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학년도를 마치면서 나는 장흥으로 가기 위해 전출 희망을 했다. 장흥 용산에서 살고 있는 큰 누나 집에서 살아볼까 해서였다. 다행이 희망이 받아드려져서 1968년 3월 1일자로 장흥 용산면에 있는 계산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군서송학초등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학년말 종업식을 하고 이사 짐을 꾸려서 광주 집으로 오기 전날, 여자의 집에 가서 작별을 고하는 인사와 함께 저녁을 얻어먹었다. 저녁을 먹고 잠시 이야기하다가 떠나오면서, 여자에게 나와 같이 광주 우리 집에 가자고 제안을 했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미리서 준비를 했는지 갑작스런 제안이었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잘 모르겠다. 그것은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하는 프로포즈였다. 너무나도 극적인 프로포즈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사랑고백을 한 적도 없었고, 결혼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었다. 희미한 희망만이 서로에게 있었을 뿐이었다. 여자가 제안에 응하면 결혼하게 될 것이고, 거절하면 그대로 이별이었다. 아쉬움은 남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게 될 사람과 교제가 계속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여자에게서 같이 가겠다는 연락이 왔다. 훗날의 깨달음이지만 성령님의 섭리였다. 송학교회를 통해 중매자가 되어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성령님의 간섭이었다. 우리의 결합에는 인간적인 어떠한 조건도 개입됨이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뜻이었음이 깨달아졌다. 광주 집에 같이 와서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시켰다. 갑작스런 아들의 행동에도 아무 나무람 없이 부모님들은 그대로 수용해주셨다. 결혼승낙을 그렇게 받았다. 나중에 어머니가, 공부가 좀 부족하다고 했다. 나는 여자에게서 받은 편지를 하나 보여드리면서 고졸 이상의 실력을 가진 여자라고 했다.
여자를 집에 두고 나는 새로운 발령지인 장흥에 다녀왔고, 그 동안 여자는 우리 집에 있으면서 광주에 있는 친척집들을 방문했고, 3월 1일에 이임하는 학교에 이임인사를 하기 위해 여자와 함께 영광으로 갔다. 그리고 당연하듯 그 밤을 여자 집에서 함께 지냈다. 아내가 될 여자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한 첫날밤이었다.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는 행복한 밤이었다. 육체적으로 실질적인 부부의 연이 맺혀졌다. 그 때부터 함께하는 시간이 주어지면 우리는 언제나 스스럼없는 부부였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정성이, 희미함에서 뚜렷하게, 우리의 사랑이 익어가기 시작했다. 3월 2일 전임지에서의 이임인사를 하고, 여자와도 헤어져서, 나는 광주를 경유하여 곧 새로운 임지인 장흥으로 갔다.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된 연인들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 가야만 했다. 결혼하기 전에 약혼식을 간단히 하려고 영광의 아는 목사님을 만나러 가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둘이서의 약속으로 약혼식을 대신하기도 했다.
결혼하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돈이 없었다. 월급 받아 모두 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1년 후에 하기로 했다. 도움 없이 내 힘으로 하려면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자도 곧 결혼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누나 집에 거하면서 누나와 함께 결혼 준비를 계획하고, 누나가 계를 이용해, 내 돈으로 목돈을 마련하기로 했다. 1년 동안 방학 때라든지, 기회가 있는 대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리고 1969년 3월 1일 12시에 우리는 광주계림교회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했다. 결혼식 하객은 친척들과 교인들, 그리고 전남대학교 교직원들이 많았다. 아버지가 전대에 근무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법과대학의 은사들이 많이 와 주신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축의금은 친척 어른들의 교통비조로 조금 나누어드리고, 나머지는 모두 부모님에게 드렸다.
1969년 3월 1일자로 나는 장흥용산초등학교로 발령이 나 있었다. 누나집이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결혼과 동시에 새 학교에 부임해야 했다. 경제 사정도 여의치 않았지만, 새로운 임지에 대한 부담도 있고 해서, 신혼여행을 생략하고, 나는 곧 학교에 부임해서 근무를 시작했다. 결혼식후, 15일 만에 용산면 소재지에서 단칸방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누나가 가까이에 살고 있는 것이 힘이 되어 주었다. 1년 반 동안의 신혼 생활을 용산에서 했다.
1970학년도가 되어 나는 6학년 여학생 반을 담임 했다. 한 학기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학생들과 즐겁게 생활했다. 학급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부용산 기슭아래 아담한 용산교, 수많은 학생 중에 백합 같은 우리들, 솜씨 맵씨 말씨 마음씨 모두 다 어여쁜 우리의 노래, 깨끗하게 즐겁게(즐겁게) 보람차게 배우는(배우는), 빛나는 새 역사 이룩할 우리는 용산교의 6학년 2반" 이라고 작사를 해서 '초록빛 바다'라고 하는 동요의 곡에 맞춰 불렀다. 이후 중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여학생 반을 담임하면, 그 지역의 가장 높은 산 이름과 학교 이름만 바꾸어 학급노래로 사용해서 학생들과 불렀다.
깨끗하게 즐거웁게 보람차게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좌우명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담임하는 학급의 급훈이 되기도 했다. 1학기말이 되어갈 무렵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남대학교에 중등교원양성소가 새로 개설되었는데 거기에 응시하라는 것이었다. 기왕 교직에 있으려면 중등으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중등학교 교사가 많이 부족한데서 생긴 것이었다. 대졸이면 응시가 가능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 중등교원 양성소에서 4개월 정도 교육을 받고, 중등학교 2급 정교사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과정이었다.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일반대학 졸업자들이 중등으로 옮기는 기회였다. 2학기가 시작되는 9월초에 사표를 냈다. 만 4년 동안의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삶이 정리 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중등교원 양성소에서 수학과를 지원하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중요과목으로 수학과 영어를 놓고 고심하다가 수학을 택했다. 영어를 하게 되면 당시 전대에 세 친구가 영어과의 교수로 있어서, 그들에게 강의를 들어야할 형편이 되고, 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아 보였으나, 수학은 사람들이 어려워 했고,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수학이 취미가 있는 과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교육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이었는데, 사표를 내지 않고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아, 어정쩡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처음부터 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사표를 내고 시작했다. 광주로 이사해서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결혼하고 바로 부모님들과 떨어져 살다가, 함께 6개월을 살았다. 아내가 시집 식구들과 정이 드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교육 받는 데에 전념하다 보니 성적이 좋았다. 수학과에서 1등으로 졸업하고 상장과 금반지를 상품으로 받았다.
1971학년도가 되어 중등학교에서의 임지를 찾아야 했다. 공사립을 막론하고 교사가 많이 부족해서 선택의 여지가 많았다. 우선 공립학교에 채용 신청을 하고, 광주 시내에 있는 사립학교 두 군데에 지원을 했다. 먼저 시내에 있는 숭의중학교에 채용이 되었고, 공립학교로는 고흥 금산중학교로 발령 통지를 받았다. 먼저 섬마을에 있는 금산중학교에 가보고 부임을 포기하고, 숭의중학교로 출근을 했다. 3학년 수업을 하게 되었다. 숭의중학교에 출근을 하고 있는 며칠 후에 광주 동신고등학교에서 채용통지가 오기도 했지만, 이미 부임한 학교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동신고등학교는 거절 했다. 숭의중학교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보름쯤 지났을 때, 학교 교목실에서 면담요청이 왔다. 면담 중에 교회를 숭의중학교 교장이 설립한 성결교단의 학동교회로 교회를 옮기라고 했다. 나는 거절 했다. 교목이, 그러면 학교에 근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설립교인의 한사람인 계림교회에서 자랐고, 같은 시내에 있는 교회를 떠난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바로 교육청으로 장학사를 찾아갔다. 부임을 거부한 학교에 다시 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장학사는 아직 발령 취소가 안 되었으니 제발 부임하라고 했다. 내일 발령을 취소하는 조치를 할 예정이었는데 잘 되었다고 했다. 교사가 부족해서 부임을 거부한 자리에 보름이 지나도 보낼 교사가 없어서 그대로 두고 있는 상태였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 같았다. 다음날 일찍 나는 고흥 금산중학교로 향해 갔다.
선생님이 되는 길은 쉬웠다. 교사가 부족해서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초등학교도, 중등학교도 모두 받아 주었기 때문이다. 양성소를 만들어 교사를 양성해야 되는 시기에, 원서만 내면 양성소에서 받아 주었고, 자격증을 받으면 갈 수 있는 학교가 많았다. 어려서 교사가 되겠다는 꿈은 가져 본적이 없다. 그런데 쉬운 길을 찾다보니 교사가 되었다. 그 교사가 내 성격에 맞았고, 천직이 되었고,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는 아마추어의 길이 되었다.