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참고문헌] | ||
|
안희제(安熙濟)
백산 독립운동가, 교육가
자(字) 태약(泰若) 호(號) 백산(白山) 거(居) 의령군 입산(立山)
1885년(고종22년), 경상도 의령에서 탄생하시어 일평생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1943년에 순국하였다.
1962년3월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1세때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養正義塾(양정의숙) 경제과로 전학하여 24세에 졸업하였다.
그 뒤 1907년 동래의 구포에 龜明學校와(구명학교)와 의령군 의령면에 宜新學校(의신학교) 를 설립하였고,
1908년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매진하였다.
1909년 10월에 尹世復(윤세복), 徐相日(서상일), 申性模(신성모), 南亨祐(남형우), 朴重華(박중화)등
80여명의 동지들과 비밀청년단체인 大東靑年黨(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하였으며,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접촉, 활발한 운동을 했다.
1914년에는 부산에서 白山商會(백산상회)를 경영하여 무역업에 종사하는 한편,국내외 독립운동단체의 연락처를 제공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각지에 배포, 국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 해에 백산상회를 白山貿易株式會社(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조달기관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수많은 애국청년학생들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이러한 장학생들 중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1925년에 경영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하여 중앙일보로 개칭하고 사장이 되어 일본의 총독정치를 맹렬히 비난였다.
또한, 1927년 李時穆(이시목)등과 自力社(자력사)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 해 나갔다.
193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大倧敎(대종교)에 입교했다.
대종교를 신봉하면서 總本司典講(총본사전강),敎籍刊行會長(교적간행회장)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고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東京城(동경성)에 발해농장을 세워 교포들의 생활안정과 청소년교육에 힘썼다.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 당하고 있던 한국인 소작농민 300여호를 불러다 토지를 분배해 주고 5년 분할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1942년 11월 일본이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하여 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하 대종교의 지도자 21명을 체포한 임오교변사건으로 투옥되었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혐의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9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인
1943년 목단강병원에서 순국하였다. 殉國十賢(순국십현)으로 추존하였다.(대종교)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선생의 삶과 항일투쟁
1989년 3월 84살의 일기로 타계한 산수(山水) 이종률 선생은 부산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던 50년대쯤 대학 응시생들의 면접 시험 때
"백산에 관해 아는 것을 얘기하라"고 물어 대합이 시원치 않으면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종률 선생은 백산선생의 묘비문 속에서 그를 가리켜 "정녕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육의 선각자요,
민족자본의 육성자시면, 민족언론의 선구자이자 민족의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우리는 백산의 삶 속에서 민족수난기를 살다 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서의 행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기준의 지적처럼 그에 얽힌 일화는 많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의 생애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은 극히 적다.
⑴ 출생과 성장
1885년(고종 22년) 8월 4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富林面) 설뫼(立山, 雪山里)에서 임진왜란 때 의령을 중심으로 곽재우와 더불어 조국방위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 안기종(安起宗)의 후손 안발(安발)의 3남 1녀 중 장남(동생 國濟, 東濟, 文卿)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진(康津, 耽津). 자(字)는 태약(泰若). 그의 집안은 1천여석의 재산을 가진 토호 향반가(鄕班家)였다고 한다.
7세에 족형(族兄) 서강(西崗) 안익제(安益濟)에게 한학을 수학한 후 사립 흥화(興化)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1906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양정의숙으로 전학한다.
전학 이유는 보성전문학교 교주(校主) 이종호(李鍾浩: 이용익의 손자) 배척운동에 가담한 탓이라 한다.
⑵ 애국 계몽운동과 국외 활동
1907년 양정의숙 재학 중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한다. 먼저 교남학우회(嶠南學友會)를 조직, 그 임원이 되어 지방순회강연에 나선다.
또한 이우식(李祐植)과 함께 의령군 의동면 중동(中洞)에 의신(宜新)학교를 설립하고, 이듬해에 종중(宗中) 재산으로
고향 설뫼에 창남(創南)학교를 설립한다(한국전쟁 때 비행기의 폭격으로 지금은 형적조차 없다).
또한 동래 구포에서 윤상은과 더불어 구명(龜明)학교를 설립한다(각 학교의 설립 년도는 정확하지 않다).
윤상은이 설립한 구포저축주식회사에 백산이 발기인, 주주로서 참가하고, 안희제가 뒤에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또 이를 주식회사로 확대할 때 윤상은이 적극적인 협력자가 된 것은 이러한 인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그 해 10월에 이원식(이원식), 서상일(徐相日), 박중화(朴重華), 김동삼(金東三),
신팔균(申八均), 윤세복(尹世復), 남형우(南亨佑), 윤현진(尹顯振), 김관제(金觀濟), 박광(朴洸), 윤병호(尹炳浩),
김홍량(金鴻亮), 민강(閔강), 이병립(李炳立) 등 80여 명의 당원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한다
(신용하는 이 단체가 신민회 산하 조직이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였으나 그 해에 국권이 상실되자 독립투사들의 뒤를 따라 1911년 국외로 망명,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 동향인 최병찬(崔秉瓚)과 더불어 "독립순보(獨立旬報)"를 간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순보"는 전해지고 있는 것이 없다. 망명시기의 활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안국제의 기술에 따르면 1911년 봄에 걸어서 두만강을 건너 말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6개월 간 머물다가
1912년 정월에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결사를 조직하며 활동하다가 최병찬이 폐병에 걸려 그를 봉천(奉天)으로 옮겨
입원시킨 다음 만주로 나왔다고 한다).
⑶ 백산상회의 설립과 부산지역 민족해방운동 지도
1913년에 3년 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914년 9월 고향에의 밭 2천마지기를 팔아 이유석(李有石), 추한식(秋翰植) 등 초량객주와 더불어 부산동광동에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그 후 최준(崔俊,: 경주), 강복순(姜復淳: 진주), 운현태(尹顯泰: 구포), 전석준(全錫俊: 울산) 등 영남의 대지주 자본을 끌어들여 1917년 자본금 13만원의 합자회사로, 1919년 5월에는 공칭자본금 1백만원의 주식회사로 확장한다. 당시 그는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인재 육성, 독립운동의 국내 연락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국외의 어느 조직과 연계되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임시정부의 국내연락망인 연통제 사무국 국내책을 맡았다고 이야기되지만 뚜렷한 근거를 갖고있진 못하다. 백산이 이른바 '임정 36호'의 책임자로서 미국, 중국의 첩보조직과 연계를 같고 일본의 아오모리항 폭파사건, 세균 특급열차 히카리호 폭파사건에 참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백산의 이름을 빌려 공적을 조작하려는 사람(김형극)이 지어낸 것으로 판명되었다.
1차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선언으로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자 윤현진, 남형우 등을 영남대표로 상해에 파견하고, 3·1운동 때는 안준상(安駿相: 제헌 국회의원)을 의령에 보내 독립운동을 지휘하도록 했다고 한다.
1919년 11월 백산회사 관계자와 영남 유지들의 힘을 모아 준재들을 선발, 국외유학의 기회를 주기 위해 부산에 기미육성회(己未育成會)를 조직한다. 그 회원은 매년 1백만 원 이상을 부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1920년 5월에는 회원이 43명, 회원부담금 신청액이 1만2천 원, 불입금이 5천 원에 달했으므로 제 1차 유학생으로 김정설(金鼎卨: 소설가 김동리의 형), 이병호(李炳虎), 전진한(錢鎭漢: 전 사회부 장관), 문시환(文時煥), 이제만(李濟晩) 등 5명을 선출하여 일본, 중국, 구미로 유학을 보냈다.
또한 1919년 12월에는 부산지역의 조선인 자본가들로 구성된 부산예월회(釜山例月會)를 조직했다. 부산예월회는 부산지역의 초기 문화운동의 구심체로서 총독부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산업개선청원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다(회원명단은 "조선일보" 1921.5.5 참조). 회원 수 38명이었고 대표자는 안희제였다.
그는 1927년에 부산을 떠나기 전까지 부산 지역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했다. 1919년 8월 14일자 "매일신보"에서 "부산 실업계를 이만큼 이루어놓음에는 경남은행의 지배인 문상우씨와 백산상회 취체역 인희제씨의 진력에 빚진 바 많다"고 평가했듯이, 그는 영남지역 지주자본을 부산으로 유치하여 부산의 민족자본을 크게 육성하였다. 부산상업회의소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교육사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1923년), 부산에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려고 동분서주했고(1926년), 부산도립 여자고등보통학교기성회 위원으로 활동했다(1926년). 또 1923년 2월 부신진공립상업학교(현 부산상고) 학생들이 학교 승격과 교명 변경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단행했을 때 부산상업회의소 의원 대표로 학생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진력했다. 경남의 진보적 유림들이 1924년 2월 마산에서 경남유림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사업 추진을 목적으로 유도협성회(儒道協成會)를 조직할 때 이사로 참가했다.
언론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 봄 동아일보 발기인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부산지국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1920년 전반기 부산역 민족운동('문화운동')의 구심체였던 부산청년회를 지원하고 스스로 재무부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1923년 11월).
1920년대 부산지역의 주민운동과 민족운동 - 부산주택난구제기성회운동(1921년),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에 대한 항의운동(1921년), 노동자 도일(渡日)저지철폐와 상애회("일선융화니 공존공영이나 하는 별별 명칭의 간판 하에서 노동자들의 고혈을 흡취하여 私腹의 利를 도모하고자 하는 상애회"-1924년 조선인협회 발회식에서 내빈으로 참여한 안희제의 축사 중 일절)박멸운동(1924년), 친일주구종교단체 보천교 박멸운동(1925년), 삼산(三山)병원습격투쟁(1927년) - 에는 백산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이종률 선생이 쓴 "백산선생 생애송(生涯頌)"에 따르면 그가 1927년 영남친목회결성반대운동에도 참여했다고 한다("반민특권 요녀 김해 출생 배정자 등이 막후세력으로 된 민족분열주의 지방열 단체 영남친목회를 반대 분쇄하시기에 역시 영남출생인 밀양의 배중세, 황상규, 안동의 이운호, 이원혁, 대구의 윤홍열, 정운해 등와 함께 나섰다." 1927년 만족단일전선으로서 신간회가 결성된 상황에서 영남의 유림지주들이 영남친목회를 결성하자, 영남의 민족해방운동가들은 이 단체가 신간회로의 민족역량집중을 방해하고 지방열을 조장한다고 하여 그 박멸운동에 나서 설립을 저지했다).
⑷ 협동조합운동과 언론활동
3·1운동을 전후하여 크게 발흥하였던 부산지역의 만족자본은 거듭된 공황과 일제의 민족차별적 산업금융 정책으로 말미암아 급속히 쇠퇴해갔다. 백산무역주식회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1925년에는 중역, 주주사이에 자금횡령문제로 서로 고소를 제기하는 일대분규에 휩싸여 사실상 영업중지상태에 빠졌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1927년 결국 해산되고 만다.
이후 안희제는 서울로 활동을 옮겨 1928년 전진한, 이시목(李時穆), 함상훈(咸尙勳) 등이 이끌었던 협동조합운동사에 참가, 협동조합경리조합 이사장에 올랐다. 이때 그가 이시목 등과 함께 自力社라는 잡지사를 경영, 월간잡지 "자력(自力"을 발간했다고 하는데, 이 잡지사는 협동조합운동사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듯하다(월간지인데, 현재 1호, 4호, 7, 8합본호가 남아 있다). 협동조합운동사는 조선의 민족운동이 협동조합이라는 경제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치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926년 5월 재일 동경 유학생들이 동경에서 조직한 것으로(강령: 우리는 협동, 자율적 정신으로써 민중적 산업관리와 민중적 교양을 한다) 1928년 4월 본부를 동경에서 서울로 이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거듭된 탄압으로 1931년경 해체되어 버렸다.
한편 그는 1929년 9월 1일 의령의 유일한 만석꾼인 이우식(李祐植)의 자금을 끌어들여 일제시기 3대 민족지중 하나인 중외일보를 인수하여 자본금 15만원의 주식회사로 만들고 사장에 취임했다(중외일보 9월 2일자에 그의 사장취임사가 실려 있다). 그 해 9월 27일자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조석간 4면씩 하루 8면을 발행했다. 이에 자극받아, 동아, 조선도 8면으로 맞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재력이 빈약한 중외일보로서는 스스로 시작한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1930년 2월 5일부터는 안희제 자신이 발행 겸 편집인을 맡았으나 여전히 재정난이 풀리지 않아 이 해 10월 13일자로 자진휴간에 들어갔다. 1931년 2월 15일 겨우 석간 4면을 속간했으나 고질적 재정난을 타개할 수 없어 그 해 6월 19일 종간호를 낸 후 9월 2일 주주총회에서 주식회사 해산을 결의했다. 안상두의 주장에 따르면 중외일보사에 신문영지를 공급해오던 선일지물(鮮一紙物)의 박흥식이 신문용지의 외상매출을 중지한 것이 큰 타격이었다고 한다. 그 후 노정일(盧正一)이 이를 인수, 중앙일보로 개제하여 발행했다(발행 당시 안희제는 고문으로 추대되어 있다).
또한 1930년 미증유의 대수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빠지자 그는 전조선수재구제회를 조직하여 수재민 구제에 헌신했다고 한다(신재홍). 이 시기에 백산은 의열단 폭탄반입사건으로 유명한 황옥(黃鈺), 유석현(劉錫鉉), 문일평(文一平), 이교담(李교淡) 등과 교유했다고 한다(나절로).
⑸ 발해농장과 대종교 활동
1931년 안희제는 경북 동화 금정(金井)광산 개발로 떼돈을 번 김태원(金台原)과 공동으로 투자하여 발해국의 도읍이었던 북만주 동경성(목단강성 영안현)에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고, 1932년부터는 목단강 상류의 일부를 석축(石築)으로 하여 강을 막고 농지에 수로를 대어 광활한 땅을 개간, 조선 남부 지방 실농민 3백여 호를 인솔하고 동경성으로 이주시켜 개간작업을 계속했다고 한다(그가 만주로 이주한 해가 1931년인지 1933년인지 분명치 않다). 그는 이곳을 발해농장이라고 이름지었다. 그가 만주로 떠난 이유는 아마 농장경영을 통해 동포 이주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킴과 더불어 경제적 실력을 형성, 그 물적, 인적 기반으로 무력투장을 위한 독립군단을 양성하려는 것이었을 게다. 그것은 신민회에 의한 독립군 기지 양성운동 이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일관된 민족해방 방략이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 정세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를 침공, 1932년 3월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했다. 만주국 치하에서의 만주에서 백산은 주로 대종교포교활동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1909년 나철에 의해 중광된 대종교는 민족종교인 동시에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성격을 지녔다. 1914년 대종교는 장차 독립전쟁을 위해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했다. 대종교의 무장투쟁노선을 대표하는 서일(徐一)은 대종교인들로 중광단(重光團)을 조직, 무장투쟁을 위한 터전을 닦았다. 중광단은 1919년 1월 '혈전주의'를 통한 자주독립쟁취를 내용으로 하는 무오독립선언서 발표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또한 서일은 1920년에 대종교 계통의 무장독립운동단체로서, 청산리 전투로 이름을 떨친 북로군정서를 조직했다. 이때가 민족해방운동에서 대종교의 역사적 역할이 정점에 오른 시기였다.
한편 나철은 일제가 대종교를 불법화하자 1916년 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순명삼조(殉命三條)를 남기고 순교하고 김교헌이 제 2세 교주가 되었다. 일제는 국치 후 그를 총독부 촉탁으로 회유, 포섭하여 월 50원의 월급을 지급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김교헌의 등장은 일제당국에서도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 것 같다. 김교헌의 등장은 무장투쟁노선이 한층 온건한 종교, 문화운동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등장으로 대종교의 중핵을 이루고 있던 혁신유림계 인사들이 대종교를 떠나기도 했으나 그의 적극적 포교활동에 힘입어 오히려 교세가 크게 확장되고 1920년 전후에 30∼40만의 신도를 헤아리게 되었다.
만주지역의 여러 종교단체들은 일제와 만주군벌의 탄압, 공산주의 운동의 흥기와 더불어 일어난 반종교운동으로 민족해방운동 전선에서 쇠약, 퇴보, 변질되어갔는데, 대종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북로군정서가 괴멸되자 서일은 자결하고(1921년) 김교헌도 1923년 11월에 병사하자 제3세 교주로 밀양사람 윤세복이 도통을 이었다.
1925년 6월에는 일제와 만주군벌 사이에 미쓰야(三矢)협정이 체결되었는데, 그 부대조건에서는 서일의 무장투쟁을 예로 들어 대종교는 종교를 가장한 항일단체이니 해산시켜야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926년 12월 대종교포교금지령이 내렸다. 그 후 윤세복은 대종교의 합법화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만주국 수립 후까지 계속되어 1934년 초 일제 관동군 특무기관과 하얼빈 일본영사관에 대종교 재만(在滿) 시교권(施敎權) 인허를 얻어 1934년 3월 하얼빈에 대종교 선도회를 설치했다. 이 해 6월(음력) 윤세복운 안희제와 의논하여 총본사를 발해농장이 있는 동경성으로 옮긴다. 그러나 만주국으로부터 정식으로 포교 공인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후 대종교는 포교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일제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으며 시교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활동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예컨대 당시 대종교 선도회(宣道會)의 김영숙(金永肅)은 하얼빈 방송국을 통해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종교의 힘'이란 제목으로 친일 강연을 하고 있다.
1911년 대종교에 입교한 바 있는 안희제는 1934년 3월 15일에 대종교 영계(靈戒)를 지수(祗受)한다. 1935년 정월 15일 대종교 참교(參敎)로 피선되고 1936년 6월 23일에는 知敎로 승질(陞秩)되고 경의원(經議院: 대종교 의결기관) 부원장을 밭게 된다. 대졸교단에서는 1939년 7월에 만주국 정부에교섭하여 교적 간행에 대한 승인을 얻어 그 해 8월 대종교서적 간행회를 조직했는데, 안희제는 회장이 되어 1940년에 "홍범규제(弘範規制)", "삼일신고(三一神誥)", "신단실기(神檀實記)", "종례초략(宗禮抄略)",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 "종문지남(宗門指南)" 등 8종을 간행하였다. 그 발행 부수는 총 3만 5천 부에 달했고 또 매년 4기(期)로 "교보(敎報)"도 간행되었다. 1941년 정월 상교(尙敎)로 승질(사후 正敎로 추승됨)되고 총본사 典講을 맡게 된 그는 1942년 4월에는 신병치료를 위해 일시 귀향했다. 그 해 10월 천전(天殿)건축준비회 총무부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그도 표면적으로는 친일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설립한 발해보통학교는 친일주구조직인 조선인민회에 인수되어 동경성보통학교로 개칭되었고, 스스로 당지의 만주국 일인 대장이나 일본영사관 경찰서장, 일경 영사관 동경성 분서장과도 두터운 교분을 쌓아야 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인 안상두를 국방청년단 간부로 입단시키고 대종교총본사에서 경영하는 학교에서 일어강습을 하게 해야했다.
그의 넷째 아들 안상두(安相斗)의 주장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안희제는 발해농장을 비밀 독립 기지로 삼아 대종교 간부를 대동청년단에 입당시키고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자 중국구국군이나 우리 독립군과 비밀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종교 교단에서 해방 이후에 낸 대종교 교단사에는 여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대종교 총본사에서는 1942년 음력 10월 3일 개천절 경축식을 거행한 후 임시 헙의회를 개최하고 만주국 정보와 조선총독부에 정식 포교공인을 신청하기로 결의했다. 여기에 대해 일제는 11월 19일 대종교 간부 25명을 일시에 체포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를 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하고, 이 사건으로 순국한 이를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 한다. 임오교변의 원인은 대종교 교인을 가장한 일제 헌병 앞잡이의 밀고 탓이라고도 하고 조선어학회사건의 '주모자' 이극로(의령군 지정면 출신 대종교인)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들어있는 격문 '널리 펴는 말'이 빌미가 되었다고도 한다. 당시는 일제가 이미 친일적 논조가 뚜렷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까지 강제 폐간시키고, 조선어학회나 진단학회와 같은 정치적 성향이 매우 옅은 한글, 국사연구단체까지도 해체시켰으며, 신사침배 강요와 창씨개명 등으로 밀족말살정책에 미쳐 날뛰고 있던 시기이다. 게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장고봉사건 등으로 소련과의 전쟁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일소개전 때 항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는 대종교가 소련과 인접한 지역에서 교적간행과 천전(天殿) 건립 추진 등 활발한 포교활동으로 교세신장을 보이자 탄압의 손길을 뻗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1월 15일 아침 만주 목단강성 경무청 형사대 3명이 돌연 설뫼에 나타나 안희제를 포박, 만주 영안현 경무과를 거쳐 목단강성 경무과에 이감했다. 백산은 9개월 동안 모진 고문과 혹독한 옥살이에 시달리다 1943년 9월 1일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족제(族弟) 경영 영제(永濟)의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3시간만에 영면했다.
죽음을 재촉하는 순간, 그는 단정히 일어나 앉아 물었다. "대전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느냐?" "이미 이탈리아가 패망하고 미, 영, 소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이 득세해 가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그는 지극히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띠며 "일제가 망할 날도 목전에 다다랐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니 죽는 나는 별로 유한이 없다"고 말하고 이어 장남 상록을 바라보며 "미급한 아비를 두어 고생이 많다. 너는 아비가 일평생 뜻한 바가 무엇인가를 잘 알 테니 노력하여 동포의 고난을 네 고난으로 알고 살아라. 가사(家事)든 국사(國事)든 오직 자력(自力)을 중심으로 해야하느니라."라고 다시 자리에 누운 후 가슴에 남은 회포가 너무나 많은 듯 입을 다시 열어 이야기하려다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1943년 9월 2일(음력 8월 3일)새벽 2시였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의 유해는 9월 2일 향리로 운구되어 선영 아래 묻혔다.
백상의 첫째 아우 국제가 쓴 "백산공가장급유사약록(白山公家狀及遺事略錄)"과 "나라사랑19-백산안희제선생특집호"에 그의 삶과 활동이 정리되어 있다. 또한 그의 한시가 "남유일록(南遊日錄)"에 실려 전해오고 있으며 1920년에 발간한 정신수양서 "석곡심서(石谷心書)"가 그의 유일한 저술이다.
백산의 유족들은 일제 하에서 독립운동가를 잡으러 다녔던 조선인 경찰들이나 관리들이 해방 뒤 한동안 숨어 있다가 다신 활개치는 세상이 되었을 때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동생 국제씨는 5·10선거에 출마했다가 경찰서에 끌려가 큰 곤욕을 치렀으며 장남 상록씨는 낙동강농민조합에 관여했다가 경찰의 집중탄압을 받았다. 이른바 '인혁당사건'에 연루되 1975년 4월 대법원 판결 뒤 하루만에 처형된 8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이수병씨는 설뫼에서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경산리 출신으로 생전에 상록씨를 무척 따랐다고 한다.
1962년 백산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1974년 의령에서 백산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1976년 5월 의령읍 동동 세거리에 높이 7미터의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1979년에는 의령의 유지들이 백산육영회를 설립했다. 1989년 9월에는 부산의 독지가들에 의해 용두산공원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선조(先祖) 탐진군파14世
ㅡㅡㅡ> 안기종 [安起宗]
1556(명종 11)∼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응회(應會), 호는 지헌(止軒).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어 장사라는 칭찬을 들었다.
선비의 집안에 태어났으나 책을 읽는 것보다는 무술을 연마하는 데 주력하였다.
원래 총명한 기질인 데다가 한번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끈기 때문에 문무가 겸전한 재목으로 성장하였다.
고을의 천거로 사옹원봉사에 제수되고 이어서 군자감판관이 되었다. 나라에 외환이 닥칠 것을 미리 내다보고
군수물자의 남용을 막고 경비를 절감하여 병기의 수선과 확보에 진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이끌고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의 휘하로 들어가서
유곡(柳谷)·영천·화왕산성(火旺山城) 등지에서 적을 무찔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 때
당쟁의 제물이 되어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래 행상에는 뜻이 없었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죽은 뒤에 논공행상에서 공적에 비하여 포상이 미약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