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증이 있어야 할 자리에 주장이, 이론적 분석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도덕적 판단이 들어서 있다면 그것은 반론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게으른 추론’에 의한 글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12월호에 실린 홍준기의 글은 어디서부터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지 난감하게 만든다.
홍준기는 지젝의 공산주의 가설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그가 사회민주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에 잘못 되었다는 주장 이외에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젝 같은 ‘공산주의자’가 “공허한 환상”을 부추기면서 가장 현실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적대시하고 있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준기의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편견에 의지해 지젝을 비판한다는 핑계로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논의 자체를 마음대로 왜곡하고 있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무엇보다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공산주의 이념을 구분하지 않고 지젝 또는 바디우의 공산주의 가설을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 또는 현실사회주의 국가와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오해와 달리, 지금 유럽에서 논의되고 있는 공산주의 가설은 과거에 실패한 역사적 공산주의를 복귀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서울 컨퍼런스를 위해 방한했던 지젝과 바디우가 입을 모아 북한을 비판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홍준기는 지젝을 표적으로 삼고 있지만, 1980년대 중반 이런 논의를 처음 제기하고 시작했던 이는 가타리와 낭시였다.(1)
가타리가 네그리와 함께 집필한 <우리 같은 공산주의자>와 낭시가 쓴 <무위의 공동체>는 스탈린의 국가주의에 포획된 공산주의의 실패를 돌아보고, 거기에서 공산주의를 발현시킨 이념(이상)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요청했다. 특히 낭시가 제기한 새로운 공동체의 의미는 “생활 속의 공산주의 개념과 실천”이라는 ‘비동일적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동일적인 것이란 이미 형성되어 있는 동일성이나 입장에 대한 거리두기를 의미한다. 이처럼 공산주의를 새롭게 생각하자는 요청은 지젝만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아직까지도 ‘철없이’ 공산주의를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지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면 그 주장은 설득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홍준기가 뭉뚱그려 거론하고 있는 ‘공산주의’는 오늘날 크게 두 개의 이름으로 나뉜다. 정치학에서 논의하는 공산주의와 철학에서 논의하는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정치학적인 의미에서 공산주의라는 것은 실패한 정치적 전통이자 전략이지만, 철학적인 의미에서 공산주의라는 것은 당면한 해방의 이론으로서 유효한 것이다. 여기에서 해방이라고 일컫는 것은 국가에 포섭된 정치를 공산주의라는 ‘논리적 전복’의 조건,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국가가 불가능하다고 금지시켜 놓은 것에 대해 사유(상상)하는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런 철학적 의미의 공산주의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그 공산주의 체제와 동일시될 수 없다. 당연히 지젝과 바디우의 작업은 철학적인 의미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논의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과거에 존재했던 다양한 공산주의의 형태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하며 미래의 공산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이 선언이야말로 이념의 문제인 것이다. 공산주의가 이렇게 선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정치에 대한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선언을 위한 대의인 것이지, 특정한 정치체제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지금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철학적 논의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획일화되어 있는 환경에서 공산주의의 이념은 말 그대로 불가능성의 대명사이다. 홍준기는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의 진보적인 지식인, 학생, 연구자들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금기로 삼아왔고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를 진보의 배신자로 생각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오늘날 공산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환영 받기 어렵다. 심지어 홍준기 자신조차도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상상이야말로 가능성만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체제에 대한 저항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공산주의 이념은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게 만들어주는 준거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평등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산주의 이념은 국가를 우회하는 정치라는 보편성을 띤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공산주의를 논의한다는 것은 이런 보편적 이념을 어떻게 정치적 갱신의 조건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를 공산주의 이념과 관련해서 논의하고 있는 바디우의 <긍정의 변증법>은 이 문제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지젝도 기본적으로 이런 바디우의 발상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바디우에게 공산주의가 이념의 문제인 것은 그것이 주체를 만들어내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준기는 이렇게 묻는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공산주의 이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에) 실패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미래에) 성공시키기 위해서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홍준기는 자신의 반론에서 맹렬하게 단죄하고 있는 그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의 질문을 분석하면, 그에게 공산주의는 ‘실패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른 이념이거나 아니면 ‘실패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다시 성공시키기 위한 다른 전략인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상상은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등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 등식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실패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이거나 아니면 그것과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지젝과 바디우가 공산주의를 철학적으로 논의하는 까닭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패에서 정치적 교훈을 배우기 위함이다. 이런 정치적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국가를 우회하는 당 없는 정치’야말로 공산주의의 본질이라는 진실이다. 이들은 이런 관점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국가와 당에 우겨넣었기 때문에 과거의 공산주의 국가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이런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논의를 섬세하게 고찰하지 않은 채 성급한 판단으로 치닫는 홍준기의 반론은 지젝에 대해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기도 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기도 한, ‘전능하며’, 그래서 ‘위험한’ 공산주의자로 대중적으로, 그리고 문화산업적으로 소비된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지젝이 굳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거나 아닐 이유도 없으며, 공산주의자가 대중적으로 소비되어서 문제될 것도 없을 것이다.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그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지젝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평소 주장과 달리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뛰어난 대중심리학자’”라는 것이다. 대중의 마음을 잘 파악하는 것이 결격사유일리는 없고, 여기에서 홍준기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지젝의 이중성일 테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만나면 그 입맛에 맞는 말을 하고, 합리주의자나 비폭력주의자를 만나면 합리적이면서 비폭력주의자인 척한다는 요지이다. 그런데 이런 홍준기의 주장은 내적인 모순에 직면한다. 그는 공산주의자 일반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젝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레닌을 따라 사회민주주의를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이고, 공산주의의 반대는 신자유주의라는 무의미한 이분법만을 제시할 뿐 서민을 위한, 진정한 진보정치를 위한 공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이 주장은 앞서 내가 인용한 내용과 배치된다. 홍준기의 고발처럼 지젝이 대중의 심리에 아첨하는 얼치기 이론가에 지나지 않는다면, 딱히 사회민주주의라고 해서 비판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젝 입장에서 사회민주주의자에게도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일 테다. 그런데 왜 지젝은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일까.
아마도 지젝이 여전히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서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홍준기는 확신하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홍준기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지젝이 진보적 지식인들의 도전에 직면하자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전향하는 ‘손쉬운 해결책’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언제는 인기영합주의에 빠진 ‘대중심리학자’라서 이중적이라고 했다가, 이제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서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니 말이다. 횡설수설하고 있는 장본인은 누군가.
앞서 지적했듯이, 이 지점에서 홍준기는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에게 공산주의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동의어이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그에게 각인되어 있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젝이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건국대학교에서 행한 강연에서, 어떤 외국인 청중이 폭력 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지젝은 비폭력주의자 간디에 대해서만 언급함으로써 폭력의 문제를 슬쩍 비켜갔다. 그래서 지젝의 강의를 들은 많은 청중들은 지젝은 마르크스-레닌과 달리 비폭력주의자라는 인상을 갖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 진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레닌과 달리 비폭력주의자라는 인상’을 지젝이 주었다는 표현이다. 예의 이중성을 지적하고자 인용한 사례이지만, 이 말이 폭로하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이 폭력주의자라는 홍준기의 믿음이다.
여기에서 왜 홍준기가 정작 바디우 같은 다른 공산주의 철학자들을 제쳐두고 애먼 지젝을 비판하고 있는지 미스테리가 풀린다. 홍준기는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한다는 근거에 입각해서 지젝이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지젝을 폭력주의자로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혁명을 위한 폭력적 행위를 진지하게 옹호하기 위해 쓴”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지젝의 책이 그 증거로 호출 당한다. 이 책에서 ‘나쁜 공산주의자’ 지젝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어난 ‘폭동’을 ‘신적 폭력’이라고 옹호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이다. 지젝의 주장에 대한 오독은 차치하고, 그의 논리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는 무차별적으로 혁명을 선동하는 폭력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80년 광주가 ‘폭동’이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는 ‘일베’의 논리를 연상시킨다. 이것이야말로 공안당국의 안보주의를 지탱시키는 편견을 구성하는 논리이다.
‘일베’와 공안당국의 편견을 지탱시켜주는 논리는 무엇인가. 바로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등가화의 논리이다. 그런데 과연 모든 폭력은 동일하게 나쁜 것인가. 강간범에 저항하다가 상해를 입힌 피해자가 있다. 강간범의 폭력과 피해자의 폭력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노동자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제 진압하는 경찰의 폭력과 거기에 저항하는 노동자의 폭력을 등가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지젝이 차용하고 있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철학적 개입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국법은 모든 당사자에게 ‘동일한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폭력의 관점에서 보면 평등이란 없고 기껏해야 똑같은 크기의 폭력만이 있을 따름”이다.(2)
국법이 가장 극적으로 관철되는 곳은 국가폭력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군대이다. 군대에서 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처벌을 면하기 어렵다. 이런 황당한 ‘군법’의 논리야말로 국가의 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가 모두 다리 밑에서 노숙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국법의 논리는 결과적으로 가난한 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신적 폭력’이란 법 제정과 집행에서 소외되어 있던 이들이 국법에 의해 정해진 금지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폭력을 의미한다. 지젝이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도 바로 이 문제이다. 홍준기는 자의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구절만을 인용하고 있지만, 지젝은 분명하게 ‘신적 폭력’을 지칭해서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라는 말이 뜻하는 바로 그 의미 속에서 신적인 것이라 간주돼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3)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주장은 ‘폭력혁명’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국법에 내재되어 있는 원리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런 오류들을 일일이 지적하는 것으로 아까운 지면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 내가 지젝 당사자도 아닐뿐더러, 지젝의 독자에 불과한 처지에서 불성실한 홍준기의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내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립구도로 설정하는 홍준기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홍준기 개인의 오류라기보다 ‘민주화’라는 정상화 또는 합리화의 과정에서 정치적 계기들을 지워버리려는 이른바 한국형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탈정치 또는 반정치적인 경향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좋은’ 사회민주주의와 ‘나쁜’ 공산주의라는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홍준기가 역사적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헷갈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홍준기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회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는 과거 코민테른 테제에 입각한 스탈린주의자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3기”라는 새로운 교의를 발명한 스탈린은 사회민주주의를 개량주의로 규정하면서 ‘사회 파시즘’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겉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 파시스트에 협력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식으로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없다. 당연히 스탈린주의를 조롱하는 지젝이 사회민주주의를 스탈린의 테제에 입각해서 비판한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라는 주제로 넘어오면 홍준기의 논의는 더욱 비약으로 일관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회복지와 동의어처럼 사용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둘은 같다고 말하기 어렵다. 사회민주주의가 복지국가를 지향하긴 하지만, 그 본래 목표는 사회주의의 달성이다. 당연히 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예비 단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차원만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내에서 보편적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정치노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회민주주의만이 사회복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이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복지 개념은 ‘사회보장’에 더 가까운 것으로, 동즐로 같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이것은 “공화국에 전적인 신뢰를 주기 위해 이 결손을 메울 적절한 수단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출현한다.(4) 이런 ‘사회보장’에 대한 입장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사회보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전제조건으로 경제발전을 우위에 두거나 아니면 정치적 결정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견해였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초기 사회민주주의가 내세웠던 것은 “정치의 우선성”이다. 물론 이런 사회민주주의의 특성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베른슈타인을 비롯한 사회민주주의의 선구자들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파시즘의 도전으로부터 지켜낸 것이다. 그러나 지젝이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논점은 오늘날 복지국가와 동일시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고유 모순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젝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복지국가 달성만을 목표로 삼게 되어버린 사회민주주의의 난관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버린 형국인 것이다. 본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면, 오직 사회민주주의만이 복지국가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굳이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복지국가에 대한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입장은 많기 때문이다.
당장 케인즈주의만 하더라도 완전고용정책을 지지하고, 노동조합을 통한 임금상승을 허용하면서 임금의 하방경직성을 옹호한다. 고용자와 노동자 사이에서 노동자의 입장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케인즈주의 역시 계급투쟁모델을 계급타협모델로 대체하는 이론인 셈이다. 케인즈주의는 실질임금을 상승시키면 노동자계급의 유효 수요가 증대해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편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경제적 토대는 역설적으로 이런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정책들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케인즈주의는 궁극적으로 자유기업을 옹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이다. 케인즈주의에 따르면, 세금 징수와 채권 발행을 통해 정부는 유효수요 노릇을 하지만 거기에 대한 공급자는 기업이다. 이런 원리에서 정부 수요의 증대가 곧 기업 생산의 증대와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적대적인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다. 기업 생산의 증대를 위해 정부가 국민의 ‘혈세’를 사용하는 이런 방식이 완전고용 달성이라는 목표를 상실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한국의 사례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홍준기는 이렇게 본래 의미를 상실해버리고 케인즈주의의 경제정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민주주의가 어떻게 독자적인 정치노선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정치이념으로서 사회민주주의도 공산주의 못지않게 머나먼 유토피아적 기획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시종일관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적대관계에 놓기에 바쁘다. 본래 목표를 따지고 들자면,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보다 공산주의에 더 가까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의 입장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 본래적인 목표의 환기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타당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지 자유기업을 옹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반론에서 드러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만을 놓고 본다면 홍준기는 자신의 비판 대상인 공산주의는 물론이고, 자신의 옹호 대상인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조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도대체 그의 반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가. 자칫 항로를 이탈해서 자기도 모르게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축출하기 위한 신성동맹에 가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글·이택광 영국 셰필드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수여했으며 계간 <미래와 희망>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마녀 프레임>, <임박한 파국>, <당신들의 대통령> 등이 있다.
(1) John Roberts, “The Two Names of Communism”, Radical Philosophy, 177 (2013), p. 9. (2) 발터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최성만 역, 서울: 도서출판길, 2008, p. 109. (3)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역, 서울: 난장이, 2011, p. 277. (4) 자크 동즐로, <사회보장의 발명>, 주형일 역, 서울: 동문선, 2005, p. 60.
이 글은 본지 12월호에 홍준기 박사가 앞서 10-11월호에 게재된 슬라보예 지젝과 이택광 교수의 ‘공산주의 이념의 가치론’을 집중 비판한 데 따른 반론이다. 이에 대해 홍준기 박사는 2월호에 사회민주주의의 실효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재반론을 다시 기고할 예정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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