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교회사연구소에서 제13차로 진행하고 있는 학술발표회(2019. 11. 7)에 맞추어, 그 주제가 되는 <귀츨라프선교사의 방문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예를 들어서 양화진선교회의 신호철장로의 경우에는 원산도 방문을 주장한다. 반대로 이현기목사의 경우에는 고대도 방문을 주장하는 것 같다. 이에 양쪽의 의견과 관련 기사를 동시에 실어보고자 한다. 먼저 신호철장로의 주장에 대한 기사와 그 내용이다.
원산도 방문- 신호철의 견해
한국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 목사가 처음 선교를 펼친 곳은 충남 보령 원산도라는 주장이 나왔다. 김주창(80) 귀츨라프연구소 이사와 함께 ‘원산도의 귀츨라프 발자취’를 지난달 출간한 신호철(80·사진) 장로를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이었던 귀츨라프 목사는 1832년 2월 26일 67명이 탄 500t급 배인 애머스트호를 타고 중국 마카오에서 출발해 그해 7월 17일 황해도 용연군 몽금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어민 김대백과 조천의에게 성서를 전하고 농어 3마리를 받았다. 하루 뒤에, 남진한 귀츨라프 목사는 충청남도 외연도(21일)와 녹도(22일), 불모도(23일)에 차례로 정박했다. 그 후 고대도에 24일 도착해 군관인 텡노를 만나 검문을 받았다. 귀츨라프 목사의 일기에 따르면 첫 대화는 “이곳은 위험하니 만이 있고 바람막이가 있는 간갱(Gan-Keang)으로 가라”였다. 귀츨라프 목사는 다음 날 아침 조선 측 도선사의 안내로 간갱 앞바다에 정박했다. 26일 오전 배를 찾아온 수군우후(부사령관급)와 만난 후 오후 상륙해 비단과 망원경, 전도지 등을 수군우후와 홍주목사(홍성군수) 등에게 건넸다.
그날 오후 귀츨라프 목사는 수군우후와 홍주목사를 통해 순조에게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그릇과 의류 등 예물 속에 담아 전했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였다. 27일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고 100개 넘는 감자를 수군우후가 주둔한 곳 인근에 심었다. 처음 주민들은 “외국 농산물은 심을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귀츨라프 목사는 “개혁을 해야 이익이 있다”고 설득했다. 재배법도 기록으로 써 주민들에게 건넸다. 다만 귀츨라프 목사의 일기에 수차례 등장하는 ‘간갱’이라는 지역이 원산도인지 고대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순조실록과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국내 문헌은 귀츨라프 목사가 고대도에 정박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신 장로는 “조선 기록에는 고대도에 정박했다는 기록이 유일하고, 고대도에 상륙했거나 머물며 활동한 기록이 없다”며 “만이 있어 안전하게 상륙할 수 있는 환경, 수군우후가 머무는 곳을 찾아갔다거나 들판을 보았다는 귀츨라프 목사의 일기 등을 종합했을 때 원산도에서 선교가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신 장로는 20대 때 농림부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30대 중반 UNDP(유엔개발계획)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선교사들의 역사를 연구하게 됐다.
고대도 방문- 오현기의 견해
반면에, 귀츨라프 연구회 회장으로 있는 오현기목사(현, 대구 동일교회 시무)는 고대도 방문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동안의 일반적인 학계 입장인 듯하다. 실제로 현재 고대도에는 귀츨라프 선교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오현기목사의 주장을 실어본다.
1832년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웲laff, 1803-1851)이다. 그의 조선 선교 방문은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는 34년,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이나 앞선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독일 프로이센 제국 프릿츠에서 경건한 기독교 가풍을 가진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나고 성장했다. 프로이센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도움으로, 18세가 되던 해 1821년 독일 최초의 선교사 양성 학교인 베를린 선교학교 (Missionsschule in Berlin)에서 4월부터 학업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베를린 선교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회심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귀츨라프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주님의 이름을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 즉 선교사에 대한 강한 사명을 확립했다.
그 후 귀츨라프는 1823년 부활절부터 베를린 대학교(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다가 중병으로 중도에 하차하게 되었다. 그 때 네덜란드 선교회에 선교사로 자원했고 중병도 그때 기적적으로 나았다.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첫 출발한 귀츨라프는 인도네시아, 싱가폴, 태국을 거치면서 독립선교사로 전환했다. 1828년 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방콕에서 선교하면서 태국어로 신약성경 전체와 구약성경 일부를 번역했다. 실제로 귀츨라프는 언어의 귀재였다. 당연히 모국어인 독일어와 영어, 화란어, 태국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해서 이들 언어로 다양한 저술과 번역 활동을 하였다. 태국에서의 선교 기간 중 1831년은 귀츨라프에게 육신적으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의 아내 메리 뉴엘(Mary Newell, 1794-1831)이 그해 2월 16일에 쌍둥이 여아의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고, 쌍둥이 딸들도 곧 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츨라프의 1차 아시아 선교 여행(1831. 6. 3-12. 13)은 이러한 슬픔을 만난 직후 행해졌는데, 방콕을 출발해서 마카오에 도착하기까지 낡은 중국 돛단배를 타고 중국 연안을 6개월 동안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선교하였다.
조선을 방문한 것은 2차 선교 여행(1832. 2. 26-9. 5)동안인데, 마카오에서 출발했다. 그는 선교를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와 용선 계약을 맺은 507톤의 범선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에 선의(船醫)와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했다. 이 배는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했던 최초의 서양 선박으로 기록된 바로 그 배이다. 1832년 7월 17일 오전 10시경 귀츨라프 일행에게 조선의 연안이 눈에 들어왔으며 오후 5시경에는 처음으로 조선인들과의 우호적인 만남이 있었다. 귀츨라프가 타고 있는 애머스트호가 조선에 최초로 정박한 곳은 몽금포 앞바다의 몽금도(대도) 앞이다. 애머스트호는 다시 남하하여 뱃길을 따라 외연도(7월 21일)-녹도(7월 22일)-불모도(7월 23일)-고대도(7월 25일) 순으로 항해하였다. 특히 고대도(古代島)는 귀츨라프가 8월 12일 그곳을 떠날 때까지 선교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고대도를 기점으로 하여 근처 도서와 내륙까지 선교할 수 있었음으로 한국 선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섬이다. 귀츨라프가 국왕을 위해 준비한 진상품에는 지리, 천문, 과학서 외에 천, 모직물, 망원경, 유리 그릇 등의 선물이 있었고 중요한 것은 한문 성경 한 권과 기독교 전도 책자들이었다. 특히 한문 성경은 ‘신천성서’(神天聖書)인데, 이 성경은 중국어로 된 최초의 신구약 완역 성경으로서 귀츨라프의 동역자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1823년 말라카(Malacca)에서 출판한 21권 낱권을 선장본으로 엮어 한 권으로 만든 성경이었다.
귀츨라프가 고대도를 중심으로 펼친 선교 활동은 문화적 중개 활동으로 이어졌다. 선교하면서 귀츨라프는 조선 언어를 통한 소통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7월 27일 귀츨라프는 오랜 설득 끝에 고관의 비서 양이(Yang-yih)로 하여금 한글 자모 일체를 쓰게 하였다. 또한 그에게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써주면서 읽게 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귀츨라프는 2차 선교 여행 후 이 때 배운 한글을 1832년 11월에 모리슨이 편집자로 있는 ‘중국의 보고’(The Chinese Repository)라는 잡지에 소논문 형태로 “한글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을 발표하였다. 당시로서는 선교 현지에 와서 현지인을 통해 현지 언어인 한글을 채집하여 서양에 구체적으로 발표한 것은 귀츨라프가 최초였다. 이처럼 귀츨라프의 번역 선교는 현지 방문을 통한 성경 번역 선교의 효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말을 익히고, 한글을 세계에 첫 번째로 소개한 문화적 중개자의 역할도 수행한 것이다. 귀츨라프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당시 먹을 것이 없어 빈궁한 삶을 사는 조선인들을 위해 감자를 직접 심고, 생산하는 방법을 글로 써주었다. 이는 한반도 감자 전래의 최초의 구체적 기록이다. 아울러 같은 이유로 야생 포도의 재배와 그것의 과즙제조 방법도 설명해주며 글로 써 주었다. 또한 그는 선교 사역의 한 방편으로서 의술을 베풀며 사람들을 돌보았다. 예를 들면 이미 태국과 중국에서 했던 것처럼 조선에서도 무료로 약을 나누어 주었고, 어느 날은 독감에 걸린 60명의 노인 환자들에게도 충분한 양의 약을 처방해 주기도 했다. 그는 가능한 한 선교지에서 의료적 도움을 주는 것이 그의 열망이라고 하였는데, 그에게 의술을 베푸는 것이 전형적인 그의 선교의 방편이었다. 그가 만약 조선에 더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었더라면 중국에서처럼 고아원과 학교 같은 사회적 봉사를 통한 선교를 더욱 체계적으로 감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귀츨라프는 조선에서 약 한 달간 선교하면서 얻은 문화적, 지리적 정보를 토대로 조선 뿐 만 아니라 동아시아 선교 전략을 세운다. 8월 17일에 애머스트호는 제주도 연안에 도착했는데, 귀츨라프는 제주도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본, 조선, 만주 그리고 중국을 잇는 선교기지로서 적합할 것으로 보았다. 귀츨라프의 동아시아 항해기 독문판(1835)에서는 영문판(1834)에서 언급하지 않는 중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에 관한 언급이 그것이다. 그는 제주도에 선교 기지가 세워진다면 “제주도가 인구가 많은 지역들(조선, 일본, 만주, 중국) 안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최상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은 조선을 위시한 이들 지역에 복음의 전파와 교회와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귀츨라프가 조선 선교 시에 교회에 대한 언급을 한 것처럼, ‘주님의 교회의 확산’(Ausbreitung der Kirche des Herrn)을 소망한 것이다. 이는 선교 거점인 제주도를 사용하여 조선선교,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대한 선교를 피력한 것으로 한반도를 통한 개신교 선교 전략의 최초 입안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에 자신의 대한 자신의 방문이 효과 있는 선교의 결실, “이 외딴 나라(remote country)에 좋은 씨가 뿌려졌고, 머지않아 영광스럽게 싹이 돋아날 것이고,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기대했다. 1851년 8월 9일 48세의 일기로 홍콩에서 숨졌고, 홍콩공원묘지( Hong Kong Cemetery in Happy Valley)의 개신교구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