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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방법
- 골고다의 심판 -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사망이다. 이 사망은 영적인 사망이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망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것은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사망은 죄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죄가 한 사람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다'. 아담의 타락은 죄를 세상에 가져왔다. 또한 ‘사망이 죄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죄의 결과는 바로 사망이다.‘이러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무엇 때문인가?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롬5:12). 사망은 단지 ”모든 사람에게 임한“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사망이 모든 사람을 침투했다’이다. 모든 사람의 영과 혼과 몸에 사망이 침투되었으므로 사람의 모든 부분에 다 사망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구원의 방법은 사람의 개선에 있지 않다. 이는 ‘사망이 개선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가 심판을 받아야만 사람은 죄로부터 온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주 예수님의 구원이다.
’범죄한 사람은 정녕 죽으리라‘는 것은 성경의 정하심이기 때문에, 짐승이나 천사는 사람을 대신해 죄의 형벌을 받을 수 없다. 범죄한 것이 사람의 세 부분으로 된 본성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할 것도 사람의 본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오직 인성만이 인성을위해 죄를 속량할 수 있다. 사람의 성품은 다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으로는 결코 자신의 죄를 속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성을 위해 심판받으려 함이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며, 죽음을 통해 그분의 거룩한 인성은 악한 인성을 구속하셨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죄의 형벌을 당하시고 자신을 모든 사람의 속전으로 드려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은 받지 않는다(요5;24).
그분의 성육신은 모든 육체를 그 안에 포함시켰다. 아담 한 사람의 행동이 모든 인류의 행동을 대표할 수 있둣이 그리스도 한 분이 이루신 일도 모든 인류의 일을 대표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포함하셨다는 것을 볼 때만이 구속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과거나 현재나 구속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과거나 현재나 모든 사람의 범죄인 것은 아담이 인류의 머리이고 모든 인간이 아담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한 분이 의롭게 되신 것은 곧 과거나 현재의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된 것이다. 이것 또한 그리스도가 새로운 인류의 머리이시고 모든 새 사람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7장에 기록된 일들은 이 의미를 나타내준다. 여기서 사도는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인의 제사장 직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림과 동시에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다”(10절).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야곱을 낳고 야곱은 레위를 낳은 것을 안다. 아브라함의 증손으로서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드리고 축복을 받을 때 레위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와 조부도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드린 것과 축복을 받은 것을 바로 레위가 십분의 일을 드린 것과 축복을 받은 것으로 여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보다 작으므로 레위도 멜기세덱보다 작은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아담의 범죄를 모든 인류의 범죄로 여기고 그리스도가 받은 심판을 모든 인류가 받은 심판으로 여기는지를 알게 한다. 이것은 아담이 범죄할 때 모든 사람이 이미 아담 안에 있었고, 그리스도가 심판을 받으실 때 거듭난 죄인들이 얻은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죄를 위하여 받은 심판을, 성경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이 받은 심판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심판을 받지 않는다.
사람의 성품이 심판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혼과 몸이 십자가 위에서 인류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셨다.
먼저 그분의 몸이 당한 고통을 보기로 하자. 사람은 몸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한다. 사람을 범죄케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은 몸이다. 그러므로 몸은 반드시 사람이 형벌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몸을 통해 죄를 범하고 몸은 또한 범죄하도록 사람을 유혹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몸으로 형벌을 받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님의 육신이 당하신 고통을 누가 다 이해하랴? 구약의 ’메시아의 시편‘(그리스도의 시편을 가리킴)에서 그분의 육신이 당할 고통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시22;16). 선지자는 그분이 ‘그들이 그 찌른바 그’(슥 12:10)라거 불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분의 수족과 이미와 옆구리와 그분의 마음이 사람들에 의해 찔린 바가 되었는데, 죄 있는 인성에 의해 찔렸고 또한 죄 있는 인성을 위해 찔리셨다.이때 상처가 극히 심하여 십자가에서 몸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었으며 전신의 혈액이 순환이 안 되고 열이 높아졌기 때문에 그분은 목이 말라,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 22:15) "(내가)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 69:21)라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사람의 손은 범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마땅히 못 박혀야 하고, 입은 범죄를 즐기기 때문에 응당 고통을 당해야 하며, 발은 범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찔림을 당해야 하고, 머리 또한 범죄를 좋아하기 때문에 가시관을 써야 했다. 사람의 육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모두 그분에게 집행되었다. 그분은 바로 이렇게 죽으실 때까지 고통을 받으셨다. 비록 그분이 고통을 피할 능력을 갖고 계셨을지라도 그분은 그분의 몸을 내어 주사 끝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시면서 한시도 물러나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신 후에야(요19:28) 목숨을 버리셨다.
그분의 몸뿐 아니라 그분의 혼도 고통을 당하셨다. 혼은 사람이 자각하는 기관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계실 때, 사람들은 몰약 탄 술을 그분에게 마시게 하였는데 이는 그분을 마취시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이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지각을 잃기를 원치 않으셨다. 사람의 혼은 죄의 즐거움에 대한 느낌으로 충만하였으므로 이제 죄에 대한 고통을 느껴야 합당하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잔을 마시기를 원했고 지각을 잃게 하는 잔을 마시기를 거절하셨다.
십자가는 얼마나 수치스러운 형틀인지! 이것은 노예를 심판하는 형벌이었다. 노예는 소유와 인권이 없고 소유권도 없으며 그의 육신은 주인의 소유뮬이었기 때문에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형벌을 그에게 가할 수 있었다. 주 예수님은 노예의 위치를 취하시고 사람에 의해 못박혀 죽으셨다. 이사야는 그분을 노예가 칭하고 바울도 그분을 노예라 불렀다. 그분은 노예의 자격으로 일생 동안 죄와 사탄의 노예였던 우리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노예 됨을 인하여 죽으셨고 우리의 모든 수치를 감당하셨다.
성경은 병정이 주 예수님의 의복을 벗겼으며(요19:23), 그분이 못 박히실 때 거의 벌거벗은 몸이었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것이 십자가의 수치이다. 죄는 우리의 광명한 옷을 벗겼다. 죄는 우리를 벌거벗은 몸이 되게 한다. 주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벌거벗은 몸이 되셨고 골고다 산 위에서 옷이 벗겨지셨다 그분의 거룩한 혼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겠는가? 이것이 그분의 인격의 신성함을 해하지 않겠으며 그분이 수치스러움을 느끼시도록 하지 않겠는가? 이때 그분의 혼 안의 느낌을 누가 알 수 있으랴?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 중의 영광을 누렸으므로 구주께서는 죄 중의 수치를 받으셔야 했다. (주께서) 저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 주의 원수가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훼방한 것이로소이다(시 89:45,51).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던” 것이다(히 12:2).
실로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혼이 어떠한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자주 그분이 육신적으로 당한 고통만을 주목할 뿐 그분의 혼의 느낌은 잊어버린다. 유월절 한 주 전에 그분은 “지금 내 혼이 민망(근심)하니”(요12징) 라고 하셨다. 이것은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다(27절).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 그분은 “나의 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26:38)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이 두 마디가 없었다면 그분의 혼 안의 고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사야 53장 10-12에서는 세 번이나 그분이 자기의 혼을 버려 죽기까지 자기 혼을 부으셨다고 말한다. 그분이 이렇게 십자가의 저주와 수치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그분을믿는 모든 사람으로 저주와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하신다.
그분의 영은 막대한 고통을 당하셨다. 영은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거룩하고 죄 없으신 분이고 죄인에게서 멀리 계신 분이시다. 그분의 영은성령고가 연합되었고 한시라도 혼동과 의심의 요소가 없었다. 그분에게 한시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던 순간은 없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6).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깨 하시도다(요 8:29). 그러므로 그분은 능히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요11:41-42) 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 계실 때 - 이 날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더 필요한 날은 없었다 -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부르짖으셨다. 그분의 영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니! 이제 그분은 외로움을 느끼고 거절당함과 분리됨을 느끼셨다. 비록 그분이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였으나 하나님께 거절당하셨다. 그 목적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이다.
죄가 가장 크게 영향을 주는 부분은 바로 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거룩하신 이가 단지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해야 하는 이유로 하나님과 분리되셨다. 헤아릴 수 없는 영원 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그분은 그러하셨다. 인성은 그분을 하나님과 분리되게 하지 못한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대신하여 그분의 영이 하나님과 갈라졌다.
그분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볼 때 - 그분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 “영에 통분히 여기셨다.” 그분은 누가 자기를 팔아 십자가에서 죽게 되신 것을 선포하실 때 “영 안에 민망히 여기셨다”{(요 13:21). 그러므로 골고다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실 때 그분은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영이 상하도다”(시77:3) 라고 부르짖으셨다. 그분의 영이 하나님과 이렇게 끊어졌기 때문에 평상시 그분이 영 안에서 얻었던 성령의 능력(엡3:16)까지도 잃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시22:14-15) 라고 외치셨다.
한 면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그분을 떠났고 다른 면에서 사탄의 악한 영은 그를 비웃었다. 시편 22편 11-13의 말씀은 이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 같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 도울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애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시 22:11-13)
한 면에서 그분의 영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다른 한 면에서는 악한 영이 그분을 비웃고 조롱하였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과 끊어져서 스스로 높이고 커졌으며 또한 악한 영의 운행을 받아들인다(엡 2:2). 이제 이 영은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대적과 연합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파쇄되어야 마땅하다.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그분 안에 있는 거룩한 인성은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바 죄 있는 인성 때문에 완전히 파쇄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에게 거절당하시고 자비하심과 빛 비춤은 하나하나 다 감추어졌는데 이는 구주로 하여금 흑암 중에서 죄를 형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시게 했다. 하나님께 거절당하는 것이 바로 죄의 결과이다.
이제 우리의 죄 있는 인성과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은 다 형벌을 받았다. 죄 있는 인성은 주 예수님의 거룩한 인성 안에서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거룩한 인성은 이미 주 예수님 안에서 승리하였다. 죄인의 몸과 죄인의 영이 응당 받아야 할 심판을 이미 주 예수님이 감당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대표이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과 연합할 수 있다. 그분의 심판받으심은 곧 우리의 심판받음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은 완전히 심판을 받았고 또한 이미 형벌을받았다. 우리가 친히 받아야 할 형벌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이후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심판이 없다.’
이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것들이다. 이것은 율법의 안목에서 보는 우리의 위치이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이다.” 우리의 위치는 주 예수 안에서 이미 죽은 자이다. 이제 성경을 통해 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으로 화해야 한다. 십자가는 죄인 - 영과 혼과 몸 - 을 심판하는 곳이댜. 하나님의 성령은 능히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담당했고, 죄인의 가치를 판정했으며 십자가는 죄인의 죄에 대한 형벌을 담당했고, 죄인의 가치를 판정했으며 십자가는 모든 죄인을 못 박고 주 예수님의 생명을 해방했다. 그러므로 이후로 무릇 십자가를 영접하기 원하는 자에게 성령은 그를 거듭나게 하사 주 예수님의 생명을 얻게 하신다.
- 거듭남 -
거듭나기 전에 사람의 영은 하나님과 멸리 있었고 죽어 있었다. 죽음의 의미로 본다면 이것은 생명을 떠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최종 칭호이다. 사망은 생명을 떠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사망은 곧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영은 죽은 것 같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에 그분과 교통할 수 없다. 혼이 온 몸을 조종하여 이상(理想)이나 자극 안에 살게 하는 반면에 몸의 정욕과 애호는 도리어 혼으로 자기에게 복종케 한다.
사람의 영은 본래 죽었기 때문에 마땅히 부활해야만 한다. 주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남은 바로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것처럼 육신에 속한 일이 아니며 혼에 속한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죄의 몸’이 멸해지는(롬6:6)것 뿐만이 아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곧 혼을 가리킴)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갈 5:24)이다. 우리는 거듭남이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영에 나누어 주는 것임을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 혼을 위해 속죄하시고 육신의 원칙을 폐하셨기 때문에 그분과 연합한 우리들은 그분의 부활한 - 사망이 없는 -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여 그분의 부활한 생명을 얻는 첫 단계의 기점은 바로 우리 영이다. 거듭남은 완전히 영에 속한 문제이고 혼과 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특별한 이유는 그에게 혼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이 혼과 연합될 때 사람을 이룬다. 이러한 연합은 우주 가운데서 사람을 특출한 존재로 만들었다. 성경에서 볼 때, 사람의 혼만 가지고 말하자면 사람의 혼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람은 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가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 오직 영(spirit)으로만 영(spirit)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오직 영만이 영을 알 수 있다(요 4:23-24, 빌 3:3). 오직 영으로만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얻을 수 있다(계 1:10, 고존 2: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을 통해 사람을 다루시고 또한 사람의 영을 통해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의 영은 신성한 율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하나님 자신과 살아 있는 연합을 가져야 하고 한 순간도 바깥 혼의 정욕과 욕망과 이상을 좇아 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사람에게 즉시 사망이 임하게 된다. 이러한 사망은 곧 영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잃고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더 이상 영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뜻은 영이 고귀한 위치를 잃고 혼에게 탈취당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이 ‘겉 사람’의 이상과 욕망의 재촉을 듣고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는 것이 바로 사망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은 곧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다(엡2:1,3).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생활은 거의가 혼의 지배를 받는다. 한 면에서 사람의 상태는 근심과 두려움과 희락과 교만과 동정과 안락과 애호와 의아함과 후회와 자극과 쾌활함 등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사람들에게는 이상과 사상과 미신적인 것과 의심과 가상과 연구와 분석과 추리등이 있다. 세 번째 방면에서 사람은 능력과 재물과 사회와 자유와 지위와 명예와 칭찬과 지식등을 취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고,그 동시에 많은 결단과 의지함과 용맹과 인내와 두려움과 우유부단함과 자립과 고지식함과 주장 등의 일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바로 혼의 감정과 생각과 의지의 세 방면인 것이다. 인생에 이러한 것들이 충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의 거듭남은 이러한 작용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죄를 지은 것을 후회하고 죄를 위하여 애통하며 울고 결심하는 것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죄를 자백하고 결심하는 것과 많은 종교적인 느낌도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 이성적인 판단과 지식 안에 있는 지혜와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선한 것과 아름답고 고상한 것들을 얻고자 하는 것들도 혼 안의 작용일 뿐 영 안에서는 조금도 움직임이 없을 수도 있다. 구원받는 일에서 사람의 이성과 감정과 뜻은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것이 아니라 이차적이고 부수적인 것들이다. 이것들은 주인이 아닌 종이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든 감정적인 충동이든 의지의 요구이든 생각의 이해에서 나온 개선과 수양이든 이러한 것들은 소위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이 아니다. 성경의 거듭남은 사람의 몸과 혼보다 더 깊은 곳에서 발생한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곳이 바로 영 안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천연적인 재간이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일이 시작에서 끝까지 결코 혼의 능력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결과가 혼의 영역에 머물게 되고 사람의 영에 더 깊이 이르게 못하게 된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에 생명을 분배해야 한다.
- 사람이 영 안에서 거듭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
주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을 대신하여 그분이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죄인 - 영과 혼과 몸 - 의 모든 죄는 다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님에게서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의 안목과 목적에서 그분은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세상 사람의 죽음으로 여기시며, 주 예수님은 그분의 거룩한 인성으로써 죄스런 인성을 대표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사람의 방면에서 필요한 한 가지 일은 바로 믿음을 사용하여 자신 - 영과 혼과 몸 - 을 주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여기고, 주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 의미하는 바이다. "저를(그 안으로) 믿는 자마다 …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인은 반드시 믿음으로써 주 예수 안으로 믿고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해야만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고 거듭남 곧 영생, 영에 속한 생명(요17:3)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과 우리가 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실을 두 가지로 나누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식적인 이해를 주의하는 사람은 이렇게 나눌 것이다. 대신 죽으심과 함께 죽는 것은 구분 되어야 하나 결코 나누어서는 안 된다. 만일 누가 주 예수의 대신 죽으심을 믿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주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이다(롬 6:2-3). 주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형벌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은, 바로 내가 이미 주 예수님 안에서 죽은 것이다. 이것 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다. 그분이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은 바로 내가 그분 안에서 형벌을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이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체험이 있다).
그러므로 한 죄인이 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믿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연합한 것을 믿는 것이다. 비록 많은 경우 그가 죄의 형벌의 문제만 보고 죄의 능력의 면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주와 연합한 이 사실은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사실이다. 주와 연합하지 않은 사람은 곧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주님 안으로 믿는 것이 바로 주와 연합하는 것이다. 주와 연합한다는 뜻은 주님의 모든 체험이 다 그의 체험이 되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3:14-15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과의 연합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는 바로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그분의 죽음에 연합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최소한) 위치적으로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믿는 모든 사람은 자연히 주 예수님과(위치적으로) 함께 부활하였다. 비록 이때 그가 주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체험하지 못한 것처럼 주 예수님의 부활한 생명의 의미도 완전히 체험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주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고 또한 그는 이미 주 예수님의 부활 생명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거듭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결코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체험을 가져야만 거듭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성경은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이미 거듭났다고 말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우리는 주와 함께 부활한 것이 거듭난 후에서야 갖는 체험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거듭남이 바로 주님과 함께 부활한 것이다. 이는 주님의 죽으심(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함께 죽는 것)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에(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부활할 때에)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은 우리로 그리스도인의 시작을 갖게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벧전 1:3)라고 말한다. 이로 보건대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주와 함께 부활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도록’(10절)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거듭나고 주와 함께 부활도 했지만 부활의 권능의 나타남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위치와 체험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주 예수를 갓 믿을 때 그 사람이 아주 연약하고 어리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미 위치적으로 그를 주와 함께 주와 함께 죽고 부활하고 함께 승천함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 없는 자로 여기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납된 자는 그리스도께서 열납되신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위치이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 다 이러한 체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사람은 위치적으로 주 예수의 모든 체험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한 자이다. 그의 체험은 - 최소한 - 이미 거듭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난 것은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어느 정도 체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가 주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위치가 그에게 거듭남의 체험을 갖게 한다. 비록 체험적으로 그가 아직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모르지만(빌 3:10), 그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고 함께 부활했으며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다(엡 2:5-6).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이라"(잠 20:27). 거듭날 때 성령은 등불이 켜지듯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오셨다. 이것은 바로 에스겔 36장 26절에서 말한 ‘새 영’이다. 전에 있었던 영은 죽은 것 같기 때문에, 이제 성령께서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 속에 두실 때 그 영은 사람을 살린다.
거듭나기 전에는 사람의 혼이 그의 영을 다스렸고, ‘자아’가 그의 혼을 다스렸으며 정욕이 그의 몸을 다스렸었다. 혼은 영의 생명이 되고 ‘자아’는 혼의 생명이 되며 정욕은몸의 생명이 되었다. 거듭날 때 성령은 사람의 영을 다스리게 되고 그의 영은 그의 혼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으며 혼을 통해 그의 몸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은 사람의 영 안에서 생명이 되고 온 존재의 생명이 되었다.
거듭날 때 성령은 사람의 영을 살리고 또한 새롭게 하신다. 성경에서 거듭남의 의미는 사람이 사망에서 나와 생명으로 옮겨지는 그 단계를 논하는 데 사용된다. 거듭남은 육신의 출생과 같이 영 단번에 이루어지고 단 한번으로 족하다. 바로 거듭날 때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영접하여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성경 안에서의 ‘새롭게 됨’의 의미는 성령께서 그분의 생명으로 더 충만히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써 우리 육체의 생명을 이기게 하는 항구적이고 지속적이며 진보적인 일을 말하는 데 사용되었다. 거듭난 사람 속에서는 영과 혼의 본래의 순서가 회복된다.
또 한가지 우리가 응당 주의해야 할 점은 바로 거듭남이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 이상이라는 점이다. 당시 아담에게도 ‘영’이 있었지만 그 영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 - 생명나무로 나타난 - 이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이는 천사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주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요1:12-13) 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가 있다. 아버지가 소유한 생명은 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얻은 생명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벧후 1:4). 만일 아담이 기꺼이 생명나무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했더라면 그는 영원한 생명 -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는 생명 - 을 얻었을 것이다.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은 영원했다. 그러나 이 영원한 영이 어떻게 해야 영존할 수 있는가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택하는가에 달려 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날 때 얻은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거듭남은 본래 사람의 영과 혼의 혼란된 순서를 회복할 뿐 아니라 또 하나님의 뛰어난 생명을 얻게 한다.
어둡고 타락한 사람의 영이 성령의 능력을 얻고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짐으로 살아나는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성령께서 사람을 거듭나게하는 근거는 십자가(요3:14-15)이다. 요한복음3장16절의 영생은 성령에 의해 사람의 영 속에 넣어진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거듭난 사람이 이 생명을 소유한 것을 일컬어 영생을 얻었다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의 생명이 죽는다면, 사람의 영생도 즉시로 끝날 것이다.
사람은 거듭난 후에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갖게 된다. 사람이 한 번 하나님에 의해 출생하면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한 번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서 영원이 지난다 하더라도 결코 이 관계와 이 위치는 제거될 수 없다. 이것은 주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얻은 것이지 주님을 믿은 후에 사람이 스스로 진보하고 영적을 되고 거룩해져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사람에게 주신 것은 영생이다. 그러므로 이 위치와 생명은 영영 멸절될 가능성이 없다.
거듭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점이고 모든 믿는 이의 최저 수준이다.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지 않고 뛰어닌 생명 곧 본래 가지고 있지 않던 생명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종교나 도덕이나 학문에 대해 어떠한 열심과 성장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여전히 죽은 사람이다.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갖지 못한 사람은 다 죽은 자이다.
거듭남을 기점으로 할 때 그 사람의 영적 생명은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이 거듭남은 영적 생명의 초보이다. 이때의 영적 생명은 완전한 것이나 성숙한 것은 아니다. 이 생명은 유기적인 면에서는 완전하고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갓 태어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직 성숙하지 않고 자라지 않은 것이다. 과실이 갓 맺어질 때 그 생명은 완전한 것이나 아직 여물지 않은 것이다. 그 완전함은 유기적인 면에서만 이루어졌을 뿐 아직 유기체의 각 부분까지 미치지 못했다. 사람의 거듭남도 이렇다. 거듭난 후에 하나님의 생명 안에는 끝없이 진보할 수 있는 놀라운 영역이 있다. 그때 이후로 성령은 몸과 혼을 완전히 이길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하신다.
-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 -
고린도전서 3장1절에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로 구분하였다.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의 영 안에 성령으로 내주하게 하고 그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육에 속한 자는 대체 어떠한 사람을 의미하는가? 육체는 성경에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모든 천성과 생명 - 곧 거듭나지 않은 사람 안에 포함된 것들로써 그들이 범죄하는 영과 혼과 몸 속에 포함된 모든 것(롬7:18)-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으나 육체를 이길 힘이 없고, 도리어 그의 육체에게 패배당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타락한 사람의 영은 죽어 있고 혼과 몸을 좇아 범죄하고 행하는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믿는 이가 거듭난 후에 오랫동안 육에 속한 사람으로 머물러 있다면 그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은 아직 온전히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은혜 안에서 영에 속한 위치에 이르도록 자랄 때 비로소 그에게서 구원이 온전케 된다.
골고다의 구원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모든 죄인이 거듭나고, 모든 거듭난 사람이 완전히 ‘옛 창조’를 이기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단계에 이르도록 모든 것을 예비해 두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