나 걸렸습니다. 지금 요셉과 마리아는 아직 아이 예수가 자신들의 보호와 양육이 필요한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예수를 통해 구원받아야 할 대상임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오랫동안의 일상과 인간적인 정을 통해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들의 구원자임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영적 감각을 잊어버리면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다른 엉뚱한 곳에서 찾아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엄습하는 두려움을 어떻게 물리치고 인생의 불안을 무엇으로 해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삶에 계신지 확신이 들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당혹감이 몰려올 때 여러분의 해결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잃어버렸는데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를 모르는 마리아와 요셉처럼 엉뚱한 데를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은 애타는 심정으로 열심히 이곳저곳을 헤매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없는 자리에서 예수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회복이 없는 곳에서 회복을 구하고 소망이 없는 자리에서 소망을 찾고, 평안이 없는 곳에서 평안을 구하고 자유가 없는 자리에서 자유를 갈망할 수 있습니다. 노력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찾고 노력하고 애를 쓰는데 답을 모릅니다. 여기에서도 답을 구하고 저기에서도 방법을 구하는데 찾지 못하고 구하지 못합니다. 선한 의지와 마음을 가졌는데도 방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느 순간 주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예수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바르게 아는 영적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어디서 예수를 찾았습니까? 성전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까? 성경입니다. 왕도가 없습니다. 성경을 잃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찾지 않으면 다른 어디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지 못합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를 아는 지식이라는 예민한 영적 감각이 없으면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그때 가끔 하나님은 내 삶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영적 실종의 사건을 허락하셔서 우리의 정신을 바짝 들게 하십니다. 마리아가 이 사건을 겪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열심을 가지고 내 삶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는 은혜와 영적 감각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