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원고
소년과 능주장
이성교
소년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은 화순천과 지석천이 만나는 두물머리로 너른 평야가 펼쳐진 도곡면 죽청리이다. 마을을 등진 산 언덕배기에 살았던 소년은 눈앞에 넘실대는 강물과 시원스럽게 펼쳐진 평야를 한눈에 보고 자랐다. 그런 소년에게 너른 평야 십 리 남쪽 산자락 끝에 아스라하게 보이는 집단마을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소년이 그곳이 능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능주장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면서부터이다.
“어디만큼 왔나?” “당당 멀었다?”
열 살 아래인 동생이 잠에서 깨어 보챌 때면 등에 업고 능주를 바라보며 했던 문답 길노래이다. 이 노래는 어머니께서 집에 도착하실 때까지 수없이 반복하였다. 그리고 보상으로 눈깔사탕 하나를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소년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은 능주시장의 모습은 13세 때의 일이다. 능주향교에 딸린 명륜당을 이용한 비인가 농공기술학교에 입학한 후이다.
처음 둘러본 소년의 눈에 비친 시장의 풍경은 오후 시간인데도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소년은 장 입구의 거리에 벌여놓은 좌판에 정신을 팔다가 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친구들은 이미 한 바퀴 돌아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소년과 다르게 장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초등학교 다닐 때 가끔 들렀던 경험이 있었다고 했다.
친구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기하게 소년의 발길을 붙들었던 곳은 어물전과 쇠전이었다. 어물전에서는 그때까지 집안의 행사 때나 상에 올랐던 생선들과 교과서에서 그림으로만 보았던 각종 어물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습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쇠전이라 부르던 곳에는 그때까지 팔리지 못한 소들이 입으로 되새김질하면서 꼬리로 파리를 쫒고 있는 모습이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그런 사이에서 밀고 당기며 흥정하는 중개인의 모습은 참 흥미로웠다. 쇠전 주변에는 음식점과 선술집이 모여 있어 그 시간까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래서 그곳을 쇠전거리라 부르며 어물전과 함께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소년은 지금도 능주시장을 떠올릴 때면 영화의 스크린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이 셋 있다.
하나는 외삼촌이 사주었던 국수이다. 소년은 어느 토요일 연주산 너머에 있는 가암리 외가에 갔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 일찍 나뭇짐을 진 외삼촌 뒤를 따라 능주장에 갔다. 외삼촌과 소년이 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뭇짐을 받쳐놓은 지게 여럿이 줄을 지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을 기다리던 끝에 모시옷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외삼촌의 나무를 샀다.
소년은 그때 외삼촌이 나뭇값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돈으로 국수 한 그릇을 사주셨던 기억은 뚜렷하다. 소년은 아직도 국수를 담은 사발에 찬물을 붓고 사카린을 넣어 먹었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국수 한 그릇 값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다만 몇 년 후에 남광주에 근로자들을 상대로 운영하는 ‘재건식당’이라고 하는 큰 창고 같은 건물에서 국수를 먹은 적이 있다. 그때 호주머니에 남은 돈 10원으로 두 그릇을 샀으니 5원 이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다음은 나이롱 극장이라 불렀던 약장수들의 단막극이다. 소년은 학교 수업이 끝나고 능주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던 중 쇠전 머리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에 끌려 어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무대도 없는 바닥에서 연극을 하고 있었다. 짙은 화장을 한 얼굴에 원색의 치마와 까치저고리를 입은 처녀들이 출연한 장화홍련전이었다. 그 모습에 푹 빠진 소년은 비봉산 그림자가 시장을 덮는 줄도 모르고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 대가로 서쪽 하늘에 물든 노을을 붙잡고 집까지 십리 길을 달려 집에 도착하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소년은 그렇게 혼이 나고도 장날이면 그 나이롱 극장에서 땅거미가 지도록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능주극장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본 기억이다. 귀뚜라미가 떼창을 하던 날 저녁 마을 앞에 나갔던 소년은 모여 있는 선배와 친구들을 만났다. 그중 선배가 영화 보러 가자고 해서 무작정 따라나섰다. 선배가 사준 영화표를 들고 손을 꼭 잡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처음 보게 된 영화는 지금도 가끔 추억의 명화에서 만나게 되는 ‘미워도 다시 한번’이었다. 소년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선배를 따라 옆자리에 앉았을 때는 이미 시작한 영화관 안에서는 고막이 터질 듯한 효과음이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스크린에서 달리는 승용차가 소년 앞으로 돌진하는 듯한 공포에서 벗어날 무렵 영화는 끝났다. 그렇지만 소년이 그날 받은 새로운 문화 충격은 시골과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소년의 정서를 키웠던 능주장과의 인연은 오래 가지를 못했다. 어느 날 들판에서 만난 이웃 마을 친구의 말을 믿고 서울로 갔던 소년은 한 달을 버티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로 비인가 중학교를 자퇴한 소년은 아버지의 제자가 되어 농사 훈련을 받았다. 그 덕분에 지금 귀촌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소년의 그런 행동이 부모님의 가슴에 얼마나 큰못을 박는 일이었는지를 그때는 전혀 몰랐다. 아니 그가 부모가 되고도 많은 시간이 흐를 때까지도 몰랐다.
소년은 지금 노년이 되어 능주시장이 있는 마을에 살고 있다. 십 대에 한 시간을 걸었던 길을 지금은 1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능주장과 인연을 끊은 지 60년의 세월을 돌아 찾아온 시장 주변의 거리는 한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전성기였던 80년대까지만 해도 사진관이 셋이 있었는데 그중 두 곳은 예식장을 겸했다. 그리고 다방은 무려 열 곳이 넘게 호황을 누렸던 곳이다. 그런 거리는 소도읍 가꾸기라는 이름으로 규격화한 듯한 간판들마저 퇴색한 채 대부분이 비어 있다. 그 사이로 전성기에 대표적으로 호황을 누렸던 다방과 약국, 담배 간판은 빈 가게에 옛 모습 그대로 있다. 당시를 대변하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명화처럼 걸어두고 싶은 것인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소년의 마음은 착잡해진다.
노년이 된 소년은 능주에 이사를 온 첫 장날 아내와 함께 장 구경을 갔다. 전통시장 현대화 사업으로 입구에서부터 시장 안 가게까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좌판 장사하는 구역도 지정이 되어 있는 듯 질서정연했다. 가게의 주인은 대부분이 소년 또래이거나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도 옛날 생각에 가끔 찾아오는 또래의 손님들 때문에 문을 닫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가게 앞에는 몇 개의 의자를 듬성듬성 놓아두었다. 찾는 사람 대부분이 주인 또래로 나이가 많으니 앉아서 물건을 고르도록 배려한 것이다.
주인의 말대로 외지에서 장을 오가는 사람 대부분이 버스를 타고 오는 어르신들이다. 그래서 지금도 명절이 다가오는 장날이면 시외버스 정류장에는 옛날의 모습 그대로 긴 나무 의자에 앉아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붐비기도 한다. 그런 모습 외에는 재래시장이라 부르며 호황을 누리던 때의 흔적은 기억조차 희미하다.
소년은 모두 떠나고 난 정류장의 긴 나무 의자에 앉았다. 시장 입구에 세워진 ‘목사골전통시장’ 전광판 불빛 사이로 잘 정비된 가게에서 낯익은 형상이 스친다. 구부정한 허리에 헐렁한 기성복을 입은 꺼벙한 촌로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