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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즐거운 날이다(2289.2025.1.26)
히11:13-16
할렐루야!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목사님도 사랑--옆사람과 인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절대로 포기하지도, 버리시지도 않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주시고 살게 해주시는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헤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기를 축원합니다.
동요가 생각납니다.
1.까치까치 설날은 어젖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2.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받기 좋아하셔요
가사는 이렇답니다. 아! 그리고 왜 까치로 불렸나면 옛날에는 까치를 길조로 여겼고 까치가 울면 좋은일이 일어난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까치로 불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까치가 울어대면 좋은 일이 있는가보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요일이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인 설날입니다. 이 명절에는 무엇보다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서 그동안 헤어져서 살던 부모님들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경기가 예년과 같지를 않아서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고 또 보너스도 작아지고 개중에는 월급도 제때에 받지 못하는 그런 회사도 있어서 전과 같이 선물보따리가 크진 않아도 그래도 고향을 찾아가는 마음은 설레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설날에는 연휴가 길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평소보다 3배 이상의 긴 시간을 길에서 보내면서도 고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설날에도 우리나라의 인구가 약 3분지2에 해당되는 3천만 명 이상이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 고향을 찾아야만 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고향에는 그리운 얼굴들이 있고 기다려 주는 부모님이 있고 어릴 때 뛰어 놀던 향수와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날은 즐거운 날입니다. 설날이 즐거운 이유가 있습니다. 설날은 만남의 날입니다. 그리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에 즐거운 날입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하여 막히는 먼 길이라도 행복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가게 됩니다. 설이 즐거운 것은 아름다운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날이 되어도 만날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설날은 기대하는 날입니다. 설날은 새해이기에 새 옷을 입습니다. 새 옷을 새로운 해를 맞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습니다. 새로운 기대감으로 새해를 맞습니다. 설은 새로운 해의 복된 삶에 대한 기대의 풍성함의 날입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새 옷을 지어 입고 풍성한 음식을 준비하면서 새해를 힘차고 행복하고 즐겁게 풍성하게 살고 싶다는 희망을 표현하는 날입니다.
지난해는 실패했어도 올해는 성공하기를 원하는 날입니다. 그러한 복을 비는 날입니다. 새로운 해를 기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설날이 아닙니다. 설날은 다짐하는 날입니다. 설날에는 희망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설날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올해는 새로운 해를 만들겠다고 다짐합니다.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결심을 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설날은 신앙적인 날입니다. 항상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옛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결단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설날을 맞이하면서 살았습니다. 노아가 홍수 심판 이후에 설날을 맞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벨탑심판이후에 설날을 맞이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이 있었으며 새로운 시작이 있었으며 새로운 축복과 약속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항상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출발하기로 결단하는 삶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설을 만남이 있고 기대가 있고 결단이 있어서 행복한 날입니다. 그러나 진정 행복한 이유는 풍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풍성함이 없다면 설의 의미가 없습니다.
설날은 풍성한 날입니다. 설날이 즐거운 이유는 풍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이 되면 겨울이어서 가진 것은 별로 없어도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풍성한 상을 차립니다. 아이들은 세배 돈으로 주머니가 풍성해 지고 사방에 먹거리로 풍성해 지는 날입니다. 설의 풍성함은 추석의 풍성함과는 다릅니다. 추석이 풍성함은 사방 자연의 풍요로움에 대한 축제라면 설은 한 겨울 자연은 삭막해도 마음의 여유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풍성함입니다. 추석이 한 해의 결과로서의 풍성한 잔치라면 설은 한 겨울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저장된 것을 가지고 누리는 풍성함입니다. 설날이 되어도 풍성함이 없으면 슬퍼집니다. 우리 주변에는 설날이 되어도 떡국 한 그릇 끓어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이 행복하고 즐거우려면 다른 것은 없어도 만남과 풍성함은 있어야 합니다.
설 날 아침 먼저 하나님께 예배 할 수 있도록 은혜주심을 감사 하고 또 나이 한 살을 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시절에는 나이 한 살 더 먹은 사람들이 ‘형’ 대접을 받기 때문에 한 살이라도 더 먹어 보이고 싶었습니다. 어른들은 명절이 되면 이것저것 챙겨야 하기 때문에 걱정부터 합니다. 그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마냥 즐겁고 기쁜 것은 세배 돈을 받아 용돈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명절을 기다립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설과 정월 대보름 그리고 단오, 백중, 중추절은 명절 중에 명절이었습니다. 그 중에 설과 추석을 공휴일로 정하면서 2대 명절을 지킵니다. 설명절의 유래는 설은 묵은해를 떨쳐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 해의 첫머리입니다. 그래서 ‘설이란 말은’,‘설다’,‘낯설다’등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새해에 대한 낯설다는 말은 문화적인 시간 인식 주기에 익숙하지 못한 속성을 가장 강하게 띠는 날이라 하여 설다라는 의미에서 설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 설과 추석이 있다면, 이스라엘에는 유월절과 칠칠절과 수장절이란 3대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라면 칠칠절(맥추절)은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절기이고 수장절은 (추수감사절)로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며 감사 하는 명절이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유대인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민족의 대 이동이 시작됩니다.
예수님도 12살이 되던 해에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을 반경으로 당시 40km안에 있는 유대인들 가운데 12살 이상의 남자들은 이 절기를 예루살렘 성안에서 지키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들도 매년 나사렛에서 이 절기를 지키다가 예수님이 12살이 되던 해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보고 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찾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친척집들이나 알 만한 사람들에게 섞여있는지 해서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을 길이 없어 오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게 됩니다.
예수님은 천연덕스럽게 서기관들과 마주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예수님의 지혜에 놀라게 됩니다. 그 때 마리아가 예수에게 눅2:48절‘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할 때 49절‘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명절 분위기에 편승을 하다보면 우리도 신앙인의 본문을 망각 할 수 있고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설 명절에 고향을 가더라도 예수를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설 명절에 고향을 가더라도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놀다가 보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지요. 언제 예수님을 잃어 버렸습니까? 동행중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유대인들도 처음에는 가족 단위에서 길을 떠납니다. 그러면 좀 더 큰 길로 나가면 이곳저곳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무리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인산인해의 행렬이 무리를 지어 성전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야 말로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 경배 하러 가는 행렬은 끝이 안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행중에 있는 줄 알고 착각 할 수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도 백두산갈때에 중국 이화원에서 경험을 했습니다만 여행중에 덜렁대는 사람이 하나 있으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덜렁대는 사람이 차를 같이 타면 참 어려움을 당합니다. 차는 출발해서 가는데 중간에 ‘어디여’하고 전화가 옵니다. ‘차 출발 했는데’,‘나를 떨구어 놓고 가면 어떻게’해 하고 합니다. 이쪽 차량을 운전하는 분은 저 쪽에 탄줄 알고 이쪽에서 운전하는 분은 저 쪽 차에 서로 탄 줄 알고 차는 떠났는데, 정작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왜 남았습니까? 식사 후에 화장실에서 일 보느라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차에 탔거니 하고 착각했기 때문에 다시 데리려 가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이번 명절에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전을 떠나면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가 언제입니까? 성전을 떠날 때였습니다. 성전을 떠나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타락과 방탕한 삶을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을 떠나면 멋진 세계가 자신을 반겨 주고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하리라는 부푼 꿈을 갖고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정말 세상에 나가 보니 휘황찬란한 네온이 번쩍이고 정신을 흐릿하게 만드는 유혹들이 즐비했습니다. 그 에게는 세상에서 즐길 수 없는 술친구, 오락 친구들이 꼬여 들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돈이 떨어지고 나니 친구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나중에는 얼마나 비참했던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주려 줄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때서 깨달은 것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한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며 한탄을 합니다. 예수 없는 삶, 부담 없는 삶을 향해 세상에 나가면 뭔가 될 것 같지만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를 통해 예수 없는 삶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떠나면 고아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죽은 예수를 찾으러 무덤에 갔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말은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통해 구원받았다면 예수님 품이 바로, 내 삶의 고향이며, 어머니의 품이며, 삶의 터전이며,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젊은 부부가 다른 부부들과 같이 교회에 가지 않고 바닷가에서 하루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술도 한잔 했습니다. 하루 종일 놀다보니 피곤하고 고속도로에서 달리다 보니 졸음이 왔던 모양입니다. 그만 졸음운전으로 가로수를 들이 받았습니다. 그들 부부는 현장에서 죽고 아이들만 살았습니다. 이 장례 주례를 했던 목사님은 씁쓸한 마음으로 장례예배를 마쳤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성도들이 한마디씩 남긴 말은 ‘주일날 교회 갔더라면 이런 불행은 없을 텐데… 믿음으로 사는 것이 복이야’ 하더라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졸더라도 교회 와서 졸아야 합니다. 술이 취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새 술에 취해야 합니다.
번영할 때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은 너무 바쁘게 살 때 예수님을 잃어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 버렸을 때가 언제입니까? 명절 끝 날입니다. 명절 하면 잔치를 연상합니다. 먹을 것이 진진하고, 노래가 있고 웃음이 있고 떠들썩합니다. 대개 사람들이 성공하거나 사업이나 일이 잘될 때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2.귀성본능으로 찾아가는 고향이 있습니다.
오늘 같이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자기 고향을 찾아 가는 ‘귀성전쟁’ ‘민족대이동’이 있는데... 올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귀소본능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들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귀소본능은 연어나 진돗개, 비둘기 같은 짐승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 같이 학교를 다니던 동창들이 그리워지고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들이 먹고 싶어지는 것이 다 귀소본능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향수병이 됩니다. 이런 육체적인 향수병이 있는 가하면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영적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을 때에 자기가 태어난 굴에 들어가서 죽는다’ 말이 있습니다. 인도의 코끼리들은 죽을 때가 되면 아무도 모르는 곳, 자기들만이 아는 비밀의 장소에 가서 죽는답니다. 강원도 남대천에서 태어난 연어는 길이가 4센티 정도 자라면 하류를 따라 동해로 나아가 험난하고도 광활한 태평양에서 자라다가 4-5년이 지나면 산란을 하려고 자기가 태어났던 곳으로 용하게도 찾아와서 산란을 하고 일생을 마친다고 합니다.
동물들의 귀소본능은 참으로 놀랍고 기이합니다. 또 비둘기는 몇 백 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곧장 자기의 집을 찾아 날아갑니다. 늦은 가을 북쪽에서부터 날아오는 기러기를 비롯하여 철새들을 보세요. 그들은 멀리 시베리아에서부터 날아오는데 몇 천km에서부터 멀리는 몇 만km를 날아와서 우리나라의 철새 도래지를 찾아 한 겨울을 나고 봄이면 또 어김없이 온 길을 날아갑니다. 이와 같이 미물의 짐승들도 고향을 동경하는 모습을 볼 때 고향이란 참으로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곳입니다. 성경에는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나그네 본능입니다. 어디론가 가고 싶은 욕망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설과 같은 명절같이 쉬는 때에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안식본능입니다. 쉬고 싶은 욕망입니다.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사는 삶의 고달픔을 고향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영접본능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고향에 가면 내 부모나 형제가 반겨줄 것을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4가지 본능, 귀소본능, 나그네본능, 안식본능, 영접본능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자란 고향은 나의 본능을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구원사역을 시작하면서 고향을 찾아 갔습니다. 고향에 대한 본능도 있으셨겠지만 내 고향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도 전하고 병도 고쳐 주려고 가셨다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네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오늘의 모습을 보지 않고 과거의 것, 나쁜 것을 기억해서--아--내지 않습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삶속에서도 악습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모르는 곳에는 진정한 의미의 고향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고향을 찾습니까? 어렵고 힘들 때 고향을 찾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신약에서 탕자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났습니다. 실패하여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는 항상 고향 아버지 집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272장- 낭패와 실망 당한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성도의 마음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주님이요,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구원받고, 섬기다가 나가면 이 교회를 생각합니다. 상주감리교회만큼 여러분을 생각하는 교회 있습니까? 나는 없다고 믿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고향 교회인 상주감리교회로 오십시오, 그리하면 주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치리라 믿습니다. 사 55:7절‘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 탕자의 비유는 환상을 좇아서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실패하고 돌아오는 패배자의 귀향을 보여줍니다. 실패를 하였던 성공을 하였던 고향은 아버지의 품처럼 모든 것을 포용해 주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오늘의 성경 말씀과 같이 고향을 떠났다가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오면 주님 사랑하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3. 고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향을 찾습니다. 이원수작사 홍난파작곡 ‘고향의 봄’이란 동요는 동요의 차원을 넘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노래를 듣노라면 누구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콧날이 시큰해지곤 합니다. ----같이 불러봅니다---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교회 건축이 아주 멋진 교회들이 많이 볼수 있습니다. 그 내막을 알아보면 고향 교회 다니다가 서울 가서 축복받은 성도들이 자기 교향 교회를 위하여 큰 헌신을 하여 건축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여러분 상주감리교회를 사랑합시다. 우리 교회를 위하여 헌신합시다. 그리할 때 이 교회가 내 고향이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의 고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시122:6절‘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하늘에 있는 고향으로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고향입니다. 16절‘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창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도 이 땅에 진짜 고향을 만들어 가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갔던 것도 새로운 고향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금의환향은 없습니다. 나이 들면 고향에 돌아가 집짓고 편히 살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꿈은 하나님의 약속,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빌3:20절‘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니 하늘의 본향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나라, 내 가정이 하나님 나라, 그리고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이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진짜 고향입니다. 진짜 우리의 이상을 충동시켜줄 수 있는 그런 기쁨이 그 고향에 있어야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만들어 가야 하는 고향은 어떤 것입니까?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창 나이에 실직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의논하여 시장에 조그만 야채가게를 내고 장사를 하는데 그런대로 장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직장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실직자다! 나는 밀려난 실패자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짜리 딸아이가 가게에 찾아와 아빠에게 예쁜 봉투를 하나 건넸습니다.
‘이게 뭐니’,‘아빠 나중에 보세요’궁금해진 아빠는 딸이 나간 후 그는 쪽지를 꺼내어 천천히 읽었습니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좋은 선물은 못해 드리지만 언제든지 쿠폰을 사용하시면 정성을 다해 드릴게요. 힘내세요. 정말 사랑해요. 아빠의 사랑하는 딸 올림’ 그리고는 그 밑에 네모난 칸이 여러 개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각각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10분짜리 안마쿠폰’,‘구두닦는 쿠폰’,‘심부름하는 쿠폰’,‘노래해드리는 쿠폰’,‘뽀뽀 해드리는 쿠폰’그리고 밑에 한 줄 더 붙여 놓았습니다. ‘이 쿠폰들은 딱 한번만 사용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기분 좋으면 두 번도 해 드릴께요’ 그 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여보. 난 직장에서 쫓겨나는 순간 세상의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주 부자였구려’부부는 손을 꼭 잡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세상은 나를 실직자로 보고 나 역시 실패자라고 느끼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래도 내 딸들은 나를 아버지로, 가장으로 본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한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이 고향이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빨리 가보고 싶은 곳은 진짜 고향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이런 사랑이 있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 중에서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이 돈 떨어지고 친구들 다 떨어지고 흉년에 몸에 병까지 들자, 아버지 생각하고 고향으로 가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고 사랑으로 맞이합니다.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나를 품꾼으로 써 주시옵소서’ 그때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을 일으켜 세워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죄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더러운 옷을 다 벗기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주고 새 가락지를 끼우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면서 동네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이 아들은 잃어 버렸다고 다시 찾은 내 아들입니다’라고 이렇게 하는 그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울에 사는 아들의 집을 찾아온 아버지가 아들의 하소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 한 귀퉁이 자투리땅에 동네사람들이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환경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경고문도 붙여 놓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음날 시장에 나가 호미를 사왔습니다. 그리고는 쓰레기를 버리고 돌을 골라내어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그 텃밭에 상추를 심고 고추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상추가 자라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이와 붓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상추가 필요하신 분은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고추가 필요하신 분은 양 것 가져가십시오’라고 크게 써놓았습니다. 상추가 파릇파릇하게 크기 무섭게 따가는 상추, 얼마나 동네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지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당신이 언제나 저희 곁에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재산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함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예수님의 사랑은 나누어 주는 사랑입니다.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몸을 내 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가정 속에 이런 예수님의 사랑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말만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는 곳이 우리가 만들어 갈 고향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서로를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희생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기도를 하십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하셔서 내 눈이 하나님의 눈이 되게 하시고 내 삶이 주님의 삶이 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오늘 일가친척들을 만났고, 만나시기도 하실 것이잖아요? 여러분 좋은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세배하면 덕담 많이 하시잖아요. 칭찬들 많이 해주세요. ‘여태 넌 그러고 사냐’이런 말하시지 마시구요.
만남이 있다는 말은 나눔이 있고 서로가 힘이 된다는 말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자매가 만나는 순간은 아이덴티티(Identity), 동질성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으로 ‘너와 나는 한 혈육이다’,‘하나의 뿌리다’,‘한 가족’ 이라는 동질성을 발견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생깁니다. 그렇죠?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고향사람이라면 동지를 얻은 기분이 들잖아요! 하물며 형제자매는 더 하지요. 만나면 힘이 될 수 있는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고향입니다. 반대로 만나면 싸우고 원수지고, 힘을 빼는 공동체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가 믿음을 따라 살았고 믿음을 따라 죽었음을 13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 온 사람들이 본향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이 고향 찾기에 분주한 이때에 여러분은 본향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명절에 벌써 고향에 다다른 사람도 있겠고 아직 출발도 하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만 몇 시간 후면 도착할 것을 믿고 그곳에서 부모, 형제, 친척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과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이미 그 곳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예배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런 것입니다.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과 믿음은 언제나 그 본향에 가 있는 듯이 살아야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 땅에 살 때에도 이미 그 약속이 성취 된 것처럼 살았기에 믿음의 선조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가르침과 그 분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동차를 타고 무작정 고향으로 갈 것이 아니라 무사히 그리고 제대로 도착하기 위해서는 신호를 지켜야하고, 제한 속도도 지켜야하고, 차선도 지키며 안전하게 운행해야 고향에 갈 수 있는 것처럼 본향에 제대로 이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제대로 된 믿음입니다. 오늘 성경에 기록 된 사람들처럼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는 것이 본향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본향을 찾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성경은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아야 할 것을 말해줍니다. 13절에 계속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믿음으로 살았던 이 사람들의 세상에서의 삶이란 바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노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란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수행을 위해 자기가 있던 곳을 떠나 있는 사람이며 그 목적 수행이 끝나면 사명이 주어진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존재를 나그네라 칭하였습니다. 외국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아가야 할 자기의 나라가 있고 또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불법 체류자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나그네나 외국인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서도 안 되고, 그 곳에 주저앉아 정착하거나 향락이나 육욕에 젖어서도 안 되는 사명자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성공적으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인내입니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피곤하고 지루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고통과 위험도 동반합니다. 그때마다 자기의 힘과 능력을 잘 안배해서 체력을 관리하고 인애해야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습니다.
지금 고속도로는 말할 수 없이 짜증스러운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내하지 못하면 고향에 갈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 곧 영적인 나그네 길에도 육체적, 정신적 혹은 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고통과 난관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참고 인내해야만 본향에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명절 때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고향 가는 길이 만만치 않듯이 우리의 본향으로 가는 길도 순탄치만은 않는 것입니다. 숱한 인내를 요구하고, 숱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손해도 감수해야합니다. 우리의 신앙선배들이 오죽하면 순교로까지 그 여행길을 지키고자했겠습니까? 나그네가 지켜야할 두 번째는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막히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모든 차선이 다 막히는데도 텅텅 비어있는 도로가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갓길 이라는 도로입니다. 보통 고속도로나 자동차 전용도로에 가장자리에 응급자동차나 고장 차량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비상도로입니다. 그런데 차가 막히면 그 유혹을 못 이겨서 꼭 그 도로로 주행하는 얌체족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나그네 길에도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명예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물질의 유혹은 말할 것도 없지요, 세상의 별의 별 달콤한 유혹이 나그네 길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합니다.
‘숲 속의 멧돼지가 늦가을 감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떨어진 홍시를 발견하고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너무나 맛있는 홍시의 맛에 멧돼지는 그 자리를 떠날 줄 모르고 그 홍시를 찾겠노라고 땅을 파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땅을 파헤쳐도 홍시는 나오지 않고 너무 지친 멧돼지는 그 자리에 벌렁 누워버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던 홍시가 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높이 감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멧돼지가 애가 달아서 죽고 말았답니다’달콤한 홍시 맛에 빠져서 위를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달콤한 유혹은 다시는 헤어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가게 만듭니다.
고향을 향하는 발걸음이 인내하며 끝까지 주어진 정로를 달려서 가듯이 본향을 향하는 우리들도 신앙의 나그네 생활에 인내와 유혹을 물리치는 믿음으로 성공적인 사명의 수행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다 고향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신앙생활의 세 가지 동기를 줍니다.
첫째는 희망입니다.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용기가 되고 희망의 샘터가 됩니다. 고향에 달려가면서 실패와 아픔을 안고 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고향에 가면서 직장의 일을 떠메고 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고향은 새 힘을 얻게 하는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둘째는 감사의 힘이 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그것도 은혜로 주신다고 생각하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는 기쁨이 됩니다. 더 나은 것을 얻는 다는 것은 분명히 기쁨입니다. 이렇게 희망과 감사와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표증인 것이므로 즐거운 고향으로 찾아가는 명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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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목사님 사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