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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비보셋의 넓은 마음을 배우자(2236.2024.2.11)
삼하 19:24-30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제가 설날이어서 고향에는 다녀오셨는지요. 여전이 고속도로에는 차가 많이 밀려도 고향은 그리워서 다녀들 오게 되는데 오늘 얼굴을 보니 무사히 다녀오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고향에 가서 넓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오신줄로 믿습니다. 금년에는 전도하는 일에도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가족들 영혼구원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가족들과는 아름다운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많은 중상모략을 당해 보았습니다. 성도들 중에서는 목사를 적대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다른 한국 교회의 여러 타락한 목회자들이 목회자들의 모습과 똑같은 목사라고, 오해하고 적대시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교역자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종종 만나 볼 수가 있었는데요. 제가 아무리 잘해주려고 노력을 하고, 정말 사랑으로 대하려고 하고 정말 인격적으로 대우해주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자신이 다른 교회에서 받았던 담임 목사로부터 받았던 그런 상처 때문에,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적대적으로 무슨 일을 해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서, 중상모략하는 그런 시각으로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제가 무엇을 해도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 그런 안타까운 경우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는 그런 모략자가 있어요. 그게 누구냐면 사탄인것입니다. 그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들을 향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모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봤자, 아무 소용없어. 하나님은 너 까짓 거의 기도는 들어주지도 않아. 하나님은 가짜야. 하나님이 진짜라면 너같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한테 이럴 수 있어 하면서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을 향해서 끊임없이 이렇게 모함을 해대고 있는데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진짜 믿음으로 마귀를 물리치고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그런가 하고 의심할 때도 있습니다. 다 마귀가 속삭이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므비보셋은 다윗이 피난 가는 그 상황 가운데서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발에 맵시를 내질 못합니다. 아마 밥도 굶었을지도 몰라요. 수염을 깎을 힘이 안 나요. 옷을 빨 그런 여유가 없어요. 모든 힘이 쭉 빠져버려서 오매불망 다윗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그 므비보셋의 모습이 있는데, 그런데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우리가 사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죽는 그 모습을 보고, 그냥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오매불망, 어떻게 하면 살릴 것인가? 애타고 애타 해 하시다가, 결국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신 것이고, 그 아들이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때에도 그 십자가를 바라보시면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1.므비보셋의 인생 추락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인생살다가 보니 추락할 때도 있습니다. 삼하4:4절‘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므비보셋은 사울 왕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왕가에서 태어나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황태자를 아버지로 둔 므비보셋은 장래가 보장된 행운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보장된 미래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나단과 할아버지 사울 왕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소식을 듣고 놀란 유모가 5살 된 므비보셋을 안고 도망하다가 아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두 다리를 저는 장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전쟁터에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왜 도망을 가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중증 장애자가 되는 큰 불행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참 이렇게 넘치는 복을 받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쉽지 않지만, 이토록 한순간에 정반대되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경우도 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마치 욥에게 잇따라 재앙의 소식이 날아들듯 하루아침에 부러움의 자리에서 부끄러움의 자리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할아버지 사울 왕이 지금 왕이 된 다윗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는 온 나라가 다 아는 일이고 보니 므비보셋의 장래는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요나단이 은혜를 베풀고 여인보다 승한 사랑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은혜를 갚을지 원수를 갚을지는 다윗 왕의 몫이니 므비보셋으로는 처분만 바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입장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생존 여부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지 않아 알 길이 없습니다.
사울이 비록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이지만, 일국의 초대 왕이었고 국가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쟁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사람입니다. 더욱 그의 아들 요나단이야말로 다윗에게 둘도 없는 은인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훌륭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이건만, 이렇게까지 집안이 몰락할 수가 있을까 싶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다섯 살짜리 어린 므비보셋이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자라갈지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어느 누가 이런 환경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갈 수 있겠습니까? 결손가정 즉 부모 중 한 분이 안 계셔도 자녀들이 자라가면서 큰 아픔이 되고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과연 므비보셋은 이런 급변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장애자 므비보셋이 건강한 육체를 가진 많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신앙인이요 인격자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장애자에게는 긍지와 비전을, 건강한 몸을 가진 일반인에게는 자기 갱신의 동기를 갖게 해줍니다.
므비보셋은 한 번도 지도자의 자리에 나선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랑하시는 인물 다윗도 이 사람 앞에서만은 초라하게 그 빛을 잃는 모습을 보면서, 신앙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게 하는 이 사람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겠는가 싶어 기쁨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가문의 몰락과 중증 장애에도 무너지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일어섰으며, 억울한 일도 겪고 무시당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그늘을 가진 거목입니다. 그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자랑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마음이 넓은 사람을 좋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마음이 좁은 사람보다 마음이 넓은 사람을 좋아 합니다. 오늘 넓은 마음의 모델 므비보셋을 들여다보며 우리들도 마음을 넓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므비보셋의 인생의 두 번째 시련이 찾아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왕이 궁을 떠날 때 같이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뚝발이였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지 않고는 왕을 따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종 시바가 속였습니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무시하고 나귀에 먹을 것을 실고 다윗을 따라갔습니다. ‘므비보셋의 시종 시바가 안장 얹은 나귀 두 마리에 빵 이백 개, 건포도 백 송이, 여름 과일 백 개, 그리고 포도주 한 말을 싣고 왔다’,‘이게 모두 웬 것이냐’고 왕이 묻자 시바가 대답하였다. ‘이 나귀들은 임금님의 가족이 타실 것들입니다. 빵과 여름 과일은 임금님의 신하들이 먹을 것입니다’ 이는 아부였습니다.
다윗왕은 므비보셋이 따라 올 텐데 오지 않으니까 의심이 나서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시바는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라고 이간질하였습니다. 그가 남아서 나라를 도로 빼앗으려 한다는 고자질이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은 명품인생들이기 때문에 이간질 하거나 고자질 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슬픈 다윗은 삼하16:4절‘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라고 말하며 재산을 모두 시바에게 주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므비보셋은 혼자 걸을 수도 없는 장애자인데 새삼 무슨 일을 꾸밀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사태는 자기 아들 압살롬이 모반한 것인 줄을 번연히 아는데 므비보셋과 무슨 관계가 있고,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2.인생에 변화가 일어난 므비보셋입니다.
삼하9:1-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은 30세에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어 7년 반을 다스렸고 37세에 통일 왕국의 왕이 되어 도합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을 다윗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들이자 원수였습니다. 기뻐하여야 할 지 슬퍼하여야 할지모를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은 다시 아픔을 안고 떠났던 왕궁으로 돌아 왔습니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입니다. 다윗은 나라가 안정되고 왕위를 견고히 한 후에 요나단을 기억하고 요나단의 자손이 혹 남아있는지를 묻습니다. 수소문 끝에 사울 왕의 종 시바를 찾았고, 그를 통하여 므비보셋을 찾아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왕이 왕궁을 떠난 날부터 내내 발을 맵지 아니하고 수염을 깍지 아니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마치 상을 당한 사람처럼 다윗의 고통에 동참하고 살았던 이였습니다.
므비보셋을 부를 즈음에는 다윗의 아들들은 이미 대신이 되어 있었으며(삼하 8:18) 다섯 살이던 므비보셋에게 미가라는 ‘젊은 아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다윗이 왕이 된지 20년 이상의 많은 세월이 지난 후인 것 같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은혜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낸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면 사울 왕의 잔존 세력을 지나치게 경계하였든지 다윗이 부르기 전 므비보셋은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 사연을 살펴보면 감동적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지만 정식으로 왕이 되지 못하였을 때에, 암몬 족속이 요단 동편 길르앗 야베스 지역을 포위한 일이 있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야베스 사람들은 대항할 힘이 없으니 항복하겠다고 하였지만 암몬 왕은 ‘너희 오른 눈을 모두 뽑아야 항복을 받아주겠다’면서 항복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기가 막혔지만 ‘이스라엘 땅으로 구원을 요청하여도 구원할 자가 없으면 그리 하겠다’하고 일주일 기한을 얻어 각 지파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밭에서 소를 몰다가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크게 분개하여, 밭 갈던 소를 잡아 각을 떠서 각 지파에게 보냅니다. ‘나를 따르지 않으면 그 소들도 이같이 하리라’사울은 백성들을 독려하여 암몬 사람을 물리치고 야베스 사람들을 구해냅니다.(삼상 11장)
40년 후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산 싸움에서 전사하자 불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시체를 가져다가 성벽에 매달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야베스 사람들은 밤새도록 블레셋 땅으로 달려가서 그 시신을 찾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사울의 고향 기스가 아닌 자기들이 사는 야베스로 돌아와 금식하고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 지냅니다. 에셀은 도움이란 뜻으로, 40년 전의 도움을 잊지 않고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줌으로 사울 왕이 베푼 오래 전의 은혜를 갚습니다.(삼상 31:11-13)
므비보셋이 요단 동편 길르앗 땅의 마길의 집에 있었던 것도, 이전에 사울 왕에 대한 은혜를 갚으려는 차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다윗은 므비보셋을 불러 이릅니다.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풀겠다. 네 할아버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주마.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 것이다’ 다윗이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은 모든 사랑 이야기의 귀감이 될 정도로 빼어납니다. 그러나 왕이 된 다윗은 요나단의 여인보다 승한 사랑을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는 훨씬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윗을 사랑하는 순간 자기의 겉옷을 벗어주고,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주었습니다. 이후에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해치려는 것을 다윗에게 알려주고 피신을 돕습니다. 또 다윗이 가장 지쳐있고 외로움을 탈 때에 그의 은신처로 찾아가 너는 반드시 왕이 될 것이라며 격려해 주는 요나단입니다.(삼상 23:16) 그 사랑은 무엇으로도 갚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입니다.
므비보셋에게 더 큰 것을 주고서도 부족함을 느껴야 할 다윗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감격하여 아룁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와 다름없는 저를 보살펴 주십니까’ 할아버지가 다윗에게 잘못하기는 하였다지만 아버지 요나단은 다윗의 목숨을 건져주었으니 권리를 주장할 수도 당당할 수도 있건만 주눅이 들은 건지 겸손한건지 그저 황송해 할 따름인 므비보셋을 보면서 측은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합니다.
삼하19:24-30절입니다. 다윗 왕이 반란을 수습하고 환궁합니다. 므비보셋은 왕이 떠난 날부터 발을 씻지 않았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답니다. 자기가 왕이 된다고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닙니다. 다윗이 마중 나온 므비보셋에게 묻습니다. ‘므비보셋이여, 어찌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는가’,‘나는 장애자이지만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는데 종이 나를 속이고 혼자 갔으며, 왕에게 나를 나쁜 쪽으로 모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분이니 처분대로 하십시오. 우리 집안은 왕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도 나를 왕의 식탁에서 먹는 영광을 베푸셨는데 내가 뭐 옳은 것이 있다고 왕에게 탄원을 올리겠습니까’다윗이 말합니다.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눠라’ 종 시바에게 다 가지라고 했던 밭을 나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자신이 잘못 판단하였다는 것을 시인한 것인데 자기가 잘못하였다면 마땅히 바로잡아야지 반반 나누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경솔했음을 즉시 깨닫지만, 왕의 체면 때문인지 잘못을 인정하거나 일을 바로잡으려 하기보다는 종에게 주었던 재산을 나누라면서 얼버무립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또 질문에 답변하는 므비보셋에게 ‘또 네 일을 말하느냐’고 힐문하지만, 왕이 묻는데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시바가 역심을 품었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에 이 부분은 반드시 해명이 필요합니다. 왕이 물으니 답변은 하였지만 권리를 주장하기 위함도 왕의 결정을 뒤집으려는 의사도 없음을 밝힙니다.
므비보셋은 재산을 반 나누지 말고 다 시바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므비보셋은 진정으로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을 들여다 보면 이 정도 마음이 넓어야 마음이 넓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원수라도 충성하는 마음이 넓은 마음입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였습니다. 사울의 가문과 다윗의 가문은 오랫동안 전쟁이 있었습니다. 삼하3:1절‘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비보셋이 다윗을 사랑하고 충성하였습니다. 얼마나 넓은 마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충성할 수 있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온 가문의 만류와 조소속에서도 상대방에게 충성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넓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의 표본이 될 사람입니다. 므비보셋이 자기 아버지 원수 다윗에게 그렇게 충성한 것은 넓은 마음입니다. 반대하던 이를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섬긴 므비보셋은 정말 넓은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이런 넓은 마음을 닮아서 마음을 넓게 쓰시기를 바랍니다.
없어도 있는 듯이 섬긴 마음은 넓은 마음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이 밖으로 나가 고생하는 동안 내내 발을 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옷도 빨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왕의 종이니까 왕이 고생할 때 같이 고생하겠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다윗이 도망친 곳은 광야였습니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을 못 닦을 주인을 생각하며 자기는 물이 있어도 발을 닦지 않았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던지 왕궁을 떠난 왕이 길거리에서 고생하고 있으니 같이 고생하겠다고 동거동락하는 므비보셋의 마음은 진정 신하중에 신하입니다. 넓은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다윗은 밖에서 고생하고 므비보셋은 안에서 고생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식이 고생시키니까 고생하였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데 고생하였습니다. 다윗왕은 아들 때문에 고생하고 므비보셋은 왕 때문에 고생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은 정말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충성하는 이를 찾고 계십니다. 므비보셋은 섬길 왕이 없는 궁중에서 발도 닦지 않고, 옷도 빨지 않고, 수염도 깍지 않고 살면서 무슨 일을 하였을까요? 내 생각에는 늘 기도하였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왕의 방을 청소하였을 것 같습니다. 왕이 살던 방으로 들어가서 어서 속히 왕이 돌아 오기를 기도하는 므비보셋의 마음은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왕을 섬겨야 하는 왕의 종인데 왕이 없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을까요? 우리는 일감이 주어졌을 때 가장 기뻐하여야 합니다. 왕이 없는 가운데서도 므비보셋은 왕이 있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정말 충성된 종이요 넓은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마음이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넓은 마음입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마음은 넓은 마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충성이 아닙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왕이 궁에서 쫓겨날 때 왕과 같이 가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절뚝발이인 그는 나귀없이는 다윗을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의 중심은 따라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시바가 모함을 하였습니다. 시바는 먹을 것을 나귀에 실고 다윗왕에게 갔습니다. 그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다윗왕에게 드리면서 므비보셋이 자기 할아버지 나라를 찾으려고 준비중에 있다고 모함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의 마음을 사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모함을 받고 있는 므비보셋이었지만 그는 말없이 충성하였습니다.
누가 오해하여도 묵묵히 자기 할 일만 충성하였습니다. 왕이 자기 재산을 오해속에서 시바에게 주어도 충성하였습니다. 진정으로 넓은 마음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리라’라는 자세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너무 주변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므비보셋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충성을 다 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변함없이 충성한 므비보셋의 아름다운 충성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넓은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3.므비보셋이란 ‘부끄러움을 없이하는 자’란 뜻의 이름입니다.
아마도 아버지 요나단이 지어준 이름일 것 같은데, 요나단에게 무슨 부끄러움이 있었기에 아들에게 이런 이름까지 지어주면서 그 부끄러움을 없애주기를 기대하였을까요? 요나단은 용맹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것도 자기 것을 다 내주면서 말입니다. 그는 단신으로 블레셋 진영을 쳐서 큰 승리를 거둔 공로자면서도 아버지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오히려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을 때에 구차히 모면하려 들지 않는 의연한 용사였습니다.
다윗을 사랑하여 언약을 맺은 후 죽는 날까지 그 언약에 대해 신실하였으며, 길보아 산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장렬하게 최후를 마칠 때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 가문을 위해 다윗을 제거하려는 헌신적인 아버지 사울 왕이 자랑스럽고 고마울 수도 있었을 텐데, 요나단에게는 그것이 부끄러움 이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였고 그런 삶을 살아왔지만 그래도 그 부끄러움이 씻겨지지 않았기에 자식의 이름을 므비보셋으로 짓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그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님 모셔오라면 부끄러움을 타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생선 행상을 하시느라 비린내로 찌든 어머니를 부끄러워하거나, 연탄 배달로 온통 검정칠을 하고 계신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부모님을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여기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고운 자태를 뽐내며 교장 선생님의 인사를 받으며 학교를 주름잡는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그런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는 아이도 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여러분중에는 부모를 부끄럽게 여긴 적은 없습니까? 없는줄로 믿습니다.
요나단의 간절한 소망은 그의 아들 므비보셋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수치, 할아버지의 수치, 가문의 부끄러움을 므비보셋이 말끔히 씻어 없애주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부끄러운 것들을 많이 갖고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다리를 저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왕족이면서 남에게 얹혀사는 것이 부끄러움일 수도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땅을 제대로 상속받아 관리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가문을 세우고 나라를 되찾을 생각도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므비보셋에게는 그런 것들이 부끄러움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는 아버지 요나단이 무엇을 부끄럽게 여겼고 무슨 부끄러움을 씻어주기를 원하여 자기 이름을 므비보셋으로 지었는지를 많이 생각하였을 것이고, 마침내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 내었던 것 같습니다.
므비보셋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것 같은, 최상의 환경에서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고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부끄러워할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기준을 찾아냈고 그 기준대로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기준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의 유익은 자신의 믿음을 화합할 때에 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4:2).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상주감리교회 성도들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들입니다.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하고,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하며,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므비보셋은 예수님을 모르는 시대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사느라 겪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에 부끄러움을 없애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므비보셋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가문의 부끄러움을 말끔히 씻어낸 위대한 거인입니다. 므비보셋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것들이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므비보셋은 아들의 이름을 미가라고 지었습니다.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의문문(疑問文)은 긍정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데 ‘여호와와 비길 자는 아무도 없다’라는 뜻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아버지 요나단이 자기 이름을 므비보셋으로 지은 것을 기억하면서 자식의 이름을 지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부끄러움을 없애는 자’와 ‘여호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을 합한 의미는 ‘부끄러움이 없이 사는 길은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시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이미 자명해집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면서 그 분의 뜻을 알았고,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그 분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롬12:2절‘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시바의 모함인 줄 알고 시바에게 넘겨준 재산의 절반을 다시 므비보셋에게 주었습니다. 재산을 다 자기를 모함한 시바에게 주라고 하는 마음이 넓은 마음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왕에게 말했습니다(30) 자기를 모함하고 자기를 죽이려고 한 종 시바에게 재산을 모두 주라고 한 말은 참으로 넓은 마음이 아니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므비보셋은 충성스러운 신하였습니다. 마음이 넓은 신하였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날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므비보셋은 마음이 넓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원수에게도 충성하는 마음은 넓은 마음입니다. 안 보여도 보이는 것처럼 충성하는 것은 넓은 마음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넓은 마음입니다. 재산을 다 자기를 모함한 시바에게 주라고 하는 마음이 넓은 마음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저는 여기서 시바는 바로 우리 육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몸이 주님 따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육체가 변하는 것 아닙니다. 이것이 늘 사기치고 유혹하고 하나님을 모반하려고 합니다. 우리 영혼을 진탕에 빠지게 합니다. 게다가 약해지고 병들기 쉽습니다. 몸을 온전히 드리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미숙하고 연약한 육체의 한 계 때문에 온전히 영광 돌리지 못함을 절감합니다.
다윗이 시바를 죽이거나 재산을 다 빼앗지 않는 것도 어쩌면 은혜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수염도 깍지 않고 그 슬픔을 애도한 므비보셋처럼 늘 기도하며 금식하며 자기를 슬퍼하며 애통하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한계에서 실망하지 말고 더 온전히 순종하지 못함을 늘 슬퍼하며 애통하시기 바랍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다 주셨습니다. 이 크신 은혜 주심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어야 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구원 받고 복을 받은 자로 믿고 날마다 감사와 감격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싸우고 죽이고 순종하고 복종하고 육체의 약함과 속성을 가진 자로서 날마다 애통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온갖 은혜를 실제로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