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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역사... 아... 머리가 아파질라꼬... ㅎㅎ
머리아프게 외우지 마세요, 그냥 읽으세요.^^
일단~은 뉴질랜드 최고의 가이드였던, 앤디맘의 쉽고 간단한 역사정리^^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미리 말씀드리며...ㅋㅋ
1. [뉴질랜드]는 옛~날 바다 밑에 잠겨있던 땅이랍니다. 그러던 어느날 여러가지 지각변동으로 만들어진 땅이
[뉴질랜드]라고 보시면 되요.
그래서 재밌는 점은 [뉴질랜드]에는 맹수가 없답니다. 바다에서 솟은 땅이라 포유류가 하나도 존재하질 못했던거죠.
지금 현재 뉴질랜드에 있는 양, 소, 사슴 등등은 전부 뉴질랜드 사람이 정~말 필요하고, 이 땅과 잘~ 어울리는 것들만
골라서 수입한거랍니다. 그래서 뱀, 여우, 늑대 등의 맹수는 전~혀 없답니다. 제가 가이드 할 때, 손님들이 항상 걱정
들을 많이 하셨죠. "저 많은 양들은 늑대한테 안잡아 먹히나?" 당근 안잡아 먹히죠, 없거든요.^^
2. 그렇게 땅이 만들어지고 난 후...
중앙폴리네시아쪽에 살던 "마오리"라고 하는 부족이 있었는데, 아이가 늘어나고 식량이 필요하자, 족장인 "쿠페" 부부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섭니다. 그때 두개의 섬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뉴질랜드]를 보고 "아오테아로아"라고 마오리 말로
이름을 붙이죠. 뜻은 "가늘고 긴 하얀 구름의 나라(남섬과 북섬이 가늘고 길게 이어져 있고, 그때 너무 이쁜 구
름이 가늘고 길게 뉴질랜드 땅 위에 있었답니다)"란 뜻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 나서 "마오리"들이 이 땅으로 이주를 시작했는데, 주로 북섬으로 많이 갔어요. 왜냐면 북섬이 따뜻
하기 때문에, 중앙폴이네시야쪽에서 살던 "마오리"들에겐 기후가 더 잘 맞았죠. 그래서 지금도 "마오리" 민속촌은 다 북
섬에 있답니다. 실제 "마오리" 인구도 북섬이 훨 많아요.
3. 암튼 그래가지고 마오리들이 잘 살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네델란드"의 "아벨 타즈만"이란 사람이 이 [뉴질
랜드]란 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아벨 타즈만"이 [뉴질랜드(New Zealand)]란 이름을 붙입니다. "아벨 타
즈만"의 고향이 아름다운 항구도시인 "질랜드"여서 "내고향 질랜드만큼 아름다운, 새로운 질랜드"란 뜻으로 만들어
졌다고 해요. 그래서 이름이 [New Zealand] 랍니다.
그런데 "아벨 타즈만"은 당시 식인종이었던 "마오리"의 공격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뉴질랜드]란 땅이 있음을 세계에 알리죠.
4. 그 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사실은 해적이었대요)이 영국 여왕의 특별 명령을 받고, 배에 전쟁준비를 모두 마친
후, [뉴질랜드]를 찾아옵니다. 마오리들과 오~랜 전쟁과 협상끝에 [뉴질랜드]란 땅에 영국 국기를 꽂게 됩니다. 그
래서 [뉴질랜드]가 영연방이죠. 암튼 이때부터 [뉴질랜드]는 원주민 문화에서 바~리 "영국" 문화로 뛰어넘게 됩니다.
"마오리"들이 무척 혼란스러웠겠죠? 그래서 아직도 "마오리"들은 좀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아요.
5. 암튼 또 그래가지고, 영국 국기가 꼽히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발전이 된거예요.
뉴질랜드 역사는 "와이탕이"조약을 맺은 때부터로 하기 땜에 약 170년의 역사로 봅니다. 정~말 짧죠?
그리고 "마오리" 부족의 역사부터 카운터 할 때는 약 1,000년정도로 봅니다. 이건 여러가지 화석이나 유품들로 추정하는
겁니다.
정말 간단하죠? ㅎㅎ 역사가 짧아서 아주 쉽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자부심을 느낄 부분은, 우린 5천년의 역사이지만 [뉴질랜드]는 겨우 170년이란 점!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은 참말로 부럽지만, 역사나 문화는 우리나라가 비교도 안 될 만큼 우세하다는 점!
그리고 위의 역사를 읽어보시면, 뭔 역사가 사실성이 많이 떨어지고 신화적인 부분이 많지? 라고 하실거예요.
왜냐면 "마오리"는 말은 있지만 글이 없답니다. 그래서 마오리 역사는 전~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내려온 것이라,
신화적인 부분이 많답니다. 그래서 "마오리"말은 소리나는대로 그대로 영어로 표기를 해 놓는답니다.
어떻게... 간단히... 이해가... 되시죠...? ㅎㅎ
자, 그럼 이번엔 좀 구체적으로, 길~게^^
1. 첫번째 역사 [마오리]
약 천년 전 "하와이키(남태평양 연안의 군도 부근)"에서 족장인 "쿠페(Kupe)"가 카누 "와카호루아"를 타고 별과 바닷물의 흐름을 따라 뉴질랜드에 최초로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라고 불렀는데, 이는 " 길고 흰 구름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아오테아로아"에 정착한 마오리는 부족 '이위(Iwi)'를 기반으로 수백년 동안 번창해 오면서 번영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쿠페가 뉴질랜드를 찾은 이후 많은 마오리가 수백년에 걸쳐 계속적으로 뉴질랜드를 찾아 정착했습니다.
낚시
마오리족은 사냥과 낚시에 있어 전문가들입니다. 대부분 해변가에 거주하고 마오리에게 낚시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또한 마오리 신화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 마오리 신 마우이가 낚시를 하다 북섬을 낚아올린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마오리족은 하라케케(아마)로 그물을 짜고, 뼈와 돌을 깎아서 낚시 바늘을 만들었습니다. 또 마오리족은 고래를 카이티아키(수호자)로 생각하며 고래의 살을 양식으로 이용하고, 단단하고 강한 뼈를 무기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현재에도 마오리들은 낚시를 할 때 첫번째 잡은 물고기를 뒤로 던져 버리는 전통이 있는데, 이것은 바다의 신인 탕아로아에게 풍작에 대해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수렵과 채취
마오리족은 여러가지 원시적인 덫과 올가미를 이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새인 모아(moa)를 포함한 새들을 사냥하고, 케레루와 투이같은 여러가지 종류의 새들을 양식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멸종된 후이아는 타푸(신성한) 로 여겨져 결코 먹지 않고, 특히 귀중하게 여기는 후이아의 날개를 족장의 머리 장식으로 이용했습니다. 남섬에서는 펭귄과 물개가 양식으로서 이용됐습니다. 머튼버드는 뉴질랜드의 가장 남쪽지역에서 유명하며, 현재에도 귀한 음식으로 여겨집니다. 머튼버드는 커다란 다시마의 주머니에 넣어져 여러달 동안 보관되어집니다.
음식의 자체생산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자생 야채를 먹었으며, 또한 쿠마라(고구마) 같은 새로운 야채를 폴리네시아로부터 들여오기도 했습니다. 마오리족은 괭이, 삽, 그리고 클럽같은 여러가지 도구들을 이용하여 야채를 심고 수확했고, 또한 고사리의 뿌리들도 나무로 만든 절굿공이 같은 것으로 빻아 음식으로 이용했습니다.
다른 음식들로는 여러가지 열매와 푸하 (시금치 같이 생긴 야채) 등이 있으며, 거대한 카우리 나무에서 채취한 고무의 수액을 껌으로 씹기도 했습니다. 아마로 짜여진 바구니과 가방들이 음식을 운반하는데 이용되었으며, 이들 음식들은 파타카라고 불리는 각주위에 지어진 저장고에 저장되었습니다.
훌륭한 땅속의 오븐
지금도 사용되는 기발한 방식의 요리인 항이는 마오리족을 방문하는 사람 누구나 꼭 맛보아야 하는 음식입니다. '항이' 또는 '우무' 라 불리는 이 방식은 땅에 큰 구멍을 파서 만들어진 땅속 오븐에 나뭇가지로 지펴올린 불위에 특별한 돌을 얹어 달굽니다. 그 돌 위에 아마의 녹색잎들을 층으로 얹고, 그 위에 고기와 야채를 아마와 층을 이루며 사이사이에 올려놓고, 거적으로 덮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돌위에 물을 뿌려 그 증기로 음식이 익게 합니다. 나무와 아마의 향이 음식과 융합하여 아름답고 섬세한 훈제의 향기가 음식에 배이도록 천천히 요리를 하면 부드럽고 맛좋을 뿐 아니라 건강 및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일품인 항이가 완성됩니다
전사의 후예들
마오리는 뛰어난 전사들입니다. 오로지 남자들만 전투에 참가하였고, 가장 귀하게 쓰인 무기중의 하나가 창처럼 생긴 타이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아름답게 조각된 타이하는 현재에도 여전히 마오리족의 의식에 사용되고 있으며, 지금은 그 용도가 세련된 예술의 한 형태로 자리잡았습니다. 다른 무시무시한 무기로는 포우나무(뉴질랜드 옥)로 아름답게 조각된 메레(곤봉)가 있습니다. 얼굴 전체에 모코 (문신)를 그리고 타이아하나 메레를 휘두르는 전사의 모습은 실로 무시무시합니다.
전쟁에 대한 준비
초기 유럽인들의 시대에 마오리 부족들과의 충돌이 종종 일어나곤 했습니다. 다른 부족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마오리족들은 파 (요새화된 마을)를 건설하였으며, 이러한 파는 대게 언덕 꼭대기나 산등성이등 전략적인 장소에 세워졌습니다. 대부분의 파는 침략자들로부터 거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방책들이나 참호등을 사용하여 영리하게 건설되어 있으며 지금도 이러한 파의 모습을 뉴질랜드 전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오리족의 중심
마래 (회의 장소)는 마오리 부족들의 중심이었으며, 현재에도 마오리 사회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화레누이(회의를 하는 건물 — 단어의 의미는 '큰 집'이라는 뜻)는 마래의 한 가운데에 아주 큰 구조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화레누이는 구조에 있어서 사람의 몸 구조와 닮아있습니다. 코루루(koruru)라고 불리는 앞쪽 부분은 머리를 나타내고, 마이히(maihi)는 '머리'에서 땅까지 닿는 커다란 판자들로, 팔을 나타냅니다. 화레누이의 앞에 있는 짧은 판자인 아모(amo)는 다리를 상징하며, 지붕까지 뻗은 기다란 들보인 타후후(tahuhu)는 등뼈를 나타냅니다. 많은 화레누이들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으며, 부족의 화카파파(가계 혈통)와 마오리족의 창조 이야기가 새겨진 판넬들이 있습니다.
2. 두번째 역사 [와이탕이 조약]
독립선언
18세기 말에, 쿡 선장이 뉴질랜드를 탐험한 이후 많은 이주민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했습니다. 1839년에는 약 2,000명의 파케하(유럽인)가 뉴질랜드에 살고 있었고, 제대로 치안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정착민이 늘어감과 함께 무법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1833년에 영국 정부는 자국의 무역 이익을 보호하고 증가해 범죄를 막기위해, 제임스 버스비를 총리대리로 임명했습니다.
또한 프랑스인이 뉴질랜드에 정착 또는 무역을 하면서 이 곳의 땅을 사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하여 영국 황실은 1835년, 34인의 마오리 족장들과 함께 뉴질랜드가 영국의 통치아래에서 독립하였다는 것을 선포하였고, 이는 또 '뉴질랜드에서는 마오리족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요구도 할 수 없다'고 명시했습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법과 사기가 계속 난무하자 영국 정부는 뉴질랜드에 좀 더 효과적인 규율이 필요하다고 결정했고, 1840년 윌리엄 홉슨 선장을 부총독으로 보냈습니다. 부총독을 보낸 이유는 토착 마오리 족장들과의 조약에 의해서,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와이탕이 조약
조약이 작성되고 번역되어졌습니다. 조약은, 논쟁을 벌인 하루 뒤인, 1840년 2월 6일에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있는 와이탕이에서 사인되었습니다. 43명의 북쪽 지역의 족장들이 그날 조약에 사인하였고, 그후 8개월동안 전국을 돌며, 전지역의 500명 이상의 마오리 족 족장들의 사인을 받았습니다.
조약이 사인된 땅과 건물은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와이탕이 역사 보존지는 유명한 광광지가 되어있습니다. 와이탕이 조약지로는 커다란 마오리족의 회의 장소, 영국 식민지 시대의 건물, 역사적인 플래그스태프,그리고 아주 긴 와카 타우나(마로리족의 전쟁용 카누)가 있습니다.
뉴질랜드의 건국문서
와이탕이 조약은 1840년 영국 황실과 마오리족 사이에 사인된 공식 협의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영국의 법을 뉴질랜드에 심었고, 동시에 마오리족의 땅과 문화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였습니다. 이 조약은 뉴질랜드 건국 문서로 여겨집니다.
열린해석
이 시대에 이루어진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들 사이에 사인된 조약들과 계약서들이 거의 대부분 잊혀진 반면에 와이탕이 조약은 아직도 뉴질랜드의 법과 사회의 중심으로서 남아있습니다. 이 조약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국가의 건국 문서로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사인된 이래, 와이탕이 조약의 해석에 있어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났습니다.
영어와 마오리 족의 언어로 된 이 조약은 모두 3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조약이 법률에 관한 경험이 조금밖에 없거나 아니면 아예 없는 사람들에 의해 씌어지고 번역되었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번역은 영어버전과 해석에 있어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첫번째 조항은 통치권에 대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는 그들의 '카와나탕아'(통치권 또는 통치 직위)를 영국 황실에 넘긴다고 명시되어 있고 마오리 부족의 버전에는 권력을 공유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두번째 조항에는 '티노랑아티라탕아' 또는 족장제도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오리 부족 버전에는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타옹아'(보물) 소유에 대한 더 넓은 권리를 약속하고 있으며,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들의 땅, 숲, 어장, 그리고 다른 부동산에 대한 통제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오리족 버전에는 '타옹아'라는 말의 사용에 있어 언어와 문화같은 것들의 소유와 보호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조항은 마오리족에게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권리를 보호함과 동시에 모든 영국의 것에 대한 권리도 약속하고 있습니다.
와이탕이 법정
이 조약이 뉴질랜드의 '건국 문서'라고는 하지만, 조약에서 마오리족에게 약속되었던 많은 권리들이 사실상 무시되어졌습니다. 와이탕이 조약에서 제시된 보호에도 불구하고, 마오리들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상당한 양의 땅을 잃었습니다. 땅을 잃은 방식이 종종 의심스러웠으므로, 이는 마오리들의 심한 저항을 이끌어냈습니다.
이에 따라, 1975년에 정부는 와이탕이 법정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법정은 와이탕이 조약을 의미 있고 살아있는 문서로서 존중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습니다. 설립 이후로 와이탕이 법정은 마오리 이위(부족, iwi)들이 제기하는 많은 요구들에 대해 판결을 내렸고, 많은 경우 금전적인 지불이나 땅의 형태로, 보상이 내려졌습니다.
지난 10년동안, 정부와 주요 이위(부족)사이에 큰 사건이 많이 성사되었으며, 보상의 많은 부분이 부족민들의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투자되었습니다.
그럼, 와이탕이 조약의 어떤쪽의 해석이 맞는걸까요? 답은 양쪽 모두 맞다 입니다. 이는 양쪽 버전 모두에 사인이 되었고, 와이탕이 법정이 의사 결정을 할때 양쪽 모두의 문장을 참고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3. 세번째 역사 [영국령이 되면서]
뉴질랜드를 최초로 발견한건 유럽인은 네덜란드인일지 모르지만, 뉴질랜드를 점령한 건 영국인이었습니다.
영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늘어나고 원주민인 마오리 수는 점점 줄어들면서 19세기와 20세기 전반부에는 뉴질랜드 전체적으로 영국 문화가 지배하게 됐습니다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뉴질랜드는 점점 자신만의 독특한 국가의 정체성을 찾으며 뉴질랜드 문화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초기의 방문객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발견한 유럽인은 네덜란드의 탐험가인 아벨 타스만 이었습니다. 당시 남쪽 대륙 '그레이트 사우스 랜드'라는 곳에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자원이 많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아벨 타스만은 바로 그 곳을 를 찾아서 모험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1642년 남섬의 웨스트 코스트를 만나게 됩니다.
첫번째 접촉
1642년에 처음으로 뉴질랜드를 발견한 아벨 타스만은 이 땅을 '스테이튼 랜드'라 명명하고 홀란드(네덜란드)에 합병시켰습니다.(후에 네덜란드의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서 '뉴질랜드'로 바뀌었음) 뉴질랜드의 웨스트 코스트를 따라 계속 항해하면서, 아벨 타스만이 마오리족을 처음으로 만난것은, 남섬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 지금은 골든 베이로 불리는 곳이었습니다.두개의 와카(카누)에 가득 타고 있던 마오리족들이 아벨 타스만의 배를 발견한 것입니다. 아벨 타스만 보낸 작은 보트의 선원들이 카누에 부딪히면서 여러가지 오해들을 야기시켜, 작은 충돌이 일어나면서 타스만의 선원 네명이 죽는 사태에 이르게 됐습니다.
얻은게 없는 모험
아벨 타스만은 한번도 뉴질랜드 땅을 밟지 않았으며, 웨스트 코스트를 따라 항해한 후 몇개의 태평양 섬들을 둘러보기만 하고 더취 이스트 인디(현재의 인도네시아)에 있는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로 돌아갔습니다. 보물이나 천연자원이 가득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결국 타스만의 고용주인 네덜란드의 동인디아회사에서 성공적이지 못한 항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죠.
비너스의 질투
제임스 쿡 선장은 비너스(금성)가 자오선을 통과하는 것을 관찰하도록 타히티로 보내어졌으며, 또한 남쪽의 대양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던 거대한 남쪽 대륙을 찾아야 하는 임무도 있었습니다. 항해 중 쿡 선장의 선실 사환이었던 어린 소년 닉이 1769년에 기스본 가까이에 위치한 한 조각의 땅을 발견했는데, 이 곳이 현재 어린 닉의 머리(Young Nick's Head)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훌륭한 표본들
쿡 선장은 성공적으로 뉴질랜드를 주항했으며 지도를 작성했습니다. 그의 식물학자들과 다른 전문가들이 그의 함선 인데버 호(the Endeavour)에 같이 승선하였으며, 뉴질랜드의 식물군과 동물군, 그리고 마오리 원주민에 대한 상당한 자료들을 수집하였습니다. 쿡 선장은 1779년에 하와이의 해변에서 살해되기 전까지, 두번 더 뉴질랜드를 찾았습니다.
초기의 정착자들
1840년 이전에는 주로 고래잡이와 물개잡이, 그리고 선교사들만이 뉴질랜드에 왔습니다.이들 정착자들은 특히 해변 지역에서 마오리족과 상당한 접촉을 해왔습니다. 마오리족과 파케하(유럽인)는 광범위한 교역을 하였으며, 몇몇 유럽인들은 마오리족들 사이에서 함께 살기도 했습니다.
무기거래
1840년 이전에, 뉴질랜드에는 약 2천명의 파케하가 있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살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마오리 부족간의 충돌이 잦았고, 이에따라 마오리족이 파케하로부터 사들인 총의 유입으로 인하여 이 전쟁은 더욱 위험해졌습니다. 무기의 유입과 파케하가 옮겨온 질병으로 인하여 결국은 마오리 인구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그들의 수는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의 기류
1840년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영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뉴질랜드의 구조적인 식민지 개척은 대부분 에드워드 기본 웨이크필드(Edward Gibbon Wakefield)의 아이디어에 의해 기초되었으며, 그는 식민지의 개척은 영국사회의 구조를 모델로 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많은 뉴질랜드의 도시들과 마을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설립되고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문명화를 추진하고, 적은 수의 농부들이 자신들의 땅을 개간하는 자급자족적 문화를 형성한 동시에, 원주민들과 영국인이 함께 평화로이 살 수 있도록 계획되어 졌습니다.
권리에 대한 분쟁
더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땅을 더 요구함에 따라 마오리족과 영국인 사이에 땅 분쟁이 증가하게 됐습니다. 와이탕이 조약의 애매 모호한 해석과 지지의 결여로 인하여 불만이 증가했고, 사소한 충돌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1840년대 중반에 북섬에서 큰 규모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다른 지역들에서는 1860년대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마오리족의 감소
땅에대한 전쟁 동안 마오리족은 많은 접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북섬의 오해와이 파 (Ohaewai Pa)의 방어같은 몇몇 전쟁에서 마오리족의 전술은 상당히 교묘함을 보여주었고, 종종 유럽인의 전술보다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군대는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숫자의 힘에 의해 뉴질랜드의 전쟁은 마오리족들의 패배로 끝이 났습니다. 머지않아, 정부는 와이카토와 타라나키의 우수한 땅들을 포함하여 마오리족 땅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많은 땅의 손실과 계속적인 질병으로 인해 마오리족의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여, 1900년에는 겨우 4만여명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식민지의 예속
19세기와 20세기의 대부분의 시기를 통하여 영국의 '조국'은 뉴질랜드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부의 행정, 교육 그리고 문화가 영국을 모델로 하여 설립되었습니다. 뉴질랜드의 군대는 보어전쟁과 두차례의 세계전쟁에서 싸웠으며 상당한 수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당시 뉴질랜드 수상이었던 마이클 세비지는 1939년에 영국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이 가는 곳은 우리도 간다. 영국이 대항하는 곳이면 우리도 대항한다.'
새로운 동맹국
세계 제 2차 대전후에는 영국과의 문화적인 예속관계가 더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뉴질랜드 정부는 미국을 그들의 주요 동맹국으로서 그리고 보호자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뉴질랜드는 SEATO (South-East Asia Treaty Organisation) 에 가입하였으며, ANZUS (Australia, New Zealand, and United States)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뉴질랜드 군대는 또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과 함께 싸우기도했습니다.
공화국으로의 발돋움?
뉴질랜드가 여전히 영국의 유산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고는 있지만, 현재는 자신만의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영연방의 멤버이면서, 미국과의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뉴질랜드는 현재 교역과 외교에 대한 아주 독립적인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1980년대 중반에 무핵지대가 되었으며, 군대 역시 기본적으로 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오늘날에는, 보수적인 정치인들조차 뉴질랜드가 공화국이 되는 것에 대하여 개방적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4. 네번째 역사 [뉴질랜드를 찾아 온 사람들]
하와이키에서 아오테아로아까지
마오리 족은 약 1,000년 전에 그들 조상의 고향인 하와이키를 떠나 와카 호우라(카누)를 타고 아오테아로아 (뉴질랜드 - 마오리어로 길고 하얀 구름의 나라)에 처음으로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뉴질랜드 지역에 걸쳐 자리를 잡고, 농업과 수렵을 하며 생활했습니다. 1800년에 뉴질랜드에는 약 십만명의 마오리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유럽인의 이주
아벨 타즈만이 뉴질랜드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지만, 유럽인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769년에 제임스 쿡 선장이 주항을 시작한 후였습니다.
하나의 나라
1839년에 뉴질랜드에는 약 2,000명의 파케하(유럽인)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840년, 뉴질랜드가 영국의 통치를 받는다는 문서인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한 후, 뉴질랜드 인구에 대단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많은 영국의 이주민들이 뉴질랜드에 돈을 지불하고 들어왔으며, 1840년과 1860년대 사이에 무려 4만여명이 이주해 와, 1858년에는 마오리족과 파케하의 인구가 거의 비슷해졌습니다. 1860년대에 일어난 남섬의 골드러쉬에 의해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중국 등 세계 각국으로 부터 더 많은 이주자 들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감소하는 마오리족
19세기 말에 노동력의 부족으로 더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왔으며, 그들은 대부분 영국과 유럽에서 온 이들인데, 이들의 대부분은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보조를 받아 들어왔다. 1900년에 뉴질랜드에는 50만의 파케하가 있었으며, 질병과 전쟁으로 마오리족은 약 4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와인과 고무
1890년대부터 5000명의 이주자가 달마티아(현재의 크로아티아)에서 들어와 북쪽 끝에 정착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달마티아인들은 고무나무 밭에서 거대한 카우리 나무에서 고무를 채취하거나 농장에서 일하며 그 지역민들과 결혼등을 통하여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달마티아의 이주민들은 또한 1900년대 초에 서쪽 오클랜드 지역에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뉴질랜드의 가장 잘 알려진 와인들, 즉 바비치와 플레전트 밸리 등은 이 지역에 달마티아 인들이 만든 포도원에서 생산된 것들입니다.
킬트(Kilt)의 나라
1800년대 중기와 후기에 많은 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이 뉴질랜드에, 특히 남섬의 센트럴 오타고와 사우스랜드에 정착하였습니다. 더니든(Dunedin, 에딘버그를 일컫는 고대 켈트족의 이름인 Dun Edin 으로부터 파생된 이름)은 센트럴 오타고의 수도이며, 이 도시는 1843년에 스코틀랜드 교회로부터 도망쳐 나온 스코틀랜드의 신교도(the Free Church of Scotland) 교인들에 의해 설계되어졌습니다. 아직 도시의 건축물들, 특히 대학과 의과 대학의 건물들에서 스코틀랜드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파이프 밴드, 스코틀랜드 민속 춤, 컬링 스포츠는 원래 스코틀랜드 이주민들에 의해 뉴질랜드에 들어온 과거의 산물들이지만, 현재는 뉴질랜드에 견고하게 자리잡은 하나의 생활 양식입니다.
금을 찾아 떠나온 이주민들
많은 수의 광부들이 유럽, 호주에서 이주해 온것 뿐만 아니라, 오타고의 골드 러쉬는 중국에서도 많은 이주민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중국인들이 '새로운 금의 언덕'이라 부르며 찾아온 뉴질랜드에서, 사실 많은 중국 이주민들은 온갖 고충과 차별, 그리고 외로움에 고통받으며 이 땅에 정착했습니다. 이들 광부들의 많은 후손과 그 후에 들어온 이주민들은 대부분 채소를 재배하는 농부가 되었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중에 많은 중국인 농부들은 군대를 위한 대량의 음식을 생산해냄으로써 영웅적으로 전쟁에 기여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이주민
1642년에 처음으로 뉴질랜드를 발견한 아벨 타즈만은 뉴질랜드를 발견한 첫번재 네덜란드인입니다. 1950년대에 체결한 뉴질랜드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간의 조약에 의해 많은 수의 네덜란드인들이 뉴질랜드 전역에 정착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많은 기술을 들여와 뉴질랜드의 레스토랑과 원예업 (특히, 화초 재배), 건물 디자인, 그리고 패션 산업등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약 10만의 뉴질랜드인이 네덜란드계 후손입니다. 현재 뉴질랜드는 튤립 구근을 네덜란드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이주민들에게 감사를!
태평양 지역의 친구들
1960년대와 70년대에 뉴질랜드는 심각한 인력난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태평양 연안 섬들의 많은 사람들이 뉴질랜드로 특히, 오클랜드 지역으로 많이 이주해 오게 되었습니다. 태평양 섬들에서 이주해온 폴리네시안이 현재 뉴질랜드 인구의 5%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오클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폴리네시안 도시가 되었습니다. 태평양 섬들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처음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그 외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일들에 고용되었었지만, 지금은 많은 폴리네시안들이 운동 선수, 전문직 종사자가 되어 있거나, 패션, 음악. 텔레비젼, 그리고 예술 분야에서 종사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폴리네시안의 음식, 패션, 그리고 예술의 영향은 많은 뉴질랜드 도시의 거리에서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아시아로부터의 이주
지난 15년동안 홍콩, 대만, 싱가포르, 한국, 일본등 아시아 지역으로부터의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들 아시아로부터 온 이주민들은 뉴질랜드의 경제에, 특히 비즈니스와 직업부문에서 상당한 공헌을 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뉴질랜드 도시에서 아시안 식당과 가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정도면 뭐... 역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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