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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6> 김성철 교수 “삼법인 철견해야 삼독심에서 풀려나게 돼” ‘깨달음과 수행’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다. 이 두가지 명제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바른 이해없이는 바른 깨달음도 바른수행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올바르게 불교를 신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에대한 진지한 탐구와 해명을 해 나가야 한다. 이와관련 동국대 김성철교수는 ‘무상과 윤회의 비참함’의 자각을 통해 삼독심을 제거해가야 한다는 수행론을 강조한 기고를 보내왔다. 회를 거듭할수록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는 ‘깨달음과 수행’기획토론 여섯번째는 김성철 박사의 주장을 싣는다.
깨달음은 ‘유여열반’의미…윤회없는 ‘무여열반’성취해야 ‘부시맨’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아프리카 원주민 ‘니카우’가 십 수 년 전 반나 차림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국내 모 신문사에서 한 면 전체를 할애하여 그와 대담한 기사를 실었다. 부시맨 말을 할 줄 아는 프랑스 사람의 통역을 다시 영어로 통역한 후 이를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고 다시 그를 역으로 되풀이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신문사 기자와 부시맨이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진설명> 중생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삶의 무상함과 윤회의 비참함을 자각함으로써 삼독심에서 풀려나야 한다. 사진은 스리랑카 폴로나루와 갈 비하라 석굴사원의 화강암에 조각된 길이 14m의 거대한 열반와불상.
이것저것 묻던 기자는 부시맨에게 종교가 있는가 물었다. 그러나 이 물음은 부시맨에게 도저히 전달될 수가 없었다. 종교라는 단어가 부시맨 말 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던 기자는 그 질문을 ‘죽음이나 사후의 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말로 대체하여 다시 물었다.
그러자 부시맨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죽는 것은 그냥 죽는 것이다. 시체는 땅에 묻는다. 마을 근처 아무 데나 묻는다. 따로 표시하거나 돌보지 않는다.’ 기자는 다시 물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부시맨은 대답했다. ‘늙으면 죽는 것이다. 그래서 두렵지 않다.’ 아주 명쾌한 대답이었다.
인도종교 중 자이나교에서는 고행을 통해 업의 속박에서 벗어난 영혼이 사후에 천계로 올라가 열반한 영혼끼리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을 해탈이라고 부르고, 우빠니샤드에서는 참 나인 아뜨만이 우주의 주재자인 브라만과 동일함을 아는 것, 동일하게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각 종교마다 추구하는 궁극적 세계는 각양각색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불자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이 가운데 전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유여의열반을 체득한 수행자, 다시 말해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의 죽음이 무여의열반이다.
‘나의 삶은 이제 다 끝났다. 청정한 수행을 모두 완성했고,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을 내 스스로 아노라’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수행자는 몸과 마음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러나 곰곰이 관찰해 보니 몸에 해당하는 ‘색’과 마음에 해당하는 ‘수, 상, 행, 식’ 모두 콸콸 흐르는 물과 같이 변해갈 뿐이다. 단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는다(諸行無常). 혹 행복이 느껴져도 모든 것이 무상하기에 그것은 잠깐일 뿐이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괴로움일 뿐이며(一切皆苦). 그 어디에도 영원한 안식처, 즉 아뜨만은 없다(諸法無我).
이 때 수행자에게는 다시는 이렇게 홍수의 물살과 같이 무상하게 콸콸 흘러가는 오온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마음이 싹트게 된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고요한 열반을 추구하는 마음이 샘솟는다는 말이다(涅槃寂靜). 이것이 ‘제행무상→일체개고→제법무아’로 이어지는 고성제(苦聖諦)에 대한 관찰이다.
이런 고성제를 자각한 수행자는 고통만이 가득한 이 생명의 세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해 열반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에 맺힌 것이 전혀 없어야 한다. 번뇌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재물이나 명예, 이성(異性) 등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누군가에 대한 원한이나 분심을 풀지 못한 사람이 죽을 경우, 그 중음신은 이를 충족하고 해결하기 위해 다시 다른 모체의 자궁에 달라붙는다. 그것이 짐승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다시 윤회를 시작하는 것이다.
또, 아직 지적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체가 공(空)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무언가가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하는 경우에도 완전히 열반하지 못하고 그의 의식이 다시 내생의 삼라만상을 구성해낸다. 요컨대 탐, 진, 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죽음 이후 다시 내생을 맞이한다.
우리들은 우리에게 전생이 있었는지, 또 내생이 있을 것인지 전혀 모른다. 앞뒤가 모두 캄캄할 뿐이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만 근거할 경우 전생도 없고 내생도 없는 것 같다. 따라서 내생에 사라지는 열반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내생에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만 들 뿐이다.
그러나 무시겁 이래 계속되어 온 윤회의 실상에 대해 자각할 경우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열반만이 궁극적 행복의 길임을 확신하게 된다. 아무리 죽어 사라지고 싶어도 다시 태어난다. 지긋지긋하게 다시 태어난다. 삶이 고통스러워 사라지려고 자살해도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대부분 짐승 이하의 세계에 다시 태어난다.
잡아함경에서는 삼선도에 태어나 살던 생명체가 그 내생에 다시 삼선도에 태어나는 경우는 손톱에 낀 먼지만큼 적고, 삼악도에 태어나는 경우는 대지의 흙과 같이 많다고 한다. 또, 인간이 내생에 다시 인간의 몸을 받을 확률은 눈 먼 거북이가 대양 밑을 헤엄치다가 100년에 한 번 물위로 올라와 숨을 쉬는데 그 때 우연히 그 곳에 떠 있던 나무판자에 뚫린 구멍에 목이 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런 가르침에 의거할 경우 현재 60억 명으로 추산되는 전 인류 가운데 전생에 인간이었던 자나 내생에 인간계에 태어날 자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지극히 청정하게 살아가는 몇 십, 몇 백, 혹은 몇 천 명만이 내생에 인간, 또는 그 이상의 세계에 태어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의 세계의 평균은 짐승이다. 짐승은 그 종류만 32억이 될 정도로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다.
따라서 하늘나라든, 인간계든, 축생의 세계든 그 어디든 육도윤회의 세계에 우리가 영원히 안주할 곳은 없다. 이를 자각한 수행자는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진심으로 추구하게 된다.
이런 두 가지 수행을 통해 탐진치의 삼독을 제거하여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희구할 수 있게 된 수행자는 자신에게 죽음이 닥칠 때, ‘이제 긴긴 윤회의 삶을 마치고 비로소 영원히 쉴 수 있게 되었다’고 안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은 지성과 감성이 모두 정화된 위대한 인격자, 아라한에게만 가능한 축복이다. 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37호/ 6월8일자] |
첫댓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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