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민주주의의 현실을 보면 ‘관객민주주의’의 고착화라고 진단할 수 있다. 관객민주주의는 시민들은 정치의 관객(spectator)으로 머물러 있고, 시민들의 삶과 관련된 결정은 관료와 직업정치인들이 내리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1).
지금 과반수가 넘는 유권자들은 대의제하에서 최소한의 참여행위라고 할 수 있는 선거에조차 참여하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 총선거의 투표율이 50% 이하로 떨어졌고, 보궐선거에는 70-80%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음번에 있을 전국규모 선거인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투표율이 더 떨어질 가능성도 높다.
투표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유권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극히 제한된 선택지일 뿐이다. 그리고 선거일 다음날부터 유권자들은 통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지금 한국의 현실이 그런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4개월 정도의 시차를 두고 치러지고 그 후 2년 정도 전국규모 선거가 없자, 국민을 무시하는 권력의 독주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대통령과 국회를 통제할 방법이 없다. 이런 현실은 루소(J.J.Rousseau)가 '영국 국민들은 선거때에만 자유로울 뿐, 선거가 끝나는 순간 노예로 전락한다‘라고 표현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시민들이 구경꾼으로 있는 상태에서, 정책결정을 하는 것은 일종의 기득권 연합이다.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그리고 일부 보수언론은 이들의 논리가 유포되는 매체이다.
2. 국가와 지역차원의 기득권연합
우리 사회에는 국가차원과 지역 차원의 기득권 연합이 형성되어 있다. 이 기득권 연합은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가치지향, 정책방향, 이해관계 등을 매개로 형성되어 있다. 국가 차원의 기득권연합은 중앙관료집단-재벌 등 일부 대기업-보수언론으로 연결되는 ‘교체되지 않는 지배집단’과 지역주의에 편승한 중앙정당(중앙정치인)으로 구성된다.2) 이들의 공통된 생각은 '경제성장이 제일 중요하고, 미국식 사회ㆍ경제모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3). 이것이 국가차원의 기득권연합(중앙관료집단·정치인·재벌·보수언론)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한미FTA에 목을 매고, 광우병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산 쇠고기의 무차별적 수입을 추진한 것이다. 또한 의료ㆍ교육ㆍ복지 등에 있어서도 미국식 모델을 선호한다. 그래서 공공성보다는 시장화 정책을 선호한다.
한편 국가차원의 기득권 연합의 지역정책은 신개발주의에 몰입해 ‘경쟁력강화’라는 명분으로 지역발전방향을 개발위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최근에는 각종 특례의 형식으로 자신들이 추진하는 ‘규제완화’를 제주도나 경제자유구역 등지에서 선도적으로 시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교육, 의료와 관련된 규제완화가 이 지역들에서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지역에도 기득권연합이 형성되어 있다. 지역 차원의 기득권연합에는 상대적으로 토건국가4)의 뿌리가 깊게 잔존하게 있다. 그래서 지역 차원의 기득권연합은 지역주민들의 장기적인 삶의 질 개선보다는 단기적인 땅값상승과 건설이익, 투기이익을 선호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세력들은 평등, 인권, 평화, 생태 등의 단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때로는 적대적이다. 그러나 이런 세력들은 지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각종 선거 때에 표를 동원할 수 있는 조직과 사람들이 있고, 지역 내의 각종 단체들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다.
지역 차원의 기득권연합은 중앙정당이나 지방자치단체장과 유착되어 있고, 국가차원의 기득권연합과 연계되어 있다. 대운하 뿐만 아니라 여러 개발사업들이 추진되는 것을 보면, 지역의 기득권연합과 국가차원의 기득권연합이 상호연계되어 긴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두고 '개발동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사회의 중요한 정책결정은 이런 국가 차원의 기득권연합과 지역차원의 기득권 연합이 주도하고 있다. 시민들은 선거 때에 투표나 해 주면 되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다.
3. 관객민주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현실들
시민들이 정치의 관객으로 전락하면 시민들의 입장, 삶을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입장은 정치의 영역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다. 시민들의 소박한 상식은 정치의 영역에서 통하지 않는다. 기득권세력의 관심사가 정치의 영역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그들의 입장이 관철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서 그렇게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지만, 결국은 그들의 입장이 관철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정치가 초래하고 있는 것은 바로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의 심화, 부동산값의 상승, 경쟁격화로 인한 청소년들의 소진, 환경파괴와 생태적 위기 등이다. 특히 지역에서는 개발과 관련된 기득권 집단, 이익집단들이 정책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고, 그 개발이 사람들의 삶과 자연에 미칠 장기적 영향은 정책결정에서 후순위로 밀려난다. 일부 지역주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지만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경우들은 찾기 어렵다.
또한 이런 현실은 여성들의 참여를 극히 저조하게 만든다. 관료와 직업정치인, 그리고 그들에 영향을 미치는 기득권 집단의 절대 다수는 남성들이고, 단지 생물학적 성만 남성인 것이 아니라 기득권적 가치와 문화, 의식을 내재화하고 있는 남성들이다. 이들은 성평등의 실현에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빈곤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시민들은 정부와 사회가 풀어야 할 근본적인 과제중에 하나가 ‘사회의 공동체성 회복’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의 보장’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구조상 정책의 우선순위는 ‘개발’에 있지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복지 실현’에 있지 않다. 그것은 현재의 의사결정자들이 결국 자신들의 기존 방향(‘개발’과 성장)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빈곤층에게 시혜를 베풀겠다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ㆍ정치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교육의 시장화, 경쟁지상주의의 지배는 청소년들의 삶의 자양분을 빨아들이고,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사회의 공동체성을 파괴하고 있다. 학교교육도 말로만 평준화이지 이미 무한 경쟁체제로 들어선 지 오래이다. 이런 교육은 사회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도 청소년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브레이크 없는 기차’처럼 제어장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기득권 연합은 그런 교육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삶의 문제들은 민주주의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지 않고,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민주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삶의 문제들도 해결되기가 어렵다. 기득권 집단들이 정책결정을 주도하는 이상 삶의 문제가 풀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4. 지역 시민사회운동의 성과와 한계
물론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시민운동이 나름의 역할을 해 왔다. 전국 규모 단체들은 준(準)정당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었고, 이슈파이팅에서는 대단한 강점을 보였다. 그러나 관성적인 활동패턴, 과도한 언론 의존 등으로 인해 전국규모 단체들의 활동은 왜소화되고 정치적 영향력은 축소되어 왔다.
한편 전국규모단체들은 ‘정치적 중립성’의 프레임에 갖혀 진정한 정치변화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낙선운동이나 정당ㆍ정치인에 대한 도덕성 중심의 비판 논법은 시민들의 정치적 냉소를 극복하지 못했고, ‘좋은 정치’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일부 명망가 중심으로 정치제도나 선거제도 개혁논의에 참여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기성 정당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의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 확대가 그런 예이다.
한편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지역사회에서도 시민운동이 활발해졌다. 주로 대변형(Advocacy) 운동방식을 취한 지역시민단체들은 급속도로 성장했고, 지역사회의 민주화에 일정정도 기여를 해 왔다. 정보공개, 주민참여와 같은 의제들을 이슈화시켰고, 지역사회의 기득권구조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 왔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전국규모 단체들이 부딪히고 있는 것과 유사한 문제들에 부딪히고 있다.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기득권 세력에 비해 시민사회운동의 영향력은 제한적이고, 주민ㆍ지역에 밀착해 있지 못한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또한 지역의 대의정치는 특정 정당에 의해 독점되거나, 2-3개 기성 정당들에 의해 과점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정작 지역사회 민주화의 진전은 한계에 부딪히고 있고, 지역의 기득권 구조는 유지되고 있으며, 지역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은 시민사회운동이 추구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한편 주민밀착형 운동방식을 취한 단체들도 지역사회에서 상당히 뿌리를 내려 왔다. 지역주민들에 밀착하려는 노력들은 다양한 주제와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소규모 공동체를 만들기도 하고, 복지, 성평등, 환경, 마을만들기, 먹거리, 평화, 문화, 청소년 등 다양한 주제와 이름으로 활발한 활동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참여하는 사람들 속에서 리더십이 형성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참여의 과정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방식의 운동이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의정치’를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경우에는 주민들과 밀착해서 쌓아온 성과들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대의정치이다. 따라서 지역사회에서 운동이 정치와 거리를 두기만 해서는 사람들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 지역사회의 현실을 보면, 여전히 기득권 중심의 흐름이 지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시민운동이 추구하는 가치와 시민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들은 지역사회에서 여전히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다. 이런 지역사회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풀뿌리 운동’이라는 지향점이 더욱 강조되고 실천되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의정치의 변화를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5. 촛불이 의미하는 것
촛불집회, 시위가 의미하는 것은 청소년, 여성 등 그동안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배제되어 왔던 시민들이 더 이상 관객이 아닌 주체로 나서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계기였다. 그러나 촛불집회나 시위만으로는 관객민주주의의 현실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제도권 안팎에 존재하는 강력한 기득권 연합이 국가와 지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뿐만 아니라, 한반도 대운하와 같은 일들을 추진하게 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지금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설정한 방향대로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결국 대의정치의 변화없이는 최소한의 삶의 가치들을 지켜내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와 지역차원에서 대의정치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것은 어느 개인, 어느 집단의 권력획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방향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6. ‘좋은 정치’를 위한 운동의 필요성
관객민주주의의 극복은 누가, 또는 어느 정당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 즉 풀뿌리들이 사회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관객민주주의는 극복될 수 있다.
물론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대의정치만으로 부족하다. 오히려 대의정치의 활성화와 정치적인 행위의 활성화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5)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대의정치의 변화가 매우 중요하다.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표시가 대의정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대의정치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무관심과 냉소는 더욱 커질 것이다.
한편 정치를 혐오한다고 해서 정치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참여가 필요하다. 다만, 단지 “사람을 바꾸면 정치가 바뀔 수 있다”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의 속성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 단지 선거에서 선출된 대표자 혼자 하는 정치가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정책결정과정과 같은 정치적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의 주체와 정치의 의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좋은 정치’를 위한 운동이 필요하다. 이 운동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의 관객으로 머물러 있는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시민들이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시민들의 참여하에 풀어나가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II.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정당 독점의 정치구조 극복이 필요
1. 넘어야 할 첫 번째 벽
한편 지역사회에서나 국가에서나 대의정치의 변화를 위해서 첫 번째로 넘어야 하는 벽은 바로 정당들이 독점하고 있는 정치구조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차원의 기득권 연합과 지역차원의 기득권 연합이 결합하고 있는 바로 핵심적 지점이 바로 정당독점의 정치구조라고 할 수 있다.
중앙정당은 공천권을 통해, 한편으로는 지역사회의 기득권 세력을 통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협력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기득권세력은 정당을 통해 대의정치에 진출하고 공식적 권력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구조는 선거 때마다 반복되면서 지역사회에서나 국가적으로나 기득권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있다.
2. 정당이 지배하는 지역정치
최소한 지역정치에서라도 전국규모의 정당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세력이 경쟁할 수 있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그러한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해 놓았다. 지방선거에서도 정당이 아니면 후보자를 추천하지 못하고, 정당 소속이 아니면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 있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공천제를 하면서, 후보자에게 기호를 부여할 때에 정당만 부각되도록 하는 기묘한 기호부여제도를 만들었다. 정당별로 일률적인 기호를 부여해 주는 것도 모자라서, 중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는 기초의원의 경우에는 한 선거구에서 한 정당의 후보자가 여러 명 나올 경우에 “1-가”, “1-나”, “1-다”라는 식으로 기호를 붙여서 최대한 정당만 보고 투표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지역정치까지 중앙정당에 의해 독점되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잘못이 정치적 무관심을 더욱 강화시키는 면이 있다. 현실적으로 어떤 주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려고 해도, 중앙정당의 조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장벽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한국의 정당은 지역의 실정에 맞는 정책, 지역의 비젼, 지역의 대의정치활동까지는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상 중앙권력에 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당 간에 지역정책을 둘러싼 정책적 차별성도 없다. 지역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한 발판으로 중앙정당 간판이 필요할 뿐이고, 중앙정치인들은 총선과 대선을 위해, 그리고 지역구 관리를 위해 지역정치인들이 필요한 기묘한 공생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정당별로 차별성있고 일관성있는 정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정당내에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것이 현재 지역정치의 모습이다6).
3. ‘좋은 정치의 출발점’은 정당법상 정당에 의한 정치독점구조의 타파이다.
이제 정당법상 정당에 의한 정치독점구조의 타파가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들어 보자.
모든 정당 저편에는 단지 두 갈래의 파(派), 참여하는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 참여파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정당의 상투어를 털어버리고 무릇 모든 정당은 동일한 목적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새로운 시작의 기회는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갈수록 정당에 대한 충성심과 정당이 내거는 슬로건에 흥미를 잃어가는 추세인 만큼 더욱 그러하다(에리히프롬(차경아 옮김), 『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996, p.270).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정당법상 정당’의 한계를 인식하고 정당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정치적 결사체는 필요하다. 정당이라는 역사적 형태를 정치적 결사체의 하나로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당만이 정치적 결사체이고 정당만이 정치를 독점해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지금은 정당법에 의한 정당의 정치독점구조를 깨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정당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정도의 확신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정당구조는 확실히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정당의 정치독점 구조를 깨는 것은 제대로 된 정당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정당의 모습은 지금의 정당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야 할 것이다.
4. 정당이 지역정치까지 독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독일의 경우에는 지방선거에서는 정당이 아닌 선거인단체(Wählervereinigungen 또는 Wählergruppen, 유권자단체라고 번역하기도 함. 연방선거나 주선거에는 참여하지 않고 오로지 지방선거에서만 후보자추천을 통하여 참여하는 단체를 의미함)가 후보를 낼 수 있도록 인정하고 있다.7) 독일의 경우에는 지방선거에서 실제로 여러 선거인단체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선거인단체가 얻는 득표율은 주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 중 선거인단체의 득표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는 바덴-뷔르템베르그의 경우에는 2004년 시행된 게마인데(Gemeinde, 우리나라의 기초지방자치단체격) 선거에서 여러 선거인단체들이 참여했는데, 이들이 34.3%를 득표하기도 했다.8)
한편 1985년과 1992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정당만이 유일한 정치집단은 아니며 정당과 경쟁관계에 있는 유권자공동체도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라 정당과 동등하게 취급하여야 한다라고 판시하기도 하였다.9)
일본의 공직선거법상으로도 정당이 아닌 ‘정치단체’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소한 지역정치의 장에서는 보다 다양한 정치세력이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역의 대표자를 뽑는 지방선거에까지 5개 이상 시ㆍ도에 시ㆍ도당을 가진 전국정당만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게 할 이유가 없다. 독일처럼 지역 유권자들이 구성한 정치적 결사체(유권자단체)도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III. ‘좋은 정치’를 위한 출발 : 2010년 지방선거
1. 2010 지방선거의 전망
여러 가지 점에서 볼 때에, 2010 지방선거는 2012년 총선ㆍ대선을 앞둔 중간평가 성격의 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금처럼 민주당과 같은 정당의 지지율이 낮은 상태를 유지하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의 진보정당들도 고만고만한 지지율을 보인다면, 결국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많은 득표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민주당과 같은 정당이 표를 얻는다고 해도, 이들이 가지고 있는 비전이나 철학이 이명박정부가 딛고 있는 ‘선진화’ 이데올로기와 별다른 차별성이 없고, 자신들 또한 정치적 기득권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세력이다.
한편 진보정당에서 ‘진보의 재구성’을 논의하고 있지만, 여전히 진보정당이 표방하는 ‘진보’는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보’인지가 일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또한 진보정당에서 느껴지는 이념적 경직성과 일반시민들과 괴리된 언어 등도 문제이다.
결국 지금 이대로 간다면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달라질 것이 별로 없다. 기존의 낡은 정치세력, 낡은 운동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정치’를 위한 기획이 필요하다.
2. ‘좋은 정치’를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좋은 정치’를 위해서는 정당과 정치세력화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틀으로 접근하면, 특정한 사람들이 선거를 앞둔 시기에 급조했다가 소멸하는 과정들을 밟을 수 밖에 없다. 그동안 여러번 있었던 흐름들을 굳이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권력을 잡아서 사회를 바꾸겠다’라는 낡은 사고에서 탈피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해결사식 정치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민들이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좋은 정치’는 정치를 시민들의 손에 돌려주는 것이다. 정치가 정치인들의 기득권 유지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스스로 시민을 대변하고자 하는 정치가 아니라, ‘시민들을 정치의 주체로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는 바뀐다’라는 사고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객으로 머물러 있는 시민들이 무관심의 벽을 깨고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시민들이 무관심을 깨고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정치제도, 정치구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문제제기해야 한다. 대의정치의 변화는, 그리고 지역사회의 민주화는 정당 독점의 정치구조를 극복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런 정치제도, 정치구조가 바로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고, 정치적 무관심을 토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10) 따라서 ‘좋은 정치’를 위한 새로운 흐름의 출발은 이런 정당독점의 정치구조를 해소하고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 시발점을 2010년 지방선거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는 단순히 하나의 선거에 참여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낡은 정치와 낡은 운동권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 사람들의 몫은 문제를 제기하고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것까지이다. 문제의식이 확산된 다음에는 지역과 사이버공간에서 풀뿌리 시민들 스스로 조직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구체적으로 3가지 풀어야 할 과제들이 있다.
3. 과제1 : 정당제도, 지방선거제도를 포함한 전면적 제도개선이 필요
현행 정당제도, 선거제도를 포함해서 지금의 기득권 구조를 유지하는 제도들에 대한 전면적인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우선 정치에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정당이 아닌 정치단체의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정당의 설립요건(5개 시.도에서 각각 1,000명 이상의 당원 필요)도 낮추어야 한다. 지방정당(local party)11)이나 유권자단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후보자 추천권도 인정해야 한다.
둘째, 정당의 특권을 해체해야 한다. 국고보조금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국고보조금을 정당의 경상적 운영자금이나 조직유지비로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국고보조금 낭비에 대한 국민소송제도를 도입해서, 국민이 정당의 국고보조금 낭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당 당비에 대한 세액공제는 소득공제로 바꿔야 한다. 정당이 그만한 특권을 누릴 근거가 없다. 당비나 후원금을 내면 그 중 일정부분은 참여하는 사람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정상적인 참여이다.
셋째, 지방선거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가능하다. 하나는 현재의 정당공천제를 유지하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방정당이나 유권자단체의 후보추천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정당투표를 유도하는 현행 후보자 기호부여제도를 개선하고(기호를 부여하지 않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당공천제의 폐해가 승자독식 선거제도와 맞물려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정당공천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었으므로 생략한다. 그동안은 두 번째 가능성을 중심으로 논의해 왔으나, 정당공천제를 단순폐지 할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현직에게 유리하게 작용, 내천의 형식으로 사실상 공천 등)들을 감안할 때에 근본적인 개혁방안으로는 첫 번째 방안이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셋째, 국회와 국회의원, 지방의회와 지방의원의 특권을 해체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누리는 과도한 특권과 국회와 국회의원이 방만하게 사용하는 예산을 개혁해야 한다. 지방의회도 마찬가지이다. 지방의회의 과도한 의정비 인상, 지방의원들의 특권의식과 이권개입 등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개혁이 필요하다.
그 외에도 여러 제도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토론을 하고 지혜를 모으고, 그것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또한 이 제도개선운동은 과거처럼 몇몇 시민단체들이 몇몇 정당 또는 정치인들을 통해 법률을 발의하고 하는 방식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누가 시민을 대리(대변)해서 할 일이 아니다. 이 운동은 시민들 스스로 요구가 있고, 그 요구가 정당과 정치인들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시민을 대리해서 기성정당(정치인)들과 협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4. 과제2 : 정치참여 주체의 형성이 필요
최근의 흐름이 보여주듯이 시민들은 정당에 대한 기대는 거의 없으나, 정치참여에 대한 욕구는 강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기존 정당은 이러한 시민들의 욕구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정당법에 의한 정당에 얽매이지 않는 무정형의 정치운동이 필요하다. 이런 운동이 그렇게 생소한 것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기존 정당의 틀을 벗어난 방식으로 선거에 참여하여 시민파 지방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킨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1999년 일본 동경도의 구니다치시에서는 지역내에서 시민사회가 중심이 된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하여 시민파 여성시장(생활협동조합 출신)을 당선시킨 사례가 있다.12) 또한 한국의 경우에도 2002년 경기도 고양시의 사례, 2006년 경기도 과천시의 사례에서 정당의 틀을 뛰어넘은 선거참여의 사례가 있다. 2002년 경기도 고양에서는 시민단체들이 ‘2002 고양시민행동’이라는 조직을 꾸려 선거참여를 해서 8명의 시의원이 당선되기도 했다. 2006년 경기도 과천에서는 지역시민단체회원들과 진보정당 당원들이 참여하여 ‘과천지방자치개혁연대’라는 모임을 꾸려 2명의 시의원(1명은 민주노동당 소속이었음)이 당선되기도 했다. 경기도 고양과 과천 이외에도 유사한 사례들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6년 충북 옥천에서의 ‘풀뿌리옥천당’ 시도도 의미있는 시도였다.
물론 이런 사례들에 대해서도 좀더 엄밀한 진단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런 식의 접근법이 그렇게 생소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상식적인 것이다. 왜 지역에서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정치참여를 하려고 하는데, 전국정당을 통하지 않으면 정치조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가?
시민들이 스스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 스스로 정치적 결사체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이런 움직임을 기존의 정당체제, 기존의 정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문제이다.
꼭 지역에서의 참여로 국한할 필요도 없다.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 시민들이 스스로의 정치참여를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참여의 주체 형성과 관련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경험 속에서 나오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 거창하게 시작하지 말고 소박하게 시작하되, 잔잔한 호수에서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동심원 방식을 주체를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경직된 조직 틀을 만들거나 참여하는 사람을 부풀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고 논의를 시작하면 될 것이다.
- 건강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면 족하다. 어려운 말을 쓰는 직업적 운동가보다는 삶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가진 건강한 사람, 건강한 모임이 더 좋은 주체이다.
- 여성과 청소년의 참여가 중요하다. 이들이 참여할 때에 좋은 정치의 모습들이 나타날 것이다.
- 사람들의 마음에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의 마음에서부터, 동네에서부터 열정이 일어나고 마음이 모아지면 어떤 일이든 가능하지만, 그게 없이는 어떤 일도 불가능하다.
반면 아래와 같은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
- 기존 조직중심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하려면, 조직중심, 단체중심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선거와 같은 상황에서도 자발성에 기초를 둔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 가능하다. 즉 동원되지도 조직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온·오프라인을 통해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자원봉사 선거’를 만들 수 있다.
- 누가 판벌려놓고 같이 하자는 방식, 중앙에서 판벌려놓고 지역과 함께 하자는 방식은 금물이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면,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정치적 조직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2006년 지방선거에 앞서서 ‘지역정치참여네트워크(예를 들면 00구, 00시, 00군 시민정치네트워크라는 이름의)’라는 틀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것 보다는 좀더 역동적인 틀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런 틀은 사람들의 고민과 실천 속에서 나오게 될 것으로 믿는다.
정당과의 관계도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부분도 지금으로서는 예정할 수 없다13). 다만 스스로 ‘진보정당’을 자처하더라도, 정당으로서의 기득권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외면 받을 것이다.
구체적인 문제들은 스스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답을 찾아 나가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과정에서 시민이 중심에 서는 것이 아니라 명망가/활동가/직업적 운동권(정치인)이 중심에 서면 이미 실패할 수밖에 없다.
5. 과제3 : 시민(주민)의 삶에서 출발하는 정치의제의 형성이 필요
여기에 대해서도 그 어떤 것도 예정할 수 없다. 결국 정치에서 다룰 의제와 내용은 참여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소한의 것을 제시한다면, ‘선진화’나 신개발주의14)에 대항하는 담론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삶의 질’, ‘행복’, ‘지속가능성’이 화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소득수준에 비해 삶의 질이 낮은 미국식 사회ㆍ경제모델과 높은 부동산가격과 토건국가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는 다른 사회의 비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사회를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들은 바로 앞서 언급한 키워드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방자치와 분권이 중요하고(스위스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15), 지역정치의 중요성은 자연스럽게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의 추세로 보면, 교육문제, 의료문제도 중요한 화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정치에서 다룰 의제가 지역적인 범위에 국한될 필요도 없다. 기후변화의 문제, 석유위기의 문제는 지역에서부터 ‘착한 지역17)’를 만들어 감으로서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국가차원에서는 기후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미국에서도 여러 도시들이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비록 우리나라가 에너지 다소비국이지만 지역에서부터 착한 지역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계기로 먹거리 문제, 안전문제 등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모아질 것이다.
또한 제도의 변화 못지 않게 사람들의 변화, 의식과 문화의 변화가 중요하다. 사람들에게 무임승차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대안은 진정한 대안이 아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대안은,
- 선진화를 뛰어넘는 대안(이제는 돈이 아니라, 삶의 질(행복)이야)
- 만들어가는 대안(선거용으로 짜맞춘 대안이 아닌 4년 내내 만들어가는 대안)
- 정부에 대해 요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변화, 개인의 실천과 연결된 대안(착한 나 / 착한 동네(마을) / 착한 도시 / 착한 국가)
- 해결사를 거부하는 대안
-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안
- 도그마가 아닌 유연한 대안
- 가장 낮은 자리와 호흡하는 대안
- 뜬금없는 대안이 아니라 평소의 활동을 기초로 한 대안
한편 전문가들이 만들어서 제시하는 의제와 정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현실에 바탕을 둔 고민 속에서 나오는 개방적인 의제와 정책이 필요하다.
VI. 글을 맺으며-풀뿌리 정치운동에 희망을 건다-
어차피 길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현실은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해서는 극복할 수 없다. 사실은 모든 사회운동은 과거를 바탕으로 하고 다른 경험으로부터 배우되, 새로운 것을 창조하면서 발전해 왔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느냐에 모든 것을 달려 있다. “삶의 문제를 정치의 의제로, 정치를 시민의 손으로” 만들고자 사람들의 마음과 몸이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풀뿌리 정치운동이다. 그 공간이 지역이든 사이버 공간이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렇다. 희망은 그런 풀뿌리 정치운동에 있을 것이고, 2010년 지방선거는 그 가능성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보 충
I. 좋은 정치에 관한 상상
1. 왜 좋은 정치인가?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라는 말만큼 진부한 표현도 별로 없을 것이다. 늘 선거때가 되면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개인, 정치조직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은 기대를 저버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과거에 어떤 슬로건을 걸고 나왔던 간에 ‘새로운 정치’를 표방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치를 한다는 전제에 서 있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정치를 하면 이렇게 잘 할 수 있다”, “내가 00가 되면 00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식이었다. 내가 권력을 가지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 국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었지, 시민들을 문제해결의 주체로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가 빠져 있는 가장 심각한 함정은 시민과 정치가 유리되어 가고, 시민들의 삶과 관련된 결정에조차 시민들은 참여하기가 어렵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정치란 새로운 대표자나 정당이 하는 정치가 아니다. 국회의원이 많이 바뀌었다고 새로운 정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새로운 정책을 표방한다고 해서 반드시 새로운 정치라고 할 수는 없다. 결국 새로운 정치란 정치의 내용뿐만 아니라, 정치의 주체가 변화ㆍ확대될 때, 그리하여 정치의 본질이 ‘통치’에서 ‘참여에 의한 자치’로 변화할 때에만 가능하다.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로 나설 수 있어야 하고, 시민들에 의한 정치적 행위가 확대되고 활성화될 때에만 새로운 정치는 가능하다. 이번 촛불집회(시위)가 보여준 사람들의 욕구는 그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정치는 기존의 정치와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달라야 한다. 그리고 기존의 정치가 ‘나쁜 정치’였다면, 이제는 그것을 좋게 만들자고 하는 상식적인 의미에서 ‘좋은 정치’라는 표현을 써 본다18).
2. 좋은 정치의 정체성
그러면 ‘좋은 정치’란 어떤 정치인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시민을 정치의 주체로, 삶의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즉 정치의 주체와 의제가 변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연결되어 있다.
우선 정치의 의제가 변하기 위해서는 기존 정치의 판을 깨고 외부에서부터 시민들이 참여하는 것이 실현되어야 한다. 삶의 문제를 누가 대신 대변해주고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그동안 증명된 사실이다. 그리고 설사 누가(정치인이) 대신해서 일부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런 ‘해결사식 정치’에서는 시민들은 늘 부탁하고 청원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한편 시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들 스스로 느끼는 삶의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의정치는 이것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시민들이 원하는 법률이나 조례, 정책이 있으면 시민들 스스로 그것을 제안하고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표자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예산편성권을 관료와 직업정치인들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시민들이 참여함으로써 시민들이 생각하는 ‘필요한 사업’,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하는 사업’이 예산으로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시민들이 삶의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고민도 하고 자원봉사도 할려고 할 때에, 대의정치는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민들이 4년에 하루 주권자가 되는 신세에서, 4년내내 주권자가 될 수 있을 때에, 시민들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3. 좋은 정치와 대표자의 역할
‘좋은 정치’에서 필요한 대표자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대표자’가 아니라 ‘시민중에 한사람’인 대표자, 이웃같은 대표자이다. 지금 부딪히고 있는 문제는 상당부분 기술적 전문성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 입장의 문제, 가치의 문제이다. 지방자치단체를 보면, 실제로 실무를 하는 것은 공무원들이다.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에게 필요한 것은 그 공무원들이 가진 실무적 전문성이 아니라, 실제로 일을 하는 공무원들을 시민의 관점에서 통제하고 감시하고, 시민들과 소통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 공무원들에게 부족한 것은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이 가진 관점, 입장, 가치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지방의원뿐만 아니라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다. 집값이 폭등해도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전문성의 부족때문이라기 보다는 관점과 가치의 문제이다. 부족한 전문성은 보완받고 지원받을 수 있지만, 대표자가 근본적으로 틀린 관점, 왜곡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답이 없다.
4. ‘좋은 정치’는 지역에서부터 출발
기득권의 논리가 관철되고 개발과 환경파괴가 자행되고, 성평등이 무시당하고, 빈곤에 대한 외면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지역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적 상황이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지방자치의 현장이다. 반면,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고, 삶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정치를 시도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곳도 지역이다.
지역에서부터 시민들이 스스로 정책도 제안하고, 스스로의 관심에 대해 토론도 하고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에도 참여하는 '정치의 활성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것이 바탕이 될 때에만 새로운 정치세력이 의미있는 존재로 발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정치적 무관심은 기득권 세력에게는 축복이지만, 새로운 정치세력에게는 절대적 장벽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정치’는 지역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지역에서부터 정치의 본질을 바꾸어 나가고, 관객민주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II. 좋은 정치를 위한 전제 : 기성정당들의 독점구조 해체
1. 정당에 대한 근본적 의문
‘좋은 정치’를 만들어보자고 하면 ‘정당’부터 만들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존재하는 ‘정당법상의 정당’이야말로 ‘좋은 정치’를 가로막는 존재이다.
지금의 정당은 직업정치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틀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그러다보니 정당은 불신의 대상이다. 이런 식의 정당민주주의가 낮은 투표율을 초래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정당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지지정당이 없다’는 비율은 35.0%(83년), 33.2%(87년), 36.0%(91년), 55.3%(95년), 50.6%(99년), 52.5%(2003년)으로 변해왔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정당을 중시하는 투표자는 계속 감소해 왔다. 그 결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정당의 추천이나 지지를 받지 않는 유력후보자가 늘어나고 있다.19)
지금의 정당은 ‘대표자(직업적 정치인 또는 그것을 지향하는)에 위임하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틀이다. 정당의 의사결정구조는 위계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조직구조의 상층부를 장악하기 위한 당내의 권력투쟁을 피할 수 없다. 또한 비대한 정당조직을 유지하고 내부의 권력투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자금이 필요하다. 많은 나라에서 정당을 둘러싼 부패가 끊이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한 정당은 폐쇄적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중앙집권적이기까지 하다. 정당에 일반 시민들의 참여는 보장되지 않는다. 결국 지금은 정당은 시민들을 정치에서 배제시키고, 스스로가 정치를 독점하는 기능을 한다. 결국 직업정치인들이 정치를 하고 시민들은 관객에 머무르게 하는 핵심적인 장치가 바로 정당인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국가예산으로 정당의 유지ㆍ운영을 지원하고 정당에게는 파격적인 세제혜택을 부여한다.
2. 정치인들의 정치독점을 유지시키는 정당제도
기존의 정당제도는 시민들의 참여를 가로막고 직업적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독점 현상을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 정당들은 국고보조금 등의 특혜를 누리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여러 가지 진입장벽을 만들어 놓았다.
우선 정당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5개 이상의 시ㆍ도에 시ㆍ도당을 가져야 하며, 각 시ㆍ도당은 1천명 이상의 당원을 가져야 한다(정당법 제17조 및 제18조).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정당으로 등록할 수 없다. 5개 이상의 시ㆍ도에 각각 1천명 이상의 당원을 모집한다는 것은 이미 일정한 정치적 기득권을 가지고 있거나 특정한 이해관계로 결집된 집단이 아닌 이상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정당이 되는 길을 까다롭게 해 놓고, 정당 이외의 정치적 결사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정당이 아닌 조직은 선거에서 후보자를 추천하지도 못한다. 심지어 정당이 아니면 “--당”이라는 명칭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에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결성되었던 ‘풀뿌리 옥천당’의 경우에는 ‘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렇게 진입장벽을 높게 쌓아 놓은 다음, 정당은 국가로부터 파격적인 재정지원, 세제지원을 받는다. 이상한 것은 정당이면 당연히 당비로 운영되는 것이 정상인데, 정당법 제4조 제1항에서는 “정당은 소속 당원으로부터 당비를 받을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당비를 내지 않는 당원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기득권 정당은 당원들이 낸 당비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국고보조금을 받아 운영된다.20) 또한 정당이 받는 당비나 후원금에 대해서는 다른 기부금에 비해서 파격적인 세제혜택을 해 준다21).
한편 진보정당도 직업적 운동권 또는 직업적 진보정치인들의 조직이 되고 있고, 중앙집권적 속성을 보이고 있으며, 정당으로서의 기득권에 안주하고자 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2006년 지방선거 당시에 기초의원 정당공천제를 추진하여 입법화하는데 한 축을 담당했다. 또한 폐쇄적인 운동권 조직 속성을 갖고 있다보니, 국민들과의 소통보다는 내부 권력다툼에 집착하기 쉽다. 진보정당도 중앙의제를 지역으로 하향식으로 전파하는데 치중하고, 사람들의 삶에서 출발하고 지역에서부터 출발하는 대안의 모색은 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도 국고보조금에 집착한다.
3.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는 정당
이처럼 정당법에 의한 정당들이 정치를 독점하면서 투표율 저하 현상도 심화되고(4.13. 총선투표율 46%), 정치적 무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정당이 정치를 독점하다보니 마음에 드는 정당이 없으면 정치 자체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지금의 정당들은 선거때에 표만 필요할 뿐,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6) ‘구매력평가(PPP: Purchasing-Power Parity) 환율 기준 GDP'는 각국의 통화단위로 산출된 GDP를 단순히 달러로 환산해 비교하지 않고 각국의 물가수준을 함께 반영하는 것이다. 즉 따라서 PPP기준 GDP는 화폐의 구매력으로 GDP를 조정한 것으로 상대적인 생활수준을 더 정확히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