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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5편 1-12절
오직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시편 3편의 경우 표제 자체로서 그 시의 배경을 알 수 있었다면 시편 4편이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시편 5편의 경우 정확한 배경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5편의 경우 표제로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용을 보면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그런 탄식은 결국 하나님을 먼저 찾고 기도함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될 것은 다윗의 상황이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다고 할 때 그 모든 섭리의 주체는 여전히 하나님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위 오늘날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사고가 한국교회 안에 있고, 또 그런 사고 속에서 기도하는 자에게 마치 문제 해결의 원리가 있는 듯 그렇게 생각되는 내용들이 있지만, 결코 주체는 기도하는 자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도 자체만 생각해보면 내 상황이 어려워지고, 그렇게 상황이 어려워 지다보니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게 사람의 심리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람이 주체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상황이 어려워져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마치 주체가 되는 듯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빌립보서 말씀으로 생각하자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빌2:13) 하나님을 먼저 찾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겁니다. 기도하는 자는 분명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지만, 그 모든 과정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기도케 하시는 역사가 먼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의 경우 1절 이하 3절을 보시면 다윗이 기도하되 다양한 표현으로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곧 다윗이 하나님을 먼저 찾았다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니 우리 표현으로 이렇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교훈적인 의미에서 “어려운 상황이 있다면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됩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 결과가 아닌, 사람 쪽에 어떤 원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때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기도하게 하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한다고 할 때 한편으로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기도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심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것도 더더욱 사실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 방향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그 틀로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어디에서 많이 배우게 되느냐 하면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배울 수 있지만, 특별히 시편을 통해 많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을 생각하시면서 시편 5편의 말씀을 생각해 보도록 하면, 먼저 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다윗의 상황이 정확하게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다윗은 자신이 기도하는 그 기도 소리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결코 나의 부르짖음에 대해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고, 반드시 자신의 기도에 대해 주의 깊게 들어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심지어 다윗은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기도하는데, 혹 자신이 말로서 하나님께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것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아니 우리가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마음의 상태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다윗은 그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어떤 경우 자신의 마음을 다 표현하기가 벅찰 만큼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일 수가 있습니다. 마음의 답답함으로 뭔가 말을 하기는 하는데, 말로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그 마음의 괴로움이 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 욥기 1장에서 그는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재산 그리고, 자신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를 다 잃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신앙의 모범이 될 만한 그런 내용을 남기시긴 했지만 그에게 전혀 고통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마음의 고통을 외적 행동으로서 표현하는데, 그의 겉옷을 찢었다, 그의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욥1:20). 어떤 면에서는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통해 표현한 것이지만, 그때도 그것으로 그의 마음을 다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가?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도 보면 그의 마음을 격분케 한 브닌나로 인하여 몹시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삼상1:6).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말로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입술은 움직이지만 마음으로서 기도하기도 했던 것입니다(삼상1:15).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는지 다 알 수는 없으나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 있고,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품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 어려움으로 인하여 때로는 우리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계시느냐?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도 감찰하시는 분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소리가 하나도 없으며, 혹 소리로서 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소원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2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 하면 자신의 왕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하나님으로서 생각하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왕이라는 말은 통치한다, 다스린다는 의미와 연결되는 단어입니다. ‘나의 왕’, 즉 다윗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때 왕으로 있을 때인지, 아니면 그 전인지에 대해 알 수 없으나 혹 그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린다 할지라도 그의 왕은 누구냐? 하나님이신 겁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다윗이라 할지라도, 그런 다윗이 누구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느냐? 하나님인 겁니다. 나아가 다윗은 ‘나의 하나님’으로서 부르고 있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왕이라는 표현 속에서 다윗은 왕이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면, 하나님이란 표현을 통해 다윗은 그가 지으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자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왕으로 표현하든, 아니면 하나님으로 표현하든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고, 나아가 모든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모든 만물에 대하여도 통치권을 실행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왕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단순히 1절의 방법으로서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부르짖으며 기도할 정도로, 어떤 면에서는 그의 간절함이 이런 모습으로 표현될 정도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2절의 내용입니다.
3절도 보시면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여기서는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신다고까지 말하는데,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소원을 지금 이런 확신의 말로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신다는 확신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마음의 소원이 그렇게 간절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침’이라는 표현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아침에만 들으신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한국교회의 경우 새벽기도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새벽에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새벽에 기도하면 더 기도가 잘 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성경이 아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할 때 그런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가 묻는다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칼빈의 경우 오늘 시편과 관련해 이런 내용으로 주석합니다. “그는 한 가지 내용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반복은 자기 마음의 욕구와 기도에 대한 오랜 불굴의 인내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 속에서 이 아침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혹자는 그가 율법의 규칙에 따라서 성전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와 함께 드리곤 했던 아침 기도를 여기서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내가 이 견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약간 장기화된 지연에서 오는 싫증 때문에 자신의 구출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을 소원하는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한편으로는 매일의 제사를 통해 아침마다 기도했던 그 습관을 따라 기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칼빈의 경우 오랫동안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서 기도하다보니 지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속히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찍이 일어나 그 문제를 놓고 기도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은 이 문제를 미룰 수 없다는 그 간절한 마음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아침에 일어나 기도할 정도로 거기에 마음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다윗은 분명 그의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칼빈의 주석대로 오랫동안 그가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응답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며, 또한 내 마음을 헤아려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리고 때로는 부르짖기도 하는 그런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는 마음으로 왕이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1절 이하 3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 하나가 있는데, 다윗의 이 간절함 때문에 간절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좀 정리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간절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JS 설교 참조).
좀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주일에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질도 드리게 됩니다. 그럼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또 우리의 물질을 받으신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의 착각 가운데 하나는 나의 정성, 나의 열심, 나의 간절함이라는 것을 들고 나아옵니다.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신6:4-5) 그런 마음으로서 나아오기만 하면 다 받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런 마음도 중요합니다. 물질을 드릴 때 아무런 마음도 없이 그저 기부금 내듯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첫째요, 유일한 원인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 우리의 열심, 우리의 노력이 첫째요, 유일한 원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첫째요, 유일한 원인인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가는 것이 첫째요, 유일한 원인입니다. 왜 우리가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역사가 있는가? 우리의 정성이 남달라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다른 종교인들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성과 노력으로 하자면 타종교보다 훨씬 못한 모습일 때도 많습니다. 또 우리의 간절함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유일한 원인,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물질을 받으시는 유일한 원인은 오직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간절함이 있어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간절함이란 없습니다. 나의 노력과 정성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노력과 정성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선에도 점과 흠이 있듯이 노력과 정성, 간절함이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받지 못하실 수밖에 없는 점과 흠이 항상 묻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받으신다고 할 때 그 이유는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의 거룩이 되시는 그리스도 때문에(고전1:30) 받으시는 역사가 있는 겁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5편의 첫 부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런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다면, 곤란한 상황이 펼쳐진다면, 그래서 마음 가운데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온다면 하나님을 찾되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찾되 한번만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찾고 구해야 한다. 때로는 소리를 내어 기도하기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말로서 하지 못할 때 그 마음을 하나님께 토해 내듯 기도하기도 해야 하며, 나아가 때로는 부르짖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고, 그 간절함이 우리로 하여금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을 찾는 모습으로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전제는 무엇이냐?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구약에 속한 인물로서 다윗이지만,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자이고, 그 믿음은 복음의 말씀 즉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모든 기도는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지고 있는 기도라는 전제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윗의 이 반복적인 기도의 내용을 통해 그의 간절함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간절함보다 앞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 이미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그리스도 때문인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윗이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가 생략되는 걸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것은 말 그대로 전제로 깔려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인식 가운데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절대로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계속해서 4절 이하 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할 때 그 이면에는 죄인이 의인에 대한 핍박의 역사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십사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면서 4절 이하 6절의 말을 덧붙이게 되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결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악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죄인이 의인을 핍박하는 것에 대해 기뻐할 수 없는 것이고, 죄인과 함께 하는 일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한 가지가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어로서 말할 때 다른 무엇과 비교하여 가장 월등한 것을 최상급이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가장 선하시고, 하나님은 가장 의로우시다. ‘가장’이라는 말이 최상급입니다. 그러나 최상급으로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가장 거룩하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거룩하십니다. 누군가와 비교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속성은 그와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 결코 기뻐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기뻐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기 때문에 악을 기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시기 때문에 결코 불의를 기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죄와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죄와 함께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죄인과도 함께 할 수 없으십니다.
반면 신자들과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함께 하시는 역사가 있을 수 있는가? 사실 이 땅의 삶으로서 보자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죄인이요, 악인이요, 불의한 자입니다. 여전히 부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와 완전히 끊어져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더러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특히 시편의 표현들을 보면 신자들에 대하여 죄인이라는 말을 돌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다윗만 보더라도 다윗이 죄를 전혀 짓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결국 우리아까지 죽음으로 내 몰았으며,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거짓을 말하기도 했던 것이 다윗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 많은 시편들을 통해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는 자로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바로 다윗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32편 1절을 통해 어떤 고백을 하느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그리고 마지막 12절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외적으로 보자면 이 땅에서는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고, 또한 그것이 사실이지만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졌기 때문에 자신을 의인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인과 함께 하시는 겁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는 의미로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달리 표현을 하자면 그들은 참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의 핍박의 역사를 보면 분명 육신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그러했고, 또한 그의 아들인 압살롬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열매로 판단할 때 그들이 참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이며, 거짓을 말하며, 피 흘리기를 즐거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뭐냐?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 열매가 결코 죄악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살인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하며,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간음을 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멸망에 이르기 때문에 거짓을 멀리해야 하고, 오히려 진실을 말하며 진리를 좇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저 외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도 살피면서 살인하지 않는 자, 간음하지 않는 자, 거짓을 꾀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때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리기보다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런 열매 맺기를 소망하라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곧바로 나오는 것이 뭐냐? 오늘 본문 7절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앞서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고, 또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어떤 자가 주 앞에 설 수 있는가? 당연히 의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인에 대하여 오늘 본문이 어떻게 말하는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여기 보면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오직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입니다. 이전 성경인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바로 이것입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지만 기도를 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는 우리의 간절함 때문이 아닙니다. 간절함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원인으로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원인이냐?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역사가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의인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스스로가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롭지 못 합니다. 여전히 이 땅에서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인으로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는 이유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결코 내 열심, 내 노력, 그리고 나의 의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 4절 이하 6절을 통해 이런 결심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기 때문에 마땅히 죄를 멀리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마땅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땅한 바입니다. 그러나 그런 결심을 한다고 할 때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우리 스스로의 결단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나 됨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아는 자로서 열심을 가지셔야 합니다(고전15:10). 왜 펠라기안주의가 나왔는가? 왜 좀 더 교묘한 형태인 반펠라기안주의가 나왔는가? 왜 알미니안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나왔는가? 나의 나됨이 주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이 사실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오직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서만 주를 경외할 수 있고, 주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데, 이 앞의 내용, 즉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는다는 걸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이런 이단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 7절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4절 이하 6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악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이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아니 일반적인 은총을 따라 약간의 깨달음이 있다 할지라도 이런 자들과는 달리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는 결코 불가능합니다. 아니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선한 열매를 맺는 거기에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선을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오직 주의 풍성한 사랑, 오직 주의 풍성한 인자, 오직 주의 풍성한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어야 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주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고, 주를 경외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8절에서는 이렇게까지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4절 이하 6절 말씀을 살필 때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본문의 배경 가운데는 죄인이 의인을 괴롭게 하는 역사와 맞물려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럴 때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기도합니다. 혹은 내 앞에 원수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그러한 원수들 때문에 자신이 더욱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걷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원수가 있어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 있지만, 그들을 보면서 그들과 같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이 무엇인지를 더욱 바르게 알아 그 길만을 걷는 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다윗은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 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죄의 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는 결코 함께 하실 수 없는 분이시지만, 그들을 통하여서도 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의 배경처럼 죄인이 의인을 괴롭게 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의 경우 이 세상의 삶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시편 90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생의 연수가 칠십, 혹은 팔십이라도 수고와 슬픔의 연속인 인생을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시90:10). 지난주 기독교 강요를 살피면서 신구약의 유사점에 대해 살폈지만(기독교강요, 1559, 2권 10장) 아담,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그리고 다윗 등 이 땅에서의 삶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 소망을 끊어버릴 수 있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디를 바라보게 되었느냐?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악인이 의인을 괴롭히지만, 그런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이끌어 내시는가? 의인으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부르도록 하는 일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사용하시고 악인을 사용하시되, 그들이 도구가 되어 의인으로 하여금 선한 역사를 이끌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의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악인이 있고 원수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그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냥 행복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 땅을 사는 동안 행복한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우리보다 행복한 자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려움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함이 있고 슬픔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의인으로 하여금 선한 역사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분명 죄악을 기뻐하는 분이 아니시지만, 그 죄조차 섭리로서 다스린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다스린다고 하니까 오해해서 죄를 창조하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지도 않으셨고, 죄를 조성하지도 않았습니다. 죄에 대한 허용도 하지 않았습니다. 허용이라고 말하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나타난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나타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죄가 하나님의 의지 밖에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 안에 있되, 결코 죄를 창조하신 분은 아니시며, 창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조차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또한 자기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무조건 어려움이 있으면 어려움을 없애 달라고만 기도하시면 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이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의 기도가 그러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9절과 10절을 보시면 원수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앞서 6절의 말씀과 같은 내용을 다시금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입은 신실함이 없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며, 거짓을 말하는 입의 마음은 이미 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런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처럼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이고, 그들의 혀는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아첨할 뿐인 것이 원수들의 특징입니다.
그런 자들을 향하여 다윗이 기도하는 것이 뭐냐? 그들의 악한 일이 실행되지 않도록,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악한 자가 악한 자의 꾀에 빠지게 해 달라는 기도는 그들 스스로의 죄가 그들에게 올무가 되어 그들에게 돌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거짓을 말하면 그 거짓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해를 입게 해 달라는 간구와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기도가 있다고 우리와 원수 된 자들에 대하여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의를 해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원수를 향하여 저주를 구하는 기도는 결코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 좀 편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신 뜻을 드러낸다는 차원에서의 기도인데, 그 핵심은 뭐냐? 하나님의 공의가 올바르게 시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기도를 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하는 게 뭐냐 하면 그들의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시되, 그들의 죄는 누구 앞에서의 죄인가? 하나님 앞에서의 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금 배역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아닌 겁니다. 다윗을 괴롭히고 있지만 다윗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괴롭히고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인 겁니다. 때문에 다윗은 그들의 꾀가 시행되지 못하도록,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도록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결국 이런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을 대적할 때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의 꾀에 빠져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의 거짓과 조롱과 여러 모양의 핍박 등에 대해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1절 이하 3절처럼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아가야 하며, 뿐만 아니라 더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11절은 원수와는 달리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한 마디로 주님께만 피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피하기만 하면 주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자들에게는 참된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어떤 표현까지 있느냐?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문제가 있을 때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문제 해결보다 그런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만 피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될 때 기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 피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보호하실 것에 대해 믿고, 그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원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바라봐야 하느냐? 문제 해결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 피함으로 그 안에서만 참된 기쁨을 누리는 것을 바래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보호하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나아가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사실 자체로 우리는 즐거워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면 감사와 즐거움이 있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과는 상관없이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것 자체가 우리의 기쁨이요,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2절도 보시면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되어 있는데, 가장 큰 복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란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신 것, 이것이 가장 큰 복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큰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보호하신다면 이겨내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혹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큰 상급으로, 그분을 우리의 방패로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일 뿐이지, 하나님만을 가장 큰 상급으로 그리고 방패로 여긴다면 어떤 문제도 사실 문제꺼리가 되지 않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사실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리 큰 문제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만 피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피하되,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마시고, 오히려 하나님 때문에 모든 문제 가운데서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혹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빨리 응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답답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고, 그 하루하루가 오랜 기간 동안 지속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길이 없어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끝까지 하나님만을 찾고 구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을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실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주 안에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우리로 하여금 갖게 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의심하지 마시고, 더욱 주의 은혜를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