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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낳은 20세기의 세계적인 음악가인 그는 인상파 음악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다. 모테 부인에 의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는 놀라운 음악적 재질을 나타냈다. 11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11년간 배웠다. 그는 재학 시절에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 메크 부인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는데, 그 때 러시아의 국민악파의 음악과 집시의 즉흥 연주를 듣고 색다른 흥미를 느끼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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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칸타타<방탕한 아들>로 로마 대상에서 1등을 차지하여 로마에 유학하게 된다. 로마의 생활에 권태를 느꼈는데,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할 교향 모음곡<봄>과 <은혜받은 소녀>등 2곡을 심사위원들이 이해하지 못하였다. 파리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창작의 세계에 눈뜨게 해주었다.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서 자바와 캄보디아 등 동양 음악의 이국적인 정서에도 눈을 들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까지의 음악처럼 멜로디와 하모니, 리듬에 의한 정연한 형식의 음악을 버리게 되었다. 그는 인상파 회화의 수법에 알맞은 음악의 표현을 창안하였다. 그림에서 빛을 중요시하듯이 음악에서 감각을 중대시하려 하였다. 새로운 감각을 위해서는 새로운 음의 조성이 필요하였으며 대담한 화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1894년에 완성한 말라르메의 시에 의한<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통하여 새로운 음악의 양식을 수립하였는데, 그것은 인상주의 음악이었으며 또한 바그너 이후 가장 새로운 음악의 시작인 것이다. 인상주의란 외계로부터 받은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해 낸 예술이다. 그것은 선이 명료하지 않고 불분명하지만 유현하고 신비스런 기분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적이라 하겠으며 감마각의 생활에서 얻은 묘사의 기술이다. 극적이 아니고 서정적이다. 표현의 예술이 아니라 인상의 예술인 것이다. 1902년 4월에 초연한 오페라<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또 하나의 대담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상주의 음악이 성숙기에 달했을 때의 소산이었다. 그의 예술은 새로움을 가지고 전통에 도전함으로써 음악적 유산의 질서를 변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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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프랑스 음악을 대표하는 가장 특징있는 개성을 지닌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스위스 국적을 가진 철도 기사인데 라벨이 태어난지 얼마 후 파리로 이사해 왔다. 그는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895년에 고전풍의 미뉴에트와 귀로들은 풍경, 제1곡의 하바네라를 발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897년 제달주에게서 대위법을, 포레에게 작곡을 배웠는데 작품에 있어서는 사티와 새브리에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작곡가로서의 자유와 색채에 대한 재능이 내부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고전적인 형식과 새럽고 대담한 화성양식을 결부시켜 점차 독자적인 스타일을 이루게 되었다. 1901년 칸타타<미라>를 작곡하였다. 28세 때 드뷔시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자유로운 리듬과 대담하고 색채적인 화성법을 볼 수 있다. 그를 드뷔시의 후계자라는 사람도 있지만 기법에 있어서나 심미관에 있어서는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드뷔시는 상징파적이고 인상파적인 심미관과 형식도 서정적인 막연한 형식이고 온음계를 임의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라벨은 고전적이고 이지적인 성격의 소지자로서 구성이나 선적으로 명확하여 온음계를 피하였다. 드뷔시는 리듬을 멜로디, 하모니, 음빛깔 등을 위하여 보조적인 역할로 많이 사용했지만 라벨은 리듬을 중시하였다. 그의 음악은 어디까지나 프랑스인의 취미에 부합한다. 그의 작품 중에 스페인의 향토색이짙은데 그것은 그가 스페인의 혈통을 이어받능 영향이라고 하겠다. 1927년 미국에 초빙되어 보스턴 교향악단을 지휘, 자작을 발표했으며 무용곡<볼레로>를 작곡하였다. 그는 쿠프랭, 라모, 모차르트를 숭배하고 있었는데 고전적인 형식을 현대적으로 부흥시킨 <소나티네>와 <쿠프랭의 무덤>을 썼다. 그의 작품은 품위가 있으며 우아하고 도회적이라 하겠다. 그리고 어딘가 우수에 차 있는 그의 작품은 프랑스 음악, 나아가서는 파리의 음악이라 평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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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탈리아의 저명한 작곡가 레스피기는 볼로냐에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7~19세기의 이탈리아는 주로 오페라 작곡들이 나타났는데 그는 이탈리아의 순음악의 부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12세 떼 볼로냐 음악 학교에 입학하여 20세에 졸업한 후 다시 러시아로 가서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관현악법을 배웠다. 34세 대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 학교 작곡과 교수가 되었으며 1916년 유명한 교향시<로마의 분수>를 작곡하였다. 이 곡은 오페라 이외의 기악곡으로 일류의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는 힘을 세계에 과시한 최초의 작품이기도 했다. 46세 때 로마 음악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2년 후 작곡과 마스터 클라스를 담당한 후 교장을 사임하고 작곡에 몰두하였다. 45세 때에는 교향시<로마의 소나무>를 썼는데, 이것은 회화적인 시정을 오케스트라로 잘 표현한 명작이다. 4년 후 교향시<로마의 축제>를 작곡했는데 그의 교향시 제3편에 해당된다. 이 방대한 작품은 높은 밀도에 깨긋한 맛을 풍긴다. 그를 가리켜 '관현악의 시인'이라고도 하는데, 시적인 환상에 찬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의 악계를 대표하고 있다 하겠다. 그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지고 있으며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실내악과 가곡도 적기 않게 작곡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음악을 과거로 돌이켜 보려는 대표자의 한 사람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절충주의적인 면이 다분히 있다. 이탈리아적인 감미로운 선율에 환상적인 향기가 드높은 풍경의 묘사 음악을 교묘하게 그려 놓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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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최대의 작곡가였던 그는 현대 음악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을 가진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다. 보통 작곡가들은 하나의 새로운 주의를 개척하면 그것으로 만족했지만 그는 새로운 사상과 수법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항상 첨단을 걷는 작곡가로 군림했다. 그의 아버지는 성악가였고 어머니 또한 음악에 재주가 있었던 때문인지 그는 9세 때부터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하게 되었고 전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하였는데,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알게 되어 그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그는 그 동안 제1교향곡을 비롯하여 <불꽃>등의 작품을 작곡하였다.
그에게 새로운 계기가 된 것은 러시아 무용단의 책임자 디아길레프의 청탁으로 발레곡<불새>를 파리에서 공연하여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 때가 28세였다. <페트루슈카>가 디아길레프 무용단에 의해 공연되자 그 관능적인 리듬에 대해 많은 반대자와 강력한지지자가 큰 센세이션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이같은 새로운 음악에는 그의 은사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영향과 인상주의적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아무튼 이로써 그는 불멸의 금자탑을 세우게 되었고 세기적인 음악의 혁신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다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는데, 지금까지의 바버리즘(Barbarism) 또는 민족주의의 수법을 버리고 신고전주의를 택했던 것이다. 그것은 8명의 연주자로 된 발레곡<병사의 이야기>인데, 1918년에 초연되었다.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창작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1945년 미국에 귀화했다. 3악장의 교향곡, 발레곡<오르페우스>, 미사 등의 작품으로 신고전주의 음악을 계속 작곡하였다. 그의 음악은 다시 새로운 전환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12음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른바 베베른의 사도로서 또 하나의 전환을 보였다. 아무튼 그는 2세기에 걸친 위대한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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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의 한사람인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에프(Sergej Sergejewitsch Prokofjew)는 1891년 4월 23일 러시아의 손조프카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953년 3월 5일에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지방의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아버지와 평범한 가정주부로 취미가 피아노연주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프로코피에프는 두 누이를 어릴 때 병으로 잃고 외아들로 성장하였다. 그는 그의 나이 5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896년 "인디안 갈롭"이라는 제목으로 소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1897년에 프로코피에프는 피아노를 위한 소곡들("왈츠, 행진곡, 론도")을 작곡하였지만, 그가 정식으로 작곡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02년에 이르러서 였다. 그 후 그는 1904년 글라주노프의 추천으로 상트 페테스부르크 콘서바토리움에 입학하였으며, 그 곳에서 1909년까지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알렉산더 빈클러(A. Winkler)에게 피아노를 사사하였다. 1908년 12월 31일에 프로코피에프는 자신이 작곡한 7곡으로 구성된 모음곡을 가지고 성 페테스부르크에서 피아니스트로서 공식적인 데뷔를 하였다. 1914년에 그는 이 콘서바토리움을 졸업하였는데, 재학 중에 이미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제1, 2번)과 오페라 "막달레나"를 작곡하였다. 이때부터 1917년경까지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서유럽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러시아에서 2월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에 프로코피에프는 고전 교향곡을 작곡하였으며, 10월혁명이 일어나자 1918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까지를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서 제1기로 볼 수 있으며, 망명기간인 제2기에 그는 미국과 파리를 중심으로 활발한 연주와 작품활동을 하다가 1923년에 파리에 정착하였다. 프로코피에프는 파리에 거주하면서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교향곡 제2번을 비롯하여 실내악곡, 오페라("병든 천사") 등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1927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하고 다시 고국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움의 객원교수를 역임하였는데, 그 사이인 1936년에 그의 가족과 더불어 완전히 러시아로 귀국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인 1953년까지의 창작시기를 제3기로 본다. 프로코피에프는 자신이 영구 귀국한 1936년에 발레 곡 "로미오와 줄리엣", 어린이를 위한 관현악적 동화인 "피터와 늑대" 그리고 영화음악인 "스페이드의 여왕" 등 대표적인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 후 프로코피에프는 현악4중주 제2번(1941)에서나 피아노 소나타들 또는 발레 곡인 "신데렐라"(1941), 교향곡 등에서 자신의 특유한 현대성과 조화된 높은 예술성을 지닌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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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출생. 12음기법의 창안으로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또 베르크, 베베른 등 많은 뛰어난 제자를 육성, 그들과 더불어 제2차 빈악파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하여 거의 독학으로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초기의 작풍은 연면(連綿)한 주정(主情)의 세계를 묘사하는 후기 낭만파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현악6중주곡 《정화된 밤 Verkl rte Nacht》(작품 4, 1899),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잔데 Pelleas und Melisande》(작품 5, 1903) 《구레의 노래 Gurrelieder》(1900∼1911) 등의 작품에서는 바그너와 말러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작풍을 거치고 나서 조성(調性:tonality)의 틀에 박힌 음악에 질식감을 느끼게 된 그는, 마침내 이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가 《3개의 피아노 소품》(작품 11, 1909)에서 조성과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부터 12음기법을 고안하기까지를 ‘무조(無調)시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시기에 그는 《관현악의 5개 소품》(작품 16, 1909)과 《달의 피에로 Pierrot lunaire》(작품 21, 1912) 등의 걸작을 내놓았다. 12음기법은 조성조직(調性組織)을 대신하는 이론으로서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작품 25, 1921)에서 이룩되었다. 이 무렵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던 그는 점차 인정받게 되어 1925년에는 베를린의 예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초청되어 이듬해 베를린으로 이사하였다. 옛 도시 빈에서 나와 자유로운 베를린의 공기를 마시게 된 이 시기에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작품 31, 1928), 미완성 오페라 《모세와 아론 Moses und Aron》(1932)을 작곡하여 그의 충실한 기량을 보였다. 그러나 나치스의 대두와 더불어 유대인이었던 그는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그 후로는 미국에 영주하였다. 그는 만년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히틀러에 대한 분노를 곁들인 《나폴레옹에로의 오드》(작품 41, 1942)와 유대인 대량학살을 소재로 한 《바르샤바의 생존자》(작품 46, 1947) 등은 특히 유명하다. 저서에 《화성악 Harmonie Lehre》(1911) 《작곡 초보자를 위한 범례 Models for Deginners in Composition》(1940), 논문집 《스타일과 아이디어 Style and idea》(1950) 《화성의 구조적 기능 Structural Functions of Harmoney》(1954) 등이 있다. 표작:제1기 작품 : 6중주곡<정화된 밤>, 교향시<펠레아스와 멜리장드>,관현악곡<구레의 노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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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출생. 파리음악원에서 M.뒤프레, P.뒤카에게 사사하고 1936년 ‘젊은 프랑스’를 결성, 당시 성행하던 신고전주의적인 추상미를 추구하는 경향에 반대하여 현대에 ‘살아 있는 음악’을 창조하고, 음악을 인간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찾으려 하는 공통된 목적에 따라 작곡활동을 하였다. 1942년 모교의 교수가 되고, 1944년에는 자신의 작곡법을 종합하여 《나의 음악어법》을 펴내 작곡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현대 음악어법에의 귀중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1949년에는 피아노곡 《음가(音價)와 강도(强度)의 모드》 《뇜 리트미크》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중요한 작법인 ‘뮈지크 세리에르’의 출발점이 되어 브레즈 ·쉬토크하우젠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 1952년에는 파리방송국에서 뮈지크 콩크레트에도 손을 대어 《음색=지속(持續)》을 제작, 전위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 창작의 근원은 가톨리즘에 있는데, 오르간곡 《주의 강탄(降誕)》(1935)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1941), 피아노곡 《아멘의 환영》(1943)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20개의 눈매》(1943) 등에 그 경향이 뚜렷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교적 엑조티시즘을 소재로 한 가곡집 《아라위, 사랑과 죽음의 노래》(12곡, 1945) 《튀랑갈리라교향곡》(1948), 합창곡 《5개의 르샹》(1948) 등 실험적인 작품을 작곡하고, 새소리를 악보에 채택한 피아노의 오케스트라 《새들의 눈뜸》(1952), 관현악곡 《이국의 새들》(1955∼1956), 피아노곡 《새의 카탈로그》(1956∼1958) 등을 작곡하였다. 그 후에도 실내악 《7개의 하이카이》(1963), 합창과 오케스트라 《주의 변용》(1969) 등을 작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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