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묘지 정문에 서면.....
대연동의 기억은 아카시아 향기가 젊음을 더욱 들뜨게 하던 오월이 좋았다. 느린 걸음으로 산의 구릉에 오르면, 멀리 해안에서 시작된 순풍이 산의 중간 점에 선 나를 향하여 연어 떼의 몸짓처럼 스멀스멀 거슬러 올라왔다. 혹, 짐작할 수 없는 서역으로부터 왔을지도 모를 그것은 묘역의 향나무 군락과 연초록의 풀 향기에 섞이면서 나른하게 다가왔다. 나 또한 순한 바람이 되었다. 분명 그건 바람이었다. 이국의 냄새를 담은.......
아버지가 식구들을 이끌고 대연동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려던 내겐 행운이었을 것이다. 조카의 손을 잡고 뛰어다니던 동심이라든지 묘역의 푸른 잔디와 키 큰 나무들의 단정함으로 말미암아, 괜한 어긋남과 애써 고독해지려던 심사가 조금이나마 다독여졌다면 말이다. 고백컨대, 애국심을 고무하던 미국 영화 <콰이강의 다리>나 <레마겐의 철교>를 단체관람시키던 시절이었으나, 이국 병사의 주검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청년 시절 이후로 <밥 딜런>과 <존 바에즈>의 반전운동에 심취하던 때가 있었고, 미국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는 우리 영화 <고지전>이나 <태극기 휘날리며> 등속에 더 박수를 치면서부터, 군(軍)이란 인생을 소모하는 시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된 이후로 입대(入隊)란 아이나 아비 모두에게 내키지 않은 채무에 불과했다.
그러던 내가 사십 년 후의 어느 날, 아이의 입대를 앞두고 뜬금없이 이곳을 떠올리다니. 아들 하나를 이미 군에 보내었지만, 둘째 아이를 또 보내야 하는 아비의 심사가 얄궂다. 이국 병사들이 국가의 부름에 취하는 태도를 긍정해보려 하였을까? 아무튼, 이 호국의 현장을 찾으려 하는 나의 심사가 오리무중이다.
유엔묘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유엔사령부가 전사한 유엔군의 유해를 묻었던 것을 시작으로, 최종적으로 미국, 영국, 터키 등 참전 11개국의 유해 2,300구가 안장된 곳이다. 1964년경에 ‘추모관’과 부산 시민들이 모금한 돈으로 ‘정문’을 설립하였으며, 2007년 국제연합일(UN-Day)에 맞추어 국가 문화재로 등록된 것이 이 묘역의 간추린 역사이다.
유엔사령부 소유의 영역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대연동의 한 자락에 섬처럼 떠 있는 이국의 땅인 셈이다. 생각해 보니, 내 청년 시절에도 그 영역의 테두리 안은 이방의 장소였다. 청동색 덮개의 봉분이 없는 묘이며, 영어로 새겨진 이국 병사들의 이름이며, 연초록의 잔디와 단정하게 누운 철쭉과 회양목, 향나무 군락이 뿜어내던 짙은 향기, 그 위로 펄럭이던 이국의 깃발. 이 모두가 일상과 단절된 곳이었으니 잠시 숨을 돌리며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볼 수 있었던 나만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 이후로 가끔 들리던 사이에 묘역의 주변은 문화의 장소가 되었다. 인근에 박물관과 문화회관이 건립되고 근년에는 수목원이 새로이 조성되었으니, 묘역의 주변은 부산문화의 중요한 한 영역을 이루었다. 오늘 보니, 묘역에 더 많은 건물과 조형물이 생기고, 조원도 놀랄 만치 세련되게 가꾸어져 있다. 아름다운 곳이다.
내가 가끔 이곳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정문’ 아래에 잠시 머무는 희열 때문이었다. 청년이던 그때에 건축가 ‘김중업’의 이름을 알지 못한 것과 하얀 기둥을 여인의 종아리쯤으로 본 일이 불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내가 건축을 직업으로 선택하여 선생의 작품을 우리 문화유산의 하나로 자부하게 된 것이다. 언감생심 선생의 의도를 넘겨짚어 보며 개인적인 사견 한 마디쯤을 사족으로 달게 되다니.....
언뜻 보아도 색다른 건축이다. 어디서 본 듯하면서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문. 통과하는 모든 사람이 위아래를 두리번거린다.
선생이 의도한 건축의 선은 굵고 힘차며 거침이 없다. 흰색의 용마루가 그렇고 튼튼한 여덟 개의 기둥이 당당하다. 용머리의 끝은 하늘로 치켜들고 처마의 선은 날아갈 듯 조선 여인의 치마 선과 같이 곱게 용머리와 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으니, 이 둘은 부창부수다. 배흘림이 지나쳐 일견 도자기 형상을 한 기둥은 머리에 무거운 짐을 지고도 하나도 버겁지 않고, 사뿐 거리는 여인의 몸매처럼 매끈하다. 더욱 절묘한 것은 무거운 기둥과 미끈한 기둥이 놀라우리만치 가볍게 만나고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그 접합부가 연결되지 않고 비어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그만 숨이 막혀 버린다. 병사들의 눈물을 형상화하였다고 하는 코끼리 코같이 삐져나온 모양의 물동이는 스승인 ‘르꼬르뷔지에’ 선생의 영향이 곡선으로 재해석 된 것이다.
1966년 선생은 이 자리에 절묘한 조형적 해석으로 매우 독창적인 한옥 한 채를 빗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문 아래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그 순간 나의 건축은 터무니없이 초라한 것이 되고 만다. 내겐 몇 안 되는 소중한 장소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오늘 여러 가지를 위로받으러 이곳에 다시 온 것이다. 지루해진 일상을 털고 봄볕이라도 맞으려는 심사로, 이즈음 선생의 작품을 둘러봄으로써 나의 건축적 나태함을 채찍질해 보려는 것과 무엇보다도 아이를 입대시키기 전의 허전함이 추가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선생의 문 아래에서 이전처럼 오래 머물렀다. 문을 통과하여 잔디 위에 앉으니 어김없이 옛 기억이 새록새록 밀려든다. 물고기가 회유하듯....., 장소란 그런 불변의 것이다. 다만, 거기에 서는 사람의 마음은 시시로 변하는 것이다. 세월이 나의 사유를 살지게 하여 오늘에 이르게 했다면 다행이다.
묘역의 주위를 거닌다. 이 땅 아래에서 진토가 되어간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을 이국 병사들의 청동빛의 명패는 40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단단하고 확고하다. 잠시 그들의 이름을 읽어 본다. ‘존’, ‘제임스’, ‘술레이만’, 한국병사 ‘김창욱’......, 나라와 인류를 향한 그들의 맹목적 순종은 그 실체가 무엇이었을까?
올려다본 오월이 푸르다. 끊임없이 펄럭이는 저 깃발은, 비로소 아이를 내 품으로부터 풀어 나라에 맡겨볼 요량을 키우라고 말하는 것일까?
-深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