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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산책]『천수경』④ 다라니는 번뇌 없애는 ‘의미 없는’ 도구 하나의 책이 마땅히 존재해야 할 이유는 다른 책들에는 없는 그 나름의 새로움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런 기준을 나의 『천수경이야기』에 적용시켜 본다면, 무엇보다도 다라니의 의미를 번역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것은 다른 학자들이 상세한 연구를 발표하고 있다는 데에서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게는 그러한 의미 찾기가 애시당초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를 묻지 말고 용법을 물어라”고 말했다. 그렇다. 정히, 나의 관심은 다라니 속에 담겨진 의미에 있지 않고 다라니가 도대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래도 좋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불교 안에는 밀교(密敎)는 사라지고 현교(顯敎)만 남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현실에 반대한다. 밀교의 존재에는 그 나름의 다른 이유와 기능과 용법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이를 통찰한 분이 있었다. “다라니는 번역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현장 스님을 비롯한 역경가들이었다. 소리로만 음사(音寫)함으로써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의미는 번뇌의 타파를 위해서는 장애일 뿐이다. 번뇌는 의미를 갖고 있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언어라는 불을 끄는 데 또 다른 언어를 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이 되려면 의미가 없어야 한다. 의미 없는 것만이 의미의 연쇄로서의 번뇌의 불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밀교 다라니의 기능에 대한 고찰」은 「선종에서 대비주를 외우는 이유」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더욱 새롭게 수정, 보완되어서 일본의 하나조노(花園)대학 선학연구회에서 발표된 바 있다. 일본 학자들 역시 선과 밀교, 화두와 다라니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임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김호성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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